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naver.com/kilokim/100019841049
,,,,,,,,,,,,,,,,,,,,,,,,,,,,,,,,,,,,,,
편저 간행 : 면우 곽종석의 학문과 사상 (도서출판 술이, 2010) 연구 진행
|
작년 4월에 경상대에서 발표하고, 같은 해 6월에 남명학연구 27집에 실었던 곽종석 관련 논문이 당시 같이 발표되었던 논문 및 9월 제2차 학술대회에서 발표되었던 논문들과 함께 "면우 곽종석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책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습니다.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총서시리즈 제9권 "면우 곽종석의 학문과 사상"이고, 제 글은 '1896년 곽종석의 포고천하문 발송 경위'입니다. |
,,,,,,,,,,,,,,,,,,,,,,,,
종류 : 종이책
면우 곽종석의 학문과 사상
- 출판사
- 술이 | 2010.01.10
- 형태
- 판형 A5 | 페이지수 490 기타정보
ISBN 10-8993382123
ISBN 13-9788993382129 - 정가
30,000원 27,000원- 가격비교 찜하기
인터넷서점 (총 5건) 더보기
전문자료
-
철학 : 한국의 유학자 ; 3.1운동과 파리장서 사건의 면우 곽종석 평전(2) 유료 2005 학술지논문 | 남명학연구원 | 권인호
-
철학 : 한국의 유학자 ; 3.1운동과 파리장서 사건의 면우 곽종석 평전(1) 유료 2005 학술지논문 | 남명학연구원 | 권인호
-
의 학문(學問)과 사상(思想) : 면우 곽종석의 성리설-한주 성리설의... 유료 2009 학술지논문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 홍원식 ( Won Sik Hong )
,,,,,,,,,,,,,,,,
(유림이 중심이된 파리장서 독립운동 기념비)
면우 곽종석은 1846년(현종12년) 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월사리 초포(草浦)에서 곽원조(郭源兆)의 막내아들로 태어 났다.본관은 현풍(경상북도 달성군에 있는 지명) 곽씨이다. 6-7세에 사서삼경을 다 베우고 15-16세에는 고금의 정치제도 역사,지리,병법음악,의술,음양,불가와 노장의 글까지 두루 읽고 후일 올바른 방향을 정하여 본격 성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25세에 성주 대포(한계)리에 살고 있는 寒洲 李震相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한주 이진상은 퇴계 학맥의 정통을 이은 정재 류치명의 문인으로 곽종석 보다 28살 위였다. 면우 곽종석은 한주 이진상으로 부터 理學을 전수 받고 이진상의 학문에 깊이 존경을 표하고 이진상이야 말로 퇴계의 학통을 잇고 주자의 宗旨를 체득하여 士風을 일으킨 큰스승으로 삼았다. 이진상이 죽자 1만3천4백자에 달하는 방대한 행장을 지어 스승에게 올린다.
50세 되던해에 비안현감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않고 58세에 통정대부 비서원승이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니 고종은 의정부 참찬을내렸다. 그는 고종에게 국정수행의 4가지 차(箚)-건의 사항-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내용은 1.올바른 학문을높혀서 장려할것(崇正學), 2.민심을 수습하여 단결하게 할것(結民心), 3.군사의 체제를 정비 확충할것(定軍制, 4. 국가의 재용을 절약할것(節財用) 등이다.
1910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남 거창군 茶田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가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기억되는 것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유림 대표단이 빠진 것을 크게 부끄럽게 여기고 이에 그를 중심으로한 유림단이 파리장서 사건을 전개하여 우리민족의 독립을 열국이 모인 파리강화회의 석상에서 요구한 사건이다. 이 파리장서는 그가 74세때 그가 짓고 유림대표137명이 서명한 2천6백7십4자의 장문으로 문인 심산 김창숙이 영어로 통역하여 중국과상해 파리로 보내졌다. 이 사건으로 그는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죽는다.
그의 이기사상은 4단10정경위도에서 잘 들어난다. 그는7情 대신 3개를 더하여 10情으로 다루었다. 10情으로 (愛,喜,樂,憂,哀,惡,怒,忿,欲,懼)나누고 이를 3가지로 묶을 수 있으며 결국은 欲으로 통합할 수 있다고 하였다.또한 그느 먼저 理가 없으면 陽이 없으며 理는 음양의 아버지요 천지만물의 할아버지라고 하여 理를 궁리하는것이 列聖의 心法이며 종지라고 하였다. 또한 4端을 날(날줄)로 보고 10情을 씨(씨줄)로 보았지만 性과 情을 각각 날과 씨로 본 농암 金昌協의 학설이나 理를 날에 비유하고 氣를 씨에 비유한 갈암 李玄逸의 주장도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대구의 낙동서원에 파리장서 기념비가 있어 영남 유림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일제에 항거하다가 목숨을 다한 그를 생각하며 글을 올린다.
