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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남한산성 탐방―벼랑 끝에서 꽃을 피우다`

굴어당 2010. 4. 13. 15:38

"仁祖의 절절한 고뇌, 귓가에 맴도는 듯"
현장에서 되새긴 '병자호란'…
"바라본 역사는 처참했지만 이만큼 성장했다는 위안도…
이성과 감성 골고루 만족"

"1637년 1월 15일, 남한산성 안에 포탄이 떨어지면서 조선에 병자호란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됩니다. 그달 30일 인조(仁祖)는 삼전도(三田渡)로 나아가 청(淸)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합니다. 당시 선택은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만일 척화파(斥和派)의 주장대로 싸움을 계속했다면 조선은 청의 직할령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전쟁 당시 이곳에서 벌어졌던 인간 군상들의 행적을 따져 누가 합리적이었는가를 다시 평가해야 합니다."(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흐리고 쌀쌀했던 10일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곳곳은 '인문학 야외강의실'로 변했다. 인문학을 일상생활 속에 심자는 취지로 조선일보·국립중앙도서관·교보문고가 올해 함께 전개하고 있는 '길 위의 인문학' 캠페인의 세 번째 프로그램인 '남한산성 탐방-벼랑 끝에서 꽃을 피우다'가 진행됐던 것이다. 7:1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참가자로 선정된 40여명의 탐방단은 타임머신을 탄 듯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으로 돌아가 해설자들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이 날 해설은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푸른역사)를 쓴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와 소현세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소현'(자음과모음)을 쓴 소설가 김인숙씨가 맡았고, 남한산성 역사관과 행궁(行宮)에서는 이광희 남한산성 문화관광사업단장이 설명했다.

‘길 위의 인문학’남한산성 탐방단이 한명기 명지대 교수(왼쪽 끝)의 설명을 들으며 병자호란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 오진규 인턴기자

남한산성 입구의 역사관에서 오전 9시쯤 시작한 이날 탐방은 종각터~행궁~침괘정~숭렬전~수어장대~연주봉 옹성~남장대터~지수당으로 이어졌고,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청에 끌려가 순절한 삼학사(三學士)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현절사(顯節祠)에서 오후 4시쯤 끝이 났다.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군대를 지휘하던 곳인 수어장대(守禦將臺)에서 여섯 살짜리 외손자에게 옛 건물에 대해 설명해주던 이재섭(58·교사)씨는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主和派)의 갈등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면서 "당시 주화파의 주장을 좀 더 받아들였다면 역사의 줄기가 다르게 잡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날 답사는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이 한데 어우러져 병자호란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한 자리였다. 소설가 김인숙씨는 "인조를 나약하고 무능한 임금이라고 했던 세간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자식을 버리고, 손자들을 죽게 하고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린 권력은 무엇이고 그걸 가능하게 한 시대는 무엇인가' 등을 뭉뚱그려 바라보는 시선이 중요하다"며 "우리가 오늘 여기서 370여년 전의 일을 다시 느껴보는 것은 그 일이 주는 '울림'을 들어보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라고 물었다.

수어장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길 위의 인문학’남한산성 탐방단. / 오진규 인턴기자

한명기 교수는 "두 달간 지속된 병자호란은 '오랑캐'로 여기며 멸시했던 청에 굴복했다는 점에서 7년간이나 지속된 임진왜란보다 조선에 더 큰 정신적 충격을 남겼고, 이후 조선의 외교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성의 남문(南門)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던 남장대 터에 들렀다 가는 길에 부인과 "너무 생생하다"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김덕(53·은행원)씨는 "해설자 두 분이 각각 전쟁의 역사적 측면과 인간적 측면을 보여준 덕분에 이성과 감성이 교차되는 듯한 기분을 여러 번 느꼈다"고 말했다.

원래 노비였으나 병자호란 때 큰 공을 세워 면천(免賤)되고 당상관의 자리에까지 오른 서흔남(徐欣男)의 묘비 앞에서 한명기 교수가 "전쟁이 누군가에게는 기득권을 몽땅 잃는 비극이었던 반면 또 다른 이에게는 '로또 당첨'과 같은 기회였다"고 설명하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열심히 메모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정현란(46·주부)씨는 "이곳에서 바라본 역사는 처참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만큼 성장했으니 옛 상처를 끄집어 내 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안도 생겼다"고 말했다.

출처 : 굴어당의 漢詩(唐詩.宋詩.漢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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