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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의 한국인들

굴어당 2010. 6. 24. 10:30

티벳(TIBET)

티벳은 히말리야 북부,남쪽으로는 히말리야산맥, 서쪽으로는 카라코람산맥, 북쪽으로는 쿤룬산맥에 둘러쌓인 불교국가이다. 해발 3500m인 땅덩어리가 한국땅의 약 12배, 중국땅의 약 1/4에 걸쳐 펼쳐진 그야말로 황량한 고원이다. 바다가 없으니 물고기도 없고 헐벗고 눈덮인 산들이니 야크나 양 외엔 짐승도 없으며 벼가 자라지도 않는 척박한 땅이라 보리농사가 고작인 땅. 가도가도 끝이 없는 황야가 삶의 터전인 민족에게 욕심을 버리라는 종교만큼 자연발생적인 것이 또 있을까.
하늘에서 밧줄을 타고 중앙티벳의 얄룽계곡으로 내려와 티벳왕국의 왕이 되었다는 신화의 얄룽왕족 초대왕 넨트리 챔포때부터 32대 왕 남리 송첸때인 6세기 이전까지 티벳에는 뵌 < BÖN>이라는 토속신앙이 있었다. 티벳탄들은 자신들의 티벳 땅을 뵈 라고 부른다.
그러다 33대 왕 송첸 캄포는 티벳고원의 여러 부족을 통일시키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한편 당나라의 웬친공주 그리고 네팔의 브리쿠티공주와 정략결혼을 하며 외교를 강화했는데 바로 이때 티벳에 불교가 뿌리를 내리게 됐다. 웬칭공주와 브리쿠티 공주가 모두 불교도였다. 티벳 최고의 불교성지인 조캉사원과 라모체신전이 각각 웬칭공주와 브리쿠티공주에 의해 최초로 탄생됐고 또 그것이 티벳불교의 계기가 됐다. 그 후 여러 세기에 걸쳐 인도로부터 고승을 모셔오거나 승려들을 인도로 보내기도 하면서 또 토속신앙인 뵌과 충돌도 접목하면서 티벳불교는 독특한 형태로 뿌리를 내리게 됐다.
<착췌>라고 부르는 오체투지의 절 방식도 <린포체>라고 부르는 환생한 고승도 티벳불교에만 볼수있는 독특한 형태이다.
무엇보다 독특한 것은 티벳불교가 바로 밀교라는 것. 밀교란 완전한 성의 합일을 통해 우주의 진리를 깨닫는 비밀불교의 준말이다.
티벳을 통일한 송첸캄포와 더불어 티벳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인물이 총카파.
티벳의 보통 남자들은 7살때 <여자는 10살때> 트라파 <공부하는 학생 승려>가 돼 20여년 정도를 오직 불교공부만 하며 논리학, 수사학, 불경, 종교심리학 등의 엄격한 시험을 통과해 서품식을 거친 후 비로소 라마로 인정 받는다. 총카파가 서품식을 받은 나이는 고작 세살인데 한마디로 총카파는 티벳 최고의 천재.
작가와 라마로 명성이 높았던 총카파는 1417년 티벳의 중심부인 우 지방에 간덴사원을 건축한 후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적극적인 포교로 티벳의 번영을 누리자는 총카파의 불교철학은 당시 뵌교, 닝마파, 카규파, 샤캬파 등의 종파와는 다른 갤룩파를 탄생시키며 번영을 누렸다.
총카파의 제자들은 총카파 사후에도 계속 드레풍사원, 세라사원, 타쉴훈포사원을 건축하고 총카파의 가르침을 포교했고 특히 총카파의 수제자인 겐덴 드루프의 활동이 영적으로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바로 겐덴 드루프때부터 지금의 14대 달라이 라마까지의 환생이 시작됐기 때문. 겐덴 드루프는 죽기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환생을 예언하면서 징표를 남겼었다. 그 징표가 드레풍사원의 수장이던 겐덴 갸초에게 발견됨으로써 겐덴 갸초가 겐덴 드루프의 환생임이 증명됐다.. 또 겐덴 가쵸 사후 겐덴 가쵸 의 환생으로 밝혀진 소남 갸초는 당시 몽골의 황제 알탄칸에 의해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칸의 환생임도 밝혀져 이때 알탄칸으로부터 <달라이 DALAI>라는 칭호를 부여받게 됐다.
몽골말인 <달라이>는 <지혜의 바다>라는 뜻.
소남 갸초는 이때 자신과 영적으로 연결돼 있는 겐덴 드루프를 1대 달라이 라마, 겐덴 갸초를 2대 달라이 라마 그리고 자신은 3대 달라이 라마로 칭호를 부여했다. 이것이 계속 환생에 환생을 거듭해 지금의 14대 달라이 라마까지 맥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환생 라마를 <린포체(RINPOCHE)>라고 부르는데 티벳불교에서 티벳불교의 수호신인 <아발로키테스바라:천수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기는 14명의 달라이 라마만 환생한 것이 아니라 달라이 라마와 서로 존중하는 지도자 관계로 지금까지 11명의 판첸 라마<위대한 철학자>도 환생이 확인 되었다.
이 모든 환생라마들을 통틀어 <투르크 (TURK)> 라고 부른다.
왕도 아니고 대통령도 수상도 아닌 전생이 확인된 불교 지도자가 나라를 통치하는 독특한 불교 국가인 것이다. 욕심을 안고는 살 수 없는 그 고원도 욕심많은 강대국들에 의해 여러 차례 짓밟힌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몽골과 청나라와 영국에 차례로 짓밟히던 끝에 1950년 10월 중국인민군 3만여 명의 침략으로 120여만 티벳탄들이 살해당하면서 결국 나라를 뺏기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때도 폭탄 한발 떨어진 일 없고 단 한명의 일본군도 발을 디딘 적이 없는 고원땅이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독립정부를 세우고 있을 때 비운의 20세기 식민지가 되고 만 것.
중국은 <그린 티베탄: 중국 앞잡이 노릇을 하던 티베탄을 일컫는 말>들을 앞세워 티벳에 있던 6,254개의 모든 사원을 파괴했고 승려들에게 결혼을 강요했으며 보리대신 벼와 밀을 심게 하는 실수로 티베탄들을 굶어죽게 만들었다. 또한 인도로 망명한 14대 달라이 라마를 테베탄들로 하여금 배반자라고 부르게 만드는 정책으로 티베탄들의 자존심을 말살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티베탄보다 더 많은 600여만의 중국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경제까지 장악케 함으로써 티베탄들을 중국인의 노동자로 전락케 했다. 몽골을 지배했을 때는 매독에 걸린 중국 창녀 3천여 명을 몽골땅에 풀어놓아 몽골인들의 씨를 아예 말려 버리려고 했던 역사도 있는 중국이다.
1959년 3월 티벳의 수도 라싸에서 벌어진 라싸항쟁을 비롯 몇차례의 산발적인 저항 운동이 있었으나 남은 것은 길거리에 쌓인 주검들뿐, 이제 세계에 티벳이라는 불교국가는 사라진지 50년이 넘는다. 중화인민공화국 서장자치구일 뿐.
20세기에 19세기의 야만적인 방법으로 지구에서 사라진 유일한 나라 티벳.
인도 북부의 다람살라에 티벳망명정부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현 14대 달라이 라마가 티벳땅에 250여만 중국전체의 500여만 티벳탄들의 유일한 희망이지만 자신들의 조국을 짓밟은 중국인들을 <갬미: 중국놈>라고 부르면서도 티벳탄들끼리 대화할 때도 티벳말 중간 중간 중국말을 섞어 쓰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거나 티베탄 처녀들이 돈 많은 중국남자들과 결혼해 중국으로 가서 살기를 희망하는 풍조는 나라에 이어 이미 민족의 혼마저 사라진 듯 보여 안타깝다. 아마 오늘도 라싸에서 티베탄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이며 중국인이 운영하는 <카이라 나이트클럽>에는 중국인사장에게 받은 월급 800위안 <약 12만원>으로 중국댄스음악에 맞춰 춤을 즐기고 있는 티벳탄 젊은이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중국인들이 티벳을 통치한 이후 많은 건물들과 도로들을 건설해 경제를 살려냈으며 황야의 오지 구석구석에도 전기를 끌어들여 중국방송을 볼 수 있는 문화생활을 누리게 했고 또 물을 끌어들여 농업을 얼마나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세계를 향해 자랑하고 있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티벳의 한국 사람들
옛 티벳의 수도이자 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 서장자치구의 구도인 라싸에는 11가구 20여명의 한국사람들이 살고 있다.
라싸인구 20여만. 중국인은 약 30%.
한국기업의 주재원이나 일반사업자는 한명도 없고 20여명의 그들 모두 100% 선교사.
초등학생 이하의 자녀들과 함께 사는 가정이 4가정. 조선족 여자와 동거하고 있는 선교사 1가정을 빼면 6가정이 남는데 그 6가정이 모두 독신여선교사들인것도 눈길을 끌었다.
이처럼 일반인들의 거주가 전무한 이유는 라싸가 <너무 먼 땅>인데다가 겨울에는 길마저 너무 위험해져 비행기외에는 오도가도 못하는 땅이기 때문. 라싸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100% 중국 내륙에서 공급받고 있는데 그 거리가 멀어 물류비용이 많이 들고 그러다보니 물가 또한 내륙보다 비싸질 수 밖에 없다. 평균 30% 정도가 비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중국 어디에도 있는 맥도널드와 KFC가 라싸에는 없다.
게다가 평균 800위안 <약12만원>정도의 월급으로 먹고사는 티베탄들과 내륙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 라싸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테이블 4~5개의 소규모 식당이나 2~3평짜리 상점을 하면서 목에 쓸데없는 힘이나 주고 사는 중국인들이 대부분인 라싸에서는 삶의 경제성마저 없어 보인다.
또 해발 3,650m 고원인 까닭에 숨쉬기도 자유롭지 못한 생활의 불편함도 이유가 됐을 것이다. 오죽하면 중국땅에서 한국사람들이 살고있는 모든 도시마다 그 한국사람들과 인연을 만들기 위해 찾아드는 조선족마저 라싸에는 5명밖엔 없을 정도인 것만 봐도 라싸의 척박함을 짐작하게 된다. 압력밥솥이 아니면 밥도 설 익고 뛰어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며 1분만 걸음을 빨리해도 숨이 차올라 걸음을 멈추어야 하는 땅..
아직은 <기도중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정착하고 있다는 선교사들만 필자는 라싸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중국 취재때 느낀 일이지만 종교활동이 금지된 사회주의체제인 까닭에 라싸의 선교사들 역시 중국 내륙의 선교사들처럼 인터뷰를 몹시 꺼려했다. 사진 찰영은 물론 자신의 신분조차 알려지는걸 원치 않아 애를 먹었는데 그 만큼 종교적으로도 척박한 땅이다.
라싸 한국선교사들의 선교대상은 중국인이 아닌 티벳탄. 그러니 모든 선교사들은 불교도들의 땅인 라싸로 이주한 후 일단 라싸의 유일한 종합대인 티벳대학교 부설 티벳어강좌의 학생으로 등록해 티벳어부터 배운다고 한다. 과정은 2년, 학비는 6개월에 천불.
