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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광해군·인조 때도 궁궐로 사용 일제 때 전각 없애고 절반 크기 축소. 경기여고 자리에 복원되는 덕수궁

굴어당 2011. 4. 30. 09:07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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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897년 즉조당에서 대한제국 선포
1905년 중명전에서 비극의 을사늑약
이승만 정권 때는 길 정비 이유로 담 옮겨
▲ 덕수궁 전경 photo 조선일보 DB
지난 4월 20일 문화재청은 용산 미군기지 내 국방부 소유 부지와 미 대사관이 보유한 중구 정동 옛 경기여고 부지를 교환하는 방안이 최종 합의됐음을 발표했다. 옛 경기여고 부지는 원래 덕수궁 터로서 흥덕전(興德殿), 선원전(璿源殿) 등의 건물이 있었던 곳이다. 정부는 이 지역을 문화재청으로 하여금 덕수궁 복원에 활용하게 할 방침이어서 덕수궁이 원 모습을 찾을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담장으로 둘러싸인 덕수궁 영역은 원래 덕수궁의 모습이 아니다. 원래의 덕수궁은 2009년 복원된 중구 정동의 중명전(重明殿) 일대를 비롯해 현재의 미국 대사관저 지역까지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경역(境域)뿐만 아니라 덕수궁은 오랜 역사도 갖고 있다. 흔히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의 궁궐로 이해하지만, 그 기원은 조선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92년의 임진왜란은 덕수궁이 궁궐로 본격적으로 기능을 하게 하는 주요한 계기가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란 갔던 선조가 1년 반 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경복궁·창덕궁 등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그래서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해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았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으로, 예종 사후 왕위 계승의 1순위에 있었지만 왕이 되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다.
   
   
   광해군 때 ‘경운궁’으로 불려
   
   임시 행궁이었던 덕수궁에서 계속 머물던 선조는 이곳의 정전(석어당으로 추정)에서 승하하고, 뒤를 이어 광해군은 이곳 서청(西廳)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광해군은 전란 후 소실된 궁궐의 재건 작업에 힘을 기울여 1611년(광해군 3년) 창덕궁을 완공한 후 창덕궁을 정궁(正宮)으로 삼았다. 광해군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전까지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현재의 덕수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했다. 광해군은 1618년 사이가 좋지 않았던 계모 인목대비를 경운궁으로 유폐했다. 당시 경운궁이 정궁의 서쪽에 있어서 이 사건을 서궁(西宮) 유폐라고도 한다. 이후 경운궁의 위상이 하락하면서 궁궐의 규모도 축소됐다. 1618년(광해군 10년)에는 경운궁의 건물을 헐어서 경덕궁(현재의 경희궁) 공사의 재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머물던 창덕궁을 접수한 반정군은 곧바로 경운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반정의 명분으로 제시했던 ‘폐모살제(廢母殺弟·어머니를 유폐시키고 동생을 죽임)’의 주인공 인목대비가 이곳에 있어 반정을 공식적으로 승인받기 위함이었다. 인조는 직접 인목대비를 찾아뵙고 이곳에서 즉위식을 올렸는데 별당인 즉조당(卽祚堂)으로 추정된다. 이후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건물만을 남기고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의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인조 이후 경운궁은 왕실의 관심에서 더욱 멀어졌다. 국왕이 직접 찾은 것도 1773년(영조 49년)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週甲·180년)을 맞아 배례를 행하고, 선조의 기일에 세손인 정조와 함께 즉조당에서 기념식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고종, 영광을 꿈꾸다
   
   광해군 이후 280여년간 비어 있던 경운궁이 다시 궁궐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897년 고종이 이곳에 돌아오면서부터다. 고종이 돌아오게 된 데는 1880년대부터 조선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된 청나라, 일본, 그리고 서구 열강의 세력 다툼이 있었다. 1880년대는 청, 일본, 서구 열강이 조선에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던 시기다. 이 시기에 일본은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 내정에 깊숙이 간여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은 ‘삼국 간섭’을 통해 일본의 세력 확장을 저지했고, 상황의 불리함을 느낀 일본은 1895년(고종 32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피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고종은 심한 충격과 함께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친러파의 지원을 받아 1896년 2월 11일 새벽 정동 근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했다.
   
