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고려대에서 한국 성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ㅇㅇ일보 문화부에 특별히 초빙되어 가서 쓴
김ㅇㅇ 기자의 성리학에 대한 기사를 보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반박했던 글들입니다.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김ㅇㅇ님께 1. (性理學과 四端七情論 등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신문기사를 읽고)
“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퇴계 이황과 안동” 잘 읽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생략하고,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정의(定義)에 대한 것만을 몇 마디 말씀드릴까 합니다.
사단(四端)은 “인간의 선천적인 네 가지 도덕적 본성”이고 칠정(七情)은 “인간의 본성이 겉으로 드러난 일곱 가지 감정”이라고 했는데, 사단이나 칠정이나 모두가 인간의 본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을 가리키는 말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사단(四端)은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내심(內心)의 표출 현상 중에서 도덕적인 것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고, 칠정(七情)은 도덕과 비도덕을 전제하지 않은 단순한 감정들의 종류를 묶어서 지칭하는 말이라고 하겠는데, 사단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인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네 가지 근원에서 발출(發出)하는 단서(端緖)를 일컫는 말이고, 칠정은 인간의 일반적인 감정 현상을 나름대로 분류하여 이름을 붙인 것들의 총칭이라 하겠습니다.
원래 이기설(理氣說)과 성정론(性情論)에서, 이(理)는 우주와 만물의 생성과 운동의 원리(原理)이고 주재(主宰)이며, 기(氣)는 이들을 구성하는 질료(質料)이고 자구(資具-道具-器具-質料)인데, 인간과 만물에게 부여되는 이(理)는 이들의 성(性)이 되고 기(氣)는 이들의 형기(形氣)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성(性)이 발(發)하면 정(情)이 된다고 하면서도 형기의 경우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고, 그리고 다만 기(氣)가 발(發)한다는 말만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또 성(性)이 발(發)하여 만들어지는 정(情)에 선정(善情)과 악정(惡情)이 있는데, 이들 선정(善情)과 악정(惡情)을 모두 성발(性發), 곧 이발(理發)이라고 하면서도, 또 이를 전부 기발(氣發)로만 볼 것이냐, 아니면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의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여러 성리학자들이 논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받은 이(理)가 곧 성(性)이고 이 성(性)이 발(發)한 것이 정(情)이라고 하면서도, 이러한 성발(性發)의 정(情)이 모두 기(氣)가 발한 것이냐, 아니면 이(理)가 발한 것도 있느냐 하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를 가지고 다투었다는 말입니다.
당초의 약속에서 조금 벗어난 것 같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2002. 5. 20.]
김ㅇㅇ님께 2. (退溪와 栗谷의 理氣論과 四端七情論 등을 오해한 신문기사를 보고)
“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율곡 이이와 강릉-파주”를 읽고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만, 그간에 몸이 좋지 않아서 이제야 자판 앞에 앉았습니다.
김 기자는 위의 글에서 “‘지나칠’ 정도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었던 이이(李珥)의 성품은 문장과 철학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황(李滉)이 인간의 도덕적 자발성을 강조하기 위해 논리적인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이(理)의 능동성을 주장했던데 반해, 이이는 자연법칙과 인간윤리의 관계를 일관된 체계 속에서 논리 정연한 문장으로 설명해냈다.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명쾌하게 체계화한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자연의 운용과 인간의 심리작용을 하나의 논리로 꿰뚫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은…이이는 이황처럼 이야기할 경우 선(善)한 감성은 ‘이(理)’가 주도한다는 것을 강조할 수는 있지만 선(善)하지 않은 감성은 ‘이(理)’가 아닌 ‘기(氣)’가 주도한다고 오해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이이는 그렇게 자만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혼란을 염려한 것이었다.”는 등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리학이나 또는 이들 성리학자들의 이야기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리학은 본래 그 이론 안에 본질적인 자기모순을 안고 있는 학문입니다. 그것은 곧 자연법칙과 인간윤리의 관계를 일관된 체계 속에서 논리 정연하게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이를 억지로 풀어내려고 하는 데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모순으로서, 다시 말하면, 자연 또는 존재의 문제와, 윤리 또는 가치의 문제를 하나로 묶어서 회통(會通)시키려고 하는데 그 잘못이 있다 하겠습니다. 동서고금의 어떤 이론을 막론하고 자연과 윤리, 또는 존재와 가치라는 입각점(立脚点)이 서로 다른 두 문제를 한데 묶어서 모순 없이 풀어낸 예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원래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리나 도덕은 인간의 문제이며, 시비와 선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서, 자연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가치중립적(價値中立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자가 달아나는 얼룩말을 잡아먹고, 얼룩말이 파들거리는 풀잎을 뜯어먹는 것은 생명의 법칙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각자 자기들의 필요에 의하여 자기들의 형편에 따라서 만들어내는 윤리나 가치를 가지고 자꾸만 이를 존재화(存在化)하여 존재의 근원에다 끌어다 붙이려고 하니까 자연 그 아귀가 맞아떨어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학창시절, 나는 주위에 독실(篤實)한 기독교 신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끌려가고 전도(傳道) 팸플릿도 얻어 보고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런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신(神)은 전지전능하다. 그리고 그 신(神)은 선(善)이다. 그런데 왜 세상에는 악(惡)이 횡행하는 것일까? 사탄 앞에 속수무책인 신이라면 그것은 전지전능이 아니라 도리어 무능력(無能力)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이 우주를 만들고, 인간을 만들고, 만물을 만들고. 그리고 다시 에덴동산이란 낙원(樂園)을 만들어서 아담과 이브에게 하나님을 경배(敬拜)하며 행복하게 살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만 이브가 뱀이란 악마에게 홀려서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었다? 그래서 그 평화의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아니,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을 줄을 전지전능한 신이 몰랐단 말인가? 그리고 또 선악과는 왜 만들어 놓았나? 이브를 시험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 시험에 빠진 이브 또한 신의 피조물(被造物)이 아니던가? 신이 이브를 만들면서 그 속에 그와 같은 영혼을 불어넣지 않았나? 그런데 바로 그 영혼이 지금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나? 그래서 다시 이것은 본래 신의 설계에 의한 것이라고 변명을 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악(惡)이나 부조리(不條理)는 모두 신에게 진상(進上)하기 위한 만찬상(晩餐床)이거나 아니면 연극무대란 말인가?
어떤 자는 말하기를, 그것은 신이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자유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 또한 신이 준 것이라면, 신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자유도, 신을 배반하고 저주하는 자유도 모두 신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그와 같은 선택의 능력이 바로 신이 불어서 넣어준 영혼에 의한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또 헤겔은 세계와 역사가 모두 신의 현현(顯現)일 뿐이며,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의 영웅호걸이란 것도 사실은 모두 신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했다던가?
그러나 사람들은 말합니다. 종교는 신앙이지 이론이 아니라고. 맞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어떤 완전하다고 생각되는 절대적인 것에 대한 믿고 의지하려는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종교라는 것이 생겨났고, 이론적인 모순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에 미치는 종교의 위력이나 영향은 항상 대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학문은 다릅니다. 학문은 이론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학문입니다. 성리학에서는 이(理)를 주재(主宰)라 하고 기(氣)는 주재를 받는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또 이(理)는 선(善)이며 기(氣)는 그 청탁(淸濁)의 여하에 따라서 선(善)이 되기도 하고 악(惡)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악(惡)은 모두 이 기(氣) 중에 있는 탁(濁)한 부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리학 또한 기독교의 이야기와 같은 것이 됩니다. 이(理)가 선(善)이면서 동시에 주재(主宰)라면 당연히 기(氣)를 주재하여 그 탁(濁)한 것을 바꾸어서 청(淸)한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든 꿰어 맞추려고 하다 보니 자꾸만 무리한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러다가 정작 이(理)는 무위무능(無爲無能)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기(氣)가 도리어 실질적인 주재가 되어서 모든 것을 결정짓는 주도자의 역할을 떠맡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허다한 논리상의 자가당착(自家撞着)이 생기고 자상모순(自相矛盾)을 빚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율곡이 성혼(成渾)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天地之化 卽吾心之發也. 天地之化 若有理化者氣化者 則吾心亦當有理發氣發者, 天地旣無理化氣化之殊 則吾心安得有理發氣發之異乎? 若曰吾心 異於天地之化 則非愚之所知也(天地의 運化는 곧 吾心의 發出이다. 그러므로 天地의 運化가 만약 理의 運化도 있고 氣의 運化도 있다면 吾心 또한 당연히 理의 發出도 있고 氣의 發出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天地가 이미 理의 運化와 氣의 運化의 구별이 없는데 吾心이 어찌 理의 發出과 氣의 發出의 相異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만약 吾心을 天地의 運化와는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런 것은 모른다.)”라는 말 말입니다. 이것은 곧 천지(天地)의 문제와 오심(吾心)의 문제를 같은 주제(主題)로 다룰 수 없다는 하나의 반증(反證)이라 하겠습니다. 율곡은 물론 천지(天地)의 문제와 오심(吾心)의 문제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주장(主張)하기 위하여 이 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천지의 문제와 오심의 문제가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이를 같은 것으로 처리하려고 하다 보니까 이와 같은 이들의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심(吾心)에 중점을 두고, 어떤 사람은 천지(天地)에 중점을 두고 하면서 말입니다.