이때는 기숙사의 방을 얻어 생활할 수 있는데 2년후에는 사업비자<현지인과 합작으로 법인체를 설립한 외국인에 한해 주어지는 사업비자인 Z비자>로 들어온 외국인은 라싸내의 외국인 거주지역에 집을 사거나 세 얻을 수 있지만 학생 비자<현지말을 공부하면서 사업을 준비하려는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F비자>로 들어온 외국선교사들은 반드시 외국인이 머물수 있는 자격이 있는 호텔에서만 거주해야 한다. 그 호텔비용은 한달에 2천위안 정도 <약 30만원>. 라싸에서 30평 정도되는 웬만한 아파트 월임대료가 500위안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무척 비싼 거주비용을 지불하도록 만든 것이다.

필자가 만났던 박모씨 <63년생>와 오모씨<70년생>는 라싸에 정착한지 5년되는 선교사들로 박씨는 미혼의 노처녀였고 오씨는 부인과 두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여기 있는 한국 선교사들이 거의 비슷해요. 미취학 아이들을 모아 교육선교를 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거의 1:1선교를 하고 있지요. 티벳말을 제대로 공부할 동안은 성실하지만 가난한 학생을 한명 선정해 자주 만나 복음을 전하면서 학비를 도와주는 형식인거죠. 처음부터 선교사업을 크게 벌였다가는 쫒겨나기 십상이거든요. 그러다 티벳어 2년과정을 마치면 기숙사를 떠나 각자 싼 호텔방을 얻어 밥을 해 먹으면서 본격적인 선교사업을 실천하는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사실 저희 선교사들이야 무슨 돈이 있습니까. 하느님말씀을 많은 티벳탄들에게 전하고 싶어도 거주 제한, 비자연기 문제등 애로 사항이 한둘이 아니죠. 저희 두 사람 모두 지금 만5년째인데도 아직 1:1 선교에만 치중하고 있죠. 아이들이 저희들의 도움으로 너무 의존적이 성격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는데 그럴때마다 “내가 지금 1:1 선교라도 제대로 하고 있는건가” 싶어 하느님 앞에 부끄러울 때가 많지요.>
박씨는 앞으로 한국식당으로, 오씨는 컴퓨터학원으로 라싸에서 선교사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한다.
라싸에 살고 있는 한국선교사들은 자주 만나 서로의 호텔방을 오가며 함께 김치찌게도 해 먹으며 외로움도 나누고 있는데 그 자리에 끼지 못하는 유일한 선교사가 한명 있단다.
한국선교사 사이에도, 한국여행자 사이에도 그에 관해 이런 저런 말이 많았다.
인테넷에서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과 옹호하는 사람들끼리 법정싸움까지 간다는 말도 들었다.
길거리에서 한국말만 들어도 반가워지는 라싸.
같은 한국사람들끼리 아름다워지기에 충분히 먼 땅 아닌가.
외국인이 사업으로 성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라싸에서 잘나가고 있는 한국사람도 한명 있다.
연변에 본점을 두고 중국 3성지역에 18개의 가맹점을 갖고 있는 조지아 햄버거의 대표 김기택 씨. 김씨는 주로 연변에 살면서 회사일을 보고 있는 관계로 조지아 햄버거 라싸점의 조선족 매니저 김광욱 씨<79년생>를 만났다. 김씨는 ㈜대우의 해외개발부에서 오래 일을 하다 99년에 중국에서 조지아 햄버거로 독립했다고 한다.
김씨가 개발한 조지아 햄버거라는 브랜드에 중국인들이 투자를 해 가맹점을 열면 김씨가 조지아 햄버거의 모든 노하우를 제공해주는 프랜차이즈 사업이다. 그동안 주로 동북3성을 무대로 활발하게 사업을 하다 2003년 12월에 투자자를 유치해 라싸점을 열었는데 5개월 후 이 라싸점이 본점포함 총 19개의 가맹점들중 매출 1위를 기록하게 됐다고 한다.
김씨나 중국인투자자 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이변이란다.
<햄버거라는걸 처음 먹어보는 티벳상류층이나 햄버거맛을 기억하고 있는 한족들이 주요 손님들입니다. 맥도날드햄버거는 투자비용이 비싸고 소비자가격을 높게 책정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라싸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김사장님이 과감히 그 허를 찌른게 딱 들어맞은 겁니다. 또 라싸에 사는 한족들의 30% 정도는 쓰촨성사람들인데 이 사람들 입맛에 햄버거가 잘 맞는것도 한몫했죠>
불고기버거의 경우 베이징에서는 9위안이지만 라싸에서는 12위안인데 그 차액이 바로 물류비라고 한다.
투자액은 총 800만위안<약12억8천만원>. 월 평균매출 30~40만위안<약4천8백만원~6천4백만원>. 순수입 매출의 약 40%. 라싸 백화점 바로 옆의 라백 쇼핑센터 1층에 위치한 조지아 햄버거의 월임대료는 비밀이라고 한다. 조선족 김씨가 하는 일은 가맹점에 모든 재료들을 공급해주며 기술을 지도해주고 직원들을 관리하는 일.
직원들 월급 800위안 김씨 월급 2,500위안.
라싸에서 한족들과 티베탄들의 관계는 어떤가?
<한족들은 내륙에서 갖가지 경험들을 많이 해봐서 좀처럼 화를 내지않고 둥글게 넘어가거든요. 근데 장즈<티베탄>들은 그렇지 못하다보니 생각나는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마디로 충돌적입니다. 머리에 빨갛거나 까만 머리띠를 묶고 다니는 사람들 보셨죠? 그게 <쩝슈>라는건데 그 쩝슈를 맨 사람들이 바로 캄바족입니다. 그 캄바족들은 한 30~40cm쯤 되는 칼을 차고 다닙니다. 장사꾼들과 흥정을 하다 안되면 그냥 돌아서는 경우가 많잖습니까? 그게 잘못된 일도 아니잖아요.. 근데 캄바족 같은 경우에는 그럴 때 칼을 빼들고 덤빈다니까요. 그렇다고 찌를 배짱이 있지도 않아요.. 그냥 겁만 주려고 그러는거지요. 그런거에 겁먹을 한족들 같으면 여기 있지도 못할겁니다. 그러니까 사실 한족들이 장즈를 무시하지요. 우리 조선족들이 한국에 가면 2등국민으로 무시당하는 게 사실이잖습니까… 라싸에서는 한족들이 장즈를 그렇게 생각하지요. 무식하다고.. >
김씨는 인터뷰가 끝난 후 조선족 정명철 씨<69년생>가 운영하는 <한식 식당>으로 필자를 데려가 정씨를 소개시켜 주었으나 정씨는 한사코 인터뷰를 고사했다. 흑룡강성 출신인 정씨는 고향에서 하는 일마다 잘 안풀려 고민끝에 3년전에 라싸로 이주해 식당을 차렸단다. 처음엔 한국사람들을 겨냥하고 <한국식당>으로 간판을 달았는데 라싸당국에서 <한국>이란 말이 들어가면 안된다고 해 <한식 식당>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100여평 되어보이는 2층건물을 월세 6천위안에 임대해 1층은 식당 2층은 살림집으로 꾸미고 <그냥 하루세끼 밥 굶지않고 살고있다>는 정씨는 <라싸에 이런 식당하나 만드는데도 10만위안 <약 166만원>이나 들었다고 한다.
라싸의 여행자거리 바콜에서도 한글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음식을 파는 현지식당에 반가운 한글이 씌여있다. 티벳까페와 호라이즌레스토랑에 가면 한국음식을 파는데 김치찌개 15위안<약 2400원> 삼겹살 38위안<약6080원>으로 일반 한족식당에서 5위안~10위안 정도면 웬만하게 한끼를 먹을수 있는것에 비해 값이 비쌌다. 중국인들이 티벳땅에서 한국음식을 만들어 팔면서 그 값은 한국식으로 받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라싸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조쉬아>라는 한글간판이 걸려있는 옷가게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옷가게의 주인은 한국사람이 아니라 한족처녀.
그 옷가게에 있는 옷들도 모두 중국옷들인데도 한글간판을 걸어놓은 이유..
<한글간판을 걸어놓으면 고급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라싸에 살고있는 한국사람은 선교사들뿐 이지만 한국이라는 이미지와 한국상품의 부가가치는 중국내륙과 다를 것 없어 보였다.

서부티벳 가는 길…
라싸까지 비행기로 가는 길은 간단하다. 중국 쳉두에서 비행기를 타면 2시간 후 라싸 공가 공항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육로로 라싸까지 가는 길은 세군데. 모두 멀고도 험한 길로 유명하다. 또 매년 11월~4월까지는 길이 얼거나 눈 때문에 페쇄된다. 평균고도가 3500m인 티벳고원을 여행하는 일은 그만큼 쉽지가 않다. 가장 위험한 길은 그 유명한 천장공로. 꺼얼무에서 라싸까지 해발 4000m의 1115km 길로 중국내에서도 가장 위험한 길로 통한다. 해마다 그 길에서 사람죽은 뉴스가 단골뉴스일 정도.
중국을 여행하다 천장공로를 타고 라싸로 들어온 후 네팔, 인도를 여행하려고 할 때나 라싸에서 서부티벳 즉 알리까지 갔다가 알리에서 신장공로를 타고 우루무치쪽으로 여행하려는 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길이다. 해마다 쿤룬산맥의 높고 낮은 산자락에서 버스만한 바위부터 세발자전거만한 바위들까지 아슬아슬하게 때를 기다리고 있다. 굴러 떨어지는...
꺼얼무에서 라싸까지 가는 교통편은 침대버스,택시,트럭 세종류…침대버스와 택시는 약 22시간, 트럭은 약 30시간 걸린다. 이 세가지 교통편 모두 500위안<약8만원 > 정도의 비싼 요금을 받고 있는데 꺼얼무의 기사들끼리 서로 굳세게 단합해 요금을 절대 깍아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중국을 여행하다 서북부 우루무치에서 라싸로 들어와 네팔,인도로 여행하려는 여행자들은 <신장공로>를 이용하게 된다. 서부티벳의 고원을 횡단해 라싸까지 들어가는 신장공로는 필자가 거꾸로 라싸부터 카슈카르까지 여행했던 길이므로 뒤에 자세히 소개하기로한다.
<우정공로>는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라싸로 들어가려는 여행자들이 이용하게 된다. 중국과 네팔 두나라의 좋은 관계를 기념해 붙여진 길 이름인데 두나라 국경사이에 있는 다리이름도 우정의 다리이다.
카트만두에서 라싸로 여행하려면 개인여행은 아직 허가되지 않고 있음으로 우선 카트만두에있는 현지여행사에 여행신청을 해야한다. 그러면 현지여행사에서 여행신청자들을 모아 그룹을 만든 후 현지가이드의 인솔 아래 버스로 라싸까지 단체로 이동하게 된다. 소요시간은 4박 5일.
네팔국경인 코다리까지는 네팔가이드가 양국 국경에서 출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서부터는 티벳가이드가 안내를 해준다. 환전은 중국국경쪽이 좀 유리하다.
