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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위치하였으며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이다. 호태왕비라고도 하며 414년 장수왕 때 건립하였고 크기는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이고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가 적혀있다.
※ 비석의 상태
광개토왕릉비는 집안 분지의 동쪽, 압록강에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고구려의 옛 도읍지였던 만큼, 주변 곳곳에 1면여기에 달하는 고분들이 흩어져 있다. 자갈이 중간중간 박혀 있는 응회암으로 만든 비석은 높이 6.39미터, 무게 37톤에 달하는데, 많이 가공하지 않아 표면이 울퉁불퉁하다. 화강암으로 된 거대한 받침돌이 비석 밑을 받치고 있다.
바둑판 같은 선을 반듯하게 그어, 그 속에 보통 14×15cm 정도의 손바닥만한 크기로 글자를 새겨서 넣었다. 예서체로서 고풍스런 멋이 나면서도 힘이 넘치는 뛰어난 필체이다. 동남쪽의 1면에 11행, 서남쪽의 2면에 10행, 서북쪽의 3면에 14행, 동북쪽의 4면에 9행, 모두 44행에 총 글자수는 1775자이다. 그중 150자 정도는 마멸되어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언뜻 보기에는 투박한 모습이지만, 고구려인들은 이 비를 세우는 데 엄청난 정성을 들였다. 광개토왕이 죽은 지 2년 뒤인 414년, 장수왕은 부왕(父王)의 업적을 자손만대에 전하려고 거대한 자연석을 다듬어 하늘을 향한 석조기념물을 세웠던 것이다.
광개토왕의 능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되지 않지만, 비석 서남쪽 200미터 정도 떨어진 태옹릉(太王陵)으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태왕릉이라는 명칭은, 이 부근에서 "태왕릉이 산악처럼 굳고 편안하기를 바란다."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발견된 적이 있어 붙여졌다.
거대한 돌을 다듬어 피라미드 모양의 7층 계단을 쌓고 그 안은 자갈돌로 메운 이 무덤은 한 변의 너비가 70m가 넘는다. 무덤 정상부에 시신을 놓았던 돌방이 있는데, 그 입구에 서면 집안 분지와 주변을 둘러싼 산과 압록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좁은 통로를 지나 들어가면 맞배지붕의 궁정을 축소한 듯한 방이 나오는데, 입구 벽면 위 쪽에는 대들보와 서까래가 가는 선으로 새겨져 있으며, 바닥에는 왕과 왕비의 관대가 놓여 있다.
※ 비문의 내용
비문은 고구려 왕가(王家)의 내력과 비석을 세운 이유, 광개토왕 생전의 업적, 광개토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에 관한 규정을 적은 세 부분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광개토왕이 사방에 무위(武威)를 떨치고 나라와 백성들을 부강하게 한 뒤 412년 9월 29일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공훈을 대대로 전하고자 능비를 세운다고 적고 있다.
둘째 부분에서는 광개토왕의 생전에 정벌 이유와 과정,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밝히고 있다. 395년에는 비려(裨麗:대흥안령 산록의 거란)을 정벌하고, 398년에는 숙신을 정복하였다. 399년에 백제가 왜와 화통하자 왕이 몸소 평양성까지 순행하였는데, 이때 신라왕이 왜의 침입 사실을 전하자 다음해에 5만의 보병과 기병을 보내어 왜병을 궤멸시켰다. 404년에는 대방고지(帶方故地:황해도)를 침입한 왜군을 무찌르고, 407년에는 백제의 6성을 격파하였으며,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왕이 정복한 지역은 총 64성 1400촌이었다.
셋째 부분은 광개토왕릉을 관리하는 수묘인에 관한 규정을 적은 것으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능비를 세운 사람들의 세계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수도 국내성을 천하 사방의 중심지로 생각하였다. 즉, 고구려를 둘러싼 세계는 모두 고구려에 신속(臣屬)되거나 신속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고구려왕은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외손자인 추모왕(鄒牟王:주몽)의 후예로서, 천하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존재였다는 자부심에 차 있었다.
당시 고구려인의 이러한 천하관 (天下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비가 세워진 5세기 초,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특히 북중 국에서는 주변 민족이 세운 나라들이 연이어 들어섰다가 멸망을 거듭했고, 요동, 요서지역 에서 세력을 떨치던 선비족도 쇠퇴하였다.
남쪽의 신라는 아직 힘이 미약하였고, 가야는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바다 멀리 일본 열도에서도 통일왕조가 성립하기 전이었으므로 '왜'라는 세력이 때때로 한반도 남부에 출몰할 뿐이었다. 고구려의 유일한 적수는 백제였다. 백제는 371년에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후,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계속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승리를 거두고 60여 성을 차지하였다. 나아가 신라에 침입한 왜를 쫓아내고 신라를 휘하에 거 느렸으며, 북으로 거란, 숙신, 동부여를 복속시켰다. 이렇게 고구려는 주변의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발돋움 하였다. 이에 고구려인은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자신의 나라를 천하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주변 나라를 고구려에 신속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비문 속에서 고구려인은 광개토왕의 정복을 만천하의 백성을 풍요롭게 살도 록 하는 조치로 예찬하고 있다.