   그러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상소가 계속되고, 스스로도 일국의 군주로서 손상된 체면을 회복하고 국권을 자주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환궁을 했다. 하지만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경복궁 대신 경운궁으로의 환궁이었다. 1897년 2월 20일의 일이었다.
   
   그후 고종은 경운궁을 대한제국의 산실로 삼았다. 1897년 9월 회현방 소공동에 환구단을 조성했고,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행했다. 같은 날 즉조당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았으며 국호를 ‘대한’으로 했음을 선포했다.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위상이 높아진 경운궁에는 중화전, 선원전, 흥덕전, 존명당, 보문각, 사성각, 정관헌 등의 건물이 축조됐고 그 경역도 확장됐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한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경운궁은 불운했던 근대사의 비극의 현장으로 전락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위협과 압박 속에서 경운궁 중명전에서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은 비극의 서막일 뿐이었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내외에 천명하고자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3인의 밀사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위에서 물러났다. 고종이 퇴위한 다음달 대한제국의 연호는 융희로 결정됐고, 태황제인 고종의 궁호(宮號)가 덕수(德壽)로 정해지면서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불리게 됐다. 고종의 퇴위 후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고종은 계속 덕수궁에 남았다. 쓸쓸한 고종에게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회갑 때인 1912년에 낳은 딸 덕혜옹주였다. 고종은 편전인 준명당(浚明堂)을 옹주의 유치원으로 활용하게 하는 등 딸에게 온갖 신경을 썼다. 그러나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함으로써 덕수궁의 주인도 사라져버렸다.
   
   
   1986년 미 대사관 측에 일부 부지 넘겨
   
   1931년 이왕직(李王職·조선 황실이 격하된 명칭)은 덕수궁의 3만3000여㎡(1만여평)를 ‘중앙공원’으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덕수궁의 부지는 약 6만6400㎡(2만100평)였는데, 절반 정도의 지역을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1932년 4월부터 덕수궁 내 전각 수리, 정원 수축이 진행되는 등 일제가 실질적인 권력을 주도한 상황에서 덕수궁의 위상은 낮아져만 갔다. 현대에 와서도 덕수궁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영역은 계속 축소됐고 주요한 전각들이 사라졌다. 1957년 산업 기술 전람회를 개최하면서 중화전 내부를 개조해 전시장으로 만들자 이를 비판하는 여론이 일어 다시 원상 복귀시켰으며,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은 길을 정비하면서 덕수궁 돌담을 헐고 밖에서 궁 안이 보이도록 철책으로 설치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1961년 12월 덕수궁 돌담을 해체하고 철책으로 두르는 공사가 진행됐고, 이와 함께 태평로의 도로 폭이 6m 확장되면서 대한문은 6m 밖으로 밀려났다. 1968년에는 덕수궁 담을 16m 뒤로 옮기되 대한문은 그 위치에 둔다는 결정을 내렸고, 결국 덕수궁은 담과 문이 뚝 떨어진 형세가 됐다. 대한문이 고립되자 다시 문제가 됐고, 담을 옮긴 지 1년 반 만에 대한문도 담 위치에 따라 옮겨졌다. 1980년대 이후 덕수궁의 역사적 의미가 부각되면서 덕수궁을 옛 모습으로 복구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지만, 1986년 덕수궁 부지 일부를 미국 대사관 측에 넘겨줌으로써 덕수궁의 원형을 찾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제 덕수궁의 원래 부지를 돌려받는 것을 계기로 이 지역에 위치했던 덕수궁의 전각들을 복원시키고, 그 속에 담긴 역사를 널리 알려나가야 한다. 선조, 광해군, 인조가 거쳐 가고, 고종이 대한제국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공간 덕수궁. 덕수궁이 보다 완벽한 모습을 찾아갈 때, 그 영광과 수난의 역사들은 우리에게 보다 생생하게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