첫날은 장무까지, 둘째날은 라체까지, 셋째날은 시가체까지, 넷째날은 장스까지 그리고 다음날 10시간을 달려 라싸에 도착한다.
장무-라체 구간이 가장 지치는데 버스타는 시간만 13시간 정도인데다가 중간에 5500m나 되는 황야도 있어 고소증을 조심해야 한다. 고소증예방에 특별한 약이나 방법은 아직 검증된 바 없지만 그래도 물이든 음식이든 뭐든지 미련스럽도록 많이 먹어두는 것이 좋단다.
그리고 나서는 버스를 타기 전 반드시 꼭 무슨 일이 있어도 화장실 다녀오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안그러면 멀쩡하게 잘 달리고 있는 버스를 갑자기 세워놓은 후 버스안의 여행자들이 킥킥대며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거칠 것 없는 황야의 한켠에 쪼그리고 앉아야 하는 색다른 경험을 겪게 될 수도 있다. 특히 여자여행자들은 황야의 화장실에 대비해 긴치마나 허리에 두를수 있는 긴 천을 준비하면 버스안에 있는 세계 각국의 남자 여행자들에게 <지혜로운 한국여성>으로 인정받아 프로포즈를 엄청 받게될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비자 비용 24불은 별도. 중국비자는 여권에 찍어주지 않고 A4용지 크기의 종이에 빨간스템프로 찍어주는데 카트만두의 현지여행사에서는 여행자들에게 복사본을 나누어준다.
이 복사본으로 일단 국경을 통과한 후 장무에 있는 장무이민국에서 다시한번 긴 줄을 서서 진본을 받게 된다. 이때 받은 A4용지 중국비자를 만일 잃어버리게 된다면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중국비자는 보통 15일짜리를 받는데 기왕이면 25일 짜리를 받아두는 것이 현명하다. 더러 카트만두의 현지여행사들에서 <티벳여행 허가>가 필요하다며 별도의 허가비용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으나 카트만두에서 라싸까지는 중국비자만 있으면 된다. <티벳여행 허가>는 라싸에서 서부티벳으로 여행할때만 필요한 것이니 현혹되지 말 것. 카트만두의 현지여행사들에서는 카트만두에서 라싸까지 4박5일동안 교통편과 숙소만 제공함으로 식사는 각자 알아서 사먹어야 한다. 필자의 경우 장무의 한 현지식당에서 자장면이 메뉴에 있길래 주문했더니 비벼먹는 자장면이 아니라 짬뽕처럼 국물이 가득한 물자장면이 앞에 놓여졌었다. 그것이 그런대로 맛은 우리의 자장면과 비슷했다.
라싸에서 3-5위안이면 국수 한그릇을 사 먹을 수 있지만 라싸까지 거치는 4박 5일 동안의 도시들에서는 음식값이 2-3배는 비싸니 배낭여행자들은 별도로 라면이나 빵 등의 식량을 준비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버스가 일단 라싸의 바콜거리에 도착하고 나면 카트만두의 현지여행사의 임무는 그걸로 끝이 난다.
한국여행자들은 주로 야크호텔로, 일본여행자들도 야크호텔 또는 스노우랜드호텔로 서양여행자들은 비락숄호텔이나 펜톡게스트하우스로 각각 흩어지는데 모두 도미토리 요금은 20위안 정도이고 시설도 깨끗한 편.
한글인터넷은 야크호텔이나 펜톡게스트하우스에서 가능하고 요금은 시간당 2위안.
15일짜리 중국비자로 라싸에 돌아온 여행자들은 사실 카트만두로 돌아가기도 바쁘다.
카트만두에서 라싸까지 왕복 10일이 걸리니 고작 3-4일 동안 라싸관광밖엔 할 수가 없는 일정. 또 라싸의 명물인 옛 왕궁 포탈라와 최고의 불교사원인 조캉사원 앞에서 망설이기도 한다. 외국인 입장료가 각각 100위안과 70위안으로 라싸 구정부에서 아예 작정하고 외국인에게 턱없이 비싼 입장료를 물도록 했기 때문. 라싸에서 카트만두로 돌아갈 경우 라싸의 현지여행사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트럭을 히치하이킹 한 후 운전기사와 요금을 협상해 5일 걸리는 길을 3일만에 돌아간 여행자들도 있으니 참고할 것.
라싸에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한동안 고민에 빠지게 된다.
티벳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서부티벳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15일짜리 중국비자부터 160위안을주고 한달을 연장한 후 또 서부티벳 여행허가증을 150위안을 주고 받아야 한다. 현지여행사들에서 개인여행자들끼리 모아 그룹으로 만들어 그 일을 대행해주고 있다.
비자나 허가증없이 서부티벳으로 떠났다가는 중간중간에 있는 체크포스트에 걸려 곤욕을 치를 수도 있다. 티벳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 불교와 힌두교의 성지로 유명한 성산 카일리쉬이다. 라싸에서 카일라쉬를 여행하는 방법은 세가지.
현지여행사들은 100% 모두 기사 딸린 랜드크루저를 권하고 있다.
4명을 그룹으로 만들어 랜드크루저 랜트 비용만 1300~1500불 정도를 지불해야 한다.
숙식은 각자 해결해야 하며 카일라쉬 트래킹 2일 포함 왕복 12일이 소요된다.
사실 이 방법이 가장 안전하긴 하지만 문제는 그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두번째 방법으로 히치하이킹도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시라… 라싸에서 카일리쉬까지는 약 1300km. 하루종일 차를 타고가도 마을 1-2개 정도나 만날 수 있는 막막하기만 한 황야와 마을을 만나지 못하면 꼼짝없이 황야에서 굶어가며 해야 할 노숙.. 오직 카일리쉬나 그 근처까지 가는 트럭을 만나는 행운 하나에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모험을…
작년에 일본청년 한명이 히치하이킹으로 서부티벳으로 떠났다가 실종된 사건까지 있었으니 대분분의 여행자들이 라싸에서 한동안 고민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랜드크루저를 타자니 돈이 많이 들고 히치하이킹을 하자니 자신이 없고 그렇다고 라싸에서의 히치하이킹이 절대 공짜가 아니다. 트럭기사들이 보통 300위안 정도를 요구하고 그것도 서부티벳 여행허가증이 없는 여행자들은 태워주지도 않는다.
체크포스트를 통과할 때 군인들의 검문에 걸리면 번거로운 일들이 생길 수도 있다.
라싸에서 카일라쉬나 알리, 카슈가르 등 서부티벳을 여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버스 여행이다. 많은 여행자들이 이 버스를 알지 못해 랜드크루저와 히치하이킹 사이에서 고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모든 현지여행사들이 이 버스를 알면서도 여행자들에게 비싼 랜드크루저를 권하고 있는 것이다.
<阿 里 販 事 處>
이곳이 알리까지 가는 버스표를 파는 사무실이다. 전화번호는 핸드폰 13618909388, 사무실 0891-6888929. 담당자는 장 폴<중국이름 장 홍파>이라는 중국남자인데 영어를 잘하니 궁금한 모든 것을 물어 볼 수 있다. 라싸백화점 앞에서 503번버스<요금 2위안>를 타면 20분 정도 걸린다. 내릴 장소를 묻고 싶어도 중국인들과 서로 통하지 않는 말들만 알고있는 경우가 99.9%니까 종이에 한문으로 미리 써두는 것이 좋다.
알리까지 가는 버스는 침대가 45cm X 165cm 정도 되는 비좁은 침대버스이고 요금은 750위안. 2박3일 약 75시간 동안 화장실과 식사시간 빼곤 줄곧 서부티벳의 황야를 달린다.
이 버스를 이용할 경우 서부티벳 여행허가증은 없어도 되는 이점이 있는데 그 이유는 버스가 허가증없는 여행자들을 위해 적절한 조치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
라싸에서 알리까지는 1650km이고 체크포스트는 라체와 기저 두 곳.
알리 버스표를 산 여행자들은 우선 첫번째 체크포스트가 있는 라체에서 이 버스를 타는 것으로 검문을 피하게 된다. 라싸에서 알리까지 직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단 라싸의 비락숄 게스트하우스 건너편 길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는 시가체행 버스를 타야 한다. 요금은 65위안. 시가체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후 5:30정도. 시가체에서 텐진호텔이나 프렌드십호텔의 도미토리<요금 30위안>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3시간 거리인 라체까지 가면 되는데 이때 주의할 일은 시가체 버스터미널에 가더라도 시가체에서 라체까지 가는 버스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호텔에 체크인할 때 다른 여행자들과 팀을 만들어 미리 다음날 아침에 라체까지 가는 랜드크루저를 예약해 두는 일이 필수이다. 만일 버스도 랜드크루저도 구하지 못하거나 늦어지면 라체에서 타야 할 750위안짜리 알리행 버스를 놓치게 되는 낭패를 겪게된다. 랜드크루저 요금은 1인당 40위안.
라체에 도착해서는 프룻게스트하우스에 배낭을 내려놓고 알리버스가 올때가지 눈이 빠지게 기다리면서 라싸에서 버스표를 샀던 장폴에게 꼭 전화를 걸어야 한다. 더러 알리버스가 하루쯤 연기되는 일도 있으니까. 프룻게스트하우스는 음식값을 턱없이 비싸게 받으므로 조금 아래쪽으로 내려가 식당을 찾는 것이 좋다
<이거 혹시 사기 당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면 드디어 알리 버스가 도착한다. 그러면 우선 영어 안 통하는 버스기사에게 영수증을 보여주며 승객 확인을 받은 후 자기 침대를 확인하고 배낭을 버스지붕에 실으면 된다. 이때 주의할 일이 하나 있다.
여행자들은 우선 다리도 쭉 못 펼 만큼 비좁기 짝이 없는 침대버스에 실망부터 하면서 자신의 침대를 차지하고 누워있는 중국인들을 보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 중국인들 보고 비키라고 해도 남의 침대에 능글맞게 버티고 있다는 것. 말도 안 통하지만 자리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 다르다. 그러다보니 성질급한 여행자는 화를 낼 수도 있는데 그냥 내버려두면 버스기사가 다 알아서 정리해 주니까 절대 화내지 말 것. 황야에서 2박3일 동안 같이 먹고 자고 또 똥,오줌까지도 나란히 같이 누어야 할 사람들이니까.
침대확인과 배낭싣기가 끝나면 곧바로 걷기 시작해야 한다. 알리버스를 타고 있으면 체크포스트에서 검문을 받게 되는 까닭에 걸어서 중국군인들 눈에 띄지 않게 체크포스트 뒤쪽으로 우회해야 한다.
