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만인보』와 근대적 주체의 문제
-『만인보』읽기의 방법론 (1)
Ko Un’s Ten Thousand Lives1 and the Problem of
Modern Subject
한원균(충주대 교수)
1. 서론
고은의『만인보』는 1986년에 1권이 발간된 이후 2009년 현재까지 모두
26권으로 간행된 시집이다.2 단일 주제로 쓰여진 시집 가운데 가장 많은
권 수를 기록하고 있는『만인보』는 한국 시문학사상 유래가 없는 현상이
다.『 만인보』는 시인의 진술에 의하면‘민족을 개체의 생명성으로부터 귀
납하는 수작’3이다. 민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개인적 삶의 구체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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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인보』에 대한 영문제목을 음가 중심으로 Man-In-Bo로 하는 것은 서구 독자들에게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아서‘여러 사람들의 삶’이라는 의미에서 Ten Thousand Lives 가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이 제목은 Ko Un, The Sound of My Waves, Selected Poems by Ko Un, Translated from the
Korean by Brother Anthony of Taizé and Young-Moo Kim, Cornell East Asia series, Cornell
University, New York, 1993 에 실린 것으로 한다.
2『만인보』는 1986년에서 1997년까지 15권이 간행되었고, 이후 2009년까지 26권이 출판되었으며 고은
시인이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2010년 초에 30권으로 완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3고은,『 만인보』1권<작가의말>, 창작과비평사, 1986, p.5.
한국문예창작 제8권 제3호(통권17호) 2009.12. pp.57~79
1. 서론
2. 자기의식과 승인운동
3. 욕망의 존재론
4. 주체의 시학
5. 결론 - 근대적 주체와‘개인의 발견’
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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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착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그의 진술은 이 시집이 구성되는 방법론적 원
리로 이해할 수 있다. 1980년 신군부의 정권탈취 과정에서 <내란 음모죄
와 계엄법 및 계엄교사>라는 죄목으로 육군교도소 특별 감방 7호실에 구
금되었을 당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지난 시절 만났던 인물들을 기억하는
일이 생존의 절대적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4은 시집 구성의 동인(動因)에
해당한다.
『만인보』의 구성 원리와 계기를 이와같이 이해하는 일은 시인의 전기적
인 맥락에 비추었을 때만 타당성을 지닌다. 문제는『만인보』의 성격을 밝
혀서 시인의 진술에만 의존하지 않고 시집의 의미를 정립하는 일이 가능
한가라는 점이다. 지금까지『만인보』에 대한 접근은 대체로‘만민 평등 사
상의 입체적 조명’5,‘ 인물시의 새로운 가능성’6,‘ 민주화 투쟁기 현실 대
응 방법’7,‘개인적 서정에서 집단의 역사성으로 이행한 역작’8,‘ 민족의
정서와 민족어의 특성을 발견한 작품’9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와같은
관점들은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민중주의적 세계관이『만인보』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민중들의 삶에 대한 애착이 지배적
으로 작용하여 개별적인 인물들의 구체성과 현실성이 사상되고 이념형 인
물만 그려진다는 비판과 이와 관련된 최근의 논쟁10 역시 이와 관련된다.
문제의 핵심은『만인보』라는 작품 자체에 주목하는 일이며, 동시에 지금
2 한국문예창작 제8권 제3호(통권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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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고은,「 『만인보』를말한다」,『 우주의사투리』, 민음사, 2007, p.237.
5김재홍,「 『백두산』과『만인보』, 그리고고은의문학사상」, 신경림, 백낙청엮음,『 고은문학의세계』, 창
작과비평사, 1993, p.248.
6윤영천,「 인물시의새로운가능성-『만인보』론」, 위의책, p.171.
7졸저,『 고은시의미학』, 한길사, 2001, p.127.
8권영민,「 개인적서정에서집단적역사성으로」, 황지우엮음,『 고은을찾아서』, 버팀목, 1995, p.413.
9백낙청,「 만인보에대하여」, 위의책, p.437.
10 최근의 논란 가운데 하나는 황종연 교수의 글「민주화 이후의 정치와 문학-고은‘만인보’의 민중-민족
주의 비판」(문학동네, 2004, 겨울)이다. 이 글에서 황교수는 고은의『만인보』를 우리 시대‘최고의 민
중주의’작품으로 평가하면서 일련의 비판을 가한다. 여기에 대해서 하정일 교수의 비판(「황종연 교수
의‘민주화이후의정치와문학’을비판한다」,《 교수신문》, 2004, 12, 12)이있었고, 황종연교수의반
론「( 민중상의 탈물신화 필요」,《 교수신문》, 2004, 12, 16)이 이어졌다. 여기에 필자는 문학논쟁의 정
치적, 권력적고려를배제하면서미학적성찰이필요하다는의견을제시한바「( 시는현실을재현하지
않는다」,《 교수신문》, 2004, 12, 26)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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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의 선행연구가 갖는 한계를 넘어 새로운 해석의 관점을 제출하는 일
이다.