주희(朱熹) 등의 어록(語錄)을 보면, “理却無情意⋅無計度⋅無造作, 只此氣凝聚處 理便在其中…理則只是箇淨潔空闊底世界 無形迹 他却不會造作, 氣則能醞釀⋅凝聚⋅生物也 但有此氣則理便在其中…若論稟賦則有是氣而後 理隨以具, 故有是氣則有是理 無是氣則無是理…理無爲而氣有爲(理는 본래 情意도 없고 計度(계탁)도 없고 造作도 없으며, 다만 氣가 凝聚(응취)하는 곳이면 理는 문득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理는 단지 하나의 淨潔하고 空闊한 世界일 뿐으로서, 形迹이 없는바, 그는 전혀 造作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氣는 능히 醞釀(온양)하고 凝聚(응취)하여 萬物을 生出하는바, 다만 氣가 있기만 하면 理는 문득 그 가운데 있다.…만약 稟賦(품부)에 대하여 논할 경우, 氣가 있은 다음에 理가 이를 따라서 갖추어진다. 그러므로 氣가 있으면 理가 있고, 氣가 없으면 理도 없다.…理는 하는 것이 없고, 氣는 하는 것이 있다.)”라는 등으로 말을 하고 있는데, 이럴 경우 이(理)는 사실상 기능이 상실된 무위무능(無爲無能)한 자로서 기(氣) 위에 얹혀사는 ‘더부살이’에 불과하고, 기(氣)가 오히려 유위유능(有爲有能)이 되어서 만상(萬象)과 만물(萬物)을 결정하고 주도하는 주재자(主宰者)로 변신하여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율곡은 “氣之偏則理亦偏 氣之全則理亦全…人生氣稟 理有善惡…氣稟有善惡 故理有善惡…氣在淸淨則理亦淸淨 氣在汚穢則理亦汚穢…氣之一本者 理之通故也, 理之萬殊者 氣之局故也…本然之性, 使之蔽者氣也 使之復者亦氣也(氣가 치우치면 理도 치우치고 氣가 온전하면 理도 온전하다.…사람이 태어날 때 氣를 稟受(품수)하는데, 이 때 理에 善과 惡이 있게 된다.…氣의 稟受에 善과 惡이 있다. 그래서 理에 善과 惡이 있는 것이다.…氣가 淸淨한 데 있으면 理도 淸淨하고, 氣가 汚穢(오예)한 데 있으면 理도 汚穢하다.…氣가 一本인 것은 理의 通 때문이고, 理가 萬殊인 것은 氣의 局 때문이다.…本然의 性을 가리어서 막아버리는 것도 氣이고, 회복하여 돌아오게 하는 것도 氣이다.)”라 하여, 이(理)에도 역시 선(善)이 있고 악(惡)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이 또 기(氣) 때문이라고 하는 등, 마치 기(氣)가 자재(自在)로운 능력을 가지고 이(理)를 지배하고 지휘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理)의 주재성(主宰性)을 노래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퇴계는 ‘殆若認理爲死物(理를 마치 죽은 물건처럼 여긴다.)’이란 말로 이와 같은 논리를 반박하였으며, 유리론(唯理論)을 주장한 노사 기정진(蘆沙奇正鎭)은 또 ‘육우기승(肉疣驥蠅)’이란 비유를 들어서 이들을 공박하기도 했던 것인데, 육우기승이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살 위에 덧난 혹이요 말꼬리에 붙은 파리”란 뜻으로서, 주기론자(主氣論者)들의 주장대로라면 이(理)라는 존재는 결국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물론 그들의 논리적인 훈련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측면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서로 합칠 수 없는 존재와 가치의 문제를 한데 뭉뚱그려서 회통(會通)시키려고 하는데 따르는 어쩔 수 없는 무리라고 하겠습니다.
또 성리학자들의 글을 보면 언어의 개념적 정의(定義)에 대한 훈련이 엄격하게 되어 있지 않아서, 우리가 그냥 무심코 대하는 이(理)니 기(氣)니, 성(性)이니 정(情)이니, 심(心)이니 의(意)니, 천(天)이니 명(命)이니, 선(善)이니 악(惡)이니, 동(動)이니 정(靜)이니, 체(體)니 용(用)이니, 생(生)이니 발(發)이니, 사단(四端)이니 칠정(七情)이니, 주재(主宰)니 소승(所乘)이니 하는 등등의 말들이 모두 사람마다 그 쓰는 의미에 차이가 있고, 쓸 때마다 그 뉘앙스에 변화를 보여서, 이들을 모두 동일한 지평(地平) 위에 놓고 정확하게 가름하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茶山丁若鏞) 같은 분은 “退溪所論理氣 專就吾人性情上立說, 栗谷所論理氣 總括天地萬物而立說(퇴계가 논한 理氣는 전적으로 吾人의 性情 위에 나아가서 立說한 것이고, 율곡이 논한 理氣는 天地와 萬物을 모조리 總括(총괄)해서 立說한 것이다.)”이라고 하면서 ‘專’과 ‘總’에다 힘을 주어서 이(理)라는 말의 쓰임새가 두 분 사이에 서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대부분의 경우 이 이(理)라는 글자의 개념을 실질적인 존재성을 가진 실체(實體)로 볼 것인가, 아니면 기(氣)에 내재(內在)하는 속성(屬性) 정도로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데 대한 경계의 선을 분명하게 긋지 못하고, 같은 사람의 경우에도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를 마구 뒤섞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어정쩡하니 걸쳐놓아서, 그 이론(理論)의 정합성(整合性)이나 결구(結構)의 완성도(完成度)에 허점을 보이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화담의 기론(氣論)이나, 퇴계의 이기호발론(理氣互發論), 율곡의 기발일도론(氣發一途論), 녹문 임성주(鹿門任聖周)의 유기론(唯氣論), 노사 기정진의 유리론(唯理論)과 같은 것들이 모두 그들 개인의 취향(趣向)이나 상호(尙好), 또는 당파와 학맥의 여하 등에 따라서 주장되었던 것들일 뿐이며, 대체적으로 보아 이를 그 논리의 우열이나 학적(學的) 깊이의 심천(深淺)을 따져서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화담(花潭)의 관심은 오로지 우주의 본원(本源)과 발생에 대한 본체론적(本體論的)인 측면에 있었으며, 윤리적인 문제는 다만 하나의 실천적인 과제(課題)로만 인식하여 그 의미적인 근원의 소구(遡求)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理)를 단지 기(氣)에 내재(內在)하는 속성(屬性) 정도로만 이해하고, 담일청허(湛一淸虛)의 일기(一氣)를 본체(本體)로 삼아서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을 통하여 그의 우주관(宇宙觀)에 대한 선천론(先天論)과 후천론(後天論)을 전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퇴계는 인간의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의 소구(遡求)와 해명(解明)에 절대적인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理)를 기(氣)의 속성(屬性)으로 처리해버린 화담의 방식이 못마땅해서 “無一語 無病痛(단 한 마디도 병통이 없는 것이 없다.)”이라거나 “揆諸聖賢說 無一符合處(성현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하나도 부합하는 곳이 없다.)”라는 등의 말로 그를 비판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화담은 본래 성현(聖賢)의 말이라는 것보다는 자신의 창견(創見)에 주안(主眼)을 두었기 때문에 성현의 말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은 별로 마음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며, 그리고 성리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성현의 말씀이란 것 또한 대개는 《周易 繫辭傳》이나 《中庸》과 《大學》, 그리고 그 이후의 정주(程朱) 등의 제설(諸說)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하겠는데, 이같은 글들이 사실은 공자(孔子)나 자사(子思), 증자(曾子) 등의 것이 아닌 전국말기(戰國末期)에서 진한간(秦漢間)에 걸쳐 이루어진 여러 무명씨(無名氏)들의 작품이고 보면 더더욱 이런 비판은 그 설 자리를 잃을 수 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문헌의 고증과 비판에 어두웠던 이들 정주(程朱) 계통의 학자들은 애써 이들 내용들을 끌어다가 자신들의 의견에 부회(附會)하려고 했지만, 이것이 본래 전체적으로 체계를 갖추고 통일을 이루어서 영글어진 것이 아닌 각각의 단편적인 조각들이라는 사실 또한 이들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율곡은 “夫理者 氣之主宰也, 氣者 理之所乘也. 非理則氣無所根柢 非氣則理無所依着(대저 理란 氣의 主宰이며 氣란 理의 所乘[탈것]이다. 그러므로 理가 아니면 氣가 根據할 곳이 없고 氣가 아니면 理가 붙어있을 곳이 없다.)”