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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과 사기,양치엔쿤 지음 | 장세후 옮김 | 연암서가
굴어당
2015. 10. 17. 22:00
저자소개
목차
역자 서문
1장 용문에서 빼어난 인재가 나다
사마천의 집안 형편 및 소년시절
1. 집안 형편과 가학의 내력
2. 용문에서 출생하다
3. 10세에 고문을 외다
4. 무릉으로 이주하다
2장 사람 가운데 용을 낳아 기르다
사마천의 청년 시기의 장도 및 벼슬에 나선 시기
1. 20세 때의 장도
2. 낭중으로 벼슬에 나서다
3. 사명을 띠고 서정(西征)하다
4. 봉선을 호종하다
5. 섶을 지고 황하를 막다
6. 태사령에 임명되다
3장 재능을 안고 형벌을 받음을 불쌍히 여기다
사마천이 ‘이릉의 화’를 당하게 된 전말
1. 저술을 시작하다
2. ‘이릉의 화’를 당하다
3. 극형을 당하였으나 원망하지 않다
4장 학식(學殖)이 전에 없이 풍부해지다
『사기』는 사가(史家)의 절창(絶唱)
1. 『사기』의 구성
2. 『사기』의 사실 추구 정신
3. 『사기』의 민족관
4. 『사기』의 경제 사상
5. 『사기』의 민본주의
5장 문장이 자웅을 겨룰 자가 없다
『사기』는 운을 달지 않은 「이소」
1. 『사기』의 호견법(互見法)
2. 재료의 취사와 구성의 안배
3. 세목의 묘사
4. 전형적인 환경의 전형적인 인물을 재현하다
6장 숨을 내쉬니 무지개가 되다
『사기』의 언어예술
1. 『사기』의 문장을 짓는 언어
2. 『사기』의 서술 언어
3. 『사기』의 인물을 개성화하는 언어
4. 서사의 사이에 논단을 기탁하다
5. 속담과 속어의 인용
6. 『사기』의 논찬
7장 공업(功業)이 이보(尼父)를 쫓다
사마천의 서까래 같은 붓
1. 사마천이 『사기』에 대하여 스스로 매우 높게 보다
2. 「보임안서」에 관하여
3. 사마천 죽음의 비밀을 찾다
8장 천추의 태사공
사마천의 중국 문화사상사에서의 지위와 영향
주석
1장 용문에서 빼어난 인재가 나다
사마천의 집안 형편 및 소년시절
1. 집안 형편과 가학의 내력
2. 용문에서 출생하다
3. 10세에 고문을 외다
4. 무릉으로 이주하다
2장 사람 가운데 용을 낳아 기르다
사마천의 청년 시기의 장도 및 벼슬에 나선 시기
1. 20세 때의 장도
2. 낭중으로 벼슬에 나서다
3. 사명을 띠고 서정(西征)하다
4. 봉선을 호종하다
5. 섶을 지고 황하를 막다
6. 태사령에 임명되다
3장 재능을 안고 형벌을 받음을 불쌍히 여기다
사마천이 ‘이릉의 화’를 당하게 된 전말
1. 저술을 시작하다
2. ‘이릉의 화’를 당하다
3. 극형을 당하였으나 원망하지 않다
4장 학식(學殖)이 전에 없이 풍부해지다
『사기』는 사가(史家)의 절창(絶唱)
1. 『사기』의 구성
2. 『사기』의 사실 추구 정신
3. 『사기』의 민족관
4. 『사기』의 경제 사상
5. 『사기』의 민본주의
5장 문장이 자웅을 겨룰 자가 없다
『사기』는 운을 달지 않은 「이소」
1. 『사기』의 호견법(互見法)
2. 재료의 취사와 구성의 안배
3. 세목의 묘사
4. 전형적인 환경의 전형적인 인물을 재현하다
6장 숨을 내쉬니 무지개가 되다
『사기』의 언어예술
1. 『사기』의 문장을 짓는 언어
2. 『사기』의 서술 언어
3. 『사기』의 인물을 개성화하는 언어
4. 서사의 사이에 논단을 기탁하다
5. 속담과 속어의 인용
6. 『사기』의 논찬
7장 공업(功業)이 이보(尼父)를 쫓다
사마천의 서까래 같은 붓
1. 사마천이 『사기』에 대하여 스스로 매우 높게 보다
2. 「보임안서」에 관하여
3. 사마천 죽음의 비밀을 찾다
8장 천추의 태사공
사마천의 중국 문화사상사에서의 지위와 영향
주석
책 속으로
이 책은 사마천의 일생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특히 『사기』에 대한 다각적이고 집중적인 분석이 돋보인다. 저자는 이 책을 모두 8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각 장의 제목은 사마천의 고향인 한성에 있는 사마천사의 비석(모두 65개) 가운데 궈모뤄(郭沫若)가 사마천을 찬양한 오언율시의 한 구절씩으로 삼아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였다. 사마천 개인사에 관련된 서술은 『사기』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책의 앞쪽에 서술하였고, 『사기』가 이루어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은 뒤쪽에다 배치를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사마천의 ... 더보기
출판사 서평
제왕학이자 경제학이며 인간학의 찬란한 보고(寶庫)
『사기』와 저자 사마천에 관한 모든 것