알리버스가 서 있던 곳에서 큰 길을 따라 30분 정도 걸으면 삼거리가 나온다. 그때 걷고 있는 길이 시가체 길, 왼쪽 길은 네팔 국경길, 그리고 오른쪽 길이 바로 체크포스트가 있는 알리 길이다. 삼거리 못 미쳐서 오른쪽으로 농가 몇 채와 밭이 보인다. 계속 가면 체크포스트. 그러니까 그쯤에서 우회전해 대각선으로 방향을 잡고 밭고랑 사이를 30분정도 걷다 보면 큰 길로 빠져 나오게 된다. 그러면 체크포스트를 무사히 벗어난 것. 그리고 나선 큰 길을 따라 10분쯤 걷다 보면 꽤 긴 다리가 나온다. 이때도 다리를 건너지 말고 다리 왼쪽 밑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10분쯤 걸으면 폭2m 정도의 개울이 옆에 흐르는 2차선 도로가 나온다. 그 도로 아무데나 선 채 황야의 노을풍경을 보게 될 때 쯤까지 기다리다보면 아까 봤던 알리 버스가 체크포스트에서 검문을 마치고 다가온다. 꼭 친구같다.
사실 체크포스트의 중국군인들은 외국여행자들의 서부티벳 여행허가증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도 있고 설사 걸리더라도 그냥 돌아오면 그만이다. 그리고 허가증없이 서부티벳으로 갔다가 체크포스트에서 걸리긴 했는데 체크포스트 안에서 엉덩이를 까고 똥을 누는 <땡깡>을 부려 그냥 통과했다는 미국여행자도 있었다지만 그래도 체크포스트 근처에서는 아무래도 긴장이 되는 것이다. 여행자들이 과연 서부티벳 여행허가증 요금 150위안을 아끼기 위해 이렇게 간첩 접선하듯 서부티벳으로 가는 걸까?
그건 결코 아니다. 라싸에서 여행허가증을 받으려면 반드시 4명이상의 그룹을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또 그때가 언제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기다려야하는 지루함도 있다.
이 방법이 돈도 아낄 수 있으면서 재미도 스릴도 있는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 새벽 1시쯤 기저라는 작은 도시에서 만나게 되는 두번째 체크포스트.
이때는 체크포스트에 도착하기 전에 알리버스회사에서 미리 랜드크루저를 대기시켜 놓았다가 여행자들을 싣고 체크포스트를 우회한 다음 다시 알리버스를 타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알리버스 기사가 시키는대로 새벽1시쯤 일어나 눈 비비면서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밤낮없이 황야를 달리던 버스는 알리에 밤 10시쯤 도착한다. 밤 10시인데도 해가 지지 않고 있어 대낮같이 환한 것이 알리의 첫 인상일 것이다. 라싸에서처럼 고원의 강렬한 자외선에 오랜기간 노출된 채 살아온 검은 얼굴의 티베탄들과 흰 얼굴을 한 중국인들이 대조도, <킴>이라 부르는 긴 삽을 들고 길가에 앉거나 서 있다가 하루 30위안의 일당으로 중국인 트럭 기사가 길가에 트럭을 세우면 죽기 살기로 뛰어 그 트럭을 먼저 올라 타려는 거리 인력시장의 풍경도 인상적이다.
알리에서는 알리호텔이 싸고 괜찮다. 4베드 도미토리가 35위안. 10-20위안짜리 초대소에서는 외국인을 아예 받아주지도 않는다. 필자가 알리를 여행할 당시에는 알리호텔 4베드 도미토리의 화장실 겸 샤워실이 고장나있는 바람에 알리호텔의 뒷문 바깥 주차장 구석진 곳에서 급한 일을 보곤 했다. 지금쯤은 화장실 겸 샤워실을 마음놓고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알리에는 버스도 릭샤도 삼륜차도 없고 오직 요금 5위안인 택시만 있다.
알리버스를 내린 곳에서 택시<요금 5위안>로 알리호텔까지 가면 된다.
필자가 인구 4만인 알리에서 알게 된 영어되는 중국인들 단 4명, 중국은행의 환전담당 여자와 PSB<공안처>에서 비자를 연기해주거나 서부티벳 여행허가증을 발급해주는 여자와 알리 버스터미널<阿 里 客 運 點> 의 매표담당 뚱보여자, 알리버스회사의 Mr. 샤오뿐이다.
호텔사장이나 직원들도 영어가 안되니 중국어가 안되는 여행자들은 벙어리와 다를 게 없다. 꼭 필요한 정보가 있을때는 이들을 찾아갈 것. 알리에서 카일라쉬가 있는 다르첸<大金>까지는 버스나 랜드크루저로 각각 10시간, 6시간 정도가 걸린다.
라싸에서는 다르첸까지 직접 가는 버스가 없으니 우선 알리까지 갔다가 약 300km를 되돌아 들어가야 하고 카일라쉬 2박 3일 트레킹이 끝나면 다시 버스나 랜드크루저로 알리까지 나온 후 라싸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카슈가르나 우루무치로 올라가야 한다.
알리-다르첸 버스나 알리-라싸 버스는 <阿 里 客 運 點>에서 표를 사서 타면 되고 요금은 각각 230위안, 500위안이다. 라싸-알리 버스와 알리-라싸 버스는 모두 같은 회사의 같은 버스인데도 요금이 라체-알리는 750위안, 알리-라체는 500위안이다.
같은 구간을 다른 요금을 받는 게 이상해서 한번 물어볼 생각을 했다가 깜빡하고 말았다.
<阿 里 客 運 點>의 위치는 알리호텔 정문에서 왼쪽 큰길로 100m쯤 올라가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길로 50m쯤 가면 차이나텔레콤 맞은 편에 라는 인터넷 까페가 나온다. 2층에 있고 요금은 시간당 4위안.
반가운 한글로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다. 거기서 조금 더 가면 티베탄들이 삼삼오오 <킴>을 들고 앉아 있는 다리를 건너 삼거리가 나온다. 그 삼거리 오른쪽 벌판길로 300m쯤 더 가면 왼쪽으로 버스 터미널<阿 里 客 運 點> 건물을 볼수 있다.
알리-다르첸 랜드크루저 요금은 1인당 200위안. 알리에 있는<阿 里 販 事 處>의 Mr.샤오<0897-2823828>에게 문의하면 되는데 Mr.샤오가 그리 친절한 편은 아니어서 여행자들 중에는 호텔 리셉션을 통하거나 길가에 세워둔 랜드크루저를 직접 섭외하는 경우도 많다.
이때 교통편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카일라쉬를 여행하려면 반드시 서부티벳 여행허가증이 필요하니 PSB<공안처>에 가서 350위안을 내고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카일라쉬에서는 체크포스트를 피해 우회할 길도 없다. 350위안이 아깝기는 하지만 카일라쉬를 보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고 PSB 에서 비자도 연장 받을수 있는데 보통 4-5일 이상 남은 비자는 연장해주지 않고 2-3일 남은 비자에 한해서만 연장을 해주고 있다.
그러나 4-5일 남은 비자를 꼭 연장해야 할 입장이라면 영어되는 담당으로 사람좋은 <데키 아줌마>에게 간곡하게 부탁해 비자를 연장한 여행자들도 있다. 데키는 착한 아줌마.
카일라쉬를 다녀온 후 라싸로 되돌아갈 여행자들은 알리-라싸 버스를 타면 되지만 문제는 알리에서 – 카슈가르를 거쳐 우루무치로 넘어 간 후 다시 중국 내륙을 여행하려고 할 때는 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阿 里 客 運 點>에 가봐도 <열흘 후에 버스가 있다>는 대답만 매일같이 듣게 된다.
그말을 믿고 열흘동안 해도 늦게 지는 손바닥만한 도시에서 삽들고 서성대는 티베탄들만 구경하고 있을순 없는 일.. 알리 호텔의 왼쪽 큰길 100m쯤의 사거리에서 좌회전 해 20m쯤 가면 오른쪽에 <万友超待所>가 있고 그 길 건너편 쪽에는 2-3평 크기의 차수리점이 2개 있다. <万友超待所>의 주인을 찾아 물어보면 언제 버스가 있는지에 대해 정확한 정보가 있다. 물론 영어는 안되니 한문과 종이와 볼펜 그리고 진지한 눈빛을 갖고 대화해야 한다. 또 차수리점 주인을 찿아 물어보면 트럭을 수배해준다. 요금은 자기들 마음대로지만 100-150위안 정도면 오케이. 그러나 알리에서 카슈가르<喀什>까지 직접가는 버스나 트럭은 없다.
일단 알리에서 예칭까지 25인승 버스나 트럭을 타고 간 다음 예칭에서 다시 카슈가르까지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알리-예칭버스는 3일에 1번 오후 3시에 있고 요금은 150위안. 버스는 <万友超待所> 앞에서 승객들을 태운 후 다시 <阿里客運點>으로 가 거기에서 대기중인 승객들을 또 태운다.
아무데서나 버스를 타도 되지만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万 友 超 待 所>앞에서 버스를 타고 <阿 里 客 運 點>에서 표를 사는게 좋다. <万 友 超 待 所>에서는 표를 팔지 않는다. 알리-예칭 버스운행시간은 약 30시간 날짜로는 2박 3일이 걸린다. 그것도 침대버스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앉아서 밤을 지새고 가야 하는 만만치 않는 길이다. 운전기사 2명이 교대 운전을 위해 있긴 있는데.. 어찌된 것이 다른 버스들처럼 교대로 운전을 하며 밤새 달리질 않고 저녁먹고 나면 운전기사 2명이 버스와 승객들은 주차장에 쳐박아 둔 채 자기들끼리만 식당에 붙어있는 초대소로 자러 들어가 버린다. 승객들이 항의해도 막무가내.
여러가지 음식을 시켜놓고 꾸역꾸역 먹기도 많이도 먹고 졸리면 무조건 자버리는 두명의 버스기사 덕분에 승객들은 이틀밤을 두꺼운 옷을 꺼내 껴입고 버스의자에서 자야하는 곤욕을 치룬다. <阿 里 客 運 點>에서 <열흘 후에나 온다>는 버스는 침대버스로 요금은 침대에 따라 280위안, 250위안, 200위안 이 세가지라고 하는데 알리에서 이 침대버스를 타게 된다면 그 여행자는 정말 운이 좋은 것이다.
이때 또 하나 꼭 새겨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알리에서 카일라쉬를 다녀온 후 예칭을 거쳐 카슈가르로 가려는 여행자는 이미 서부티벳 여행허가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만일 일정상 카일라쉬를 포기한 채 알리에서 곧바로 예칭을 거쳐 카슈가르로 가려는 여행자는 이때 또 조금 고민에 빠지게 된다.
350위안을 내고 서부티벳 여행허가증을 받느냐 마느냐…
서부티벳 여행허가증이 필요한 지역은 당연히 아직 외국인에게 완전히 개방이 안된 서장자치구의 서부지역에 한해서이고 신장자치구는 이미 외국인에게 개방된 지역이므로 어떤 허가증도 필요없다.
알리는 서장자치구이고 예칭과 카슈가르, 우루무치는 신장자치구. 알리-예칭구간 약 1116km중 서장자치구는 알리에서 117km 떨어진 루톡<日土>과 루톡에서 111km 떨어진 도말<多馬>뿐이고 그후부터는 위그르들의 신장자치구이다.
필자도 고민을 하다 결국 허가증을 사고 말았는데 막상 지나고 나니 루톡에는 체크포스트도 없고 도말에만 비포장길 옆의 초소도 없는 야산에 군인들 6-7명이 졸고 있다가 버스기사와 손 한번 같이 흔들곤 그걸로 끝이었다.