이라고 하는가 하면, “大抵 ‘發之者氣也 所以發者理也, 非氣則不能發 非理則無所發’…‘發之’以下二十三字 聖人復起 不易斯言(대저 發하는 것은 氣이고 發하도록 하는 것은 理인바, 氣가 아니면 發할 수가 없고 理가 아니면 發하도록 하는 것이 없다…그러므로 ‘發之’ 이하 스물세 글자는 설사 聖人이 다시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를 바꾸지 못할 것이다.)”이라 하고, 다시 “理無形也 氣有形也, 理無爲也 氣有爲也. 無形無爲 而爲有形有爲之主者 理也, 有形有爲 而爲無形無爲之器者 氣也(理는 形相이 없고 氣는 形相이 있으며, 理는 하는 것이 없고 氣는 하는 것이 있는바, 形相이 없고 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形相이 있고 하는 것이 있는 자의 主人이(主宰가) 되는 것이 理이며, 形相이 있고 하는 것이 있으면서도 形相이 없고 하는 것이 없는 자의 資具(道具-器具)가 되는 것이 氣이다.)”라 하여, 우주와 인간의 원리와 구조를 작용인(作用因-運動因)과 작용자(作用者-運動者)로 나누어서, 작용인은 이(理)이고 작용자는 기(氣)라는 이(理)와 기(氣)의 역할 분담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역시 기론(氣論) 일변도의 화담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 “繼善成性之理 無物不在, 湛一淸虛之氣 多有不在(善을 이어서 性을 이루는 理는 없는 事物이 없지만, 湛(담)一淸虛한 氣는 없는 事物이 많다.)”에 “元氣生生不息 往者過 來者續而已, 往之氣 已無所在(元氣가 끊임없이 生出하여 止息하는 법이 없어서, 지난 것은 지나가버리고 오는 것은 계속하여 이어질 뿐인바, 지나가버린 氣는 이미 아무데도 있는 곳이 없다.)”임에도 화담은 일기(一氣)가 장존(長存)한다고 하면서 “往者不過 來者不續(지나간 것을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라 하고, 다가오는 것을 연하여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이라 하여 기일변(氣一邊)에만 떨어지고 말았으니, 이는 곧 ‘기(氣)를 이(理)로 착각한 것이다[認氣爲理]’라고 한탄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理)만이 형상(形上)의 도(道)이고 기(氣)는 형하(形下)의 기(器)일 뿐이라는 선입견에서 연유하는 것이며, 보기에 따라서는 기(氣)가 도기(道器)를 아우르는 일원(一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서양의 헤겔은 절대자(絶對者)란 유한자(有限者)를 자기 속에 포함하는 자로서, 유한자의 변화를 통해서 자신을 실현하는 자, 곧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발전하는 자가 절대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실 절대자와 유한자를 통일하여 일원(一元)으로 본 것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화담은 기(氣) 안에다 이(理)를 포섭(包攝)시킨데 반하여, 헤겔은 절대자 안에다 유한자를 포용하였다는 말입니다.
화담은 여기에서 ‘機自爾’란 말을 사용하여 “自能爾也 亦自不得不爾 是謂理之時也…不能無動靜 無闔闢 其何故哉 機自爾也(스스로 능히 그러하며, 또한 스스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바, 이것을 일러 理의 時라 한다(理가 顯出하는 때라 한다).…능히 動靜이 없을 수 없으며, 闔闢(합벽-우주가 열리고 닫히고 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기틀이(幾微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기(機)’는 곧 기(氣)의 내재인(內在因)으로서의 이(理)를 말하는 것으로서, 헤겔의 이른바 절대자와도 얼마쯤은 비슷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또 그는 “氣外無理 理者氣之宰也 所謂宰 非自外來而宰之 指其氣之用事 能不失所以然之正者 而謂之宰(氣를 벗어나서는 理가 없는바, 理란 氣의 主宰이다. 主宰라고 하는 것은 바깥으로부터 (무엇이) 들어와서 主宰한다는 것이 아니고, 氣의 用事가(作用이) 그러한 까닭의 올바름을 능히 잃지 않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主宰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퇴계는 윤리적인 이상(理想) 세계에 매달려서 이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함으로써 이(理)와 기(氣)가 모두 체(體)와 용(用)을 가진 거의 완벽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 되어서, 이(理)는 우주의 본원(本源)이고 주재(主宰)이며 기(氣)는 만물의 질료(質料)이고 자구(資具-道具-器具)라는 성리학 당초의 주장에 모순됨에도(縱的이던 관계가 橫的으로 바뀌었음에도) 이를 억지로 맞추려다 보니 명쾌한 논단을 놓치고 말았을 것이며, 율곡은 또 정이(程頤)의 “理氣不相離 不相雜(理와 氣는 서로 分離되지도 않으며, 서로 뒤섞이지도 않는다.)”이나 주희(朱熹)의 “理却無情意⋅無計度⋅無造作…理無爲而氣有爲(理는 본래 情意도 없고, 計度(계탁)도 없고, 造作도 없다.…理는 하는 것이 없고, 氣는 하는 것이 있다.)” 등과 같은 말들의 조화와 회통(會通)에 집착한 나머지, 선(善)과 악(惡)의 내력에 대한 설명과 주재(主宰)와 피주재(被主宰), 또는 운동인(運動因-作用因)과 운동자(運動者-作用者)에 대한 개념 정립에 혼선을 일으켜서, “所以發者 理也…所以陰靜陽動者 理也(發하도록 하는 것이 理이다.…陰은 靜하고 陽은 動하도록 하는 것이 理이다.)”라 하고는 또 “陰靜陽動 其機自爾 非有使之(陰이 靜하고 陽이 動하는 것은 그 기틀이 본래 그러하며, 그렇도록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 하는가 하면, “理有善惡”이니 “氣稟有善惡 故理有善惡(氣의 稟受에 善과 惡이 있다. 그래서 理에도 善과 惡이 있는 것이다.)”이니 하다가, 다시 “本然之性, 使之蔽者氣也 使之復者亦氣也(本然의 性을 가리어서 막아버리는 것도 氣요, 회복하여 돌아오게 하는 것도 氣이다.)”니 “氣在淸淨則理亦淸淨 氣在汚穢則理亦汚穢(氣가 淸淨한 데 있으면 理도 淸淨하고, 氣가 汚穢(오예)한 데 있으면 理도 汚穢하다.)”니 하여, 이(理)는 주재이고 기(氣)는 자구(資具-道具-器具)라든가, 이(理)는 선(善)이고 기(氣)는 악(惡)과 관련된다는 등의 성리학 본래의 주지(主旨)를 뒤집음은 물론, 논리적인 정합성(整合性) 또한 확보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 율곡은 “動靜無端 陰陽無始(動靜에는 端初가 없고, 陰陽에는 시작이 없다.)”란 정호(程顥)의 말에 매몰되어서 화담의 선천후천설(先天後天說)이 유시유종(有始有終)이라 하여 잘못 되었다고 비판을 했지만, 정작 오늘날의 발달된 과학이론으로 보면 도리어 화담의 설이 근사(近似)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빅뱅이론(Big Bang Theory)에 의하면 우주는 당초에 하나의 질점(質點)에서 대폭발을 일으켜서 지금의 우주로 진화(進化)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화담의 선천후천설 또한 율곡이 착각한 것처럼 유시유종(有始有終)의 이론이 아닙니다. 화담은 “理不先於氣, 氣無始 理固無始, 若曰理先於氣 則是氣有始也. 老氏曰 ‘虛能生氣’ 是則氣 有始有限也(理가 氣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氣가 시작이 없어야만 理 또한 시작이 없을 수 있다. 그런데도 만약 理가 氣에 우선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氣에 시작이 있는 것이 된다. 老子가 말하기를 ‘虛가 능히 氣를 낳는다’ 하였다. 이렇게 되면 氣에 始作과 限界가 있게 된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것이 유시유종이 된단 말입니까? 