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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백인제. 외과의학의 개척자 백병원 설립 6·25전쟁 중 피랍

굴어당 2011. 6. 18. 09:28
세계 첫 장감압술 성공 혈액은행 설립 주장도
백병원 열자마자 문전성시 피랍 후 조카 백낙환이 맡아

학창시절 줄곧 수석 구루병 연구로 도쿄제대서 박사
“神技에 가까운 수술 솜씨” 일본·만주서 환자 찾아와

photo 백낙훤
백인제(白麟濟)는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 이전까지 외과수술의 최고 권위자로 꼽혀온 한국 현대의학의 개척자이다. 그는 경성의과전문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일본 도쿄제국대학 의학박사가 됐으며 오늘날 백병원의 전신인 백인제 외과의원을 광복 전에 개원했다.
   
   백인제는 1899년 1월 28일 평북 정주군 남서면 남양리 424번지에서 백희행(白禧行)과 청주 한(韓)씨 사이의 4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정주군 남서면은 바닷가 마을이다. 그가 살던 부호라는 포구는 달천강 하구를 거쳐 수로 30리의 남쪽, 숙섬을 바라보는 곳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병어, 숭어, 농어, 민어, 복어, 조기 등 서해에서 나는 물고기는 없는 것이 없었다. “내 고향 부호는 항상 풍년이었고 부업으로 어업, 축산 등도 성해 풍요롭고 인심이 좋은 농어촌이었다”고 조카 낙환(86)씨는 회상한다.(‘백낙환 외길 70년’)
   
   관향은 수원(水原)으로 정주파에 속한다. 백인제의 고조부가 영조 때 한성좌윤(서울시 부시장)을 지낸 백경해, 증조부가 정조 때 병조참의·우승지를 지낸 백종걸이다. 백종걸은 시훈과 시중 형제를 낳았으며, 백시훈의 아들이 3·1만세운동을 배후에서 뒷받침한 현상윤 전 고려대 총장의 장인이자 오산학교 초대교장인 백이행으로, 이승훈과 함께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백시중의 아들이 백인제의 부친 백희행이다.
   
   한문을 공부하던 백인제는 1906년 당숙 백이행이 세운 부호육영학교에 입학하며, 1912년 오산학교에 입학한다.
   
   “백인제가 4년의 재학기간 동안 한번도 수석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며, 그뿐만 아니라 만학이 많던 시절이라 다른 학우들보다 어린 나이에도 리더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교장과 교사들의 재임 기간이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백인제가 재임하는 기간 동안 이종성·나부열·박기선·조만식 등이 교장을 지냈으며, 교사로는 여준·윤기섭·이광수 등 당대의 민족운동가와 재사들이 있었다.”(‘선각자 백인제’)
   
   백인제는 1914년 광주(廣州) 이씨와 결혼하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한다. 학업에 열심히 정진하여 오산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4년 동안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1919년 백인제는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퇴학 처분을 받음과 동시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당시 경성의전 후배 한규환의 증언이다.
   
   “3월 1일, 독립선언문과 함께 태극기를 후암동 일대에 뿌리고 곧장 파고다공원으로 가려다가 만세를 부르고 나오는 인파와 종로통에서 합류했어요. 얼마 안되어 일본 순사에게 연행되어 종로경찰서로 끌려갔어요. 그때 보니 백인제 선생도 연행되어 왔더군요. 백인제 선생은 그때 경성의전의 학생대표로 활약했었어요.”(‘한국의학의 백년야사’ 의사신문 1972년 6월 5일자)
   
   백인제는 예심 판결을 거친 뒤 이듬해 열 달 만에 출옥한다. 3·1운동의 최고 지도급 인사들의 최대 형기가 3년이었음을 보면 백인제는 학생 신분으로서는 주범급으로 일제가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감옥 문을 나오니 한없이 도망가고 싶더라. 이 조선땅이 아닌 곳으로 한없이 도망가고 싶더라”고 말했다고 장기려가 전했다.(‘장기려 박사 회고록’) 실제로 백인제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려다 친구의 만류로 1920년 4월, 4학년생으로 복교하였고, 이듬해 3월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한다.
   
   백인제는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총독부 의원에서 2년간 더 임상공부를 해야만 의사면허를 주겠다고 하자, 외과학 교실에서 조수가 되지 못하고 부수(副手)로서 2년간 마취를 전담한다. 이것은 그의 의사 생애로서는 전화위복이었다. 마취 전문의가 없던 시절, 마취는 외과의사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가 훗날 외과의사로 대성할 수 있었던 데는 탁월한 마취 솜씨도 한몫 단단히 했던 것이다. 그는 또 의학 연구에 정진해서 당시 저명한 의학자 키리하라 교수와 공저로 학계 데뷔 논문을 발표하는 학문적 수확을 거둔다.
   