『사기(史記)』는 제왕의 전기와 연대기인 「본기(本紀)」, 제후국과 제후의 역사 및 인물 전기인 「세가(世家)」, 연표인 「표(表)」, 각종 기록인 「서(書)」, 인물들의 전기인 「열전(列傳)」 등 모두 130편 25만 6,500자로 구성된 기전체로 쓰인 불후의 대저(大著)이다. 중국 최초의 통사(通史)인 『사기』 이후 중국의 모든 정사(正史)가 이 역사서의 체례를 따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사기』는 비단 역사뿐만 아니라 후대의 문장과 소설 등 문화 전반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의외로 『사기』와 저자 사마천에 대해 구체적이고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이 책은 사마천의 일생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사가(史家)의 집안에서 태어나 한(漢) 제국 최강의 절대군주 무제(武帝)와의 악연으로 인한 비극으로 점철된 죽음에까지 사마천 개인사는 물론, 『사기』의 체제와 언어 예술, 저술 태도 및 방향, 그리고 후대에 미친 영향까지 『사기』의 풍부한 원전을 적절히 인용해 가며 다각적이고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었던 사마천의 죽음 등에 대해 여러 자료를 심층 분석하여 고찰한 것은 기존의 사마천 개인사 연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인상적인 성취이다.
점차 혼란스럽고 복잡다단해 가는 각박한 현대 세상에서 사마천의 위대성이 갈수록 드러나고 강조되는 것은 마땅한 일일 것이다. 사마천의 시대를 관통하는 세계관은 좁게는 개인의 처세에서, 넓게는 과거의 귀감을 통하여 미래를 조망한다. 사마천과 『사기』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이 책을 통해 그 위대한 세계관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사기』를 아직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훌륭한 안내가 될 것이고, 이미 『사기』를 읽은 사람에게는 완벽한 정리가 될 것이다.
“사가(史家)의 절창이요 운(韻)을 달지 않은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이다.”-루쉰(魯迅)
“태사공(사마천)은 실로 역사의 조물주이다.”-량치차오(梁啓超)
“공업(功業)이 공자를 쫓으니 천추(千秋)의 태사공이라네.”-궈모뤄(郭沫若)
“『사기』를 읽으면 직접 당시의 사람을 대하고 그 일을 직접 목도하며 그 말을 직접 듣는 것과 같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가 하면 놀라게도 하고, 두렵게 하는가 하면 눈물을 흘리게 하여 절로 그칠 수 없게 한다.”-사이토 마사야스(齋藤正廉)
*책속으로 추가
역사를 편찬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상황에서도 사마담은 아들인 사마천의 장래만 생각했다. 장차 사관을 맡을 관직에 종사하게끔 배양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매우 어렵고도 거창한 『사기』를 자신과 함께 완성하게 되기를 꿈꾸었다. 사마천이 10세 때 고문을 외고 나중에 또한 동중서와 공안국을 스승으로 모신 일 은 좋은 예다. 집안에서는 사마담에게 배워 10년의 학습과 연마를 거쳐 학업과 학술 조예 방면에서 신속한 향상을 보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불어 사마담은 사마천이 더 많은 감성적 지식을 얻기를 바랐다. 사회와 접촉하고 고대와 근대의 역사 고사 및 각종 사료를 얻게 배려했다. 또 사학가로서 안목을 넓히기 위하여 20세 때는 꼼꼼하고 빈틈없는 배려로 목적성을 띤 여행을 시켰다. 이 여행에서 사마천은 한 가지 중요한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천하 각지의 도서를 모으는 것이 그것이다. -40쪽
사마천은 낭중이 된 후로 무제를 모셨다. 무제가 곳곳을 유람 하며 교사(郊祀: 종묘가 아닌 야외에서 올리는 제사)를 올릴 때면 그는 자연스레 그 자리에 끼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무제는 즉위 초기에 귀신을 공경하는 제사를 많이 올렸다. 사마천이 낭중이 되기 몇 년 전에 무제는 수차례나 옹(雍) 땅으로 가서 오제(五帝)에게 올리는 사전(祀典)을 거행하였다. 그 후로는 늘 3년에 한 번씩 교사(郊祀)를 거행하였다. 그 가운데 처음으로 제사를 지낸 후의 10년을 제외하면 그는 내정을 다스리고 흉노에 대한 공격과 방어에 바빠 지방의 시찰을 떠나지 못하였으며 이후에는 종종 교사를 지냈다. 이를테면 원수 원년(B.C. 122) 겨울 10월에 무제는 옹 땅으로 가서 오치(五?)에서 제사를 지냈다. 