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출강하고 있는 한 대학에서 '동양정치사상' 과목을 맡아 달라고 했다. 강의 준비를 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적당한 교재를 찾는 것이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학부생용 동양정치사상 교재 중 최대한 한자 표기가 적은 책을 찾기 위해 책방을 뒤졌다. 겨우 한 권을 골랐는데 그래도 세 쪽에 한 번꼴로 한자 단어가 나왔다. 그 단어를 읽을 때마다 학생들은 어김없이 표정이 굳어졌다. 명색이 정치외교학과 학생들인데, '다스릴 정(政)'자조차 모르겠단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이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필자의 학창 시절과 비교해 보면 훨씬 머리회전이 빠르고 지식도 폭넓은 듯하다. 원어민과 거침없이 영어로 대화도 잘하면서 한자만 보면 손사래를 친다. 무슨 '암호(暗號)' 같다나. 한자를 소홀히 하는 교육과 문화 속에서 자란 세대의 현주소다.
일부 지식인과 인터넷 논객들은 "한글이라는 훌륭한 우리 문자가 있는데 왜 또 한자를 배워야 하느냐"고 한다. "우리 전통문화를 알려면 한자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 "관련된 전공 분야의 학자들만 배우면 된다"고 한다. 하긴 수십만 글자가 넘는 한자 중 겨우 몇천 자를 배운다고 고전을 읽어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누구나 일상에서 외국인과 상담(商談)을 하거나 학술토론을 벌일 것도 아닌데, 영어는 왜 모두 목숨 걸고 배우는 걸까?
언어와 문자는 단지 실용적인 의미만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알파벳에 서양의 에토스가 깃들어 있듯, 한자에는 동양의 정신이 담겨 있다. 동양에서 나고 자랐다면, 적어도 그 문화의 기본적인 맛과 향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은 한자를 익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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