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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주역사전 1-8.저자 정약용|역자 방인, 장정욱|소명출판 |2007.08.20

굴어당 2016. 3. 22. 17:05

역주 주역사전 1-8.저자 정약용|역자 방인, 장정욱|소명출판 |2007.08.20
페이지 349|ISBN ISBN 안내 레이어 보기 9788956262628|판형 A5, 148*210mm
책소개
다산 정약용의 저서 <주역사전>을 완역하고 주석한 책. 다산은 1801년 강진에 유배된 이후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오히려 학문을 닦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주역』연구에 몰두하였고, 그 결과로『주역』주석서인 <주역사전>을 펴냈다.
이 책에서는 주로 1937년 신조선사에 의해 간행된 활자본과 규장각 소장 필사본을 번역 텍스트로 사용하였다. 편집 체제는 신조선사본을 따르지 않고 무진본 체제를 근간으로 하여 권수 등을 표기함으로써 고본의 원형을 제시하고, 3권씩 묶어 총 8책의 체제로 구성하였다. [양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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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정약용
조선 말기의 실학자. 호는 다산[茶山]이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승지 등 벼슬을 지냈다. 그는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문·지리·과학 등에도 밝아 진보적인 신학풍을 총괄 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는 당시 금지한 천주교를 가까이한 탓으로 좌천되어 귀양을 갔으나,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에도 [목민심서]를 비롯한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정약용은 40년 동안을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조선 최대의 정치·경제학자이다. 죽은 후 규장각 재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주요 저서에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 심서] 등이 있다.



출판사 서평


이번에 번역된 책은 다산 정약용의 주역사전(周易四箋) 무진본(戊辰本) 24卷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이 나온 무진년(戊辰年)은 1808년, 즉 순조8년에 해당된다. 내년(2008년)은 이 책이 나온지 200년째 되는 해가 될 것이다. 다산은 신유년(辛酉년, 1801년)에 강진에 유배된 이후, 다산은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오히려 학문을 닦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주역』 연구에 침잠하게 된다. 다산의 무진본 주역사전의 서문에 해당되는 제무진본(題戊辰本)의 기록에 따르면, 계해년(癸亥年, 1803년) 겨울부터『주역』을 읽기 시작하였다. 다산이 그의 친구 윤외심(尹畏心)에게 보낸 편지(「여윤외심서與尹畏心書)」에 따른다면,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잡는 것, 입으로 읊조리는 것,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붓으로 기록하는 것으로부터 밥을 먹고 변소에 가며, 손가락 놀리고 배 문지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주역 아닌 것이라고는 없었다.”(「與尹畏心書」, 『여유당전서』, 제1集, 詩文集, 19-20) 이처럼, 자나깨나 오로지 『주역』 연구에 전념한 결과 나온 다산의 『주역』 주석서가 바로 『주역사전(周易四箋)』이다. 다산이 『주역사전』의 완성을 위해 쏟은 정성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주역사전』이 세상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04년에 펴낸 갑자본(甲子本, 8卷)이었는데, 다산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후 연속해서 을축본(乙丑本, 8卷, 1805년), 병인본(丙寅本 8卷, 1806), 정묘본(丁卯本 24卷, 1807), 무진본(戊辰本 24卷, 1808년)의 개정본을 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1804년에 갑자본(甲子本)이 나온 이후로 네 번의 개정본을 내었으며, 그 양은 처음에 8권이다가 정묘본(丁卯本)과 무진본(戊辰本)에는 24권으로 대폭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다산의 저술 중에서 다산이 이처럼 정성을 기울인 저술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주역사전』을 다산은 자신의 다른 어떤 저술보다도 더 소중히 여겼다. 다산은 자신의 『주역사전』이 하늘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天助之文字’(하늘의 도움을 얻어 지어낸 文字)라고 부른다. 다산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주는 편지(「示二子家誡」)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다. “『주역사전』은 그야말로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어 지어낸 문자(文字)이다. 결코 사람의 힘으로 통할 수 있거나, 사람의 지혜나 생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 책에 마음을 가라앉혀 깊이 생각하여 그 속에 담긴 오묘(奧妙)한 이치를 모두 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나의 자손이나 친구가 되는 것이니, [그런 사람이] 천년에 한 번 나오더라도 배 이상 정을 쏟아 애지중지할 것이다. : 周易四箋, 是, 吾得天助之文字, 萬萬非人力可通, 智慮所到, 有能潛心此書, 悉通奧妙者, 卽子孫朋友, 千載一遇, 愛之重之, 當倍常情. ;「示二子家誡」) 다산은 자신의 저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고, 비난하는 사람은 많다는 사실에 대해 개탄하며, 만일 천명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불에 태워버려도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만일 자신이 저술한 책 중에서 『주역사전』과 『상례사전(喪禮四箋)』 만이라도 전승해간다면, 나머지 책들은 그냥 없애버려도 좋겠다고 말한다. 다산의 『주역사전』이 지니는 대단한 가치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이를 격려한 사람은 다산의 중형(仲兄)이었던 손암(巽菴) 정약전(丁若銓)이었다. 『주역사전』이 완성되었을 때,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어 있던 손암(巽菴)은 이를 읽어보고, 복희, 문왕, 공자의 세 성인 마음 속의 오묘한 이치가 이제야 찬연하게 밝혀졌다고 기뻐하였다. 손암(巽菴)은 말하기를 ”처음에는 놀라고, 중간에는 기뻤고,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무릎이 굽어졌다. 저자(著者)인 내동생을 어떤 사람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미용(美庸) 저 자신도 모를 것이다.“ 손암(巽菴)은 특히 『주역사전』 중에서 고점법(古占法)에 대한 부분을 특별히 독립시켜 저술한 「시괘전(蓍卦傳)」에 대해서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손암(巽菴)은 말하기를 “주역사해(周易四解)는 그 어는 것이 장관(壯觀)이 아니오리마는 시괘전(蓍卦傳)에 이르면, 더욱 절기(絶奇)한 문자(文字)인 것이다“(周易四解, 孰非壯觀, 而至蓍卦傳, 尤是絶奇文字)”라고 하였다. 손암(巽菴)과 더불어 『주역사전(周易四箋)』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 인물로는 아암(兒庵) 혜장(惠藏:1722-1811) 선사(禪師)가 있다. 혜장선사는 다산이 강진 유배시에 친하게 지냈던 불승(佛僧)으로서, 『주역(周易)』에 대해서도 박식(博識)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으나, 다산역학을 접하고 나서는 산승(山僧)이 20년동안 역학을 공부한 것이 모두 헛된 일에 지나지 않았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