흰 기린이 잡히자 상서로운 조짐으로 생각하여 「백린지가(白麟之歌)」를 짓고 아울러 연 호를 원수(元狩)로 바꾸었다. 원정 4년(B.C. 113) 겨울 10월에도 무제는 옹 땅으로 가서 오치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에 ‘지금 상제(上帝)는 나로 말미암아 친히 교제에 임하였지만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니 예제(禮制)가 완비되지 않았다’는 의견이 오가기도 했다. 결국 관부(官府)의 주관자와 태사공 사마담, 예관(禮官) 동중서 등이 의논 끝에 못 가운데에 있는 원구(?丘: 못 가운데 외형 이 둥글고 높은 작은 언덕만한 단 5개를 세웠다)에 후토사(后土祠)를 세우기로 했다. 이에 무제는 마침내 동쪽으로 가서 하양(夏陽)을 거쳐 분양(汾陽)으로 행차하였다. 이때부터 천자가 비로소 군국을 순시하였다. -54쪽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은 태사령으로 무제의 봉선의식의 전례를 매우 중시하였다. 무제를 호위하며 따르는 대열에 들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장 안에서 동으로 가던 중에 낙양에 이르러 사마담이 병을 얻게 된 것이다. 병든 몸으로 무제를 수행할 수가 없어서 부득이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봉선의식 전례에 참여할 수 없게 된 사마담의 가슴에는 울분과 번민이 가득 찼다. 그럴수록 병은 더욱 위중해져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아침에 저녁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때 아들 사마천은 사명을 받들고 서남이에 갔다가 돌아와 조정에 업무를 보고해야 했는데 무제는 이미 태산으로 간 뒤였다. 사마천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하여 하락(河洛) 사이에서 부친인 사마담을 뵈었다. 중병을 앓는 사마담은 아 들 사마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68쪽
태사령에 임명되었을 때 사마천은 역사를 써내려갈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한혜제 후로부터 문사경적의 서책이 모두 나와 조참 (曹參)이 갑공(蓋公)을 천거하여 황룡을 말했다. 가의(賈誼)와 조조(晁錯)는 한비(韓非)를 밝혔다. 공손홍도 유자 출신으로 세상에 나 아가 이름을 드날린 이래 백년에 걸친 천하의 유문과 고사(古事)가 태사공에게 모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원봉 연간에 봉선을 거행하고 태초 연간에 역법을 개혁한 것은 서한의 번성이 극에 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사마천이 성세를 몸소 만났다는 것을 상징한다. 무엇보다도 직접 태초의 역법 개혁에 참여한 것은 그 의미가 크다. 게다가 태사령에 임명된 지 5년째 되던 해, 곧 태초 원년(B.C. 104)에 그 부친의 뜻을 계승하여 이미 써내려가던 『사기』를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이 해가 42세로 사마천의 나이 한창 때였다. -86쪽
사마천은 낭중으로 출사하였을 때부터 자기의 일에 매우 돈실하고 엄숙하게 임했다. 직무에 대해 마음 씀을 매우 삼갔고, 힘을 씀에는 매우 부지런하였다. 장기간 무제를 수행하고 궁궐을 드나들던 중에 그는 곧 동이를 이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빈객들과 알고 지내는 것을 끊고 집안의 일도 잊은 채 밤낮으로 재주와 힘을 다하였다. 전심전력으로 관직의 일에 매진하여 무제에게 잘 보이기를 추구하였다. 그런 중에 뜻밖의 일이 터졌다. 이릉의 일이 생긴 것이다. 그 일로 그는 마침내 부형이라는 참사를 당하게 되어 『사기』의 집필은 당장 중단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95쪽
『사기』는 사마천의 정치 군사 문화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방면 의 사상을 관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 사상 또한 그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 이런 경제사상은 사마천이 홀로 우뚝 서서 행한 표지이자 획기적인 공헌이다. 그 이전의 사학에서는 경제 방면은 언급될 수 없었다. 그 후의 관찬 사서에서도 이 방면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다지 세세하게 제기하고 있지 않다. 이른바 「식화지」 같은 것은 토지제도 및 징세(徵稅)에 대하여 거듭 말하고 있다. 