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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조성 1000년, 최치원 입산 1100여 년, 해인사 창건 1200여 년. 그 천년의 역사를, 길을 걸으며 되새겨본다. 해인사 천년역사길이다. 길은 한적하다. 예로부터 전란을 피해 은거할 제1의 장소로 꼽히던 가야산(사적 및 명승 제5호) 자락으로 난 길이다. 지금이야 팔다리 허리 다 잘리고 몸통만 덩그러니 남은 가야산이지만, 그나마 깊은 계곡이 십승지지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가야의 건국 설화를 지닌 정현모주와 이비하가 놀던 가야산 자락, 그 길에는 고운(孤雲) 최치원이 있고, 천년고찰 해인사가 있고, 구국의 심정으로 민심을 모아 만든 팔만대장경이 있다.
최치원이 누구인가? 최초의 우리 문자 이두를 만든 설총과 더불어 신라 이군자(二君子)로 꼽히는 최고의 천재적 인물이다. 이규보는 <백운소설>에서 ‘최치원은 천황(天荒)을 깨치는 큰 공이 있었으므로 우리나라 학자들이 모두 종장(宗匠)으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도 ‘문장으로 어느 누가 중화를 움직였나. 청화의 치원이 처음으로 칭찬을 받았네’라고 했다. 정지상은 그의 시에서 ‘최고운을 생각해 보니 / 문장으로 중국 땅을 진동시켰네 / 무명옷 입고 갔다가 비단옷 입고 돌아오니 / 나이는 스물아홉이 못 되었네’라고 노래했다.
고운과 관련된 유적은 전국에 50여 곳쯤 남아 있다. 경주 남산 아래 고운이 글을 올린 곳이라는 상서장이 있고, 부산 해운대는 그의 자 해운(海雲)에서 비롯됐다. 함양 상림은 그가 태수(지금의 군수)로 있으면서 조성한 숲이다. 가야산은 세상에 미련을 버린 후 학처럼 구름처럼 스며들어간 마지막 은둔처이며, 가장 많은 흔적을 남긴 곳이다.
그 가야산 자락 홍류동계곡에 최치원의 첫 흔적이 서려 있다. 바로 농산정(籠山亭)이다. 농산정은 그가 정자 앞 바위에 남긴 칠언절구 둔세시(遁世詩)에서 유래했다. 시가 바위에 새겨져 있어 제시석(題詩石)이라고도 부른다.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미친 물 바위 치며 산을 울리어)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키 어려워라)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세라)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롱산,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그의 후손들이 정자를 복원하며 마지막 두 글자를 따서 농산정으로 지었다. 정자엔 최치원의 시를 차운(次韻)한 김종직 등의 시도 걸려 있다.
- ▲ (위) 최치원의 마지막 흔적이 서린 해인사 옆의 학사대에서 상왕봉으로 가는 길은 아직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아래) 가야산 상왕봉 가는 길은 조릿대가 유난히 많으며, 봄이 되면 약용식물도 새순을 드러낸다고 손홍배 문화해설사가 귀띔했다.
- 대한팔경 중 으뜸 홍류동계곡에 길 조성 예정
홍류동계곡의 바위엔 온갖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분명 전국에서 유람 온 시인묵객들의 글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글을 아직 이렇게 방치하고 있다니. 안타깝다. 누가 언제 어떤 글을 남겼는지 궁금하다. 아직 정리된 자료가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다행히 지금이라도 홍류동계곡으로 천년역사길을 조성해서 안내하겠다니 천만다행이다.
현재 홍류동계곡으로는 길이 없다. 계곡 위로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뿐이다. 합천군에서 홍류동계곡 전체를 ‘해인사 천년역사길’로 조성할 예정이다. 지금은 기존에 다니던 길만 개통한 상태다. 홍류동계곡으로 걷는 길이 나면 전국의 어느 명소보다 볼 만하고 걸을 만한 길이 될 것 같다. 단풍이 들면 마치 붉은 물이 흐르는 듯한 홍류동계곡의 그 깊은 물에 기암절벽과 각종 글씨가 새겨진 암각까지 걷는 이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한 조건들이다. 원래 홍류동계곡은 대한팔경 중에 으뜸으로 꼽혔다. 뿐만 아니라 홍류동계곡이 있는 가야산 남쪽은 신선의 세계인 만수동(萬壽洞)이 있다고 전해왔다.