   백인제는 1923년 의사면허증을 받은 후, 총독부의원과 경성의전 외과 강사를 지내면서 의사 및 의학 연구자로 성장한다. 그는 1928년 구루병에 관한 연구로 도쿄제국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도쿄제대 의학박사가 됐다.
   
   “키리하라 교수는 그때 혈액형에 관한 연구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그분의 연구 업적의 훌륭한 성과가 우리 백 선생님의 협조에 의하여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신임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외면으로 나타나는 행동이나 태도로서는 키리하라 교수와 백 선생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백 선생님은 수술 중에 조수가 잘못한다거나 실수하면 팔꿈치로 조수의 손을 밀어젖히거나 큰소리로 타박을 주거나 또 ‘소 같은 힘을 주었구나’ 하는 식으로 야단쳤기 때문에 조수 중에는 수술 시 옆에 서는 것을 두려워 하여 손이 벌벌 떨리는 사태까지도 있었다고 합니다.”(조진석 ‘백인제 선생 회고좌담회’)
   
   백인제는 이어서 1928년 경성의전의 외과 주임교수가 된다. 당시 한국 학생이 경성의전에 입학한다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고, 한국인 교수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특히 한국인 주임교수는 미생물학 교실의 유일준밖에 없었다. 백인제는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던 경성의전 외과 주임교수가 된 것이다. 1928년부터 1941년까지 경성의전 외과 주임교수로 재임하는 동안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 또는 ‘도규계(刀圭界)의 일인자’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선생의 수술에 대한 호평과 일반인의 신임도는 여간 두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각종 질환의 감별 진단에는 어느 누구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당시의 대수술은 선생님의 독무대 같은 인상을 줄 정도였으며, 한·일인 할 것 없이 서울 장안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심지어 일본이나 만주에서까지도 수술을 받기 위해서 찾아왔던 것입니다.”(장기려 ‘백인제 선생 회고좌담회’)
   
   외과는 손을 놀려서 하는 의술이다. 외과 영역에서는 손솜씨가 매우 중요한데, 백인제의 수술 솜씨는 가히 신기에 가까웠다고 한다. 커다란 몸과 손에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는 섬세한 손놀림은 모든 사람의 찬사의 대상이었다. 외과의사가 갖추어야 할 또 한 가지 조건은 건강과 체력이다. 제자이자 동료 외과의사이던 주영재에 의하면 백인제는 “건강이 아주 좋았고 초인적 체력을 가졌다”. 그리하여 “두 시간의 열의 있는 임상 강의를 마치고 계속하여 몇 시간씩의 수술을 계속하시나 피곤함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뵈올 수 없었다”고 한다.
   
   백인제는 1928년 6월 27일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배화여고 교사이던 최경진과 결혼한다. 그는 환자를 차별하지 않고 누구든지 똑같이 인간적으로 대했다. “한번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금광왕으로 이름난 최모씨가 병원에 찾아와서 백 선생의 진단을 받으려고 하는데, 기다리는 환자가 많아서 차례가 쉬 오지 않을 것을 알고 나더러 좀 먼저 진찰을 받게 하여 달라고 청한다. 그래서 이 뜻을 백 교수에게 전하니 선생 대답이 ‘다른 환자도 다 같이 바쁜 환자일 테니 그러지 말고 차례를 기다리라고 해’ 하신다. 참으로 선생은 금력이나 권력에 이끌리지 않고 오직 인권과 질서를 존중하는 정신이 엿보이는 듯하여 더욱 우러러 보였다.”(조진석)
   
   백인제는 의학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1930년 수술환자에게 수혈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나, 1938년 혈액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선진국의 의학계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혈액에 대한 연구 외에 임상외과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1936년에는 세계 최초로 장감압술(腸減壓術) 시술에 성공한다.
   