빅뱅이론에서 우주가 폭발을 일으킨 어떤 시점(時點)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폭발을 일으킨 질점(質點)의 존재 자체는 역시 그 시점(始點)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율곡은 “元氣生生不息 往者過 來者續而已, 往之氣 已無所在(元氣가 끊임없이 生出하여 止息하는 일이 없어서, 지난 것은 지나가버리고 오는 것이 계속하여 이어질 뿐인바, 지나가버린 氣는 이미 아무데도 있는 곳이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화담의 말은 “往者不過 來者不續(지나간 것을 지나간 것이 아니라 하고, 다가오는 것을 연하여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이라고 공박하였는데, 이것은 사실 화담이 사물의 관찰에 보다 투철했던 매우 중요한 사례의 하나로서, ‘촛불 이야기’에서 화담은 촛불이 타면 연기로 바뀌어서 흩어져 보이지 않게 되지만 그렇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의 ‘에너지 보존(保存)의 법칙-에너지 불멸(不滅)의 법칙-에너지 항존(恒存)의 법칙’에 상당하는 선각(先覺)이라고 해야 할 것으로서, 율곡은 화담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往之氣 已無所在”가 잘못된 소견임을 깨닫고 그를 칭송하고 찬양(讚揚)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往者不過 來者不續”이란 해석 또한 율곡이 화담의 글을 잘못 읽은 사례의 하나로서, 화담은 기(氣)가 불과불속(不過不續)하는 것이 아니라 취산(聚散)하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율곡은 선악(善惡)이 모두 기(氣)의 소관이며 이(理)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퇴계의 걱정처럼 우리 인간이 선(善)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으며, 선(善)한 세상에의 기대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또 이(理)라는 것은 도대체 우리 인간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래서 여기에 느닷없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 심(心)이란 것인데, 성리학 이론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바로 이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심(心)이라는 존재입니다. 원래 본체(本體)에는 이기(理氣)란 것이 있고 인간(人間)에게는 성정(性情)이란 것이 있는 것으로 서로 짝을 지어서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본체론에는 없던 심(心)이란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윤리나 도덕의 모든 책임을 모두 이 심(心)으로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理)니 기(氣)니, 성(性)이니 정(情)이니, 이선(理善)이니 기악(氣惡)이니 하는 관념들이 왜 필요했을까? 선악(善惡) 문제의 총책임자는 바로 일신지주(一身之主)라는 이름의 심(心)인데, 그러면 심(心)이 스스로 알아서 모든 선악(善惡) 문제를 판단하여 처리할 것인데, 아무런 쓸모도 없는 성(性)이니 정(情)이니 하는 것들을 왜 끌고 들어와서 왜 그렇게도 ‘성즉리(性卽理)’를 옹고집하면서 ‘심즉리(心卽理)’를 매도했단 말인가? 그리고 기(氣), 곧 악(惡)을 표상하는 질료(質料)로 만들어진 심(心)이 도리어 선(善)을 상징하는 조화(造化)의 추뉴(樞紐-關鍵-核心-지도리와 연결고리)이고 품휘(品彙-品類)의 근저(根柢-뿌리)인 이(理)를 통령(統領-統攝)하여 악(惡)을 제거하고 선(善)을 창출한다는 것은 논리나 문맥으로 보아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이 문제는 물론 율곡 뿐이 아니고 성리학 이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 율곡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先下一心字 在前, 則心是氣也. 或原或生 無非心之發 則豈非氣發耶? 心中所有之理 乃性也, 未有心發而性不發之理 則豈非理乘乎”라고. 이를 풀어서 번역하면 “먼저 ‘심(心)’이라는 글자를 앞에다 놓고 본다면 심(心)은 곧 기(氣)인바, ‘原於性命之正(性命의 中正함에 根源)’하기도 하고 ‘生於形氣之私(形氣의 偏私에서 發生)’하기도 하는 것들이 모두 심(心)의 발(發)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氣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심(心) 속에 가지고 있는 이(理)는 곧 성(性)이다. 그러므로 심(心)이 발(發)하면서 성(性)이 발(發)하지 않을 수 있는 이치는 있지 않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것이 ‘理乘’이 아니겠는가?”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심(心)이 기(氣)이면 물론 ‘心發’은 ‘氣發’입니다. 그러나 심(心) 속에 다시 이(理)가 있고, 그 이(理)가 곧 성(性)이라는 말은 엉뚱한 말입니다. 심(心) 속에 이(理)가 있다면 당연히 ‘心=氣+理’가 되어야 하며, ‘心=氣’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心發=氣發+理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 여기서 ‘氣發’은 그대로 ‘氣發’이라고 하면서 ‘理發’만 ‘理乘’으로 바꾸어서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또 ‘氣發’은 있어도 ‘理發’은 있을 수 없다고 그처럼 주장을 하고는, 지금 여기서 갑자기 “未有心發而性不發之理(心이 發하면서 性이 發하지 않을 수 있는 이치는 있지 않다.)”라 하여 ‘性發’ 곧 ‘理發’을 들고 나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또 ‘性發爲情’이란 말을 다들 모두 거리낌 없이 하고 있는데, ‘性發’은 ‘理發’ 곧 ‘理之發’의 축약(縮約)으로서, 성리학의 주장들은 이처럼 용어 사용의 엄밀성이 결여되어서 논리 전개에 명료성(明瞭性)과 정합성(整合性)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性卽理’라면 ‘性發’은 곧 ‘理發(理之發)’이 되어야 하고, ‘心是氣’라면 ‘心發’은 단지 ‘氣發’만 되어야 하는바, 이것이 이른바 논리라는 것입니다.
또 심(心)을 기(氣)라고 하면서도 그에게 일신지주(一身之主)의 임무를 맡겨서 성정(性情)을 통령(統領)토록 하고, 인격의 수양과 선악(善惡)의 판단 및 도덕의 실천 등 모든 행위의 책임을 모두 심(心)으로 돌려서 추궁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理)는 형이상(形而上)의 (道)요 생물(生物)의 본원(本源)으로 기(氣)의 주재(主宰)이며, 기(氣)는 형이하(形而下)의 (器)요 생물(生物)의 자구(資具-道具-器具-質料-材料)로 이(理)의 소승(所乘-탈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기(氣)로 만들어진 심(心)이 자신의 주재자(主宰者)인 성(性), 곧 이(理)를 거꾸로 통령(統領)하고 주재(主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또 어떻게 이(理)인 성(性)이 기(氣)인 심(心)의 본체(本體)가 되어서 그 심(心) 속의 한 부분으로 귀속(歸屬)되며, 또 ‘체(體)인 성(性)과 용(用)인 정(情)’을 함께 통령(統領)한다는 심(心)이 어떻게 다시 자신은 체(體)가 되고 의(意)를 용(用)으로 삼아서 ‘성정(性情)의 체용(體用)’에 ‘심의(心意)의 체용(體用)’으로 대응(對應) 병렬(竝列)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면 어떤 때는 ‘성정(性情)의 체용(體用)’으로, 어떤 때는 ‘심의(心意)의 체용(體用)’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그때그때 말하기 편한 쪽으로 기울어진단 말입니까?
퇴고(退高)와 우율(牛栗) 논변(論辨)의 기본적인 핵심은 이기호발(理氣互發)이냐 기발일도(氣發一途)이냐 하는 것이며, 그리고 선악(善惡)의 근원이 무엇이냐? 이기(理氣) 모두이냐, 아니면 기(氣) 뿐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퇴계는 이기(理氣) 모두에게 체용(體用)을 인정하여 상호 발용(發用)을 주장하면서도 역시 이주기종(理主氣從)의 원형(原形)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율곡은 기(氣)의 절대성과 능동성을 강조하면서도 여전히 이(理)가 주재(主宰)이고 기(氣)는 자구(資具)라는 기본이념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악(善惡) 문제의 관건은 선정(善情)의 근원은 무엇이고 악정(惡情)의 근원은 무엇이며, 또 이들 감정의 조정(調整)과 교유(矯揉-矯正-整飭)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보면 그 원인을 이기(理氣), 기(氣)의 청탁(淸濁), 발(發)한 기(氣)의 중절(中節)과 부중절(不中節) 등에 두루 돌리면서도, 언제는 이것이 원인이 되고 언제는 저것이 원인이 되는지 그 갈래와 한계가 명료하게 밝혀져 있지 않아서 혼란스럽습니다. 언제는 기(氣) 때문이고, 언제는 탁기(濁氣) 때문이고, 언제는 부중절(不中節) 때문인지? 또 사단(四端)도 부중절하면 악정(惡情)이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선악(善惡)의 정(情)은 모두 중절(中節)과 부중절(不中節)에서 그 최종적인 결판이 나는 것인지? 또 그러면 중절과 부중절을 결정짓는 힘은 무엇이며, 그 결정과정의 맥락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인지?