「화식열전」의 이론 체계와 사상의 고도(高度) 또한 사마천이 집대성한 치생술(治生術)로 발전시키고 생산한, 경제사상으로 커다란 차별성이 있다. 사마천은 전에 없이 상업경제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경제 및 정치와 도덕 민속간의 관계를 고찰하여 완정한 발전경제 이론을 제기하였다. 생산의 발전, 교환의 확대는 국가와 집을 부유하게 한다. 이런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관점을 포함하고 있는 경제사상은 『사기』에서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다. 사마천의 경제사상은 주로 「화식열전」과 「평준서」 등 몇 편에서 표현된다. 「화식열전」의 명칭은 식(殖)은 키우는 것이고, 화식(貨殖)은 재화(財貨)와 재리(財利)를 키운다는 뜻에서 취하였다. 「평준서」의 명칭은 관부(官府)의 물자를 융통하고 물가를 잡는 조치에서 따왔다. 곧 비싸면 팔고 싸면 사들임으로써 부유한 대상인들이 큰 이익을 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만물의 물가가 맹렬히 뛰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심사상이다. 천하의 사물을 누르는 것을 평준(平準)이라고 한 다. 이런 면에서 「화식열전」과 「평준서」는 『사기』의 다른 편장과는 큰 차별이 있다. 「화식열전」은 여러 가지 설명과 논의를 섞어 가며 의론을 주로 한다. -140쪽
『사기』에서 내뿜은 민본주의란 광휘는 사마천의 탁월한 역사 인식의 체현이다. 그는 전대에 나온 사서들이 군왕과 경상(卿相), 장군과 대부 등 존귀한 자들을 위해 전기를 짓는 전통을 뒤집었다. 중하층 인물들을 위해 전기를 지어 그들이 재상이나 경대부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전해지도록 한 것이다. 백성들이 강포함에 반항하는 것을 동정하였는데 이는 그의 민본사상에 대한 발양이 큰 것이다. 제왕의 전제와 폭력사상에 대한 비판은 두려움이 없는 그의 담략(膽略)을 표현해 내고 있다. 그중에서 포폄을 하는가 하면 애증(愛憎)을 갖기도 하는 등 사마천의 손에서 나온 것은 백성의 마음에서 발원하였다. 이런 전형적인 인물들은 『사기』에서 매우 전형적으로 표현되었다. -154쪽
사서에서 인물을 기록하기는 쉬우나 그 인물에 생동감을 풍만하게 불어넣기는 어렵다. 즉, 인물을 훨훨 살아 있는 듯 묘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기』는 다르다. 완벽하고 아름답게 인물의 형상을 빚어내었다. 『사기』에서는 호견법(互見法)을 처음으로 만들어내어 인물 형상을 특히 포만감 있고 생동감 있게 하였다. 절묘한 필치로 깎고 다듬어 재료의 취사를 가장 적절하게 하였으며 구성의 안배에도 장인(匠人)의 마음을 갖추었다. 세목(細目)의 묘사에 치중하여 주제를 돌출시켰으며 대대적으로 작품의 감응력을 증대시켰다. 세목의 묘사를 통하여 전형적인 환경 안에서 전형적인 인물을 재현해내었다. 그 인물들은 부르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책 밖으로 툭 튀어나올 것 같다. 전대의 역사에 비하여 『사기』의 웅장하고 왕성한 기세는 탁월하여 볼 만하다. -181쪽
사마천은 『사기』의 인물 형상을 빚어내는 일에 창조적인 작업을 진행시켰다. 특정 환경에서 전형적인 인물을 재현했다. 모순과 충돌하는 가운데서 전형적인 인물을 펼쳐내고, 심리묘사에서 전 형적인 인물의 본질적인 특징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일단의 훨훨 살아 있는 듯한 인물의 형상을 빚어내는 데 온힘을 쏟았다. 이전 사서의 인물 형상의 단순하고 창백한 약점을 되돌려 인물의 정신을 풍부하게 하고 살아 있게 하였다. -238쪽
언어예술의 정점은 『사기』가 얻은 큰 성공의 중요한 한 요인이다. 문장을 이루는 언어가 적절한 문체를 터득하고 있다. 또한 서술 언어의 풍성함과 인물을 성격화하는 생생한 언어 구사력도 보인다. 서술하는 사이에 저자의 의견을 끼워 넣는 치밀함, 속담을 인용해 넣은 적절함도 놀랍다. 논찬이라는 독보적인 견해를 피력한 기준 등은 『사기』의 언어를 정확하고 정련되고 생동적이고 우미(優美)하게 만들었다. 오색찬란할 뿐만 아니라 호연지기까지 갖춘 덕분이다. 말이라는 일정한 법식을 갖춘 언어라는 정련되면서도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사기』가 세상에 전하게 되는 필연적 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사마천이라는 사학의 대가이자 문학 거장의 풍미이기도 하다. -265쪽