   “1940년 미국 왕게스틴 교수가 비위간 삽입술에 의한 감압법(減壓法)을 실시해 성공했는데, 백 교수는 이미 3년 전에 그것을 입증했던 것이다. 만일 백 교수가 미국인이었다면 그때 벌써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1931년부터 수술 환자에게 수혈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나, 1938년 혈액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을 볼 때 백인제의 연구는 미국 의학이나 다른 선진국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백 교수는 외과학의 선구자였던 것이다.”(최제창 ‘한미의학사’ 1996년)
   
   백인제는 1932년 스승인 우에무라 준지의 외과병원을 인계하여 후배로 하여금 운영하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1937년 미국 여행 중 저명한 종합병원인 메이요 클리닉을 둘러보고 자신도 그런 병원을 세우겠다고 결심한다. 그 첫 단계로서 1941년 경성의전에 사표를 내고 ‘백인제외과의원’을 직접 운영한다. 김희규와 주영재, 윤덕선 등 후배·제자들이 의료진으로 동참했다. 백외과는 개업하자마자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내가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병원 구조로 봐서 베드가 한 삼십 될까말까 했을 거예요. 그런데 개업해서 얼마 안 되니까 만원이 되어서 할 수 없이 병원에 붙어 있는 주택을 이용했어요. 꽤 넓었습니다. 아래층하고 위층 합하면 한 칠팔십 평 됐을 거예요.…그렇게 하고 한 일 년 반쯤 되어서 증축을 했어요. 이렇게 해서 한 오십 명가량 입원시킬 수 있었습니다.…일본에서 온 것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만주국의 대관들도 몇 사람 오고, 전체적으로 보아서 한국 환자 절반, 일본 환자 절반, 그 정도 되었습니다.”(주영제)
   
   1946년까지 5년 동안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 공익법인 재단법인 백병원을 창설한다. 백병원은 유명 인물의 진료를 자주 담당하게 된다. 장택상씨가 피습을 받아 입원 치료를 받았고, 장덕수씨가 피습 후 백병원에서 별세했으며, 1949년 백범 김구가 암살됐을 때에도 백병원 의사들이 달려가 사후처리를 하였다. 차녀 향주씨는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 입학 당시 부친과 얽힌 에피소드를 회상했다.
   

▲ 차남 백낙훤씨가 아버지를 회상하고 있다.


   “나하고 친했던 경기여고 급우 중에 같은 해에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한 Y양이 있었다. 등록 마감이 임박한 어느날 나는 다른 급우로부터 Y양이 입학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몹시 마음이 아파서 저녁상에서 아버지께 그 이야기를 드렸다. 아버지는 잠시 말씀이 없으시더니 어머니에게 ‘현금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고 물으셨다. 어머니 표정으로 나는 당장 그때 현금이 많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일 아침에 주어 보내지’라고 한마디만 하셨다. 나는 이튿날 신문지에 싼 그 돈을 안고 등교하면서 고마운 아버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선각자 백인제’)
   
   백인제는 광복 후 경성의전의 재건 과정과 서울대 의대의 탄생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는다. 그는 경성의전 부속병원장 겸 외과 주임교수로서 진료 교육 연구에 두루 심혈을 기울였다. 1946년 10월 경성의전과 경성제대 의학부가 국립 서울대 의과대학으로 통합되었을 때도 서울의대 제2부속병원장 겸 제3외과 교실의 주임교수를 맡는다. 또 해방 정국의 의료계 지도자로 활약한다. 서울의 개업의사들이 결성한 건국의사회와 각 의대 교수들이 결성한 조선의학연구회, 두 단체의 통합으로 이루어진 조선의학협회(지금의 대한의학협회)에서 모두 핵심 인물로 활약한다. 그는 서울시의사회의 1~2대 회장, 조선외과학회의 1~3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백인제는 서재필 초대 대통령 추대 운동에 참여하며, 1949년에 흥사단 의사부장으로 임명된다. 이듬해 6·25전쟁 중인 7월 19일 흥사단원 박현환의 집에서 납북된다.
   
   재단법인 백병원은 1951년 백인제의 동서 김희규가 2대 원장에 취임하여 재임 10년간 이끌어 왔으나 재정이 고갈되고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법인을 해체하자는 의견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당시 백병원에 근무하던 조카 백낙환이 백부의 뜻을 받들어 백병원 중흥에 나선다. 1975년에 백병원의 13층 건물이 완공되고, 1979년에는 백낙환·백낙조(장남)가 부산에 인제의과대학을 설립한다. 인제대학의 건학이념도 백인제의 ‘인술제세(仁術濟世)’ 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인덕제세(仁德濟世)’로 하였다. 뒤이어 상계, 일산, 해운대에까지 근 5000개 병상을 거느리는 세계적인 대형 최신병원으로 변모했다.
   
   백인제는 백병원 이사장을 지낸 최경진(103)씨와 사이에 2남5녀를 두었다. 인제학원 이사장을 지낸 장남 낙조(사망·독일 본대 의학박사)씨는 독일인 하네로레 이틱(69)씨와 결혼하여 아들 형제를 두었다. 장남 선우(42·컬럼비아대 법학대학원 졸업)씨는 미국 변호사로 법무법인 한얼 파트너이며, 차남 선재(40·코넬대학원 호텔경영, 인간관계론 석사)씨는 하와이 알렉산더 볼드윈사 인사담당 부사장이다.
   