최치원은 이 길을 따라 가야산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당나라에서 그의 학문과 명성을 드높였지만 정작 고국인 신라로 돌아와서는 골품제 탓에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좌절한 모습을 보였다. 천하의 최치원도 어찌할 수 없는 두터운 신분의 벽이었다.
<계원필경>에 나오는 시 ‘秋夜雨中(추야우중)’이 그의 절절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秋風惟苦吟(추풍유고음, 가을바람 맞아 그렇게 괴로이 읊었건만)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내 뜻 알아주는 사람 이 세상에 적구나)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창밖에 비 흩뿌리는 이 한밤중)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불을 앞에 두고 마음은 만 리 저쪽)’
당시 신라엔 과거제도는 없었고 진골이라는 혈통만이 출세가 보장되는 시대였다. 6두품 출신의 최치원이 신라보다 훨씬 개방적인 당나라에서 당당히 실력으로 과거에 합격하고 화려한 관직까지 지낸 뒤 돌아왔으니, 당연히 신라를 바꾸려 했을 것이다. 그의 나이 30도 안 된 29세(885년) 때였다. 넘치는 혈기로 진골 중심의 폐쇄적인 신분체제와 사회적 모순의 극복방안을 충분히 모색했으리라. 더욱이 당나라 말기의 망해 가는 모습을 지켜본 터라 신라도 빨리 바꾸지 않으면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역으로는 진골들의 집중적인 견제와 시기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쩌면 최치원의 좌절은 그의 운명에서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는 실제로 중앙정부의 진골들로부터 집중적인 견제를 받고 철저히 소외당했다. 함양 태수로 간 것도 그런 연유였다.
그는 미련 없이 처자를 데리고 세상을 등졌다. 898년 그의 나이 42세 때다. 최치원이 떠난 것은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신라의 불행이었다. 최치원을 버린 신라는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끝내 운명을 고한다. ‘어릴 때부터 산에 들어가서 사는 게 꿈이었다’는 대목이 그의 저서 <계원필경>에 나온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올라가는 길에 마침 산문 밖으로 나서는 한 노승과 마주치자 그의 심경을 담은 입산시 한 편을 남겼다.
‘僧乎莫道靑山好(승호막도청산호, 스님아 청산이 좋다 말하지 마오) 山好如何腹出山(산호여하복출산, 좋다면서 어찌 다시 산을 나오나) 試看他日吾踪跡(시간타일오종적, 뒷날 내 종적 한 번 두고 보겠나) 一入靑山更不還(일입청산갱불환, 청산에 한 번 들면 다시 안 돌아가리)’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홍류동계곡의 깊이를 절감할 수 있다. 농산정에서 100m쯤 위에 있는 낙화담은 빙벽등반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얼음이 크고 높게 얼어 있다. 쳐다만 보고 있어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여태 무심코 지나친 길을 이제 유심히 쳐다보니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다.
홍류동계곡을 즐기는 사이 어느새 천년고찰 해인사 입구에 도착했다. 일주문이 저만치 보인다. 성철종정 사리탑도 있고, 사명대사와 김영환 장군 등 해인사와 관련된 인물들의 공적비도 여기저기 있다.
여러 탑 중 하나가 유독 눈에 띈다. 해인사 길상탑이라 불리는 삼층석탑이다. 이정표에 의하면 길상탑은 훈혁스님이 895년에 세운 위령탑으로 전형적인 신라 계통의 3층탑이다. 약 3m 높이의 이 탑 속에서 최치원이 쓴 탑지, 157개의 소탑 등 유물들이 나왔다.
- ▲ 1 일주문을 지나 해인사 경내로 들어서는 길에 연인이 다정하게 걷고 있다. 천년고목이 가로수로 있어 매우 운치 있는 길이다. 2 해인사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포근한 듯하면서도 홍류동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매우 차가워 겨울엔 다른 지역보다 춥다. 3 해인사 경내에서 해인도 따라돌기를 하고 있는 불자들. 4 최치원의 자취가 서린 농산정과 그 앞에 있는 비석. 비석엔 ‘고운최치원선생둔세지’라고 쓰여 있다. 5 최치원이 마지막 흔적을 남긴 곳으로 알려져 있는 학사대. 그가 사용하다 꽂은 전나무 지팡이가 살아나 천년고목의 자태를 보여준다. 6 해인사 경내로 들어가는 문은 첩첩이 의미심장한 문구로 쓰여 있다.