그 군인들에게 먼저 다가가 <서부티벳 여행허가증>이란걸 보여주면 <도대체 이게 무슨 종이냐?>고 되물을 것도 같았다.
그러니 가난한 배낭여행자들은 이 서부티벳 여행허가증에 350위안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 알리에서 아예 PSB에 가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예칭에서는 택시<10위안>를 타고 <트래픽호텔 : 교통삔관>을 찾아가는 것이 좋다.
4베트 도미토리가 20위안으로 싸고 깨끗하며 바로 뒤편이 예칭-카슈가르 버스가 있는 터미널이다. 카슈가르까지 소요시간 4시간 요금은 30위안, 합승택시도 있는데 1인당 40위안.
그런데 예칭같은 변방도시에도 창녀촌이 있는 모양이었다. 함께 방을 쓴 중국청년 장이 가르쳐준건데 못생긴 여자는 5-10위안, 예쁜 여자는 50위안이란다.
그렇다면 아마 전중국에서 가장 싼 값일 것 같았다.
카슈가르에서는 세멘호텔이 싸고 깨끗하다. 항상 우루무치에서 넘어온 여행자다운 여행자들을 만날 수 있어 정보를 교환하기도 좋다. 4베드 15위안.
게다가 카슈가르는 지금까지 거쳐온 도시들 중에서 가장 물가가 싸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1-2주간씩 마음편히 쉬며 그동안의 여독을 푼다. 살 것도 볼 것도 사실 별로 없지만 유명하다는 재래시장 선데이 마켓의 혼잡속에서 결코 쉽지않은 서부티벳 여행길을 시작하거나 정리하려는 것이다.
카슈가르에서 125km 떨어진 투슉타쉬는 꼭 가보고 싶긴 했으나 일정때문에 포기했다.
바위산이 수천년 동안 비바람에 깎여 높이 360m 폭 150여m의 거대한 자연아치가 형성된 것으로 카슈가르의 명물. 그 아치의 이름은 <쉽튼 브리지>. 쉽튼이라는 영국인이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그곳을 가본 여행자는 아직 손가락에 꼽을 정도. 교통편이 없는 곳이다.
세멘호텔 바로 뒷편에 있는 존스까페의 중국인 주인 존과 중국여자와 결혼해 중국국적을 취득한 한 폴랜드남자가 그 루트를 여행상품으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3박 4일에 걸쳐 랜드크루저로 여행하는 비용이 2천위안<약 32만원>으로 엄청 비싼 요금을 매겨두고 있었다. 여행자들 몇 명이 팀을 만들어 차라리 1000위안이면 살 수 있는 당나귀로 황야의 오지를 노숙을 하며 탐험한 후 돌아온다면 평생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그 당나귀는 카슈가르에서 되팔면 된다.
알리,예칭,카슈가르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리에만 3년전까진 10여명의 한국사람이 살다 모두 떠났다고 한다. 아마 선교사들이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한국여행자들을 6명이나 만날 수 있었던 카슈가르가 필자는 참 반가웠었다.
모두 중국을 여행하다 우루무치에서 넘어온 여행자들인데 그중 특히 반가웠던 여행자가 필자와 같은 루트로 넘어온 김대은 씨<29살>였다.
김씨가 여행한 방법은 바로 히치하이킹. 그때 라싸에 있던 100여 명의 세계 각국 여행자들중 용감하게 히치하이킹에 도전한 여행자는 단 4명.
필자보다 하루 먼저 길을 떠났던 일본청년 슈와 이틀 먼저 떠났던 미국청년 둘 그리고 한국청년 김군뿐 이었다.
라싸에서는 김군을 만난 적이 없지만 슈는 몇번 우연히 부딪혔다. 그때마다 서로 정보를 주고 받았다가 알리에서 다시 만났다. 슈는 운좋게 라체에서 알리까지 한번에 가는 트럭을 만나 300위안을 주고 왔다고 했다. 슈에게 김군에 대해 물어보니 그동안 황야를 횡단하며 한번도 김군을 보지 못했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때 라싸에 있던 10여명의 한국여행자들이 모두 김군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필자도 라싸를 떠난 터 였다.
<내가 히치하이킹에 실패하고 되돌아오더라도 반겨줘야 돼..>라며 혼자 황야로 떠났다고 했는데…그런 김군이 무사히 황야를 건너 카슈가르에 도착한 것이다. 카슈가르에 김군이 도착하기 하루 전날 필자는 한국여행자들에게 김군의 얘기를 해주며 실종에 대비한 대책을 상의까지 했던 터라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운이 좋았던 슈와는 달리 김군은 다르첸을 거쳐 카슈가르까지 오면서 트럭 2번에 랜드크루저 1번, 버스 1번을 탔단다. 그 힘든 여정 가운데서도 체크포스트에 3번이나 붙잡혀 고생이 말이 아니었단다. 처음으로 체크포스트가 있는 걸 보고는 등을 돌려 한참을 도망치고 있는데 중국군인 한떼가 트럭을 타고 쫒아와 잡아가더란다. 체크포스트에 끌려가서는 <서부티벳 여행허가증을 보여달라>는 중국군인들에게 한국여권을 보여주며 박박우긴 끝에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한다..
두번째로 붙잡혔을때는 미국청년 둘을 우연히 만나 길동무를 했다. 한 마을에서 셋이 돈을 모아 랜드크루저를 빌려 탔다. 그러다 또 체크포스트가 보이자 랜드크루저 운전기사에게 자기들은 걸어서 체크포스트를 우회할테니 넌 체크포스트를 2km쯤 지나 기다리고 있을라고 하곤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광경이 중국군인들 눈에 띄는 바람에 중국군인들이 총을 든채 쫒아오는 걸 보고는 셋이 죽어라고 도망치고 있는데 하필 그때 눈앞에 나타난 것이 강이 더란다. 강으로 뛰어들 순 없는 일.. 별수없이 체크포스트로 끌려갔다. 그 안에서 미국청년들이 갑자기 <땡깡>을 부렸다. 체크포스트 안에서 한 청년은 바지를 내리고 똥을 누질 않나.. 한 청년은 오줌을 누질 않나.. 그러자 기가 막혔던지 중국군인들이 빨리 가라고 등을 떠밀어 내더란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셋이 도망치다 중국군인들한테 잡히는걸 멀리서 봤는지 받은 돈 다 받아먹은 랜드크루저가 사라지고 없는 것.. 오는 차도 가는 차도 한대없는 막막한 황야에서 허기는 지고 날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셋은 너무 황당하고 지친 나머지 나머지 배낭을 베고 황야에 벌렁누워 말도 잊은채 하염없이 노을만 보고 있었단다. 그러다 안되겠던지 한 미국청년이 벌떡 일어나더니 배낭을 남겨둔 채 길을 떠났다. 도망간 랜드크루저를 잡아오겠다는 것이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3시간쯤 후… 길을 떠난 미국청년이 정말로 랜드크루저를 타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더란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운전기사가 그나마 양심이 남아있었던지 도망치다 차를 돌려 길을 되돌아 오고 있던 걸 우연히 만난 때문. 행운이었다. 그쯤에서 미국청년 둘은 너무 힘들었던지 김군을 한 마을에 내려준 후 랜드크루저와 흥정을 다시해 라싸로 돌아갔다. 황야에서 혼자 남은 우리의 김군.
처음엔 체크포스트를 발견하면 도망부터 갔지만 세번째쯤 되니 웃음이 다 나더란다.
자기 발로 체크포스트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 중국군인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어깨도 두드려 주면서 배고픈 시늉으로 <밥 좀 달라>고 하거나 <한국에 전화 좀 하자>는 땡깡을 부리면서 중국군인들을 황당하게 만드는 작전으로 체크포스트를 통과했다고 한다.
아마 우리의 김대은군만큼 모험적으로 서부티벳을 횡단한 여행자는 없을 것이다.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용기의 한국청년 김군을 필자는 라싸에서 만난 한국여행자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김군 역시 필자를 알고 있었단다.
다르첸에서 칼멘일행을 만나 서로 얘기를 하게 됐는데 모두들 필자 얘기를 하며 무척 반기더라는 것이다.

김군에게 옛 길동무들의 그 메시지를 전해듣자 <오리온 초코파이 사건>이 떠올랐다.
알리의 큰 슈퍼마켓에서 우연히 한국의 오리온 초코파이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에 한 상자를 사서 그 길동무들에게 자랑을 하며 하나씩 나누어 준 그날밤…모두들 한국의 오리온초코파이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며 비상식량으로 한 상자씩 사서 갖고 다녀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다음날 9명이 우르르 비상식량을 사러 그 슈퍼마켓에 들렀을때 필자빼고 8명의 바구니에는 모두 중국초코파이가 한상자씩 들어있는 것 아닌가. 이런… 오리온은 10위안, 중국제는 7위안. 세상의 어떤 여행자가 같은 물건을 비싼 것으로 사겠는가. 당연한 일인 것을...그러나 그 당연한 일이 필자에게는 당연해지지가 않았다. 차라리 어제밤 <너희나라들 물건은 없어도 한국물건은 이 오지까지도 진출해 있다>고 자랑한 일이 부끄러웠다. 어찌해야 하나…이 국가비상사태를…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필자는 주인남자에게 오리온 초코파이 8상자를 가져오라고 해 계산대위에 쌓아두었다.
그리곤 길동무들이 차례로 계산을 치를 때마다 길동무들에게는 오리온 초코파이를, 주인남자에게는 3위안씩을 주는 것으로 중국초코파이를 다시 진열대로 돌려보냈다.
인상은 구겨져있었겠지만 어색하게라도 웃으면서 말없이 그일을 했고 길동무들도 어색하게 웃으며 필자를 따라주었었다. 필자가 나이도 가장 많았고 여행도 가장 오래 했다.
그날밤에 칼멘이 길동무들에게 3위안씩을 걷어 필자에게 주면서 <초코파이는 한국것을 머지만 결혼은 호주사람인 마크와 해도 되지?>라며 활짝 웃었었는데…
그 옛 길동무들이 이번 여정 내내 그리울때가 많았다.

라싸의 <阿 里 販 事 處>에서 알리표를 산 외국여행자는 모두 9명.
라싸에서 시가체와 라체까지 1박 2일 그리고 알리까지 2박 3일 또 알리에서 다음 여행준비하며 3박 4일 총 10일동안 같이 먹고 같이 잤다. 황야만 계속 달렸던 라싸에서 알리까지 5일간은 황야에서 서로 10-20여m쯤 떨어져 서로 시선만 비낀 채 똥오줌도 같이 누었던 길동무들이었다. 몸을 가려줄 나무가 하나 있나.. 바위가 하나 있나.. 텅빈 산에 올라가 봤자 힘만들뿐. 서로 벌건 대낮에 엉덩이를 까발릴 수 밖에 방법이 없었다. 여자들은 오히려 마을의 변소를 더 싫어했다. 칸마다에 똥무더기가 잔뜩 쌓여있어 똥냄새에 질식사할 것 같은데다가 어쩌자고 똥구덩이는 두개인겨? 필자는 중국일주때 시안에서 똥구덩이 두개인 한밤중의 변소에서 시안처녀와 함께 나란히 앉아 똥을 눈 적도 있었다. 이번 여정에서는 필자가 한마을의 변소에서 똥을 누고 있을 때 마을꼬마 5-6명이 필자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 필자의 똥누는 모습을 <생방송 칼라>로 구경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칸막이는 반토막에 문도 아예 없는 마을변소 보다는 차라리 보일 것 보여 주더라도 똥냄새라도 없는 황야가 낫다고 생각해 특히 여자들은 버스가 마을에 도착하기 1시간 전쯤 꼭 버스를 세우곤 똥부터 누었다.