『만인보』는 다양한 층위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만난 이웃들, 혹은 역사와 현실에 실재하던 인물들 그리
고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맥락에서 존재했던 인물11 등이『만인보』를 이루
고 있는 군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만인보』의 인물들은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존재이
면서 동시에 하나의 공동체, 공공의 존재론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이 전작시편「만인보」는 막말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다. 나의 만남은 전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
으로 공적인 것이다. 이 공공성이야말로 개인적인 망각과 방임으로 사라질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삶 자체로서의 진실의 기념으로 그 일회성을 막아야 한다.
하잘 것 없는 만남 하나에도 거기에는 역사의 불가결성이 있다.12
이러한 진술의 핵심은, 개인은 고립된 자아에 머물지 않고 세계로 이어
지는 통로이며, 이러한 글쓰기는‘주관적 서정성을 집단적 역사성으로 전
환하고자 하는 의지’13의 발로이고, 동시에‘민족을 소멸되지 않는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로 이끌어가는 민중의 유기적 생명력에 대한 믿음’14을 드
러낸 데 있다. 그러므로『만인보』는 사람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존
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보다 명징하게 형상화한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하
다.
시인은 1989년에 열린 일본 지식인회의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고은의『만인보』와 근대적 주체의 문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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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만인보』의 인물 유형에 관한 연구는 졸저, 앞의 책, pp.138~152, 참조.
12고은,『 만인보』1권<작가의말>, 창작과비평사, 1986, p.4.
13 권영민, 앞의 글, p.414.
14박혜경,「 민족생명력의개체적형상화」, 황지우엮음, 앞의책, p.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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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의 고아가 삼인칭의 무한한 만인의 세계를 꿈꾸게 된 사실이 바로『만
인보』의 세계인지 모릅니다. (…) 동북아시아에서‘만(萬)’이란 많은 사물이나
많은 사람을 뜻하는 고대 이래의 표현입니다. 이 만(萬)은『아라비안나이트』에
서의 천(千)과도 같습니다. 반드시 이런 뜻의 복수(複玢)만이 아니더라도 인간
이란 뜻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개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휴면’은
‘사람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 오직 가능한 것은 너와 나 사이의 다함없는
순환이며 변화입니다.15
『만인보』1권의 서문보다는 좀더 정교한 이론적 근거를 내세우고 있는
부분인데, 시집이 갖고 있는 성격을 이와같이 자각적으로 표현했다는 점
은 시인의『만인보』에 대한 관심이 어떤 것보다 크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자기 체험의 강렬성이 시인에게는 일종의 자부심을 형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박용길 장로가 나에게 신구교회 공동 번역의 성서를 넣어 주었다. 이전에 성
서를 띄엄띄엄 읽어 본 일이 있는 것 말고는 그때 처음으로 성서를 다 읽었다.
그러나 나는 육군 교도소 생활의 대부분을 시의 구상으로 보냈다. 시를 구상하
는 일 자체가 하루하루를 보내는 힘이 되었다. 내 문학은 세상을 구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구하는 일이 된 것이다.
그때 서사시「백두산」과「만인보」가 이미 태어났다.16
시인에게『만인보』는‘이미 태어’난 존재만큼 선험적인 강렬함을 내재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이 시인의 내면성과 자부심을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
한 이유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 작용한 결과
4 한국문예창작 제8권 제3호(통권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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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고은,「 『만인보』를말한다」, 앞의책, pp.237~239.
16고은,「 그날0시이후」, 위의책,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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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만인보』를 민중주의적 관점에서 읽게 하는 요인은 여기서 비롯된
다.『 만인보』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대체로 그것은‘빛나는 이
름을 남기지는 못하지만 역사를 지탱하는 가장 중추적인 힘을 간직한 뭇
민중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17을 드러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만인보』는 이와같은 민중주의적 관점 위에서 창작되었지만, 중
요한 것은 이들이 어떻게 개별적인 주체로서 그 위상을 갖게 되었는가 하
는 점이다. 다시말해 시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시인의 사적인 경
험범위이든 역사적이고 공적인 범위에 있든,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주도
적으로 이끌어가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정적이거나 수동
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들조차 사실은 역사적 흐름을 형성하는 근본이
되었다는 점에서 고은은 역사의 진보를 신뢰하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지녔
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만인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떻게 자신을 주체적이고 자
립적인 인물로 설정해 가는지를 확인할 필요성이 발생한다. 시인은‘사
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 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고은의『만인보』와 근대적 주체의 문제 5
- 61 -
17김태현,「 이웃을위한시」, 황지우엮음, 앞의책,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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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서시」(1)18
사람들의 관계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고 그들 각자가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독립된 존재들이라면 그들의 만남은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이기 때
문에 헤어짐조차 <확대>라는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세계의
외연이‘사람’을 통해 넓혀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람’의 관계론을 통해
삶을이해하고자하는의지의작용으로볼수있다.『 만인보』가, 주체들이
자기의식을 찾아서 만나고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근대적 승인운동의 공간
이라는 가설이 설정될 수 있는 이유는 여기 있다.