   백인제의 차남 낙훤(67·캘리포니아주립대 졸업)씨는 인제학원 이사를 지냈으며, 정연희(67·서울대 미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연희씨는 정인욱 강원산업 창업주의 3녀로 화가이며, 작품 5점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아들 영익씨(노스캐롤라이나 법학대학원 졸업)는 미국 보스턴 연방검사이며, 딸 지원씨(버클리대 졸업, 미술사 전공)도 미국에 살고 있다.
   
   백인제의 맏딸 난영씨(이화여전 영문과 졸업)는 미국에 살고 있으며, 차녀 향주(81·웨슬리대 졸업, 스탠퍼드대 식물학 박사)씨는 전명제(87·서울대 졸업, 스탠퍼드대 경제학 박사, UNCTAD 정년 퇴직)씨와 결혼하여 경화(44·웨슬리대 불문학과 졸업)·수익(42·스탠퍼드대 기계공학 역사학 전공)씨 남매를 두었다. 3녀 남주(73·이화여대 영문과, 남가주대 대학원 졸업)씨는 신봉조 전 이화학원 이사장 아들 융선(75·UCLA 물리학 박사, 워싱턴대 수학 박사, 텍사코 근무)씨와 결혼하여 기영(44·텍사스 베일러 의대 졸업, MD 앤더슨 재활의학과 부교수)·기선(40·텍사스A&M대 졸업, 공인회계사)씨 자매를 두었다. 백인제의 4녀 향남(사망·이화여대 불문과 졸업)씨는 이규호(72·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한진 전무 역임)씨와 사이에 혜정(41·이화여대 졸업)·종상(39·연세대 건축과 졸업, 오리건대 박사과정)씨 남매를 두었다. 5녀 금주(64·서강대 영문과, 일리노이대학원 졸업)씨는 오세혁(67·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일리노이대 박사, GM연구소 근무)씨와 사이에 영석(38·남가주대 의대 졸업·위스콘신의대 교수)·윤석(하버드대 생화학과 졸업, 스탠퍼드대 의학박사)씨 형제를 두었다.
   
   “부친께서 납북되셨을 때 만 5세였으니 그분에 대한 기억은 매우 단편적일 수밖에 없지요. 집에서 같이 냉면을 눌러 먹고 중국집에 데리고 가셔서 탕수육을 사주시던 기억이 나는군요. 시골에 사냥 가시면 시골 노인 누구든지 대좌해 같이 마시고 잡수셨으며…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 또 일본인들에게, 그리고 누구에게나 굴하지 않고 사셨던 두둑한 배짱은 우리 모두가 배워야겠지요.”(차남 낙훤씨)
   
   백인제의 동생 붕제는 약관의 나이로 일본 고시 사법·행정 양과에 합격하여, 광복 후 변호사 개업 중 6·25 때 백인제와 납북됐다. 최귀란(사망·일본나라여자사범 졸업)씨와 사이에 3남3녀가 있다. 장남 낙환씨는 인제학원 이사장, 차남 낙청(74·미 브라운대 영문과 졸업, 하버드대 영문학 박사)씨는 창작과비평 편집인, 3남 낙서(67·미 윌리엄스대, 코넬대학원 졸업)씨는 통일원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인제대 교수이고, 3녀 미영(66·서울대 음대, 매사추세츠대학원 졸업)씨는 피아니스트이며 단국대 교수이다.
   

내가 본 백인제
   
   서홍관 국립암센터 교수
   
   나는 인제대 의학사 주임교수로 있으면서 백병원의 모태를 만드신 백인제 선생의 행적을 추적하였다. 선생은 한마디로 한국 의학계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찾기 어려울 전인적(全人的) 인물로 주목하게 된다. 그분은 오산학교의 민족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경성의전 시절 학생대표로 3·1만세운동을 주도한다. 그러면서도 오산 시절 4년 내리 수석에 경성의전 제1기로 입학해서도 줄곧 수석을 놓치지 않는다. 저명한 일본인 교수들과 공동연구로 그의 탁월한 실력을 나타내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의학적 실적을 남기기도 한다. 문필력도 뛰어나 춘원이 그 문재를 인정했을 정도이다. 광복 후에는 의학협회 조직에도 앞장서는가 하면, 흥사단 활동에도 열중하여 흥사단의 단훈인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그의 인생지침으로 삼기도 했다. 납북되어서도 박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의연하게 의사로서의 긍지를 지켰으니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