,,,,,,,,,,,,,,,,,,,,,,,,,,,,,,,,,,,,,,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의(義)를 위해 일어서는 사람들이 바로 선비인데요..
나라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난 선비로서 학문적으로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평가를 받을 인물로 산청 단성 출생 면우 곽종석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면우는 선현들의 성리학과 유학 사상을 집대성하여 500년 유교를 총결산하였으니, 한말 영남학맥의 종장이라고 일컬을 만한 선비입니다.

다천서당:1921년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면우는 1846년(현종 12년) 6월 24일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동에서 태어났다.
자질이 영특해 어려서부터 신동이라고 불렸다. 4세때부터 부친에게 공부를 배웠는데 마침 부친 도암공(道菴公)이 학생들을 모아놓고 수업을 하고 있었다. 이때 면우는 부친 무릎에서 가르치는 글을 듣고 학생들보다 먼저 암송하여 한치의 차이도 없어 듣는 사람들이모두 입을 모아 ‘신동’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면우의 뛰어난 재주에 대한 이야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우도 지역에 널리 회자되어 전해지고 있다.
하루는 면우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 객이 찾아와 ‘땅(地)’에 대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겨우 5세밖에 안된 면우는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廣大天與同 其上幾萬國’라고 하니, 객이 천하에 이름이 떨칠 재목이라고 극찬을 하였다.
21세 되던해 요망한 중이 마을의 도호공(都護公) 하겸락(河兼洛)의 집을 찾아와 의기양양하게 요술를 부려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이때 도호공의 초청을 받고 면우가 그 자리에 나타나자 중이 온 얼굴에 땀을 치면서 요술을 중단하고 말 없이 도주하였다. 도호공이 이르기를 ‘邪不眩正(사악한 기술은 정도를 현혹시키지 못한다)’이라 고 하면서 곽모(郭某)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런 일화도 전한다. 도호공이 평소에 가장 아끼던 병서(兵書) 한권이 있었는데 문득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보다 십수년 전에 면우가 도호공의 권유로 그 병서를 읽은 적이 있었으므로 도호공은 그 아들 약헌(約軒) 용제(龍濟)에게 명하여 면우에게 기억할 수 있겠느냐고 묻게 하였다. 이때 면우는 어른이 아끼는 책이라면 한번 기억해 보자고하면서 즉석에서 집필하여 완성을 했다. 도호공이 이를 보고 한 자의 오차도 찾을 길 없다고 하였다.
23세 때는 당시 영남학맥의 종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한주 이진상을 성주로 찾아가 성리학을 질정하고 주리설(主理說)을 독실히 믿어 스승으로 섬겼으며, ‘지의록(質疑錄)’을 저술하여 ‘성리성명(理氣性命)’을 논하고 여러 학자들의 ‘동이설(同異說)’을 남김없이 분석하여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사단칠정경위도설(四端七情經緯圖說) 등을 저술하여 선현들이 주장한 성리학을 집대성하였다.
32세 되던해 30여인과 천왕봉에 올랐다. 이 때 동행한 선비들이 각자 초목을 채집하여 그 이름과 그 성분을 면우에게 질문했다. 이때 면우는 이 나무는 목변(木邊)에 어찌 쓴 글자이고 이 풀은 초(艸)에 어찌 쓴 글자이며 독이 있는지 없는지 그 성분까지 일일이 분석하였다.
39세 때 세상이 날로 그릇됨을 보고 은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고자 가족을 데리고 태백산 아래 봉화군 춘양면 학리에 은거하였다.
50세 되던해 조정에서는 면우의 학문과 처신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비안현감(比安縣監)으로 불렀다. 면우는 나아가지 않고 다음 해 다시 거창의 가북산중 다전(茶田)으로 숨었으나 54세때 고종이 다시 신하를 보내 벼슬을 할 것을 촉구하였다. 면우는 소를 올려 정중하게 사양하였으나, 얼마후인 58세 때 비서원승(秘書院丞)의 벼슬을 내리고 간곡하게 불렀다.
면우는 임금의 명령을 여러번 어기는 것은 신하의 도리에 어긋난다고 판단해 도보로 상경하여 수원(水原)에서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은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칙임의관(勅任議官)을 제수하는 한편 비서랑(秘書郞)을 시켜 함께 입궐할 것을 최촉하였다.