※ 신묘년 기사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 일제의 학자의 주장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 정인보(鄭寅普)의 주장
주어를 고구려 광개토왕으로 하여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신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 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그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였다.
-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
비문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3차의 석회도부(石灰塗付) 작업이 있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문제의 비문 중 왜(倭) 이하 도(渡)·해(海)·파(破) 등 4자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1972년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도 참모본부가 비밀리에 이 문제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 이형구(李亨求)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 비문의 변조 (이진희 주장 1984년 12월 20일 중앙일보)
<1920년대 후반 탁본> <1930년대 중엽 탁본>
<1981년 탁본> <신묘년 기사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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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은 고구려 왕가(王家)의 내력과 비석을 세운 이유, 광개토왕 생전의 업적, 광개토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에 관한 규정을 적은 세 부분으로 크게 나뉘어 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광개토왕이 사방에 무위(武威)를 떨치고 나라와 백성들을 부강하게 한 뒤 412년 9월 29일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공훈을 대대로 전하고자 능비를 세운다고 적고 있다.
둘째 부분에서는 광개토왕의 생전에 정벌 이유와 과정,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밝히고 있다. 395년에는 비려(裨麗:대흥안령 산록의 거란)을 정벌하고, 398년에는 숙신을 정복하였다. 399년에 백제가 왜와 화통하자 왕이 몸소 평양성까지 순행하였는데, 이때 신라왕이 왜의 침입 사실을 전하자 다음해에 5만의 보병과 기병을 보내어 왜병을 궤멸시켰다. 404년에는 대방고지(帶方故地:황해도)를 침입한 왜군을 무찌르고, 407년에는 백제의 6성을 격파하였으며,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왕이 정복한 지역은 총 64성 1400촌이었다.
셋째 부분은 광개토왕릉을 관리하는 수묘인에 관한 규정을 적은 것으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능비를 세운 사람들의 세계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수도 국내성을 천하 사방의 중심지로 생각하였다. 즉, 고구려를 둘러싼 세계는 모두 고구려에 신속(臣屬)되거나 신속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고구려왕은 천제(天帝)의 아들이자 하백(河伯)의 외손자인 추모왕(鄒牟王:주몽)의 후예로서, 천하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존재였다는 자부심에 차 있었다.
당시 고구려인의 이러한 천하관 (天下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비가 세워진 5세기 초,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특히 북중 국에서는 주변 민족이 세운 나라들이 연이어 들어섰다가 멸망을 거듭했고, 요동, 요서지역 에서 세력을 떨치던 선비족도 쇠퇴하였다.
남쪽의 신라는 아직 힘이 미약하였고, 가야는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바다 멀리 일본 열도에서도 통일왕조가 성립하기 전이었으므로 '왜'라는 세력이 때때로 한반도 남부에 출몰할 뿐이었다. 고구려의 유일한 적수는 백제였다. 백제는 371년에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후,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계속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승리를 거두고 60여 성을 차지하였다. 나아가 신라에 침입한 왜를 쫓아내고 신라를 휘하에 거 느렸으며, 북으로 거란, 숙신, 동부여를 복속시켰다. 이렇게 고구려는 주변의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발돋움 하였다. 이에 고구려인은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자신의 나라를 천하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주변 나라를 고구려에 신속한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비문 속에서 고구려인은 광개토왕의 정복을 만천하의 백성을 풍요롭게 살도 록 하는 조치로 예찬하고 있다.
※ 신묘년 기사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한·일 고대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어 온 구절은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以爲臣)"로서, 여기에서 문맥과 전혀 관계없이 왜(倭)가 나온다. 이를 근거로....
- 일제의 학자의 주장
4세기에 한반도 남단에 일본의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런 해석은 1884년 일본군 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가지고 귀국한 뒤, 일본육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하여 1889년 《회여록(會餘錄)》 5집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의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 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 정인보(鄭寅普)의 주장
주어를 고구려 광개토왕으로 하여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신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 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그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였다.
-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李進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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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있는 곳의 현재 지명은 압록강 북안(北岸)인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 통구진[通??] 태왕향[太王?] 태왕촌[太王村] 이다. 주변에는 대형고분과 성터를 비롯한 많은 고구려 유적이 산재해 있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비로, 남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세워져 있다. 높이는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문자는 비의 4면에 모두 새겨져 총 44행 1,755자로, 이중 마멸되어 전혀 판독할 수 없는 것이 약 140여 자에 이른다. 중국 학자 왕쪤췬〔王健群〕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제1면은 11행 449자, 제2면은 10행 410자, 제3면은 14행 574자, 제4면은 9행 369자이다. 각 문자는 당시에 통용되던 예서체에 가까운 서체를 사용하여 장중하고도 위엄이 있어 고구려 독자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특하다. 그리고 문자의 크기는 균등하지 않으나 대략 가로·세로가 14~15cm 안팎이며, 이체자(異體字)와 간체자(簡體字)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비는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지안 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져 지금에 이른다.function formSubmitValidCheck(formId,textareaId) { if($(textareaId).value.trim() == "") { alert("채택 이유를 남겨 주세요."); } else { $(formId).submit();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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