공자가 지은 『춘추』는 노나라의 사료에 근거하여 수찬한 것이다. 중국 최초의 편년 단대사로 노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연도 단위로 일을 기록하였다. 노은공 원년(B.C. 722, 周平王 49년)에 시작하여 노애공 14년(B.C. 481, 周敬王 39년)에서 끝이 나며 모두 242년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공자는 『춘추』를 지으면서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깎을 것은 깎아 난신적자를 두렵게 하였다. 사마천은 『춘추』는 위로는 삼왕(三王)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사(人事)의 벼리를 변별하며 혐의를 구별하고 시비를 밝힌다, 어정쩡한 것을 바로잡고 훌륭한 것을 훌륭하게 여기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긴다, 현자를 현명하게 여기고 불초한 자를 천하게 여기고 망한 나라를 존속시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는다, 낡은 것을 수리하고 없어진 것을 일으키며 왕도의 근본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의 『사기』 또한 『춘추』와 그 주된 취지가 같다. 과연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올바르게 돌리는 세상을 넓히는 저작이다. 이런 스스로의 믿음에 비추어 보았으므로 그는 아래와 같은 비교를 하게 되었다. -328쪽
요컨대 전사(全史)를 창시한 『사기』는 중국의 첫 번째 통사(通史)로 내용이 완정하고 구성이 주도면밀하다. 편년(編年)과 기사(紀事) 등 여러 역사 서술 방식의 장점을 모았으며 인물의 전기(傳紀)를 중심으로 하여 기전체(紀傳體)를 창시하였다. 이 역사의 새로운 체재(體裁)는 포괄한 것이 매우 넓고 형식이 주도면밀하며 역사와 사건의 서술이 꼼꼼하고 빈틈이 없다. 이는 전에 없던 역사를 기술한 위대한 저작이자 또한 걸출한 문학의 명저로 후세의 사서와 문학의 전범이 되었다. 이에 대한 “사가(史家)의 절창(絶唱)이자 운을 달지 않은 「이소」이다”라는 노신의 평가는 매우 정확하다. 사마천은 『사기』를 위해 온 정력을 다 바쳤으며, 노래할 수도 울릴 수도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숭앙하고 존경하게 한다. 『사기』는 사마천으로 인하여 세상에 유명해졌고 사마천은 『사기』로 인하여 문화의 거인이 되었다. -361쪽
『사기』와 저자 사마천에 관한 모든 것
『사기(史記)』는 제왕의 전기와 연대기인 「본기(本紀)」, 제후국과 제후의 역사 및 인물 전기인 「세가(世家)」, 연표인 「표(表)」, 각종 기록인 「서(書)」, 인물들의 전기인 「열전(列傳)」 등 모두 130편 25만 6,500자로 구성된 기전체로 쓰인 불후의 대저(大著)이다. 중국 최초의 통사(通史)인 『사기』 이후 중국의 모든 정사(正史)가 이 역사서의 체례를 따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사기』는 비단 역사뿐만 아니라 후대의 문장과 소설 등 문화 전반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럼에도 의외로 『사기』와 저자 사마천에 대해 구체적이고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이 책은 사마천의 일생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사가(史家)의 집안에서 태어나 한(漢) 제국 최강의 절대군주 무제(武帝)와의 악연으로 인한 비극으로 점철된 죽음에까지 사마천 개인사는 물론, 『사기』의 체제와 언어 예술, 저술 태도 및 방향, 그리고 후대에 미친 영향까지 『사기』의 풍부한 원전을 적절히 인용해 가며 다각적이고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었던 사마천의 죽음 등에 대해 여러 자료를 심층 분석하여 고찰한 것은 기존의 사마천 개인사 연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인상적인 성취이다.
점차 혼란스럽고 복잡다단해 가는 각박한 현대 세상에서 사마천의 위대성이 갈수록 드러나고 강조되는 것은 마땅한 일일 것이다. 사마천의 시대를 관통하는 세계관은 좁게는 개인의 처세에서, 넓게는 과거의 귀감을 통하여 미래를 조망한다. 사마천과 『사기』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이 책을 통해 그 위대한 세계관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사기』를 아직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훌륭한 안내가 될 것이고, 이미 『사기』를 읽은 사람에게는 완벽한 정리가 될 것이다.