면우가 입궐할 당시 명성을 듣고 여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방문객의 수가 만명을 넘게 되자 선생은 그 조카를 불러 “오늘부터 시도(時到)를 하여라”고 명하자 “어제까지의 시도는 어떻게 하시렵니까”고 물으니 면우가 답하기를 “만명이 넘으니 정신이 조금 혼미하여지는 듯하나 어제까지는 기억이 된다”고 하였다. 면우의 뛰어난 학식을 알 수 있는 한 일화이다.
면우은 부득이 선비복장으로 함녕전(咸寧殿)에서 임금을 독대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을 아뢰자 임금은 극구 칭찬하고 즉석에서 명령하여 의정부(議政府) 참찬(參贊)을 제수하였다.
이에 면우는 곧 임금께 올리는 글을 지어 숭정학(崇正學) 결민심(結民心) 정군제(定軍制) 절재용(節財用)의 4가지 조항을 주장했으니, 올바른 학문을 높여서 장려를 하여야 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단결되게 하여야 하고, 군사의 체제를 제정 확립하여야 하고 국가의 재산 확보를 위해 절약을 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한 것이다.
임금은 면우의 상소를 보고 더욱 우대하여 홍문관(弘文館)의 경연관(經筵官) 시강원(侍講院)의 서연관(書筵官)으로 삼았다. 면우는 더욱 황공하여 다시 사직하면서 경연(經筵) 서연(書筵)에 글을 올린 뒤 바로 낙향을 결심했다. 이미 국운이 위태로워 자신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을 듣고 도보로 상경하여 매국오적(賣國五賊)의 참수(斬首)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입대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돌아와 대죄(待罪)하던 중 마침내 망국의 비통을 당하게 되었다. 면우는 이름을 ‘도’로 개명(改名)하고 망국의 신으로 자처하면서 일절의 세상사를 버렸으며 두문칩거하였으나 영재의 양육만은 사양하지 않았다.
74세 되던해 기미년에는 전국유림대표(全國儒林代表) 137명을 대표하여 파리의 세계평화회의(世界平和會議)에 독립을 호소하는 장서를 송치한 일로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병환의 위중으로 풀려나 1919년 8월 24일 다전(茶田)의 여재(如齋)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1960년에 정부에서는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고 이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920년 그 탄생지인 단성에 니동서당(尼東書堂)을 세웠고 다음 해 에는 거주지인 거창에 다천서당(茶川書堂)을 건립하여 후학들이 그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고 있다.
,,,,,,,,,,,,,,,,,,,,,,,,,,,,,,,,,,,,,,,,,,,
면우 곽종석의 비분의 현장
면우(俛宇)곽종석(郭鍾錫)은 나라가 기우러질 즈음에 태어나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봤고, 이민족의 치세에 살다가 그 픽박으로 죽음을 재촉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한 국가의 종언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세를 당해도 난감하거늘 망국의 현장에 선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더욱이 ‘나라 걱정이 내 걱정’이고 ‘시대의 아픔을 가장 민감하게 앓는’ 선비로서는 하늘을 우러러 피를 말리는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벼슬길에 나아가 세상을 위해 일해 보려는 포부도 지녀봤고, 후진을 양성해 천하에 도(道)를 펴려는 야망도 실제로 옮겨봤으며, 임금의 부름에 응해 나라를 구할 계책도 아뢰었고, 나라를 잃어버린 뒤에는 세계만방을 향해 국권 회복을 호소해보기도 했다.
그의 만년은 좌절과 암울과 분노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고, 통한으로 생애를 닫앗다. 하지만 그가 일생을 두고 쌓은 학문의 공은 알찬 열매로 남아 조선시대 유학의 마무리에 큰 줄기가 된다. 면우는 현종 12년인1846년에 경상도 단성현 사월리 초포촌(지금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에서 출생했다. 현풍곽씨로 아버지는 원조(源兆), 어머니는 해주 정씨였다.