본고에서는 시집『만인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서 나타난 근대적 주체들이라는 점을 밝히고, 이들은 한 개별자로서의 운
명을 담지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국사회라는 보편자의 수용태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럴 경우 이들의 삶이 근대적 시민사회의 수원(水原)이
라는점도함께밝혀지게될것이며,『 만인보』에대한시인의구성의도역
시 개진될 것으로 판단된다.
2. 자기의식과 승인운동
헤겔은 이미 존재의 최초의 단계에서‘즉자성이란 한낱 어떤 타자를 위
6 한국문예창작 제8권 제3호(통권 제17호)
- 62 -
18 이후 인용시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만인보』에 수록된 작품이며, 괄호안의 숫자는 수록 권수를 의
미한다.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62 001 @PDF_IN
해서만 있는 대상의 존재양식’19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헤겔에게 자기의
식이란 최초의 감성적 확신의 단계에서 자기 스스로가 하나의 주체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에서‘그 자신이 스스로의 대상이 됨으로써 의식도 또한
바로 그 자신이 진리가 된’20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주체21란 이미‘타
자를 위한 존재가 바로 동일자’22라는 점이 명백해 진 것이다. 이는 주체
가 순수하고 자기동일적인 의미에서 주체가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전제할
때만 주체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의식으로서 주체는
타자라는 존재, 타자의 생(生)을‘통해서만’23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
기 때문에 이때의 자기의식은 욕구이며, 주체는 욕망하는 주체가 된다. 결
국 자기의식을 갖는 주체가 주체이기 위한‘이러한 지양이 이루어지기 위
해서는 반드시 이 타자가 존재해야만 하는 까닭’24이 성립되는 것이다.
모두가 독자적인 자기존립자로서 움직이는 자기의식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와 독립성을 바탕으로 이 모든 자기의식의 통일을 뜻하는 나, 즉 우리이며 동시
에 우리가 곧 나(Ich, das Wir, und Wir, das Ich)라는 경지에 다다르게 된
다.25
이로부터 주체는 자신의 존재를 타자의 존재와 결부지어 생각하게 된
다. 자기 자신에 대한 주체적 정립은 타인의 존재로부터 가능한 일이며 타
고은의『만인보』와 근대적 주체의 문제 7
- 63 -
19F, 헤겔, 임석진역,『 정신현상학·1』, 지식산업사, 1988, p.243.
20 위의 책, 같은 곳.
21 헤겔은 <자기의식의 진리>에서‘즉자적 존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이후에 벌어질 인정투쟁
과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이르러서야 나타나는‘즉자-대자적 존재’를 설명하기 위함이지만, 본고에
서는‘즉자적 존재’와‘대자적 존재’는 주체의 개념과 일치한다고 판단하여 헤겔의 개념을 구별하지
않고‘주체’라는 용어로 사용하기로 한다.
22 헤겔, 앞의 책, p 244.
23 헤겔은 이를‘지양(Aufheben)함으로써만’으로 적고 있지만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타인들과
여러 가지 층위에서 관계맺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위의 책, p.252.
24 위의 책, 같은 곳.
25 위의 책, p.255.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63 001 @PDF_IN
인의 존재가 전제될 때 주체는 자기의 입지를 정립하게 된다. 이러한 상호
과정은 주체 사이에 일어나는 행위가 사실은‘타자에 의한 행위이면서 동
시에 자기 자신에 의한 행위’26라는 이중성 때문에 가능하다. 이 이중성은
주체 스스로가 자기의 존립근거를 확보하고 있다는 데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한 것이므로 타자의 죽음을 전제로 한 사활을 건 투쟁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관점에서‘자유의 획득은 오직 생명을 걸음으로써만 가능하다’27
A, 꼬제브는‘자신의 생을 인정투쟁 즉, 순수하게 자신의 입지를 세우
려는 위신투쟁(Prestigekampf)에 걸 수 없는 본질은 결코 현실적으로 인간
적인 본질일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인간적 현실이란 타인에 의해 어
떤 사람이 인정된다는 사실 속에서 성립되기 때문’28이라는 것이다. 꼬제
브는 이어서 헤겔이 말했던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은, 세계사라는 흐름
이 지배와 예속의 변증법적 관계의 역사이므로 주인과 노예의 종합이 실
현되는 순간 종결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종합은 나폴레옹에 이르러 구현
되었고 그의 출현이야말로 단일하고 보편적인 시민국가의 완성이라는 것
이다.29
‘자아는 존재의 진리’라는 명제를 내세운 J. 이뽈리뜨 역시‘존재란 그
것을 탈취하는 자아에 대해서만, 그리하여 자기를 자기에 대해서 정립하
는 자아에 대해서만 있기 때문’에 자기를 세우는 일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식의 통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자기의식은
세계와 투쟁하는 가운데 있다. 자기의식에 있어서 이 세계란 소멸되어 가
는 것으로 지속적으로 존립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멸 자체
8 한국문예창작 제8권 제3호(통권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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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위의 책, p.261.
