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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학에서 초학으로 : 사상사 연구의 방향성에 관한 성찰.글쓴이 노관범.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굴어당 2011. 4. 18. 20:48

한 학자의 일생에서 초학과 만학은 다르다. 학문을 시작하는 시기가 초학이라면 학문을 완성하는 시기가 만학이다. 초학과 만학의 시기는 학자마다 다를 수 있지만 아호(雅號)의 출현이 한가지 준거점이 될 수는 있다. 명종대 예안의 산중에서 비로소 ‘퇴계’로 거듭난 이황의 일생에서 그 이전 중종대의 이황은 퇴계 이전의 퇴계였다. 순조대 강진의 유배지에서 비로소 ‘다산’으로 거듭난 정약용의 일생에서 그 이전 정조대의 정약용은 다산 이전의 다산이었다. 퇴계 이전의 퇴계, 다산 이전의 다산은 만학의 전형성에 가려진 초학의 신세계이다. 여기 경상도 선산 임은 출신의 유학자 허훈(許薰 1836~1907)이 있다. 이황-정구-허목-이익-안정복-황덕길-허전의 학통을 계승하는 인물로 그 문하에서 장지연이 배출되었다. 그는 만년에 도산서원의 동주(洞主)와 병산서원의 원장(院長)을 지내며 퇴계학의 정점에 올라섰지만 기실 그가 초년에 몰입했던 학문은 조선시대 육경고학의 주창자인 허목의 고학이었다. 허훈의 경우 초학을 어떻게 형성해 나갔는지 아래에 그가 허목의 저술 『기언』에 부친 간단한 글을 읽고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세상에서 문집이 유행함은 옛스럽지 않은 것이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문화가 더욱 번성하고, 문화가 번성할수록 원기가 더욱 분열되어 고문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된 후에 문집이 출현한 것이다. 진(晉)ㆍ당(唐) 이후 경생(經生)과 숙유(宿儒)가 각각 자립해서 자기 글을 모아 불후의 저작으로 전하기를 도모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이 옛날과 어긋나고 도를 등졌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송조(宋朝)가 되어 치교가 밝아지니 정(程)ㆍ주(朱) 노선생들이 나타나 언어를 다듬고 가르침을 세워 과거의 성현을 이어 후학을 열어 주었다. 즉, 한 글자 한 마디가 모두 경전을 돕는 것이었고 천지에 영원히 전해질 문자였다. 끊어진 학문을 다시 밝히자니 주소(注疏)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고, 미세한 이치를 분석하자니 논변이 넓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말류의 폐단으로 마침내 지리함과 방만함의 문제점이 발생하였고 순박하고 옛스런 글은 더욱 다시 희미하게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도산(陶山) 선생(=이황)이 국조(國朝)의 전성기에 태어나 주자(朱子)가 남긴 학문을 직접 접하고 공맹으로 거슬러 올라가 근원과 소통하고 유파를 인도하여 속학의 잘못을 씻어 냈다. 한강(寒岡) 정선생(=정구)은 도산 선생의 도를 전수받아 남방에서 학문을 제창하였고, 미수(眉叟) 허선생(=허목)은 그에게 가서 종유하여 학문의 지결을 얻어 들었다. 사문(斯文)의 정맥이 이에 귀결처가 생겼다. 연원의 적실함과 도통의 계승됨이 환히 해와 별처럼 빛나게 되었으니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닌가.


선생은 소싯적에 고문을 독실하게 좋아하여 백수(白首)가 되도록 하루 같았고 공력이 깊어지자 진(秦)ㆍ한(漢) 이후의 경지를 넘어섰다. 매양 글을 지음에 단어 하나 구절 하나라도 삼대가 아니면 법으로 삼지 않았다. 수천 년 후에 태어나 수천 년 전의 법과 합하려 하였으니, 이 어찌 선생이 힘써 배운 것만으로 이룩할 수 있었으리오. 실로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삼대의 빛나는 기상을 붙잡아 선생을 빌어 발휘케 한 것이다.


대개 선생이 태어났을 때는 명나라가 국운이 다하고 오랑캐가 차츰차츰 천하의 황제가 되려는 기상이 있었다. 하늘도 중국이 멸망하는 날 삼대의 학문을 만회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기운과 질서는 순환하는 법이라 끝내 없어질 수는 없기에 필시 우리나라에서 이를 잇기 위해 선생 같은 분이 났으리라.


선생의 글은 간략하지만 갖추어져 있고 자유롭지만 엄격함이 있다. 마치 하늘이 낳고 땅이 기르는 것, 해와 달과 별이 운행하는 것, 비바람과 계절이 오고가는 것, 산천과 초목과 짐승과 오곡이 자라는 것, 사람의 도덕과 사물의 법칙, 시서와 육예의 가르침, 기쁘고 성내고 슬프고 즐거워하는 감정, 귀신과 요물과 괴물의 이상함, 풍기와 속요의 같지 않음, 현인과 열사와 정부(貞婦)와 간인과 역적을 경계함이 하나같이 글에 깃들어 있다. 그런데, 선생은 언젠가 손수 스스로 글을 찬정하고 ‘기언(記言)’이라 이름 붙였다. 그 차례와 표제가 근세의 문집과는 관례가 다르다.