두 아들중 막내인데, 아버지가 마을 뒤 석대산이 방안으로 드는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하여 어릴 적자를 석산이라 했다. 어른이 된 후의 자는 명원(鳴遠)이고, 면우는 스스로 지은호인데, 오두막집에 살면서 몸을 구부리고 드나든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한껏 도를 펴지 못하는 처지를 절감한 나머지, 스스로 우주에 몸을 움츠리고 사는 조그만 존재로 낮춰 겸손해 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원조는 호를 도암(道菴)이라 하는 가난한 선비로, 집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린 면우는 아버지 옆에서 맴돌며 놀곤 했는데, 아이들이 공부하는 걸 보고 듣는 사이에 어느새 혼자 외워버리곤 했다. 신기하게 여긴 아버지는 아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5세 때 19사(史)를 배우는데, 달 밝은 밤이면 어머니 등에 업혀 마당을 돌며 외웠다. 하룻밤에 한 권씩 외우는데 한 자도 틀리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정성이 돈독했다. 훗날 과거를 보게 된 것도 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서였다.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였고, 19세 때 대구 감영에서 치르는 증광시에 합격해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회시를 보았으나 실패했다. 이후 몇 번 시도하다가 30세 때 단념하고서 위기지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1세 때 「회와삼도(晦窩三圖)」를 지었는데, 제1도는 회암(朱子)을높이는 한편 신유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회헌(安珦)의 도맥을 이어 후세에 전해준 회재(李彦迪)를 배우겠다는 결의를 나타낸 것이고,
제2도는 회(晦)라는 글자가 스스로 몸을 숨겨 공부에만 힘쓴다는 뜻을 품고 있고, 달이 그믐(晦)이 되면 사그라졌다가 다시 초하루로 되살아나는 것에 착안하여 스스로 경계를 삼은 것이며, 제3도는 회가 매(每)와 일(日)로 합성되어 있으므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日新之工)’를 결의한 것이었다. 면우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도해에 각별한 정력을 쏟았다.
이는 응축된 언어와 집약된 논리로 일목요연하게 기본 구조를 나타내려는 노력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25세가 되던 겨울에 면우는 성주 대포로 한주 이진상을 찾아뵙는다. 이미 성리학에서 확고한 주견을 세우고 난 후였다. 연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
면우 곽종석 5년전, 2006년 6월 5일 첨부파일 ( 1 ) 아샤, kilo kilo | 당근이죠 http://blog.naver.com/kilokim/100019841049 면우 곽종석 다천서당:1921년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일제 암흑기 경상우도 지역의 선비들은 나라를 되찾기... blog.naver.com/ywknd 天 595984318^http://blog.naver.com/ywknd/120025221816^N595984318595984318^http://blog.naver.com/ywknd/120025221816^N
-
면우 곽종석 선생의 [자신을 경계하는 글 ] 5년전, 2006년 12월 22일 ://blog.naver.com/kwsk139/120032637059 카페 > 홍익학당 | 피터팬 http://cafe.naver.com/bohd/6862 면우 곽종석 선생의 [자신을 경계하는 글 ] 2006. 12. 22 박산 역 [회잠](晦箴, 어두운 곳에서 자신을 갈고닦아서 더욱... blog.naver.com/kwsk139 大學 - 인간의 길을 열다 594499274^http://blog.naver.com/kwsk139/120032637059^N594499274594499274^http://blog.naver.com/kwsk139/120032637059^N
-
면우 곽종석 의사의 독립 호소문 초고본 두루말이(19.5.. 4년전, 2007년 4월 6일 두루말이 (19.5×48cm) 부분 확대한 사진 - 곽종석(郭鍾錫) 선생에 대하여 - 곽종석(郭鍾錫)은 학자, 의사(義士), 字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 본관은 현풍(玄風)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조약의 폐기와... blog.naver.com/kwsk139 大學 - 인간의 길을 열다 593841964^http://blog.naver.com/kwsk139/120036505244^N593841964593841964^http://blog.naver.com/kwsk139/120036505244^N
-
산청의 인물 - 면우 곽종석 4년전, 2007년 11월 13일 이름이며, 자는 명원, 또는 연길, 호는 회와 또는 면우이다. 현종 12년(1846년 병오) 6월 24일, 단성면 사월리 초포동에서 그의 어머니의 꿈에 큰 돌산이... 펼친 나라가 몇인가? 이 시는 곽종석선생이 4세때 재주가 있음을 기이하게...
'http:··blog.daum.net·k2gim·'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26기 사단법인 유도회 부설 한문연수원 장학생 모집 (0) | 2011.01.09 |
|---|---|
| 草书写法 (0) | 2011.01.09 |
| 遊悟眞寺詩(유오진사시) - 백거이(白居易) (0) | 2011.01.08 |
| 물물이불물어물(物物而不物於物).글쓴이 / 이상현 (0) | 2011.01.08 |
| 문집의 정본을 만들어야 한다.글쓴이 / 김문식 (0) | 2011.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