27 위의 책, 같은 곳.
28A, 꼬제브, 설헌영역,『 역사와현실변증법』, 한벗, 1981, p.78.
29 위의 책, 한편 꼬제브의 이와 같은 헤겔 해석은 다분히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동의하기는 어
렵다. 헤겔이 그의 저서『법의 철학』에서 개념을 보편성, 개별성, 특수성으로 나누면서 후에 이를 프로
이센 민족국가를 강조한 것도 이와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F, 헤겔, 이동춘 역,
『법의 철학』(전편), 박영사, 1987, p.85.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64 001 @PDF_IN
는 자기의식이 스스로를 정립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하다.’30 따라서 욕망
하는 자기의식은 이 세계와 맞서기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식은 욕구하는 자기의식일 수밖에 없다. 헤겔의 자기의식
은 사회적 자기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자기의식의 다른 자기의식과
의 관계는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자기에게 환원되는 구조를 지닌다. 이 과
정이 승인(Anerkennung) 운동의 본질을 이룬다.
이 승인관계 역시 다른 자기의식(타자)을 부정하여 자기를 확보하기 위한 것
이지만 타자가 완전히 소멸되어버리면 자기가 승인받지 못하게 되므로 타자가
보존되면서‘자기’가‘자기의식’으로 승인받아야 한다. 이때 이러한 관계가 가
능한 것은 여기에서의 타자가 자연적 대상과 달리 스스로 자기를 부정할 수 있
는‘다른’자기의식이기 때문이다.31
결국 헤겔에게 자기의식은 타자와 함께 공존하면서 자기의식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게 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자기의식이라는 점이
설명된 것이다. 주체는 타자와 함께 존재할 때 주체일 수 있고, 이것은 일
차적으로 자기 안의 자기의식을 통하여 자기의식이 자기를 인식하는 단계
와 현실적 타자인 또 다른 주체와 맞대결함으로써 주체의 주체성을 확인
하는 이중적인 과정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이다. 다시말해 자기의식은‘자
아=자아’라는 추상적 동일성을 벗어나 자신에 대한 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다른 자기의식을 매개’해야 하며, 이 과정을 통해서 결국 각각의
자기의식이‘승인된 공동적 자기의식’32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만인보』는 주체들의 상호과정, 서로에게 타인이 되면서 존재하는 과정
고은의『만인보』와 근대적 주체의 문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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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J. 이뽈리뜨, 이종철·김상환역,『 헤겔의정신현상학·Ⅰ』, 문예출판사, 1987. pp.198~199.
31 양운덕, 「《정신현상학》의‘자기의식’장에서의 승인운동(承認運動)과 그 구조」, 한국헤겔학회편, 『헤
겔연구. 4』, 지식산업사, 1988, pp.63~64.
32 위의 글, p.69.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65 001 @PDF_IN
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체는 타자를 통해서만 비로소 주체일 수 있
는데, 『만인보』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타자들의 삶과 시선을 통해 자신을
정립해 가는 존재들이다. 자신의 삶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존재로부터
그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는 점을 그들은 자각하게 된다. 자신과 주변의 환
경, 삶과 현실에 대한 이해 등으로 사유의 확장이 가능한 것은 이와같은
인식론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고, 시인은 시집에서 이 점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다.