캐나다여행자 리프와 브리짓은 2년 반째 세계일주 중인 23살짜리 동갑내기 커플.
히말라야의 따또빠니 온천에서 만났던 그 연인들을 반갑게도 라싸에서 또 만났다.
그런데 황야에서 똥누기도 가지각색.
리프는 쪼그려 앉으면 머리만 보일 거리까지 50-60m 정도를 열심히 뛰어가 혼자 똥을 눈다. 그러고나선 꼭 똥 안눈 사람처럼 황야를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돌아온다. 브리짓은 중국남자 승객들이 쳐다보건 말건 아무때나 아무데서나 똥오줌을 잘 누었다.
멕시코여자 칼멘과 호주청년 마크도 2년째 세계일주 중인 연인으로 칼멘이 30살. 마크는 23살. 마크는 멀리 뛰어가는 대신에 20-30cm되는 죽은 나무 뒤에서 또는 머리통만한 돌 뒤에서라도 최대한 쪼그려 앉은 채 고개를 있는대로 쳐박곤 똥을 누었다. 그런데 칼멘은 마크와 10여미터쯤 떨어진 반대편에서 그런 꼴사나운 자세의 애인을 손가락질하면서 옆에 바싹 붙어 앉은 브리짓과 낄낄대며 똥을 잘도 누었다. 브리짓과 칼멘이 똥 누는 모습은 거칠게 없었다. 똥을 <넘어선> 사람들 같았다.
19살 초보여행자인 스위스처녀들 사라, 제시카, 웬디는 칼멘과 브리짓하고는 10여m쯤 떨어져 똥을 눴다. 한번은 사라가 급히 버스를 세우더니 버스 뒤와 옆의 모퉁이 바로 앞에서 설사를 했다. 얼마나 급했으면 수줍음 잘타는 19살 사라가 그랬을까. 그런데 그때 젊은 기사녀석은 난데없이 스패너를 하나 꺼내들고는 버스밑으로 기어들어가더니 사라가 설사하는 장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아닌가. 똥을 다 누거나 안누는 남자들이 보통은 똥누고 있는 여자들과 중국승객들의 시선 사이 중간쯤에 서서 몸으로 가려주곤 했는데 그때 사라는 도와줄 수가 없었다.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아마 사라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주 적나라하게 자신이 노출된 것을.. 인도와 티벳 여행중인 22살짜리 일본여자 나오꼬는 달랐다. 황야 대신 꼭 마을의 변소를 이용했다. 한번도 자신이 똥누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필자는… 그냥 아무대나 마음내키는대로 싸버렸다..
그 길동무들도 모두 그때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 <황야에서 낮에 똥누기>가 제일 기억에 남을 거라고…
또 하나 하늘, 구름, 산, 땅 그리고 바람밖엔 없는 황야가, 기억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의 자궁에서 숨쉬고 있었던 그 태초의 느낌과 비슷할 것이라는 것도…
그 9명의 길동무들끼리는 세수나 양치도 머리빗질도 서로 하지못해 황야의 현지인들과 다를 것 없는 몰골들을 하고서도 서로 챙겨주고 도와주는 우정이 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로의 몸으로 부끄러운 시야를 막아주기도 했고 물건이나 먹거리도 아낌없이 나누었다. 한방에서 바지 갈아 입는 건 예사이고 식사를 할때도 꼭 9명이 같이 했다.
필자는 그 중 칼멘이 좋아 얘기를 특히 많이 했다. 남미여자답게 활발하고 유쾌하면서도 어린 연인 마크를 순종적으로 잘 챙겨주었다. 착한 누나처럼. 그런데 밤이면 변했다. 애마부인 같았다. 야한 속옷차림을 하곤 마크와 거리낌없이 한 침대에 들었다. 그렇다고 섹스를 하진 않았다. 그냥 마크위에 올라타서 낄낄댈뿐 이었다. 길동무들을 배려한 듯싶었다. 칼멘은 식당에서 음식이 좀 늦게 나올 경우는 자기가 직접 주방에 들어가 여주인을 도와주었다. 식사중 그 빠른 영어 소나기 속에서 영어가 짧은 필자와 나오꼬를 위해 쉬운 영어로 말을 걸어주는 배려도 돋보였다.
필자의 노총각처남이 멕시코여자 칼멘과 인연이 되기를 바랐을 정도로 정말 마음에 드는 처녀였다. 저런 사람이 세계 240개국일주를 한다면 멕시코라는 나라의 이미지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싶기도 했고 웬만한 멕시코대사보다도 낫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필자는 그때 칼멘을 보면서 우리도 여행을 정말 잘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우리가 여행하는 풍경에 따라 한국이 좋은 나라도 될 수 있고 나쁜 나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칼멘을 보면서 새삼 느끼게 됐다.
그 길동무들과 함께 있을 때 필자와 나오꼬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대화의 분위기는 영어가 모국어인 리프,브리짓 커플과 마크가 주도했는데 자기들끼리 따발총 쏘듯 대화를 하니 왜 웃어야 하는지도 모를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필자 혼자 다른 식당에 가서 마음편히 밥 좀 먹고 싶을 때도 있었다.
길동무들과 더 많은 대화를 해 어떤 사람들인지 자세히 알고도 싶었고 우정도 쌓고 싶었지만 영어에 대한 부담감이 더 커 그러질 못했다.
<이 나이에 젊은 애들한테 영어로 망신 당할 일 있어? >라는 생각도 한몫 했던 것 같다.
여태까지는 되면 되는 대로 안되면 안되는 대로 서양여행자들과 편하게 지내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째 부담스런 마음이 앞섰다.
그러다보니 칼멘과 나오꼬 외에는 간단한 대화만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카슈카르로 넘어가는 필자만 빼고 나머지 길동무들이 모두 같은 날 카일라쉬로 떠나고 났을 때 알리호텔의 여행자는 필자 혼자였을뿐 아무도 없었다.
텅빈 방에 혼자 있기가 뭐해 거리를 돌아다녀봐도 여행자는 한명도 보이질 않았다.
다른 호텔도 두군데를 들렀지만 모두 중국인들뿐 여행자의 세계는 적막강산이었다.
알리라는 도시에는 그때 여행자라고는 필자 혼자뿐인 것 같았다.
이젠 짧은 영어로라도 <말>이란 것을 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외로움에 짓눌려 어찌할 바를 몰라 했었다. 꼭 여행의 늪에 빠진 채 허우적대는 꼴이었다. 여행하면서 그렇게 안절부절해보기도 처음이었다.
그제서야 그 소중한 길동무들과 우정의 문을 활짝 열지 못했던 것이 영어의 벽때문이 아니라 필자자신의 옹졸한 마음의 벽때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됐다.
이젠 정말 세상 어디서고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 길동무들과의 우정에 대한 미련때문에 길동무들의 흔적을 찿아 정처없이 거리를 헤맸던 것 같다.

카슈가르에서 카람코람 산맥을 넘어 파키스탄 국경마을인 소스트까지는 1박 2일이 걸렸다. 그 길 이름이 유명한 카라코람 하이웨이.
카슈가르의 국제여객 터미널에서 일단 타쉬쿠르간행 버스를 타야 한다.
요금은 63위안이고 6시간 반 정도 걸린다. 매표소에서 버스표를 살 때 <타쉬쿠르간>이라고 분명히 말해야지 <카라코람>이라고 했다간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매표소직원이 물론 영어를 하지만 칸막이를 두고 있는 상태라 잘 못들을 수도 있는데다가 또 <카라코람>표대신 <카라콜리>표를 내어줄 수 있기 때문. 카라콜리 요금은 43위안.
설사 그런 일이 생겨 운전기사가 카라콜리에 버스를 세우며 내리라고 할 때는 <카라콜리>가 목적지가 아니라며 운전기사에게 추가요금 20위안을 주면 된다. 필자가 그런 실수의 주인공.
힌두쿠시 산맥을 옆에 끼고 달리는 버스는 1시간쯤 후 먼데이 마켓에서 멈추고 점심을 먹는다. 카슈가르의 특산물인 살구와 앵두를 사서 먹어보니 그 맛이 참 달고 새콤했다. 버스는 3시간을 더 달려 카라콜리호수에 도착했다.
카라코람 산맥의 한 계곡 자락에 있는 카라콜리 호수. 여행자 하나 없이 돌로 지은 롯지만 하나 덜렁 서 있고 그 옆으로 과연 호수에 뜰 수나 있을까 싶은 유람선 두 척만 버려진 듯 쉬고 있는 풍경이어서 쓸쓸하게 보였다. 세상을 며칠 잊고 싶을때는 딱인 것 같았다.
파키스탄 국경의 첫 마을이 소스트라면 중국 국경의 마지막 도시는 타쉬쿠르칸.
카슈가르의 위구르와도 다른 타쉬쿠르니들의 도시이다.
살결이 흰 것은 같았지만 얼굴생김은 위그르가 나아 보였다. 같은 무슬림이어도 말도 다른데다가 위구르여자들은 <야글륵>이라는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데 비해 타쉬쿠르니여자들은 먼저 머리에 검은 모자를 쓰고 그 위에 스카프를 두른 게 달랐다.
결혼한 여자의 것은 <쿠다>, 처녀는 <세다이>라 부른단다.
또 남자들끼리 인사할 때 서로 악수하듯 손을 맞잡고 그 두손을 서로의 볼에 대는 풍습도 독특했다.
해발 3,600m로 인구 약 만여 명의 깨끗하고 작으면서 도박장도 하나있는 타쉬쿠르칸에서는 교통삔관의 도미토리에서 잤다. 4베드 10위안. 여행자는 필자뿐이고 중국과 파키스탄을 오가는 파키스탄 보따리장사꾼들 6명이 버스에서도 숙소에서도 손님의 전부였다.
서로 말도 안통해 재미도 없는데다가 고산증세로 숨까지 가빠와 밤새 뒤척거려야 했다.
다음날 아침 10시. 밤새 교통삔관의 주차장에서 잤던 어제의 버스를 타고 2-3분 정도 가자 중국세관이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걸린 시간이 3시간.
어제밤에는 필자밖엔 안보이던 여행자가 아침에 세관에서 보니 서양여행자들 50여 명이나 붐비고 있었던 것. 짐검사는 간단했지만 중국군인 둘이 한팀이 되어 현지인 포함 모두 80여명을 심사하는 출국수속때 시간이 많이 걸려 지루했다. 그 와중에 한 중국군인은 여행자들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중국돈 남은 거 있으면 나에게 달라>며 치사한 눈웃음을 치고 다니기도 했다.