또 율곡은 “性發爲情 心發爲意”라 하여 “성(性)이 발하면 정(情)이 되고 심(心)이 발하면 의(意)가 된다”고 하면서도, 다시 또 “非分心性爲二用”이라 하여, 그렇다고 “심(心)과 성(性)을 나누어서 ‘二用’ 곧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작용(作用)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억지입니다. 심(心)과 성(性)이 ‘二用’이 아니라면 心=性과 情=意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도 심(心)은 기(氣)이고 성(性)은 이(理)라고 하고 있으며, 또 성(性)에서 발한 정(情)을 심(心)에서 발한 의(意)가 계교상량(計較商量)한다고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 “心之未發爲性 已發爲情 發後商量爲意(心의 未發이 性이고, 이미 發한 것이 情이며, 發한 뒤에 다시 생각하는 것이 意이다.)”라 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性發爲情 心發爲意”가 아니라 “心發爲情 發後商量爲意”로 “심(心)이 발하면 정(情)이 되고 그 정(情)이 생각을 하면 다시 의(意)가 된다”는 뜻이 되어서, 성리학(性理學) 본래의 이론이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서로 대대적(對待的)인 것이냐, 아니면 칠정에 사단이 포괄되느냐 하는 것은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또 이것이 논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용어의 정의에 관한 문제일 뿐으로서, ‘칠정=감정의 총체’라는 방식으로 이 말의 정의를 매겼다면 모르겠지만, 인간의 감정을 모두 합쳐서 이들 일곱 가지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착각입니다. 칠정을 보통은 ‘喜(희)⋅怒(로)⋅哀(애)⋅樂(락)⋅愛(애)⋅惡(오)⋅欲(욕)’이라고 하지만 《禮記 禮運》편에는 ‘樂’이 ‘懼(구)’로 바뀌어 있으며, 또 동양의학에서는 ‘喜⋅怒⋅憂⋅思⋅悲⋅驚⋅恐’이라 하고, 불교에서는 또 ‘喜⋅怒⋅憂⋅懼⋅愛⋅憎⋅欲’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모두 합쳐서 일곱 가지라고 한다면 헛소리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말들을 공부한다면 이것 말고도 또 여러 종류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사단(四端)을 칠정(七情)에 배분(配分-按配)하는 것 역시 억지춘향이식 접붙이기에 불과하며, 다만 사단은 순선(純善)이고 칠정은 선정(善情)도 있고 악정(惡情)도 있다는 정도로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심발(心發)이고 사단과 칠정은 성발(性發)이라는 등의 구별 논리는 역시 부회(附會)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心之未發爲性 已發爲情 發後商量爲意”니 “心爲性情意之主(心은 性과 情과 意의 主人(主宰)이다.)”니 하고는, 또 “性發爲情 心發爲意”라고 하는 것은 논리체계상의 일관성의 결여일 뿐입니다.
율곡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은 이를 간단히 말하면 “이(理)는 만유(萬有)에 공통하고 기(氣)는 만유(萬有)를 차별짓는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통하는 것’이란 무엇이고 ‘차별짓는 것’이란 무엇이냐 하는 데에 이르면 또 대답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율곡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理雖一 而旣乘於氣則其分萬殊, 故在天地而爲天地之理 在萬物而爲萬物之理 在吾人而爲吾人之理. 然則參差不齊者 氣之所爲也. 雖曰氣之所爲 而必有理 爲之主宰, 則其所以參差不齊者 亦是理當如此, 非理不如此而氣獨如此也. 天⋅地⋅人⋅物 雖各有其理, 而天地之理卽萬物之理 萬物之理卽吾人之理也, 此所謂統體一太極也. 雖曰一理 而人之性非物之性 犬之性非牛之性, 此所謂各一其性者也.(理가 비록 하나이지만, 이미 氣를 탔다면 그 구분은 만 가지로 달라진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의 理가 되고, 萬物에 있어서는 萬物의 理가 되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람의 理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參差(참치)하여 不齊(부제)한 것은 氣의 所爲라 하겠다. 그러나 이것이 비록 氣의 所爲이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理가 있어서 主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參差(참치-들쭉날쭉함)하여 不齊(부제-가지런하지 않음)한 것은 역시 당연히 理가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요, 理는 그러하지 않은데 氣만 그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天地와 사람과 萬物이 비록 각기 그들의 理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天地의 理는 곧 萬物의 理요, 萬物의 理는 곧 사람의 理인바, 이것이 이른바 統體一太極(통일된 하나의 원리)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理가 비록 하나라고는 하지만, 사람의 性은 萬物의 性이 아니고, 개의 性은 소의 性이 아닌바, 이것이 이른바 各一其性(각자마다 하나씩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性)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이것은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의 이(理)가 각기 모두 같다는 뜻이기도 하며 다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같은 것은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이고 다른 것은 각구일태극(各具一太極), 곧 각일기성(各一其性)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기(氣)와 마찬가지로 이(理)도 당연히 참치(參差)하여 부제(不齊)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理通氣局 要自本體上說出, 亦不可離了本體 別求流行也. 人之性 非物之性者 氣之局也, 人之理 卽物之理者 理之通也. 方圓之器不同 而器中之水一也; 大小之甁不同 而甁中之空一也. 氣之一本者 理之通故也, 理之萬殊者 器之局故也. 本體之中 流行具焉; 流行之中 本體存焉. 由是觀之, 理通器局之說 果落一邊乎?(‘理는 萬有에 공통하고 氣는 萬有를 차별짓는다’는 것은 본체로부터 말해야 하며 본체를 떠나서 따로 유행을 찾을 수는 없다. 사람의 性이 事物의 性이 아닌 것은 ‘氣의 局’이며, 사람의 理가 곧 事物의 理인 것은 ‘理의 通’이다. 모나고 둥글고 한 그릇이 서로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릇에 담긴 물은 모두 같은 물이며,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병이 서로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병 속이 빈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同一하다. 氣가 一本인 것은 理의 通 때문이고, 理가 萬殊인 것은 氣의 局 때문이다. 본체 속에 유행이 갖추어져 있으며, 유행 속에 본체가 들어있다. 이렇게 본다면 ‘理는 萬有에 공통하고 氣는 萬有를 차별짓는다’고 하는 것이 과연 한 쪽으로만 치우친 소견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여기서는 또 기(氣)가 일본(一本)인 것은 이통(理通) 때문이고 이(理)가 만수(萬殊)인 것은 기국(氣局)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氣)에도 일본(一本)과 만국(萬局-萬變)이 있고 이(理)에도 이통(理通)과 만수(萬殊)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理)는 통(通)’이고 ‘기(氣)는 국(局)’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말 다듬기 놀이’와도 같은데, 현대적인 감각으로 보아 그 논리적인 타당성을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리학자 중에는 이일(理一)이 아닌 기일(氣一)을 가지고 주지(主旨)로 삼아서 이론을 풀어낸 자도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또 율곡은 “一本之理 理之體也, 萬殊之理 理之用也(一本의 理는 理의 體이고, 萬殊의 理는 理의 用이다.)”라 하여, 퇴계와 마찬가지로 이(理)에도 체(體)와 용(用)이 있다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주희(朱熹)의 후계자들이 그처럼 ‘性卽理’를 외치면서도 지금 또 이처럼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다르고 인리(人理)와 물리(物理)는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性)이 곧 이(理)라면 인리(人理)와 물리(物理)가 같을 경우 인성(人性)과 물성(物性)도 당연히 같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또 다르다고 하니 혼란스러워서 종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이들의 개념 정립이나 논리전개는 그때그때 편리한 대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통하는 것이 이(理)인지 기(氣)인지, 차별짓는 것이 이(理)인지 기(氣)인지, 성(性)과 이(理)는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또 이렇게도 말하고 있습니다. “氣之偏則理亦偏 而所偏 非理也氣也, 氣之全則理亦全 而所全 非理也氣也. 