3. 욕망의 존재론
고은의『만인보』는 주체들의‘주체되기’과정을 그린 연작시이며 그 주
체들은 근대적 삶의 형식을 하나하나 담지하는 근대적 주체들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근대적 주체는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입지를 타인들의 삶과
견주어 보며 이로부터 형성되는 심리적 정황에 대한 자기이해를 바탕으로
성립하는 의식적 타자이다. 『만인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다양성에 비추
어 볼 때 근대적 삶에 대한 주체들의 의식이 전일적인 현상이라고 보기 힘
들다는 견해도 성립될 가능성이 있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 형상화한 승려
들의 삶 역시 자신에 대한 자기의식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주체되기의 한
과정을 그린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개인과 실존적 차원, 역사적, 초월적
차원의 인물들이 등장했다는 현상적인 분석33은 이 시집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에 대한 일차적인 분류작업으로 의미가 있지만, 이들을 어떤 관점
에서 분석하고 시인의 세계관을 어떻게 논의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결여
10 한국문예창작 제8권 제3호(통권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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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대개의『만인보』에 대한 선행연구는 이와 같은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이 시집에 대한 일차적인 접근
에서 인물들의 유형을 분류하는 것은 일단 중요하지만 본고는 이 같은 차원에서 나아가 이들 인물들의
성격과 시집을 어떤 관점에서 읽어야 할지를 논의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볼 수 있
다.『 만인보』의인물유형에대해서는졸저, 앞의책및김재홍, 앞의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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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현재까지 간행된『만인보』는 모두 26권이고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시인의 직·간접의 체험과 상상력 그리고 문헌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
이다. 따라서 시집에 실린 개별적인 작품들은 모두‘어떤 사람들’의 이야
기이고 시인은 이들의 삶을 관찰하거나 재구성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시
집 전체를 통해 볼 때, 시인이 직접적인 자기 자신을 드러내거나‘나’라는
일인칭 화자를 등장시킨 경우는 매우 드물다.34 제1권에 실린「김성숙」이
라는 작품이 이례적인 이유는 여기 있다. 산문이나 다름없는 형식으로 이
루어진 이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1959년 광화문 거리 노란 은행잎 널릴 때
나는 처음으로 김성숙옹을 만났습니다
비각에서 견지동까지
화봉 유엽스님을 따라가서
조계사 밑 컴컴한 다방에서였습니다.
-「김성숙」(1)35
김성숙은 1898년 평북 철산고을의 산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학문과 여러 종교에 심취하다가 1916년부터는 출가하여 만주나
국내 양주 봉선사와 금강산 등지에서 공부를 한다. 그러다가 혁명노선에
나서게 되어 노동공제회라는 곳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후 압록강을 건너
고은의『만인보』와 근대적 주체의 문제 11
- 67 -
34 가장 최근 간행된『만인보』21~26권에는 간혹 시인 자신이 화자가 된 작품이 발견되기도 한다. 24권
에 수록된「박동담」이라는 작품이 대표적이다. 시인 자신의 전기적 이력과 관련된 이야기가 두드러진
다.
35 작품「김성숙」에서는 서술형이 모두‘~읍니다’라고 되어 있다. 현재의 바른 표기는‘~습니다’이므로
논문의 인용에서는‘~습니다’로 표기하기로 한다. 하지만 마침표가 없다든지 띄어쓰기가 안 맞는 경
우는 원시대로 인용한다. 특이한 것은『만인보』에 실린 작품들은 대개 마침표가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자리에서 체계적으로 언급될 필요가 있다.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67 001 @PDF_IN
서 북경으로 가 장건상, 양명, 김봉환, 이낙구, 장지락 등과 함께 좌익투쟁
에 나선다. 김성숙은 북경 대학을 다니면서 고려유학생회 회장이 되고 신
채호의 추천으로 의열단에 가입한다. 민족해방과 혁명의 이론을 전개하던
중 광동코뮨에 참가한 뒤 상해로 가서 청년총동맹을 조직하여 투쟁의 무
대를 만주로 옮긴다. 1931년에는 반제동맹을 창립, 기관지『봉화』를 편집
하고 중국인민군 19로군에 편입하여 상해전투에 나서기도 한다. 뒤에 광
서 사범대학 교수로 있다가 1936년 김규식의 조선민족해방동맹에 참가하
여『민족해방』을 발행하였다. 해방 이후 김성숙은 임시정부와 함께 귀국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4·19가 일어난 다음 해인 1961년 통사당 정무위
원을 잠시 지내다가 5·16 군사 쿠데타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그는 감옥에서 <평생 나라 위해 싸운 늙은이를 감옥에 집어넣는 사람들이
이 나라 권력을 틀어쥐게 되다니! 하고 1평 반짜리 마루방에서 햇볕도 없
이 개탄>한다. 그리고 이어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1968년 나는 제주도에서 돌아와서 종로 2가 다방에서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중국집 잡탕밥을 얻어먹었습니다
나는 이 파란만장의 70 노인 앞에서 어서 하직하고 싶었습니다
다음해 4월 그가 세상 떠난 것도 나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소위 예술에 미쳐서 니나노에 빠져서 이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
마땅할진대 혁명은 한 혁명가의 운명을 이렇게 성취합니다
고은에게 김성숙이라는 인물은 투쟁가, 혁명가의 본모습을 지닌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은 자신과 김성숙이라는 인물의 상
관관계, 정확히는 고은 자신이 김성숙을 어떤 관점에서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일종의‘욕망의 대타화’라고 할 수 있다. 김성숙이라
12 한국문예창작 제8권 제3호(통권 제17호)
- 68 -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68 001 @PDF_IN
는 인물에 대한 장황한 기록은 시적인 형식과 제한을 뛰어넘고 있다. 『만
인보』에 실린 많은 작품과 달리, 이 작품은 시인 고은의 욕망을 가장 명시
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은이 다른 자리에서‘가장 불명
예스러운 사실은 내가 4·19 혁명의 현장에 없었다는 사실’36이라는 고백
과 긴밀하게 만난다. 현실의 중심, 논쟁의 가운데에 놓이고 싶은 정치적
욕망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다는 판단이 여기서 가능하다. 문제의 핵심은
김성숙에게 고은은 자기의식의 거울이었고, 정치적 욕망의 주체이자 대상
이며, 이것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투옥되어서 나날이 시를 구상
하면서 보냈던 지난 시절 시인이 가질 수 있었던‘가능의식의 최대치’였
다는 점이다. 이와같이『만인보』는 고은 자신의, 자기의식의 타자화로부
터 출발한 것이다.