“사가(史家)의 절창이요 운(韻)을 달지 않은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이다.”-루쉰(魯迅)
“태사공(사마천)은 실로 역사의 조물주이다.”-량치차오(梁啓超)
“공업(功業)이 공자를 쫓으니 천추(千秋)의 태사공이라네.”-궈모뤄(郭沫若)
“『사기』를 읽으면 직접 당시의 사람을 대하고 그 일을 직접 목도하며 그 말을 직접 듣는 것과 같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가 하면 놀라게도 하고, 두렵게 하는가 하면 눈물을 흘리게 하여 절로 그칠 수 없게 한다.”-사이토 마사야스(齋藤正廉)
*책속으로 추가
역사를 편찬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상황에서도 사마담은 아들인 사마천의 장래만 생각했다. 장차 사관을 맡을 관직에 종사하게끔 배양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매우 어렵고도 거창한 『사기』를 자신과 함께 완성하게 되기를 꿈꾸었다. 사마천이 10세 때 고문을 외고 나중에 또한 동중서와 공안국을 스승으로 모신 일 은 좋은 예다. 집안에서는 사마담에게 배워 10년의 학습과 연마를 거쳐 학업과 학술 조예 방면에서 신속한 향상을 보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불어 사마담은 사마천이 더 많은 감성적 지식을 얻기를 바랐다. 사회와 접촉하고 고대와 근대의 역사 고사 및 각종 사료를 얻게 배려했다. 또 사학가로서 안목을 넓히기 위하여 20세 때는 꼼꼼하고 빈틈없는 배려로 목적성을 띤 여행을 시켰다. 이 여행에서 사마천은 한 가지 중요한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천하 각지의 도서를 모으는 것이 그것이다. -40쪽
사마천은 낭중이 된 후로 무제를 모셨다. 무제가 곳곳을 유람 하며 교사(郊祀: 종묘가 아닌 야외에서 올리는 제사)를 올릴 때면 그는 자연스레 그 자리에 끼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무제는 즉위 초기에 귀신을 공경하는 제사를 많이 올렸다. 사마천이 낭중이 되기 몇 년 전에 무제는 수차례나 옹(雍) 땅으로 가서 오제(五帝)에게 올리는 사전(祀典)을 거행하였다. 그 후로는 늘 3년에 한 번씩 교사(郊祀)를 거행하였다. 그 가운데 처음으로 제사를 지낸 후의 10년을 제외하면 그는 내정을 다스리고 흉노에 대한 공격과 방어에 바빠 지방의 시찰을 떠나지 못하였으며 이후에는 종종 교사를 지냈다. 이를테면 원수 원년(B.C. 122) 겨울 10월에 무제는 옹 땅으로 가서 오치(五?)에서 제사를 지냈다. 흰 기린이 잡히자 상서로운 조짐으로 생각하여 「백린지가(白麟之歌)」를 짓고 아울러 연 호를 원수(元狩)로 바꾸었다. 원정 4년(B.C. 113) 겨울 10월에도 무제는 옹 땅으로 가서 오치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에 ‘지금 상제(上帝)는 나로 말미암아 친히 교제에 임하였지만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니 예제(禮制)가 완비되지 않았다’는 의견이 오가기도 했다. 결국 관부(官府)의 주관자와 태사공 사마담, 예관(禮官) 동중서 등이 의논 끝에 못 가운데에 있는 원구(?丘: 못 가운데 외형 이 둥글고 높은 작은 언덕만한 단 5개를 세웠다)에 후토사(后土祠)를 세우기로 했다. 이에 무제는 마침내 동쪽으로 가서 하양(夏陽)을 거쳐 분양(汾陽)으로 행차하였다. 이때부터 천자가 비로소 군국을 순시하였다. -54쪽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은 태사령으로 무제의 봉선의식의 전례를 매우 중시하였다. 무제를 호위하며 따르는 대열에 들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장 안에서 동으로 가던 중에 낙양에 이르러 사마담이 병을 얻게 된 것이다. 병든 몸으로 무제를 수행할 수가 없어서 부득이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봉선의식 전례에 참여할 수 없게 된 사마담의 가슴에는 울분과 번민이 가득 찼다. 그럴수록 병은 더욱 위중해져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아침에 저녁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때 아들 사마천은 사명을 받들고 서남이에 갔다가 돌아와 조정에 업무를 보고해야 했는데 무제는 이미 태산으로 간 뒤였다. 사마천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하여 하락(河洛) 사이에서 부친인 사마담을 뵈었다. 중병을 앓는 사마담은 아 들 사마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68쪽