至於淸濁⋅粹駁⋅汚穢之中 理無所不在 各爲其性, 而其本然之妙 則不害其自若也. 此之謂理通也.……氣之本則湛一淸虛而已 曷嘗有糟粕⋅煨燼⋅糞壤⋅汚穢之氣哉? 唯其升降飛揚 未嘗止息, 故參差不齊而萬變生焉. 於是 氣之流行也 有不失其本然者 有失其本然者, 旣失其本然 則氣之本者 已無所在. 偏者偏氣也 非全氣也, 淸者淸氣也 非濁氣也, 糟粕⋅煨燼 糟粕⋅煨燼之氣也 非湛一淸虛之氣也. 非若理之於萬物 本然之妙 無所不在. 此所謂氣之局也(氣가 치우치면 理도 치우치지만 치우치는 것은 理가 아니고 氣이며, 氣가 온전하면 理도 온전하지만 온전한 것은 理가 아니고 氣이다. 심지어 淸濁(청탁)⋅粹駁(수박)⋅汚穢(오예)한 속에도 모두 理가 있어서 각기 그것들의 性이 되지만, 그러나 그 本然의 妙는 그것이 스스로 그러함에(自若함에)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理의 通이라 한다.…氣의 本源은 湛(담)一淸虛일 뿐이다. 거기에 언제 糟粕(조박)⋅煨燼(외신)⋅糞壤(분양)⋅汚穢(오예)와 같은 氣가 있은 적이 있었던가? 다만 그것이 升降하고 飛揚하여 止息하는 일이 없는바, 이런 때문에 그것이 參差(참치)하여 不齊(부제)해서 萬變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氣의 流行이 그 本然을 잃어버리지 않는 경우도 있고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는바, 그 本然을 잃어버릴 경우에는 氣의 本然이 이미 있는 곳이 없다. 치우칠 경우에는 치우친 氣요 온전한 氣가 아니며, 맑을 경우에는 맑은 氣요 濁한 氣가 아니며, 糟粕⋅煨燼의 경우에는 糟粕⋅煨燼의 氣요 湛一淸虛의 氣가 아닌바, 理가 萬物에 대하여 그 本然의 妙가 無所不在한 것과는 같지 않다. 이것이 이른바 氣의 局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기(氣)가 치우치면 이(理)도 치우친다고 하고는 또 치우친 것은 이(理)가 아니고 기(氣)라고 하니, 그러면 이(理)는 피동적으로 치우친 것이지 능동적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이(理)는 만유(萬有)에 없는 곳이 없어서 각기 그 성(性)을 이루지만 그 본연(本然)의 묘(妙)는 여전히 자약(自若)한 바 이것이 이른바 이통(理通)이라고? 그러면 ‘無所不在 各爲其性’의 理와 ‘本然之妙 不害自若’의 理는 서로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각성(各性)이면서 이통(理通)이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분수리(分殊理)와 이일(理一)을 말하는 것인가? 그러면 이들은 서로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
기(氣)의 본연(本然)은 담일청허(湛一淸虛)이지만 이것이 운동을 하다보니 만변(萬變)이 생긴다? 그래서 기(氣)의 본연(本然)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본연(本然)을 잃어버릴 경우에는 그 본연(本然)이 없다? 그래서 편기(偏氣)는 편기일 뿐이고, 탁기(濁氣)는 탁기일 뿐이며, 찌꺼기 기(氣)는 찌꺼기 기(氣)일 뿐이지, 담일청허(湛一淸虛)한 기(氣), 곧 본연의 기(氣)는 아니다? 그래서 이(理)의 본연(本然)의 묘(妙)가 만유(萬有)에 공통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것이 이른바 기국(氣局)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이(理)에는 본연(本然:理一)이 있고 만수(萬殊:理分殊)가 있으며 기(氣)에는 담일(湛一:氣一)이 있고 만변(萬變:氣分殊)이 있는데, 이(理)는 본연과 만수가 모두 만유(萬有)에 공통하지만 기(氣)는 만유(萬有)가 모두 만변(萬變)의 모습은 갖추고 있어도 담일(湛一)의 기(氣)는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설법(說法)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이란 논리를 펼 경우, 만수리(萬殊理:分殊理)는 만변기(萬變氣:分殊氣)를 타면 되지만, 이일(理一)은 기일(氣一), 곧 담일청허(湛一淸虛)의 기(氣)가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는데 무슨 기(氣)를 타고 만유(萬有)에 무소부재(無所不在)할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다(多)의 세계를 일(一)의 개념으로 수렴(收斂)할 경우 대체로 총괄(總括)의 방법과 총합(總合)의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겠습니다. 총괄의 방법이란 개와 소는 포유류이고, 포유류와 조류는 동물이고, 동물과 식물은 생물이고, 생물과 무생물은 물(物)이고 하는 방식으로 개념을 추상(抽象)하여 수렴(收斂)해서 드디어 최고의 정점인 이(理), 도(道), 신(神), 형상(形相) 등의 존재나 가치의 근원(根源)에 이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근원에서 다시 나뉘어져 내려오는 방법은 물론 그 반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총합의 방법은 그냥 전부를 합쳐서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람들이 우리 사람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통기국설은 이일(理一)을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하면서도 또 만유(萬有)가 모두 별도로 분수리(分殊理)를 가지고 있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 이야기가 복잡해집니다. 일리(一理)와 분수리(分殊理), 곧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과 각구일태극(各具一太極)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아니면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는가? 분수리는 일리를 나눈 조각인가, 아니면 복제품(複製品)인가? 각구일태극의 각각의 태극은 통체일태극과 동일형(同一型)인가, 각이형(各異型)인가, 형(型)은 같으면서도 크기만 서로 다른가? 아니면 누구의 말처럼 강물에 비친 하늘의 달그림자와 같은 것인가? 그러나 달그림자는 말 그대로 그림자이지 실물이 아니지 않은가? 또 각기 개물(個物) 속에 존재한다는 기일(氣一)과 기분수(氣分殊)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는 아마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만유(萬有)의 제각각의 성질들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분수기(分殊氣)가 결정되면 분수리(分殊理)도 동시에 이를 탄다고 하는데, 이럴 경우 이(理)가 주재가 아니라 도리어 기(氣)에 종속되는 논리가 되어버립니다. 모든 결정은 기(氣)가 하고 이(理)는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또 “無形無爲而爲有形有爲之主者 理也; 有形有爲而爲無形無爲之器者 氣也. 理無形而氣有形 故理通而氣局; 理無爲而氣有爲 故氣發而理乘(形相이 없고 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形相이 있고 하는 것이 있는 자의 主(主人-主宰)가 되는 것이 理이며, 形相이 있고 하는 것이 있으면서도 形相이 없고 하는 것이 없는 자의 器(資具-道具-器具-材料-質料)가 되는 것이 氣이다. 理는 形相이 없고 氣는 形相이 있는바 이런 때문에 理는 通하고 氣는 局하며, 理는 하는 것이 없고 氣는 하는 것이 있는바 이런 때문에 氣는 發하고 理는 乘하는 것이다.)”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논리적인 귀결을 따라서 답안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는 식의 정언적(定言的), 또는 단언적(斷言的) 논법이라 하겠습니다. 보통 우리의 상식으로는, 주재(主宰)하여 시키는 자를 행위의 책임자라 하여 더욱 중요하게 여기며, 지휘자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자는 이를 하수인(下手人)이라 하여 보다 단순한 행위로 보고 있는 데 반하여, 여기서는 오히려 주재하여 시키는 자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고, 시키는 대로 하는 자만을 하는 것이 있다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또 보편(普遍)과 특수(特殊)에 대한 설명이 이처럼 이일(理一)과 이분수(理分殊), 기일(氣一)과 기분수(氣分殊)로 사중주(四重奏)를 연출하고, 그러면서도 또 기일(氣一)은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어서 이(理)와 기(氣)가 그 대칭(對稱)에 불균형을 이루는 것은, 주재(主宰)와 피주재(被主宰), 존재(存在)와 속성(屬性), 개념(槪念)과 실체(實體), 총괄(總括)과 추상(抽象) 등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아직 충분하지 못했던 데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주리론(主理論)은 보수적이고 주기론(主氣論)은 진보적이란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아직 공부가 미숙한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우선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하는 용어부터 그 뜻매김이 정확하지 못합니다. 