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천석 주필
남의 것 얻어 쓰고 베껴 쓰고 훔쳐 쓰는 나라 운명 벗을 때…
카이스트 교수·학생 멍에 덜어주며, 서 총장에겐 힘 실어줘야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은 올해 우리 나이 일흔여섯이다. 손자들과 놀아주기에도 힘이 부칠 나이다. 그 나이에 아들뻘 교수, 손자뻘 학생들과 말이 토론이지 청문회나 다름없는 일정을 무슨 생각을 하며 감당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고등학생 때 아버지를 따라 건너간 미국에서 주(週) 25시간씩 잡일을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를 나왔다고 한다. 한국 유학생들이 다 그랬던 시절이니 이걸 두고 특별하달 건 없다. 그래도 모교 MIT의 기계공학과 과장으로 돌아와 이종(異種)학문과 접목(接木)해 새 시대에 맞춰가야 한다며 전공이 다른 교수들을 영입하다 동료 교수 절반이 등을 돌려 내쫓길 뻔했을 땐 마음고생 좀 했을 듯싶다. 한 해 수십억달러의 연구비 지원을 관장하는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의 차관보급으로 자리를 옮긴 다음 업무 방식에 반기(叛旗)를 든 1600여명 직원이 백악관에 자신의 해임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보냈을 때는 더 아찔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그에 대한 평가를 높여주는 걸로 끝났다. 팔순(八旬)이 내일모레인 그를 한밤중 카이스트 교정에 세워놓고 있는 것도 그 경험의 힘인지 모른다.
'개혁'의 한국적 정의(定義)는 '머리는 크나 갈수록 작아져 꼬리가 없는 동물'이다. 대학 개혁은 더 미끌미끌하기까지 하다. 개혁의 뜻이 컸던 총장도, 다른 영역에서 볼만한 성과를 거뒀다고 모셔온 총장도 이 미끄러운 동물을 움켜쥐지 못했다. 뜻을 굽히지 않으면 중도하차(中途下車) 해야 했고 뜻을 꺾으면 빈손으로 교문을 걸어나가야 했다. 유대인의 경전 탈무드는 '만장일치(滿場一致)는 무효'라고 말하고 있다. 만장일치의 뒷면에선 뭔가 꺼림칙한 속임수가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만장일치 개혁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게 이 나라 풍토다. '의료보험료는 낮추고 의료의 질은 높이고' '복지 예산을 늘리고 세금은 줄이고' 식(式)의 얼토당토않은 말이 개혁 완장을 차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교수도 반색하고 학생도 박수치는 개혁'이란 대학 총장 선거 공약(公約)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더구나 대부분 한국 대학은 총장을 교수 투표로 뽑는다. 그러니 총장 선거의 개혁 공약은 유권자를 개혁하겠다는 정치인의 공약처럼 빈말이 될 수밖에 없다. 서 총장의 전임자 로버트 러플린 총장은 노벨 화학상을 받은 스탠퍼드 대학 교수였다. 그는 '세계적 대학'이란 취임 때의 포부에 다가서 보지도 못한 채 2년 만에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것이 한국 대학의 현실이다.
아무리 좋은 저울로도 목숨의 무게를 달 순 없다. 목숨을 끊은 네 카이스트 학생과 세계 정상급 학자였다는 한 교수의 안타까운 죽음을 올려놓을 만큼 큰 저울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최고'와 '최우수'라는 단어가 운명적으로 딛고 선 천 길 낭떠러지를 절절하게 느꼈다. 하버드 대학 출신의 한 미국 작가는 자신의 모교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다룬 책의 제목을 '불완전한 천국(Halfway Heaven)'이라고 붙였다. 1996년 하버드 기숙사에선 4명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캠퍼스 전체론 20건의 자살미수 사건이 잇따랐다. 그 끔찍한 해의 최악은 에티오피아에서 건너온 가난한 여학생이 기숙사 같은 방의 베트남 여학생을 칼로 마흔다섯번이나 찔러 죽이고 목을 매 자살한 사건이다. 작가는 그 피범벅을 뒤쫓아가며 세계 최고 대학 학생이 겪는 불안과 고독과 좌절과 구원(救援) 없는 마음의 고통을 그려냈다. 책 속의 하버드는 천국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연옥(煉獄)으로 다가온다.
카이스트는 한국 대학의 꽃이다. 그 최고의 틀 안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겪어야 하는 아픔과 괴로움과 외로움은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와 함께 카이스트가 한국 대학 가운데 개혁의 기대를 걸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학이란 것도 진실이다. '한 곳에 미치지 않고선 남다른 경지(境地)에 이를 수 없다(不狂不及)'고 했다. 매사에 유·불리만 따져 주판알을 튀기는 나라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를 개척한 사람이 나올 수 없고 그런 나라는 백 년이 가도 남의 것을 빌려 쓰고 얻어 쓰고 베껴 쓰고 훔쳐 쓰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그 운명을 벗어던질 수 있느냐는 대학 개혁의 앞날에 달렸다. 카이스트 교수와 학생들이 지고 있는 마음의 멍에를 덜어줄 방안을 함께 고민하면서 세계 최고 대학의 가능성을 카이스트에서 읽고 어리석게만 보이는 도전에 몸을 던진 서 총장 어깨에도 힘을 실어줘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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