태사령에 임명되었을 때 사마천은 역사를 써내려갈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한혜제 후로부터 문사경적의 서책이 모두 나와 조참 (曹參)이 갑공(蓋公)을 천거하여 황룡을 말했다. 가의(賈誼)와 조조(晁錯)는 한비(韓非)를 밝혔다. 공손홍도 유자 출신으로 세상에 나 아가 이름을 드날린 이래 백년에 걸친 천하의 유문과 고사(古事)가 태사공에게 모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원봉 연간에 봉선을 거행하고 태초 연간에 역법을 개혁한 것은 서한의 번성이 극에 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사마천이 성세를 몸소 만났다는 것을 상징한다. 무엇보다도 직접 태초의 역법 개혁에 참여한 것은 그 의미가 크다. 게다가 태사령에 임명된 지 5년째 되던 해, 곧 태초 원년(B.C. 104)에 그 부친의 뜻을 계승하여 이미 써내려가던 『사기』를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이 해가 42세로 사마천의 나이 한창 때였다. -86쪽
사마천은 낭중으로 출사하였을 때부터 자기의 일에 매우 돈실하고 엄숙하게 임했다. 직무에 대해 마음 씀을 매우 삼갔고, 힘을 씀에는 매우 부지런하였다. 장기간 무제를 수행하고 궁궐을 드나들던 중에 그는 곧 동이를 이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빈객들과 알고 지내는 것을 끊고 집안의 일도 잊은 채 밤낮으로 재주와 힘을 다하였다. 전심전력으로 관직의 일에 매진하여 무제에게 잘 보이기를 추구하였다. 그런 중에 뜻밖의 일이 터졌다. 이릉의 일이 생긴 것이다. 그 일로 그는 마침내 부형이라는 참사를 당하게 되어 『사기』의 집필은 당장 중단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95쪽
『사기』는 사마천의 정치 군사 문화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방면 의 사상을 관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 사상 또한 그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 이런 경제사상은 사마천이 홀로 우뚝 서서 행한 표지이자 획기적인 공헌이다. 그 이전의 사학에서는 경제 방면은 언급될 수 없었다. 그 후의 관찬 사서에서도 이 방면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다지 세세하게 제기하고 있지 않다. 이른바 「식화지」 같은 것은 토지제도 및 징세(徵稅)에 대하여 거듭 말하고 있다. 「화식열전」의 이론 체계와 사상의 고도(高度) 또한 사마천이 집대성한 치생술(治生術)로 발전시키고 생산한, 경제사상으로 커다란 차별성이 있다. 사마천은 전에 없이 상업경제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경제 및 정치와 도덕 민속간의 관계를 고찰하여 완정한 발전경제 이론을 제기하였다. 생산의 발전, 교환의 확대는 국가와 집을 부유하게 한다. 이런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관점을 포함하고 있는 경제사상은 『사기』에서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다. 사마천의 경제사상은 주로 「화식열전」과 「평준서」 등 몇 편에서 표현된다. 「화식열전」의 명칭은 식(殖)은 키우는 것이고, 화식(貨殖)은 재화(財貨)와 재리(財利)를 키운다는 뜻에서 취하였다. 「평준서」의 명칭은 관부(官府)의 물자를 융통하고 물가를 잡는 조치에서 따왔다. 곧 비싸면 팔고 싸면 사들임으로써 부유한 대상인들이 큰 이익을 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만물의 물가가 맹렬히 뛰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심사상이다. 천하의 사물을 누르는 것을 평준(平準)이라고 한 다. 이런 면에서 「화식열전」과 「평준서」는 『사기』의 다른 편장과는 큰 차별이 있다. 「화식열전」은 여러 가지 설명과 논의를 섞어 가며 의론을 주로 한다. -140쪽
『사기』에서 내뿜은 민본주의란 광휘는 사마천의 탁월한 역사 인식의 체현이다. 그는 전대에 나온 사서들이 군왕과 경상(卿相), 장군과 대부 등 존귀한 자들을 위해 전기를 짓는 전통을 뒤집었다. 중하층 인물들을 위해 전기를 지어 그들이 재상이나 경대부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전해지도록 한 것이다. 백성들이 강포함에 반항하는 것을 동정하였는데 이는 그의 민본사상에 대한 발양이 큰 것이다. 제왕의 전제와 폭력사상에 대한 비판은 두려움이 없는 그의 담략(膽略)을 표현해 내고 있다. 그중에서 포폄을 하는가 하면 애증(愛憎)을 갖기도 하는 등 사마천의 손에서 나온 것은 백성의 마음에서 발원하였다. 이런 전형적인 인물들은 『사기』에서 매우 전형적으로 표현되었다. -154쪽