퇴계가 비록 주리(主理)니 주기(主氣)니 하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쟁점은 어디까지나 이발(理發)을 인정할 것이냐 아니냐의 여부에 있었으며 주(主)⋅부(副)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율곡이 더러 기(氣)를 우선시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역시 무리한 설명에 따르는 표현기술상의 문제에 불과하며, 율곡이 결코 이(理)의 주재성(主宰性)을 부정한 적은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도리어 화담이 이(理)를 경시했다고 해서 그를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하는 말은 정확하게는 ‘이기호발론(理氣互發論)’과 ‘기발일도론(氣發一途論)’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다산(茶山)의 말처럼 오인성정(吾人性情)을 위주로 하는 것이냐, 천지만물(天地萬物)을 위주로 하는 것이냐 하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주(主)자를 붙여서 구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주기론을 진보적이라고 하는 것은 짐작컨대 과거 중공과 북한이 유물론이란 사이비 이론에 매몰되어서 이(理)를 봉건시(封建視)하고 기(氣)가 무슨 구세주라도 되는 양 떠받들던 시절에, 학문적 주체성이 결여된 일부 미숙한 학인(學人)들이 이를 수입 모방한 데서 비롯되게 된 것 같으며, 주리론을 보수적이라고 하는 것은 퇴계의 ‘理尊氣卑’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엉터리로 해석하여 ‘君尊臣卑’나 ‘官尊民卑’라는 엉뚱한 공식에다 대입함으로써 이처럼 엉뚱한 착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理尊氣卑’의 이(理)는 화장실, 시궁창, 쓰레기통 등 만물(萬物)과 만상(萬象)의 어디에도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지극히 공평하고 무차별적(無差別的)인 자로서 세상을 합리적이고 도덕적이게 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이며, 기(氣)는 만물을 차별짓는 재주를 가지고 양반도 결정짓고 상놈도 결정짓고, 전제군주도 결정짓고 간신과 모리배도 결정을 지으면서 끝없이 세상을 차별화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이를 끌어다 붙이려면 도리어 주기론이 신분차별적이고 주리론이 신분평등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퇴계는 도덕적인 차원에서 이(理)는 높고 기(氣)는 낮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氣)든 이(理)든 사실은 모두 전근대적 시절의 일종의 사변철학(思辨哲學)의 관념적인 말들에 불과하며, 양식(洋式)에 물든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슨 진보가 어떻고 보수가 어떻고 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퇴계는 원래 타고난 자질이 성실하고 학자적인데다, 조광조 등 기묘인(己卯人)들의 광경과 을사사화(乙巳士禍) 및 친형 온계공(溫溪公)의 참화 등을 두루 목격하면서 인간세상의 선악문제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서 이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에 주력하게 되었을 것이며, 그리고 율곡은 천품(天稟)이 형철(瑩澈)하고 명민(明敏)하여 선학(先學)들의 연구성과를 논리적으로 종합 회통하는데 관심이 있었는 데다, 이(理)는 주재(主宰)이고 기(氣)는 자구(資具)라는 이(理)와 기(氣)의 역할 분담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드디어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는 답안(答案)에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율곡의 무실론(務實論)이나 경장론(更張論) 등을 그의 이기론(理氣論)에다 갖다 붙이는 것은 그야말로 도식적(圖式的)인 사고방식의 치졸(稚拙)한 발상이라 하겠습니다. 율곡은 결코 기(氣)를 지금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민중(民衆)이라는 등의 의미로 접근한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이기(理氣)의 묘(妙)’라는 관점에서 이(理)와 기(氣)를 운동인(運動因-作用因)과 운동자(運動者-作用者)로 분명히 그 역할을 나누려는데 진정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수적인 것으로 말하면 정작 숭명(崇明)과 배청(排淸)이라는 몰주체적(沒主體的) 가치의식(價値意識)에 한사코 매달려서, “주자(朱子)의 말은 일자일획(一字一劃)도 고칠 수 없다”던 주기파의 후예들이 더욱 철저해서 나라의 말로를 망국으로 이끌고 말았으며, 실학(實學) 등 개혁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주리파와 가까운 곳에서 많이 나와서 나름대로 그들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 첨언(添言)한다면, 퇴계는 원래 타고난 기질이 정치적이 아니라 학자적이었기 때문에 정사(政事)에 관한 일들도 학자적인 감성(感性)으로 접근하였으며, 그리고 율곡은 본래 탁월한 정치적인 안목과 역량을 가졌던 분이기에 당시 현실 정치의 허다한 오류와 모순들을 몸으로 부딪치면서 이들의 개혁과 경장(更張)에 남다른 열정(熱情)을 보였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성리학에 대한 이상의 여러 이야기들은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리고 비판적인 안목에서 하는 말들이며, 당시에 있어서는 역시 성리학이 매우 수준 높고 깊이 있는 학문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성리학이 비록 자신의 도덕적인 주제(主題)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사회에 끼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우리 선인(先人)들은 이와 같은 성리학 논쟁을 통하여 비로소 진정한 학문의 세계에 깊이 다가갈 수 있었으며, 그리고 좀 더 고차원(高次元)한 지적(知的) 연찬(硏鑽)과 함께 사고의 훈련을 쌓을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문화적 경험들이 축적이 되어서 지금 세계에서 우리 한자문화권이 근대화를 먼저 이룩한 저들 서구의 문명을 바짝 추격할 수가 있게 되었으며, 그리고 여타의 세계가 아직도 그 원리주의(原理主義)⋅근본주의(根本主義)와 같은 도그마에 매달려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역시 모두 이와 같은 합리적이고 학문적인 경험과 훈련의 부족에서 연유(緣由)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끝으로 지금 성리학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한문(漢文) 오독(誤讀)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漢文 誤讀事例】
1. 天地間人物草木禽獸 其生也 莫不有種 定不會無種子 白地生出一個物事 這個都是氣 (연세대 배종호 교수의 《韓國儒學史》 P17)
(원역) : 天地間에 있어 人物 草木 禽獸와 같은 것은 그것이 生하려면 種子가 없을 리 없다. 그것은 白地(空地와 같음)에 한 개의 物事를 生하는 것과 같은데, 이것이 모두 氣이다.
(개역) : 天地間의 人物이나 草木이나 禽獸나 무엇이든 그것이 태어나는데 있어 모두 種子가 있는바, 종자가 없이 白地에서 단 하나의 事物이라도 태어나게 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氣이다.
2. 所覺者心之理也 能覺者氣之靈也 (〃P35)
(원역) : 覺하는 바는 心의 理요, 능히 覺하는 것은 氣의 靈이다.
(개역) :知覺하도록 하는 것은 心의 理요, 능히 知覺하는 것은 氣의 靈이다. [‘所覺’은 ‘所以爲覺’의 縮約型임]
3. 未有天理人欲夾雜者 (〃47)
(원역) : 天理와 人欲은 아직 夾雜함이 없다.
(개역) : 天理와 人欲이 서로 뒤섞이는 일은 있지 않다.
4. 格至也 物猶事也……致推極也 知猶識也 (〃P50)
(원역) : 格은 至이요, 物은 오히려 事이다.…致는 推極이요, 知는 오히려 識이다.
(개역) : 格은 至이고, 物은 事와 같다.…致는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요, 知는 識과 같다.
5.發之者氣也 所以發者理也 非氣則不能發 非理則無所發 (고려대 윤사순 교수의 《韓國儒學論究》 P135)
(원역) : 發하는 것은 氣이고 發하는 까닭은 理이다. 氣가 아니면 發할 수 없고 理가 아니면 發하는 바(결과)가 없게 된다.
(개역) :發하는 것은 氣이고 發하도록 하는 것은 理이다. 氣가 아니면 發할 수가 없고, 理가 아니면 發하도록 하는 것이 없다. [ ‘所以發者’는 ‘所以爲發者’의 縮約型이며, ‘無所發’은 ‘無所以爲發’의 縮約型임]
6. 則是朱子亦誤也 何以爲朱子乎 (〃147)
(원역) : 주자 역시 틀렸다. (과연 그렇다면) 어떻게 주자로 되겠는가?
(개역) : 주자 또한 틀렸다고 하겠다. 그런 분이 어떻게 주자일 수가 있겠는가?
7. 其所以能然 實理之爲也 (최영성의 《韓國儒學思想史Ⅱ》 P273)
(원역) : 능히 그렇게 하는 所以(所以能然)는 實理인 것이다.
(개역) : 그것이 능히 그러할 수 있는 것은 실로 理의 所爲인 것이다.
8. 則未必不更深於今日 而持守講明之功 可以進也 (〃 P312)
(원역) : 반드시 (그 병통이) 오늘보다는 더 깊어지지 않았을 것이요, 心性을 堅持固守하고 학문을 講明하는 功도 진보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개역) : (그 학문이) 지금보다 더 깊어지지 않았으리라고 할 수가 없을 것이요, 그리고 그 마음에 대한 持守와 학문에 대한 講明의 功이 진보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9. 忍痛含寃 迫不得已 (〃Ⅲ P75)
(원역) : 아픔을 참고 원한을 삼키며, 窮迫한 생활을 그치지 말라.
(개역) : 아픔을 참고 원한을 삼키는 것은, 강박에 못 이겨 어쩔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10. 閑先聖 拒詖淫 (〃 P76)
(원역) : 先聖을 법받아 詖行과 淫辭를 막아
(개역) : 先聖을 保衛하고 詖行과 淫辭를 막아
11. 後之人 但當平心虛己 看得義理 (〃 P91)
(원역) : 후대의 사람은 다만 자기를 버리고 의리를 볼뿐이다.