4. 주체의 시학
『만인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시인에게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위를 담담하게 걷는 존재들
이다. 시인의 체험과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들은 모두 자기 시대의 아들이
며, 그들로부터 모든 상상력과 심지어는 철학조차 당연히도 자기시대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게 제시된다. 시집에 등장하는 모
든 개인은 자기시대의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세계-내-존재’들이
며 이들은 모두 로두스(Rhodus)의 섬37에 갇힌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들 가운데는 자신의 삶을 숙명적으로‘인식한다’는 의식조차 없이 살아가
는 사람들도 있고, 주어진 현실에 대하여 문제적인 시각을 지닌 인물도 있
고은의『만인보』와 근대적 주체의 문제 13
- 69 -
36고은,「 한이름없는삶」,『 방황, 그리고질주』, 미학사, 1990, p.87.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69 001 @PDF_IN
으며,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역사의 주체화를 시도하는 인물도 있다. 헤
겔적인 표현법을 빌자면 정신의 전개과정에서‘감성적 확신’으로서의 의
식(즉자적 의식)과‘자기의식’(대자적 의식), 그리고‘이성’(즉자-대자적 의
식)으로 나아가는 단계가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각각 구체화되고 있다. 물
론 주체의‘주체되기 과정’이 이와같이 단선적인 구조 속에서 모두 설명되
는 것은 아니지만, 『만인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순수 자기동일성으로서
의 삶과 타인으로부터 자기자신을 발견하는 삶이라는 유형으로 묶인다.
이때 순수 자기동일성이란 주어진 삶을 수동적인 자세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자립적 개인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개인이 비자립적 자
기의식으로부터 정립된 주체로 이행하는 과정이『만인보』의 인물학이자
동시에 서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하루 150환을 버는 막일꾼이올시다
구공탄 배달하는 막일꾼이올시다
허위허위
비탈길 오르면
한겨울에도 내 몸에서 하얀 김이 한 소쿠리씩 피어납니다
나는 구공탄 친구올시다
나는 구공탄 쓰는
언덕배기 가난한 집들 친구올시다
14 한국문예창작 제8권 제3호(통권 제17호)
- 70 -
37 이솝우화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로두스 섬에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춤을 잘 추었다고 하자,
다른 사람이 그에게 지금 서 있는 곳이 그 섬과 다르지 않으므로 자랑만 하지 말고 실제로 춤을 추어
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로두스 섬은 이상이나 이념을 의미하고 그 사람이 지금 서 있는
곳은 현실을 의미한다. 로두스는 장미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헤겔은『법철학』에서 이 장미를 이념이
나 이상의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Hier ist Rose, hier tanzel!>(여기 춤추는 장미를 보라! :번역
은 인용자)은 현실이 곧 이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명제이다. J, 이뽈리뜨, 앞의 책, p.61. 결국 사람
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적 한계 내에서 사유하고 철학 역시 그 시대를 초월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로
두스 섬이라는 비유가 성립하는 것이다.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70 001 @PDF_IN
내 자식놈은 야간학교 고학생이올시다
김영호올시다
구공탄 배달 김위술의 아들 김영호올시다
마산 남성동 파출소 찾아가
어느 놈이 내 자식 때려죽였느냐
어느 놈이 내 자식 죽였느냐고
부르짖는 내 마누라마저
수갑 채워 형무소 보낸 경찰이 대한민국 경찰이올시다
내 자식 총 맞은 뼈 그대로