사서에서 인물을 기록하기는 쉬우나 그 인물에 생동감을 풍만하게 불어넣기는 어렵다. 즉, 인물을 훨훨 살아 있는 듯 묘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기』는 다르다. 완벽하고 아름답게 인물의 형상을 빚어내었다. 『사기』에서는 호견법(互見法)을 처음으로 만들어내어 인물 형상을 특히 포만감 있고 생동감 있게 하였다. 절묘한 필치로 깎고 다듬어 재료의 취사를 가장 적절하게 하였으며 구성의 안배에도 장인(匠人)의 마음을 갖추었다. 세목(細目)의 묘사에 치중하여 주제를 돌출시켰으며 대대적으로 작품의 감응력을 증대시켰다. 세목의 묘사를 통하여 전형적인 환경 안에서 전형적인 인물을 재현해내었다. 그 인물들은 부르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책 밖으로 툭 튀어나올 것 같다. 전대의 역사에 비하여 『사기』의 웅장하고 왕성한 기세는 탁월하여 볼 만하다. -181쪽
사마천은 『사기』의 인물 형상을 빚어내는 일에 창조적인 작업을 진행시켰다. 특정 환경에서 전형적인 인물을 재현했다. 모순과 충돌하는 가운데서 전형적인 인물을 펼쳐내고, 심리묘사에서 전 형적인 인물의 본질적인 특징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일단의 훨훨 살아 있는 듯한 인물의 형상을 빚어내는 데 온힘을 쏟았다. 이전 사서의 인물 형상의 단순하고 창백한 약점을 되돌려 인물의 정신을 풍부하게 하고 살아 있게 하였다. -238쪽
언어예술의 정점은 『사기』가 얻은 큰 성공의 중요한 한 요인이다. 문장을 이루는 언어가 적절한 문체를 터득하고 있다. 또한 서술 언어의 풍성함과 인물을 성격화하는 생생한 언어 구사력도 보인다. 서술하는 사이에 저자의 의견을 끼워 넣는 치밀함, 속담을 인용해 넣은 적절함도 놀랍다. 논찬이라는 독보적인 견해를 피력한 기준 등은 『사기』의 언어를 정확하고 정련되고 생동적이고 우미(優美)하게 만들었다. 오색찬란할 뿐만 아니라 호연지기까지 갖춘 덕분이다. 말이라는 일정한 법식을 갖춘 언어라는 정련되면서도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사기』가 세상에 전하게 되는 필연적 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사마천이라는 사학의 대가이자 문학 거장의 풍미이기도 하다. -265쪽
공자가 지은 『춘추』는 노나라의 사료에 근거하여 수찬한 것이다. 중국 최초의 편년 단대사로 노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연도 단위로 일을 기록하였다. 노은공 원년(B.C. 722, 周平王 49년)에 시작하여 노애공 14년(B.C. 481, 周敬王 39년)에서 끝이 나며 모두 242년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공자는 『춘추』를 지으면서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깎을 것은 깎아 난신적자를 두렵게 하였다. 사마천은 『춘추』는 위로는 삼왕(三王)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사(人事)의 벼리를 변별하며 혐의를 구별하고 시비를 밝힌다, 어정쩡한 것을 바로잡고 훌륭한 것을 훌륭하게 여기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긴다, 현자를 현명하게 여기고 불초한 자를 천하게 여기고 망한 나라를 존속시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는다, 낡은 것을 수리하고 없어진 것을 일으키며 왕도의 근본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의 『사기』 또한 『춘추』와 그 주된 취지가 같다. 과연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올바르게 돌리는 세상을 넓히는 저작이다. 이런 스스로의 믿음에 비추어 보았으므로 그는 아래와 같은 비교를 하게 되었다. -328쪽
요컨대 전사(全史)를 창시한 『사기』는 중국의 첫 번째 통사(通史)로 내용이 완정하고 구성이 주도면밀하다. 편년(編年)과 기사(紀事) 등 여러 역사 서술 방식의 장점을 모았으며 인물의 전기(傳紀)를 중심으로 하여 기전체(紀傳體)를 창시하였다. 이 역사의 새로운 체재(體裁)는 포괄한 것이 매우 넓고 형식이 주도면밀하며 역사와 사건의 서술이 꼼꼼하고 빈틈이 없다. 이는 전에 없던 역사를 기술한 위대한 저작이자 또한 걸출한 문학의 명저로 후세의 사서와 문학의 전범이 되었다. 이에 대한 “사가(史家)의 절창(絶唱)이자 운을 달지 않은 「이소」이다”라는 노신의 평가는 매우 정확하다. 사마천은 『사기』를 위해 온 정력을 다 바쳤으며, 노래할 수도 울릴 수도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숭앙하고 존경하게 한다. 『사기』는 사마천으로 인하여 세상에 유명해졌고 사마천은 『사기』로 인하여 문화의 거인이 되었다. -3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