이어서 생각해 보니 나는 늦게 태어난 후학으로 구령(九嶺)과 미강(湄江) 사이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했고, 『기언』 한 질을 잡아 만의 하나라도 헤아려 몽매함을 없애려 하였으나 집에 소장한 것이 없어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계해년(1863년) 겨울 유하(柳下) 정(鄭) 어른께 한 질을 빌렸다. 정 어른은 한강선생의 후손이다. 삼가 받아 모두 읽은 다음 사람을 시켜 전사(傳寫)하게 하였다. 삼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그러나 별집에 빠진 부분이 있어서 아직 완본이라 할 수는 없었다. 금년 여름 계당(溪堂) 어른(=유주목)을 뵙고 마침 말이 여기에 미치자 계당 공이 두 책을 주었다. 마침내 책을 완성하고 삼가 책 끝에 한마디 말을 붙이니 감히 함부로 논술하려는 것이 아니고 평소 공경하는 마음을 깃들이려는 것일 뿐이다.

〈원문〉

世之行文集。非古也。世降而文愈繁。文愈繁而氣愈分。古文不作。然後文集出焉。晉唐以來。經生宿儒。各立編袠。以圖不朽者。不可數計。其違於古而偭於道。均也。及夫宋朝休明。濂閩諸老先生出。而修辭立訓。繼往而開來。則雖隻字片言。皆羽翼經旨。爲天壤間不刊文字。絶學是明。故注疏不得不作。微奧是析。故論辨不得不博。而末流之弊。遂病於支離汗漫。淳古之文。益復寢息。我東陶山夫子。生於國朝盛時。直接考亭遺緖。泝以上乎洙泗。疏源導流。洗俗學之訛謬。寒岡鄭先生得儔夫子之道。倡學南服。眉叟許先生。往從之遊。獲聞旨訣。斯文正脉。於是有歸。淵源之的。道統之來。昭乎如日星之明。曷不偉矣哉。先生自少時篤好古文。至白首如一日。用工深至。不作秦漢以下人。每爲文。一言一句。非三代不法。生於數千載之下。而合轍於數千載之前。是豈先生力學之可辦得。實天佑東方。把三代雍煕氣像。借先生手而發之也。葢先生之生。皇明運否。黑漢駸駸。有帝天下之象。天不欲挽回三代之學於神州陸沈之日。而氣機循環。又不可終泯。故必于吾東而鍾之。有如先生者作。其文簡而備。肆而嚴。如天地之化育。日月星辰之運行。風雨寒暑之往來。山川草木鳥獸五糓之資養。民彝物則。詩書六藝之敎。喜怒哀樂之感。鬼神妖祥物怪之異。風氣謠俗之不同。賢人烈士。貞婦奸人。逆豎之戒。一寓於文。而先生嘗手自纂定。名之曰記言。其序列標題。亦與近代文集異例也。仍念余後學晩生。旣不得親承謦欬於九嶺湄江之間。欲把記言一書。庶幾窺測其萬一。以去蒙陋。而家無藏弆。區區私恨。其無竆已。癸亥冬。幸借一袠於柳下鄭丈。鄭丈寒岡先生之後裔也。敬受而俯讀訖。倩人傳寫。歷三歲始就。然別集有遺漏。姑未完寫。今夏往拜溪堂丈人。語適及此。溪堂公遺以二冊。遂乃了書。敬附一語於末簡。非敢妄有所論述。聊以寓平日執鞭之心云爾。

 

- 허훈(許薰), 〈『기언』의 뒤에 쓰다(書記言後)〉, 《방산집(舫山集)》


 

해설〉    
학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인이 남긴 불멸의 경전은 나의 삶을 변화시키는 규범이다. 경전은 단순한 글이 아니다. 그 안에는 도(道)가 담겨 있다. 경전은 도를 드러낸 우주적 말씀이다. 나는 자연에서 도를 묵상하며 나의 삶을 변화시킨다. 나는 일상에서 도를 준수하며 나의 삶을 변화시킨다. 경전의 앎과 나의 삶이 도에 의하여 서로 혼연일체가 되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의 길이다. 그렇기에 동양/서양, 자연/역사, 불변/변화의 구도에서 유교 문화를 불변의 코드로 읽었던 유럽인의 오리엔탈리즘은 성리학에 내재한 변화의 열정을 읽지 못한 무지일 따름이다.