필자 차례가 됐을 땐 어째 다른 여행자들 보다 더 시간이 걸렸다. 출국담담 군인 둘이 필자 여권과 A4용지 비자를 서로 나눠 보면서 찌뿌둥한 표정으로 말을 많이 주고 받는 모양새가 필자를 불안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필자를 앞으로 빠지게 해 기다리게 하곤 필자의 여권과 A4용지 비자가 다른 군인에게 들려 사무실로 전해졌다. 분명 필자의 비자엔 문제가 없으니 곧 버스를 탈 수 있을거라고 믿었지만 만일 필자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문제를 들이대며 출국을 막는다면 정말 아주 아주 먼 길을 다시 되돌아 가야하는 것이어서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이럴때는 섣불리 흥분해서 따지려 든다거나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으면 일이 더 꼬일 수 있는 법.
그들이 충분히 확인하도록 기다려 준 후 나중에 차분히 설명을 해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오갔던 30분쯤 후 출국담당 군인들이 마침내 필자를 불렀다.
서양여행자들의 긴 줄도 5명으로 줄어 있었다.
<너는 카트만두에서 그룹비자를 받아 라싸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너랑 같이 입국한 그룹은 어디가고 너 혼자인가?>
<라싸에서 알리까진 같이 왔는데 나만 파키스탄을 여행하려고 이리로 왔고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다시 카트만두로 돌아갔다>
그때 거기에 있던 여행자들은 100% 우루무치에서 카슈가르를 거쳐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타는 여정이지만 필자만 유일하게 카트만두를 시작으로 약 3천km가 넘는 여행끝에 그 자리에 선 것이라 그들이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아마 그런 여정으로 타시쿠르칸까지 온 여행자를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다른 여행자들처럼 여권에 비자가 찍히는 대신 A4용지에 빨간 도장하나 달랑있는 종이비자라 더 의심하는 것 같았다.
<그룹비자로 입국했으면 그룹이 함께 여행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니가 혼자인 것이 좀 이상해서 그러는거다>
<그 그룹비자는 라싸까지만이다. 라싸부터는 그룹이 헤어져 각자 가고 싶은 곳을 선택해 여행하는건데 카라코람을 가려는 여행자는 나 혼자뿐 이어서 혼자 온 것이다. 너도 알다시피 여기까진 무척 먼 길이기 때문에 또는 여행 목적지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 중간에 돌아간 것이라 나혼자 올 수 밖에 없었다>
<너는 왜 그 먼길을 혼자서 왔는가?>
<나는 여행작…>
이때.. 퍼뜩 어떤 생각이 하나 솟구쳐 가까스로 여행작가라는 말을 꿀꺽 삼켰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아예 비자를 주지도 않는 입국금지 직업중의 하나인 것이다.
<나는 여행사 사장이다>
<그런가? 그럼.. 이젠 가도 좋다>
영어단어 하나 잘못말해 위기를 맞을 뻔 하다가 영어단어 하나 잘 말해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라고 말을 바꾸었길 망정이지 라고 했으면 영락없이 먼 길을 되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타쉬쿠르칸에서 소스트까지 버스요금은 225위안, 티켓은 중국세관에서 사면 된다.
필자는 운좋게도 중국비자가 끝나는 마지막 날에 중국국경을 무사히 통과해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넘을 수 있었다.
카라코람은 그때가 6월초였는데도 눈이 왔다. 환상적인 진눈깨비의 축제.
낮은 돌산들을 양옆에 끼고 있는 좁은 계곡사이로 카라코람하이웨이가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었고 황야와 돌산들의 풍경이 반복되고 있었다. 앞도 제대로 안보이는 진눈깨비의 황야에서 털옷을 두른 양치기들이 수십에서 수백마리의 양떼들을 몰고 보이지도 않는 풀을 찾아 다니는 회색풍경은 이방인을 숙연하게 만든다.
이방인의 눈엔 진눈깨비와 돌 밖엔 아무것도 안보이는 황야지만 그 어딘가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고 그들은 바로 그것을 찾아 진눈깨비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순례자가 별건가..저들이 순례자만 같았다. 황야를 달릴때마다 느끼게 되는것이 있다. 우리 세계의 눈으로 보면 황야에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하나도 없어 보이는 황야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 그들의 황야에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모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황야는 황량하지만 그들의 황야에는 생명력이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산이 있되 나무 한그루 새 한마리 품고 있지 않고 땅이 있되 물 한줄기 풀 한포기 품고 있지 않는다. 그러나 속 다 들여다 보이는 하늘과 돌아갈 길 없는 바람, 그리고 그 땅의 주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땅에서의 삶에 필요한 것은 다 준비돼 있음을… 필자는 황야에 서서 그 옛날 지구에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동물이 출현했을 때 그 태초의 땅 그 생명의 땅이 바로 황야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버스는 2시간 반쯤 후 쿤제라브 패스에 도착했다. 해발 4900m의 쿤제라브 패스는 중국 북경의 마지막 검문소가 있으며 카라코람 하이웨이중 최고 지점이다. 만일 필자와 같은 루트로 여행하려는 여행자는 꼭 이점을 주의 하시라…
중국비자를 받을 때 카트만두의 현지여행사에서는 A4용지 비자 복사본을 받고 중국 장무에서 원본을 받게 되는데 이때 원본을 받았다고 해서 복사본을 없애면 안된다는 것이다. 타쉬쿠르간의 중국세관에서 이미 A4용지 비자 원본을 회수한 터라 콘제라브 패스에 갔을 때 여행자는 중국비자가 안찍혀 있는 여권과 A4용지 비자 복사본만 갖고 있을 뿐이다.
만일 필자가 비자 복사본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아찔한 일들만 잔뜩 생겼을 것이다.
마침내 중국땅을 벗어나 파키스탄 땅으로 들어서자 달라진 것이 두가지.
하나는 중국쪽은 아스팔트 길이었는데 파키스탄쪽은 비포장 길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쪽에는 위험한 길이 없었는데 파키스탄쪽에는 더러 위험한 길이 그냥 방치돼 있다는 것이다. 국력의 차이가 느껴졌다.
금방 굴러 떨어질 것만 같은 돌산위의 돌들 밑을 지나는 일은 히말라야의 산길에서 여러 번 겪은 터임에도 좀 긴장됐지만 히말라야의 산길 같은 천길낭떠러지는 없어 다행스러웠다.
어떤 글에서 누군가가 카라코람 하이웨이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길이라고 쓴 걸 본 적이 있었다. 아마 그 사람은 아직 세상의 길들을 다 겪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글을 썼을 것 같았다. 카라코람 하이웨이에는 위험한 길은 잠깐이고 대부분 평탄하고 안전한 길이므로 편안한 마음으로 카라코람의 풍경을 즐기며 여행하기에 좋다.
사실 히말라야에 비하면 낮은 설산들의 풍경도 티벳에 비하면 좁은 황야의 풍경도 별 것은 아니지만...
중국세관을 출발한지 5시간 만에 소스트에 도착했다. 중간에 쿤자라브 국립공원이 나오는데 여기를 통과하려면 내외국인 모두 입장료를 내야 했다.
현지인 20루피, 외국인 무려 4불<235루피>, 버스가 출발한지 한 3-4분 지났을까. 밖을 보니 라는 팻말이 언뜻보여 파키스탄 보따리 장사꾼들한테 물어보았다.
<쿤자라브 국립공원이 끝난거냐?>
<방금 지났다>
<그럼 3-4분 달리는데 돈을 4불이나 받은거네?>
<… 글쎄 그런 셈이지..>
어이없는 통행세였다. 말만 국립공원이지 그냥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5km정도 구간에서 초소하나 달랑 세운 채 돈을 챙기고 있는 것 같았다.
소스트에서는 입국심사 세관검사가 간단했다.
세관에서는 <어디서 왔냐?> 고 물어 <한국>이라고 했더니 그걸로 끝이었다.
약 50가구 정도 되보이는 소스트는 국경무역을 하는 상인들의 거점이어선지 영어되는 파키스탄들이 대부분이라 편했다. 또 길을 물을 때 직접 데려다주는 친절함도 남아 있어 좋았다. 2차선도로 양쪽으로 숙소, 식당, 구멍가게등이 짧은 줄로 서있고 멀리서 설산이 그 작은 국경마을을 지켜보고 있는데 설산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제법 힘이 실려 국경마을의 풍취를 더해 주었다. 그런데 상인들만이 오가는 마을이어선지 여자는 한명도 볼 수가 없었고 술도 보이지 않았다. 외국인용 술집도 없었다.
잠은 모하메드 게스트하우스의 도미토리에서 잤다. 요금은 100루피.
이번 여정의 최종 목적지는 파키스탄의 라호르.
그러려면 소스트에서 길기트를 거쳐 라왈핀디까지 간 다음 라왈핀디에서 라호르에 도착해야 하는데 길기트행 버스를 알아보니 모두 운행이 중단된 상태.
반군들이 길기트를 장악한 채 정부군과 대치 중이란다.
1박 2일동안 버스 3번만 갈아타면 되는 길이 막판에 또 험한 길로 꼬여버렸다.
그렇다면 훈자까지 간 다음 훈자에서 길기트를 우회해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했다.
다음날 새벽 5시. 12인승 승합버스는 만원이었다. 요금 65루피. 버스는 2시간 후쯤부터 훈자 지역을 달리기 시작했다. 듣던대로 풍경이 아름다웠다. 헐벗은 산들 사이의 계곡에는 빙하가 녹아내린 훈자강이 흐르며 훈자강을 끼고는 키 큰 나무들과 밀밭과 마을들이 태양에 빛나고 있었다.
꼭 히말라야의 자르코트와 비슷한 풍요한 이 산중마을은 노란 밀밭 사이를 지나는 마을사람들의 느린 걸음과도 잘 어울렸고 특산물인 주황색 살구나무들과도 잘 어울렸다.
만사 제치고 며칠 쉬어가고 싶었다. 훈자는 세계3대 장수마을이며 네팔의 국왕이 무스탕왕국의 왕과 함께 왕으로 인정해 주고 있는 역사와 전통의 왕이 통치하는 훈자왕국인 것이다. 훈자지역 중 나가밸리는 특히 아름다웠다.
4시간 반 후 다니울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다니울이 바로 길기트를 우회한 첫마을.
기관총을 설치한 짚차들이 바쁜 가운데 총든 군인들이 내외국인 할 것 없이 일일이 짐검사를 했는데 필자도 배낭과 보조가방까지 다 뒤집고야 끝이 났다.
그래도 군인들의 자세는 고압적이진 않아서 불쾌하진 않았다.
신드강 위를 가로지르는 신드다리를 건너 30분쯤 걷자 정류장이 있었다. 여기서 스즈끼를 타고 주글롯까지 가야 주글롯에서 비로소 라왈핀디행 버스를 탈 수 있다. 스즈끼는 태국의 툭툭이 같은 교통수단으로 주글롯까지 50루피. 소요시간 1시간.