(개역) : 후대의 사람들은 다만 마음을 平靜히 하고 스스로를 비워서 義理를 간파하여 터득할 일이다.
12. 忠信篤厚之風 大不如古人有一分實見 必有一分實行 知與行不相懸絶 (〃 P114)
(원역) : 忠信篤厚의 風은 옛 사람이 一分 實見이 있으면 반드시 一分의 實行이 있었던 것과 크게 같지 않다. 知와 行은 서로 멀리 단절될 수 없다.
(개역) : 忠信과 篤厚의 기풍이, 옛 사람들이 一分의 實見이 있으면 반드시 一分의 實行이 있어서 知와 行이 서로 懸隔히 斷絶되는 일이 없던 것과는 크게 같지 않다.
13. 無所爲而必有事者 (〃 P127)
(원역) : 하는 바 없어도 반드시 일이 있게 되어
(개역) : 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반드시 노력하는 것이 있어서
14. 道脈千年傳孔孟 一毫差爽亦嫌云 (〃 P284)
(원역) : 도맥은 천년동안 공맹을 전해오니, 일호라도 어김 있으면 미심쩍다 할 것이다.
(개역) : 道脈을 천년 만에 孔孟의 그것을 전하였으나, 약간의 어긋남이 역시 嫌疑(혐의)롭다 하겠다.
15. 陽明則疑朱子之分於外 爲襲義理之弊也 (〃 P331)
(원역) : 양명은 주자가 밖으로 갈려나가 義理를 답습하는 폐단이 있지 않은가 의심하였다.
(개역) : 양명은, 주자가 (仁內義外의 說을 따라 義를) 외부의 것으로 갈라 나누어서, 義理를 (바깥에서) 襲取하려고 하는 폐단이 있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2002. 6. 24.]
김ㅇㅇ님께 3. (自然과 人間이 만나는 곳에 대한 동경의 의미와, 訓詁의 歷史라는 東洋哲學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문제)
일전의 전화 통화에서 김 선생은 “무어라고 꼭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곳에 분명히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부릴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물론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왜냐 하면, 이는 비단 김 선생만의 생각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고 또 생각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의 여러 건국신화와 영웅전설들, 중국 한유(漢儒)의 천인상응설(天人相應說), 《역전(易傳)》과 《중용(中庸)》의 천명(天命)과 인성(人性), 천도(天道)와 성명(性命)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언설(言說)들, 이를 이은 성리학(性理學)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관념, 송유(宋儒)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서명(西銘)〉 등의 문맥(文脈), 인도(印度) 우파니샤드 철학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 기타 여러 종교 이론들의 출발 논리가 대개 모두 이와 비슷한 곳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시 이런 것들은 모두 그 본질이 종교적인 심성(心性)이거나 아니면 문학적 또는 예술적인 정서(情緖)들에 불과하며, 논리적으로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이론은 아닙니다. 또 하나. 우리나라의 무당 인구가 30만을 넘는다는 점복(占卜) 행위나 굿판 의식(儀式) 등의 심리와 정서들 또한 기본적으로는 모두 사람들의 이와 같은 마음바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 하나. 귀지 6월 29일자 ‘책의 향기’란에 실린,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의 《일심의 철학》에 대한 동국대 김성철 교수의 평문(評文)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흔히 서양철학의 역사는 반동의 역사인 반면 동양철학의 역사는 훈고(訓詁)의 역사라고 평한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과거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조망(眺望)을 자유롭게 토로한다. 칸트는 데카르트를, 헤겔은 칸트를, 마르크스는 헤겔을 밟는다. 그러나 동양에서 철학자의 역할은 과거에 이미 완성되었던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해(理解)하는 것이었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에 대한 이런 상반된 연구태도는 현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현대의 서양철학 연구자는 과거 자신들의 선배들이 그랬듯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조망을 자유롭게 토로하며 새로운 철학을 구성해 낸다. 그러나 동양철학 연구자는 이를 금기시했다. 철학자 한자경은 이런 금기를 깨뜨린다. 독송(讀誦)과 주석의 대상이었던 불교의 가르침을 과감하게 풀어낸 후 마치 서양철학자들이 그랬듯이 자신의 철학을 개진한다.
마치 선승의 화두처럼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자아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 저자는 치밀한 논리적 분석의 끝에 원효의 일심(一心)과 만난다. 일심은 공(空)과 자유를 자각한 마음이며 무한의 마음이고 절대의 마음으로 우리의 일상적 마음의 근저에서 작용하는 본래적 마음이다.
저자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 칸트의 초월적 자아, 유가(儒家)의 태극을 불교의 일심과 동치(同値)시킨다.…”
매우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역시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생각건대 이는, 선인(先人)의 철학을 세상에 소개하는 작업과 자신의 철학을 세상에 제출하는 행위의 서로 다른 두 측면을 한 데 묶어서 동일한 것으로 혼동한 언설(言說)이라 하겠습니다. 선인(先人)의 철학을 세상에 소개하려면 먼저 선인이 고민(苦悶)하고 사유(思惟)한 여러 가지 곡절(曲節)들을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따라서 세상에 소개하고 설명할 일이요, 그리고 다시 자신의 생각을 표출해서 이와 같은 선인의 방법을 평가하고 보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먼저 선인의 결론만을 취하여 자신의 논리를 따라서 이를 증명한 다음, 다시 이를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은 결코 온당한 방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동양의 후학(後學)들이 비록 선철(先哲)의 것을 주석(註釋)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하더라도 역시 단순한 주석만이 아닌 변용(變容)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던 것인바, 주석철학(註釋哲學)의 대표격인 주희(朱熹)의 《四書集註》가 그 원의(原義)의 범위를 한참 벗어나서 오히려 자신의 이기론(理氣論)을 펼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투시(透視)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공자의 《論語》에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의 관념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孟子》 또한 본성론(本性論)의 성격만 약간 지닌 것일 뿐으로서, 형이상(形而上)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들은 다만 인간의 인격과 주체적인 자각능력에 기초한 도덕론을 주창(主唱)하고 강론(講論)했던 것일 뿐이며, 결코 주희(朱熹)가 말하는 것과 같이 이(理)가 어떻고 기(氣)가 어떻고, 형상(形上)이 어떻고 형하(形下)가 어떻고 하는 그런 방식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희는 이를 자기 생각에다 끌어다 붙여서, 단순한 심성론(心性論)인 이들의 이야기를 이기(理氣)와 성명(性命)의 이론으로 주석(註釋)을 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려대 김ㅇㅇ 교수의 《中國哲學散稿Ⅰ》은 그 97면에서 “요컨대 공자 早年의 사상은 그 중점을 형이상학의 경계에 두어 그 취지를 비교적 현실 행동 세계의 政敎方面에 기울였고, 만년엔 깊은 사색을 거쳐, 온 정신을 형이상학의 세계에 기울여 天道人性의 근본문제를 탐구한 것이다.” 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易傳》을 속설(俗說)에 따라서 공자의 저작으로 착각했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論語》의 사상과 《易傳》의 사상이 서로 엉뚱하여 가당치도 않다는 것을 그는 아직 감별(鑑別)하여 가려낼 안목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또 만약 ‘공자 조년의 사상’이란 말이 《論語》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더더구나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 원효(元曉)의 일심(一心)과 유가(儒家)의 태극(太極)이 과연 동치(同値)하는 것인지도 의문스럽습니다. 만유(萬有)의 실재(實在)를 인정하는 현실세계의 긍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태초론적(太初論的) 방법의 근원적(根源的)인 의미로서의 태극과, 만유(萬有)의 자성(自性)을 부인하는 현실세계의 부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연기론적(緣起論的) 방법의 구경적(究竟的)인 의미로서의 일심이 과연 서로 동치(同値)하는 것인지?
중국철학사를 쓴 노사광(勞思光)은 그의 글에서 유⋅불⋅도(儒佛道)의 구별 방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유학(儒學)은 차안(此岸)의 세계를 긍정하여 그 교화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불교(佛敎)는 차안의 세계를 부정하여 피안(彼岸)으로의 도탈(度脫)과 열반(涅槃)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도가(道家)는 인위(人爲), 곧 인간문명을 부정하고 세상을 자연의 상태 그대로 관상(觀賞)하는 전생(全生)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전일에 보냈던 편지의 한문 원문에다 번역문을 새로 붙여서 다시 보내드리니, 한번 시간을 내어서 조용히 읽어보시고, 생각나는 대로 비판과 반론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들의 생각 또한 한층 더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02.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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