학문의 본질이 변화이기에 학문은 ‘학문[學]’이라는 명사형으로 존재하지 않고 ‘학문하기[爲學]’라는 동사형으로 존재한다. 나의 학문은 ‘학문하기’의 시간적 주기에 따라 초학과 만학으로 구별될 수 있다. 초학과 만학은 학문의 내용에서 보자면 학문의 성취가 뚜렷한 만학이 학문의 성취가 미약한 초학보다 찬란하게 보인다. 그러나 학문의 마음에서 보자면 초학의 마음과 만학의 마음은 다르지 않다. 아니, 학문하는 마음을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초학이 그렇지 못한 만학보다 학문의 진경(眞景=眞境)에 가까워 보인다.


초학의 학문하기는 논문이나 저술과 같은 틀에 박힌 학문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황(李滉)은 열아홉의 나이에 어렴풋이 도와 만난 느낌을 네 줄짜리 간단한 시로 읊었다. 십여 년간 숲 속 초당에서 만 권 책을 읽었다는 그는 어느 날 도와 만난 느낌을 ‘태허(太虛)를 본다’는 시구로 표현했다. 초학의 그 가슴 떨린 느낌은 이황의 평생을 지배했다. 생애 마지막 칠순의 나이에 자신의 학문을 회상한 그는 역시 ‘태허를 본다’는 시구로 자신의 학문을 요약할 수 있었다.


이이(李珥)는 스무 살의 나이에 자기 인생을 새로 시작하면서 스스로 성찰한 글, 곧 자경문(自警文)을 지었다. 어머니를 사별하고 금강산에 입산했다가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온 청년은 변화와 혁신의 마음으로 가득했다. 자경문에서 첫 번째로 다짐한 것은 뜻을 크게 가져 기어이 성인이 되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초학의 그 확고한 의지는 이이의 평생을 지배했다. 뜻을 세우라는 것, 곧 입지(立志)는 훗날 자신의 삶의 변화는 물론 타인의 삶의 변화를 위한 초석으로 거듭 강조되었다. 그것은 향촌의 자제들을 올바른 사람으로 깨우치는 격몽(擊蒙)의 제일의 원리이자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임금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덕목으로 제시되었다.


허훈의 초학은 허목의 『기언(記言)』을 통독한 후 지은 간단한 독후감 위에서 빛나고 있다. 옛길[古道]을 걷고 싶다. 옛글[古文]을 짓고 싶다. 혼란한 난세에 성장한 허훈의 마음은 시속을 초월하려는 고학(古學)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의 이십대는 철종 말 고종 초의 시기, 절망의 현실과 변혁의 소망이 동시에 혼재하던 시기였다. 삼남 지방을 휩쓴 임술민란(1862년)의 전야, 과거 시험을 완전히 단념한 그는 스물여덟 살(1863년)에 그가 그토록 흠모하는 학자가 남긴 저술과 마주쳤다. 조선시대 육경고학(六經古學)을 수립한 허목의 『기언』 전질이었다.


허훈은 『기언』을 통독하면서 초학을 시작하였다. 그는 『기언』을 일독한 후 무려 삼 년에 걸쳐 필사 작업을 진행하였다. 도중에 허목의 학풍을 계술한 허전이 자신의 관향인 김해에 외임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옛길을 행하고 옛글을 짓는 당대의 종사가 허전이라는 생각에 김해에 가서 허전을 만나 문인이 되었다. 훗날 허전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미수(眉叟=허목) 선생이 힘껏 육경 고학을 제창하니 성호(星湖=이익), 순암(順菴=안정복)이 계승하고 다시 하려(下廬=황덕길)에 왔네[眉翁力倡古詩書, 星順相承又下廬]’라고 하여 허전의 학맥이 허목의 학풍을 계승한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허훈은 삼 년에 걸친 필사 작업을 마쳤지만 필사 저본이 불완전했기 때문에 다시 정본을 빌려 별집의 누락된 부분마저 보충하였다. 『기언』의 완본을 가장(家藏)하는 기쁨의 순간이었다. 그 누구의 『기언』도 아닌 허훈 자신의 『기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기언』의 끄트머리에 독후감을 기록하였다. 지면의 제약으로 짧은 분량 안에 최선을 다해 허목이 추구한 옛길과 옛글의 핵심을 적었다. 마지막 화룡점정이었다.


허훈에게 『기언』의 완성은 초학의 정립을 의미했다. 그는 서른두 살(1867년) 때 개령(開寧) 지천(芝泉)에 이주하여 학문의 터전을 세웠고 이때부터 방산(舫山)이라 자호하였다. 『기언』의 완성에 용기를 얻어 자신의 기왕의 저술에 ‘수언(修言)’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허목의 『기언』, 그리고 허훈의 『기언』, 그리고 허훈의 『수언』.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언』이 허목의 작품일 뿐만 아니라 허훈의 작품일 수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언』이 허목의 빛나는 만학일 뿐만 아니라 허훈의 신선한 초학일 수도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만학 중심의 사상사 연구 풍토에서 초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가?


ㆍ참고사항
글쓴이 노관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