스즈끼 안에서 웬 꼬마 둘이 살구를 한보따리 갖고 있길래 한 주먹에 10루피를 주고 사먹었더니 그 살구맛이 그렇게 향기로울 수가 없었다. 살구는 훈자의 특산물. 주글롯은 소스트 정도 되는 작은 마을. 길기트 봉쇄로 대목을 만난듯 길이 약 100m나 될까 싶은 중심도로와 그 양편의 가게들에는 버스와 사람들로 꽤 붐비고 있었다.
버스편부터 알아봤더니 오후 3시에 25인승 버스가 출발하는데 요금은 500루피이고 14시간 걸린다고 했다. 외국인을 보기 힘든 마을이어선지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순박해보였다.
그래도 500루피면 비싼 요금이라 혹시 외국인요금을 부른 것 아닐까 싶어 매표소 근처의 과일가게 주인에게 확인해 보았더니 자기들도 500루피를 낸다고 했다.
버스출발시간까지 시간이 많아 좀 돌아다녀 보다가 곧 포기하곤 한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여행일지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 필자를 보는 사람들마다 다 쳐다보는 것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지만 동네 꼬마녀석들이 필자 가는 곳마다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건 좀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필자의 찢어진 모자를 꿰매기 위해 재봉가게에 들어갔을때는 동네 꼬마녀석들 10여명이 가게앞에 둘러선 채 필자를 원숭이 보듯 구경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이번엔 어른들까지 모여들어 여간 난감하질 않았다. 게다가 말까지 통하질 않으니 일방적인 구경거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오후3시 만원버스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마지막 여정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버스안에서도 또 난감한 일이 생겼다. 필자 앞자리의 청년이 영어로 말을 걸어오길래 처음엔 반가와 했는데 문제는 그 청년의 영어가 하고 가 전부라는 것. 그 두마디 영어와 영어도 아니고 현지어도 아닌 괴상한 언어로 버스 내릴때까지 말을 걸어오면서 씨~익 웃기를 반복한 호기심 많았던 그 청년.
하도 그러기를 반복하니까 기분이 나빠져 나중엔 <환자>로 인정해버렸다..
출발후 5시간 정도까진 길이 좋았다. 평탄한 아스팔트 길의 여러 도시들과 산중턱을 달렸다. 하루 다섯번 기도를 올리는 숨바양때문에 2-3차례 버스가 섰을뿐 이었다.
그러다 밤 9시정도 부터는 수시로 버스를 내려야 했다. 그쪽에는 간밤에 큰 비가 와서 카라코람 산자락에서 흙더미와 바위들이 3-4미터폭 낭떠러지길을 덮쳐 길이 아예 사라진 곳이 많았다. 그럴때마다 버스기사는 남자승객들만 모두 내리게해 버스앞쪽 길에 쌓여있는 바위들을 치우게 했다. 새까만 어둠만 있는 낭떠러지길에서 버스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이용해 맨손으로 길을 치우는 일 역시 위험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건성으로 하지않고 열심히 길을 치웠다. 젊은 버스기사는 그런 길들이 나올때마다 필자를 돌아보며 그냥 앉아 있으란 손짓을 했지만 필자는 다른 남자들 뒤를 따라다니며 바위 하나라도 같이 치우곤 했다.
그렇지만 흙더미를 맨손으로 완전히 평탄하게는 만들 수 없는 일이었다. 오른쪽이 높이 들린 채 버스가 기우뚱하며 낭떠러지길을 지날때마다 심란한 심정을 지우기 어려웠다.
<난.. 왜 지금 아런 쌍놈의 길위에 있을까…>
물론 목적은 있었다. 라호르에서 라호르박물관에 갔을때 파키스탄의 고대문자인 카로쉬티가 씌여있는 비문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카로쉬티 속에는 놀랍게도 우리 한글도 씌여 있는 것이 아닌가! <동.서.강.경> 이 네글자가 카로쉬티 비문에 씌여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그 비문은 약 2000년 전의 것인데 우리 한글은 약 600년전부터 사용했으니 그럼 그 네글자는 우리가 삼국시대때 사용했던 이두문자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당시 카로쉬티와 이두문자가 어떤 연계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혹시나 우리 한글의 유래가 카로쉬티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을까? 아니면 약 2000년전에 어떤 우리 조상들이 그 카로쉬티 비문이 발견됐던 파키스탄의 탁실라에 살고 있었던 걸까? 도대체 <동.서.강.경>은 무엇을 의미할까??
필자는 그때 카로쉬티에서 한글을 발견했다는 정도의 내용으로만 의문의 글을 써둔 채 인도와 네팔로 넘어 갔었는데 파키스탄이 멀어질수록 <동.서.강.경>은 자꾸 생각이 났다. 여행작가로서 직무유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글에 문외한인 필자지만 필자능력이 되는데까지만이라도 그 실체를 추적해보려고 발길을 돌린 것이었다. 그렇잖아도 카라코람을 넘어보고 싶었던 <길욕심>도 있던 터라 길을 바꾼 것에 후회는 조금도 없었다. 젊은 버스기사는 노련해 보였다. 침착한 표정으로 한발한발 버스를 굴리고 있었다. 큰 복이었다. 그래도 제발 더 이상 산위에서 바위나 흙더미가 굴러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다 밤 11시쯤 파탄이라는 마을을 앞둔 산길에서 였다. 바위에 박살나고 또 흙에 파묻힌 집 두채가 나왔다. 버스 불빛 사이로도 처참한 모습이었다. 버스기사는 모든 승객들에게 짐을 챙겨 내리라고 했다. 더 이상 버스로는 갈 수가 없다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버스기사는 승객들에게 일일이 150루피씩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나서는 상황판단을 하느라 그걸 보고 서있던 필자를 데리고 흙더미동산을 넘기 시작했다. 눈 앞은 뿌옇게나마 보였지만 눈 아래쪽은 캄캄절벽이었다. 어디를 밟아야 사는 것이고 어디를 밟아야 죽는 것인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얼떨결에 버스기사를 따를뿐 이었다. 필자와는 말이 안통하니 자신이 직접 안내해주려는 것 같았다. 필자가 배낭과 보조가방들을 지고 든 채 왼쪽 1m옆의 천길낭떠러지를 느끼며 1-2m 높이의 비탈진 흙더미를 가슴 졸이며 넘고 있을때 갑자기 버스기사가 필자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었다. 필자는 그 손을 꽉 움켜 잡았다. 따뜻했던 구원의 그 손. 불안한 마음이 싹 가셨다. 무너진 길을 무사히 넘자 승합차 여러대가 사람들을 태우고 있었다.
버스기사는 그중 한 승합차에 필자를 타게 하더니 필자의 손에 150루피를 쥐어 주었다. 주글롯에서 라왈핀디 까지의 요금 500루피 중 길이 끊긴 파탄까지 요금을 뺀 나머지인 모양이었다. 필자는 그 돈을 도로 버스기사의 주머니에 넣어주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더니 버스기사도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세운 후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내 지금은 갈 길이 멀어 그냥 떠난다만 그대와 인연이 닿아 어디에선가 꼭 한번 더 만나게 되기를.. 내 그대와 의형제를 맺으리라.. 그래서 무너진 카라코람 벼랑길의 아찔함과 칠흑같은 어둠의 불안함 속에서 그때 내 손 잡아준 그 인정을 두고두고 은혜 갚으리라.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이름도 알지 못하는 마음 착한 사람이여…
승합차가 비산이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쯤. 내리막 길은 구불구불했을뿐 무너진 길은 없었다. 새벽 1시인데도 문을 연 가게들이 있었는데 필자는 하도 목이 말라 콜라를 한병 시켜 가게앞의 테이블에 앉아서 마셨다. 종업원이 콜라값으로 20루피를 받아 등을 돌렸을 때 옆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종업원에게 갑자기 야단을 쳤다.
그러자 그 종업원이 필자에게 10루피를 돌려주었다. 아마 빈병을 두고갈 손님에게 빈병 가져갈 손님에게 받는 값을 받은 것 같았다. 몸은 만근 같았어도 마음은 가벼워졌다.
사람 사는데는 인정…그게 중요하다…
다른 승합차로 비산에서 만체라까지는 4시간 반.
만체라에서는 또다른 승합차로 라왈핀디까지 3시간. 길도 좋아 배고픈 것도 목마른 것도 잠 못잔 것도 괜찮았는데 온 몸이 쑤시며 아팠다. 거의 10시간을 한줄에 건장한 남자들 4명씩 모두 20명이 꽉 끼어앉은 승합차 속에 있다보니 라왈핀디에 도착할 쯤에는 사지가 다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몸이 괴로웠다. 잠 못자고 배 고프고 세수 못하고 양치 못하고 긴머리가 귀신대가리처럼 된 것들은 문제도 아니었다.
어디 둘러볼데도 없는 밤이라 앞사람의 뒤통수만 보면서 왔던 여정이어서 더 지쳐버렸다. 그런데다가 이제 라왈핀디에서 버스를 딱 한번만 더 타면 이번 여정이 끝난다는 걸 생각하니 허탈한 마음까지 생겨 배낭을 깔고 길바닥에 잠시 주저앉아 쉬었다.
라왈핀디의 아침 8시 반. 햇살은 뜨거웠다. 온몸이 진땀으로 스멀스멀 했지만 도시는 빛났다.
그때 필자앞을 지나가던 거지소년 둘이 필자 1m쯤 앞에서 걸음을 멈추곤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거지같은 몰골의 외국인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저 인간이 외국인은 외국인인 것 같은데 우리가 동냥을 해도 될 외국인인지 아닌지를..>판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외국인도 우리와 같은 거지가 다 있네..>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았다.
<그래.. 너희와 내가 뭐가 다르겠니..> 필자는 녀석들이 갑자기 사랑스러워졌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더니 녀석들은 그냥 쑥스러운 웃음만 돌려주었다.
순박한 웃음이었다. <순박>은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발견되든 아름답다. 그래서 배고픈 시늉을 하며 손바닥을 내밀어봤더니 그중 큰 녀석이 또 쑥스럽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하나를 필자의 손바닥에 올려주었다. 얼마짜리 동전인지 확인하진 않았다.
필자의 오른손바닥 위에 놓인 동전 한닢이 햇살에 번쩍여 꼭 금덩어리 같이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행복한 기분이 들면서 힘이 솟았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들 중에 녀석들에게 줄만한 게 뭐가 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하다가 항상 목에 걸고 다니는 목걸이볼펜을 벗어 주었다. 그리곤 녀석들뒤 길 건너편에 고속버스 터미널이 있는걸 확인하며 다시 배낭을 맸다. 아침 뙤약볕속을 걸어 한국의 대우 고속버스에 몸을 실으니 시원한 에어컨에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라왈핀디에서 라호르까지는 약 3시간 반. 요금 360루피.
한국의 대우에서 건설한 파키스탄 최고의 길 M2.. 357km인 M2가 끝나는 곳에는 필자와 의형제를 맺은 한국프로야구 선수출신의 파키스탄 아우 김동관이 필자를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삼겹살에 소주를 준비해둔 채…
이 길고 험했던 여정의 끝자락에 누군가 필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행복함.
필자는 웃으면서 <잠>속으로 여행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