땅에 묻었습니다
마누라는 콩밥 먹고 나왔습니다
정신 나가버렸습니다
나는 구공탄 리어카 끌고
오르막길 오르고
내리막길 내려갑니다
영호야
영호야
영호야
속으로 불러봅니다
소리내어 불러봅니다
오늘 빈 리어카하고 나하고 비탈길 굴러버렸습니다 엉엉 울었습니다
나는 자식 잃은 막일꾼이올시다
-「김위술」(21)
고은의『만인보』와 근대적 주체의 문제 15
- 71 -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71 001 @PDF_IN
이 작품은 4·19 혁명 당시 마산사태의 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 구공탄
을 배달하며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이 혁명의 와중에서 아들을 잃어버린다
는 이야기에서 시인은 김위술이란 사람의 삶에 주목한다. 가장 평범한 사
람들이 역사적 상황에 의해 자기의식의 단계로 이행하는 모습을 통해서
김위술 개인의 삶이 더 이상 자기 안에 머물고 마는 즉자적 생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김위술에게 죽은 아들은 현실 속에서 자기자신을 타
자로인식하게하는계기를만든다『. 만인보』도처에서확인할수있는것
은 이와같이 자기의 삶을 역사적 공간 속에서 타자화하는 일이야말로 근
대적 삶의 전면적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18세기 조선 실학의 실마리는
자아이다
그런데 조선 실학
박제가는
타아이다
우리나라 땅이 중국과 가깝고
우리나라 음성이 중국과 같도다
그러매 우리말을 다 내어버린다 할지라도
안될 것 없도다
버린 뒤에라야
오랑캐라는 수치를 면하고
몇천리 땅이 두루
주·한·당·송의 기풍을 가질 것이로다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16 한국문예창작 제8권 제3호(통권 제17호)
- 72 -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72 001 @PDF_IN
이런 타아를 전승하여 마지않으니
1930년 이광수는
앞장서서
내 이름
내 넋 다 바꿔
일본인이 되자 하였다
1945년 10월
왕년의 수원 애국반장 키무라 마사히꼬
본명의 박우회로 돌아갔다가
미 군정청 민사처 간부로 되었다
민사처 조사과장
에드먼드 존 대위 이름 따다
에드먼드 팍이 되었다
아흐 자아는 허울이고
타아는 본색이로다
이제 알겠느냐 이 불쌍한 자아들아
-「박제가」(25)
자기동일성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시인의 통찰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다. 박제가의 실학이 사실은 타자에 대한 동경과 신뢰를 바탕
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이광수 역시 자신을 버리고 타자와 동일시했
던 과오를 저질렀다고 시인은 비판하고 있다. 개별적인 작품에 드러난 시
인의 비판은 일차적으로 타당하지만 사실상 그러한 주체들의 삶이 실은
타자의 자기화 과정에서 비롯된 오류이면서 동시에 역사의 자기발견이라
고은의『만인보』와 근대적 주체의 문제 17
- 73 -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73 001 @PDF_IN
는 점에서 고은은 자신도 모르게『만인보』의 의미를 구축하고 있는 셈이
다.
개별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의 삶이
사실은 보편적이며 동시에 타자의 이해를 동반하는 것임을 시집『만인보』
는 증명하고 있다. 고통받고 힘겨운 삶으로서 일상이 사회적 관계의 산물
이라는 점은 자기의식의 역사적 발현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사적 정황에 대한 개개인의 각성과정을 통해 한국 근대
사의 전체를 드러내려 했다는 점에서『만인보』의 문제적 의미가 드러난
것이다.
5. 결론-근대적 주체와‘개인의 발견’
한국의 근대화가 성공을 거두었는가 하는 점은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
시민사회의 가치를 보전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과 병행한다고 볼 수 있다.
시민사회는 개인의 자유가 타인의 존재를 승인하고 인정한 이후에 성립하
는 소통의 공간이다. 이러한 과정은 주체들의 욕망이 공동체와 자기의식
의 상관성을 이해하는 일종의 욕망의 통어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
에 시민사회의 가치를 구현하는 일은 여전히 미완의 기획(project)이며, 지
속적인 관심과 비판을 통해 수행되어야 하는 과정에 놓인다고 할 수 있다.