- 사명대사 비석·성철종정 사리탑 등 유적 많아
탑지는 당시의 사회상황과 탑의 건립내역을 아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895년에 쓴 최치원의 ‘해인사 길상탑지’에 따르면 ‘신라 진성여왕 9년(895)을 전후해 7년간에 걸쳐 궁예와 견훤의 싸움에 흉년으로 굶주린 장병들을 위해 당시 해인사의 훈혁스님이 농촌으로 다니면서 벼 한 단씩을 희사시켜 군량을 충당하고, 그 나머지는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또 ‘이는 오로지 전란에 죄 없이 목숨을 잃은 고혼들의 명복과 국태민안을 빌기 위하여 세우게 되었는바 조각담당은 난교스님이었고, 탑의 높이는 13척, 소요물품은 황금 3푼, 수은 11푼, 동 9정, 철 260칭, 탄 80석, 벼 20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탑지는 당시의 사회상황과 탑의 건립내역뿐만 아니라 최치원의 개인적인 부분까지 엿볼 수 있게 한다. 짐작컨대 최치원은 신라의 국운이 다한 것을 알고 다시 일으켜 세우려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가야산으로 들어갈 시기만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공덕탑과 비석거리 바로 위에는 영지(影池)라는 연못이 있다. 한때 가야산 정상 칠불봉과 상왕봉 능선이 연못에 그대로 비쳐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지금은 연못이 줄어들어 능선이 비칠 정도가 아니라 능선이 겨우 보일 정도로 변했다.
이제 해인사 일주문이다. 해인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이며, 양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와 더불어 삼보사찰 중의 하나다. 일주문 올라가는 길 양옆으로 천년은 족히 된 듯한 노거수들이 가로수로 늘어서 있다. 제법 운치가 있는 풍경이다.
해인(海印)이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유래한 것으로, 득도한 이후의 청정한 마음을 일컫는다고 한다. 일주문에서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까지 108계단이다.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고 팔만대장경을 보라는 의미다. 물론 중간에 대적광전, 사명대사가 창건했다는 홍제암 등도 지나친다.
팔만대장경은 1011년 강화도 선원사에서 최초의 목판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을 발원한 이래 1251년 팔만대장경이 완성됐다. 이규보(1168~1241)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판각 동기가 나와 있다.
‘현종 2년(1011)에 거란이 침입하여 현종이 난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했으나 물러가지 아니하여 군신이 무상의 대원을 발하여 경판을 새기기를 서원한 후에 비로소 거란병이 물러갔나이다.(후략)’
당시 고려는 초조대장경의 판각을 통해 불심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려 했다. 이것이 고려에서 처음 만들어진 대장경으로 송나라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판각한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소실됐다. 그리고 다시 대장경 판각을 완성(1251)한 것이 지금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세계 최대의 목판본으로 국보 제 32호이며,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이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 역시 국보 52호이면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이 팔만대장경이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디면서 세 번의 큰 수난을 겪었다.
그 첫 위기가 임진왜란이다. 당시까지 가야산은 십승지지의 오지로 전혀 훼손되지 않은 상태였다. 해인사가 너무 깊은 오지라 왜군이 들어오지 못한 덕분에 다행히 원형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조선총독부 데라우치 총리는 대장경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 양이 너무 많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대장경의 규모는 세로로 쌓으면 경판수가 8만1,350장으로 백두산 높이가 되며, 4톤 트럭 70여 대분에 해당한다고 한다. 한문에 능숙한 사람이 하루 8시간씩 30년을 꼬박 읽어야 전부 읽을 수 있고, 5,200만 자의 글자도 마치 한 사람이 쓴 듯한 똑같은 필체를 자랑한다.
6·25 전쟁 때에도 해인사가 폭격당해 사라질 뻔했다. 지리산의 북쪽 끝 지점과 연결되는 가야산은 빨치산의 거점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잦았다. 연합군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김영환 대령이 폭격하지 않고 직접 소탕에 나서 보호했다고 한다. 김영환 대령의 공적비는 비석거리에 있으며, 해인사에서 매년 봄 추모제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