고은의『만인보』가 지니는 미덕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수
많은 문제와 갈등, 고통과 좌절을 한 사람 한 사람의 인물을 통해 구현해
보고자 한 데 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단순히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별
자가 아니라, 타자와의 끊임없는 상호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가는 특수자라는 점이『만인보』전편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런 의미에
서 시집은 한국적 시민사회의 형성과정을 그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8 한국문예창작 제8권 제3호(통권 제17호)
- 74 -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74 001 @PDF_IN
시민사회에 있어서는, 각인(各人)은 자기 스스로가 목적인 것이며, 타자는 일
체 자기에 있어서 무(無)이다. 그렇지만 타자(他者)와의 관계에 들어감이 없이
는 각인(各人)은 자기의 목적의 범위를 달성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 타자라
함은 따라서 특수자의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이다.38
시민사회는 개인들이 주체가 되기 위하여 타자를 욕망하는 행위, 즉 상
호승인과 인정투쟁이 이루어지는 장(場)이다. 개인의 자유는 타인으로부
터 침해받지 않을 자유를 의미하지만, 사실상 그 자유는 타인의 존재, 타
인의 승인으로부터 가능한 것이다. 고은이 살았던 전후 한국사회의 다양
한 모순들, 한국전쟁, 4·19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 등이 시집 전편을 통
하여 개별적인 삶과 인물로 재생되는 과정을 목격하는 일은 한국적 시민
사회의 자기전개 과정을 보는 일이고, 공동체의 가치와 윤리를 강조했던
한국적 상황과 파행적이고 불행했던 역사의 과정을 동시에 고려할 때 온
전한 주체, 시민사회의 가치를 담지하는 개인은 문학사에서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갈망했던 주제이자 인물이었다. 이런 이미에서 고은의『만인보』
는전후한국의보편적삶의현장에대한서사적그림이자,‘ 개인의발견’
이라는 문학사적 의미망을 획득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고은의『만인보』와 근대적 주체의 문제 19
- 75 -
38F, 헤겔, 이동춘역,『 법의철학』, 박영사, 1987, p.59.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75 001 @PDF_IN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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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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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한국문예창작 제8권 제3호(통권 제17호)
- 76 -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76 001 @PDF_IN
Abstract
A Study of Ko Un’s Ten Thousand Lives and the
Problem in Modern Subject
Han Won Kyun
Ko Un’s Ten Thousand Lives is a collection of poems comprised of
26 volumes in total, which was first published in 1986. In fact, Ten
Thousand Lives is unprecedented in the history of Korean poetic
literature with the largest volumes among the anthology of poems
written under a single theme. Ten Thousand Lives was written in the
process of remembering the characters that a writer met when he was
detained in Special Cell #7 at an army prison charged with
‘Conspiracy of Rebellion and Violation of the Martial Law’during
the military coup in 1980.
What matters is the interest in Ten Thousand Lives itself. At the
same time, it is important to bring a new point of view, exceeding the
limitation of the previous studies. Characters in various social classes
appear in Ten Thousand Lives including neighbors encountered in
private space and time, those who have existed in the history and in
reality and transcendent and religious beings. In fact, the characters in
Ten Thousand Lives are specific and living beings, forming a single
community and public ontology. Therefore, as a collection of
sequential poems, which has stated the process of being the subject,
고은의『만인보』와 근대적 주체의 문제 21
- 77 -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77 001 @PDF_IN
Ten Thousand Lives can be understood as modern subjects that
vividly describe their modern life styles.
A question of whether or not Korean modernization has been
successful is another question on how much Korean society has
preserved the value of civil society. Therefore, the implementation of
the value of civil society is still an incomplete project and needs to be
carried out through continued interest and criticism. The virtue of Ko
Un’s Ten Thousand Lives lies in an attempt to describe the various
problems, conflicts, pain and frustrations that occurred during Korean
modernization through each character. Ten Thousand Lives sees that
an individual is not an isolated being but a subject that seeks for its
identity in the process of continuous interrelationship with others.
Therefore, Ten Thousand Lives is significant in that it has illustrated
the forming process of a Korean civil society.
A civil society is the place where an individual wants others to
become a leading entity. In other words, it is the space in which
mutual recognition and recognition struggle take place. Individual
freedom means the freedom free from any disturbance from others.
However, this freedom can exist with the existence of others. It is a
process of the self? evolution of Korean civil society to witness a
variety of social conflicts such as Korean War, the April Nineteenth
Uprising and May 16 Military Coup being restored through an
individual life.
Considering the unique characteristics of a Korean society in which
public value and ethics were emphasized and its destructive and sad
history, the individual who has the true value of civil society was the
22 한국문예창작 제8권 제3호(통권 제17호)
- 78 -
03한원균 2010.1.7 12:22 PM 페이지78 001 @PDF_IN
character that has been continuously pursued in Korean literature.
Therefore, it appears that Ko Un’s Ten Thousand Lives is a narrative
picture on the common lifestyle before and after the Korean War and
piece of work which is significant in the history of Korean literature
with the‘ Discovery of Individual.’
● 주제어: 고은(Ko Un), 만인보(Ten Thousand Lives), 헤겔(Hegel), 인정투
쟁(struggle for recognition), 자기의식(self consciousness), 근대적 주체
(modern subject), 시민사회(civil society)
고은의『만인보』와 근대적 주체의 문제 23
- 79 -
● 논문접수일 : 2009. 11. 10.
● 심사일 : 2009. 11. 30.
● 게재확정일 : 2009.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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