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산강(崑山腔) 또는 곤강(崑腔)이라고도 하며 경극(京劇)보다 앞서 발달한 중국의 전통극이다. 장쑤성[江蘇省] 쿤산[崑山]의 명창 위양보(魏良輔)가 가정연간(嘉靖年間:1522∼1566)에 시작하였다고 한다. 곤곡의 곤(崑)은 쿤산의 곤(崑)자에서 따왔다. 피리 ·소(簫) ·생황(笙簧) ·비파(琵琶) 등의 악기가 반주에 사용되며, 1620년 이후 100여 년간 크게 성행하다가 18세기 중엽 이후 서서히 퇴조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중엽 희곡 연구자들에 의해 정리 ·개혁되어 현재는 곤곡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이 많이 생겨났다.
[출처] 곤곡 [崑曲 ]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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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곡 [南曲]
중국의 남방계(南方系) 고전극의 형식 또는 그 희곡 장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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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계의 원곡(元曲:잡극 ·북곡)에 대응되는 호칭으로, 옛날에는 남희(南戱) ·희문(戱文) ·명곡(明曲)이라고 하였다. 명(明) ·청(淸) 시대에는 그 각본을 보통 전기(傳奇)라고 하였다.
남곡 형식의 특징 고전극이 모두 그렇듯이 막(幕)을 사용하지 않고, 무대장치도 간략하며, 모든 상황이 노래 ·대사 ·동작으로 설정되었다. 또 기성(旣成) 곡조에 맞추어 작사되었다는 점에서는 원곡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척(齣)이라고 하는 막(幕:거의 scene과 일치)의 수에 제한이 없으며, 가사의 형식은 자유다. 1막 중에서 또는 1곡 중에서 운(韻)을 바꿀 수도 있고, 또 노래는 모든 배역자에게 개방되어, 합창 ·호창(互唱)의 형식까지 허용된다. 이 점은 제약이 많은 원곡과는 전혀 다르다.
남곡의 기원과 변천 남곡의 발생 상황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12세기 말경 남송(南宋)의 수도 임안(臨安:杭州)으로 진출했던 저장성[浙江省] 원저우[溫州]의 지방극이 세련된 경지를 거쳤다고 한다. 그 후 남송이 멸망하여 원곡의 중심이 대도(大都) 베이징[北京]에서 항저우[杭州]로 옮겨지자, 그 세력에 눌려 한때 침체되었다. 그러다가 원(元)나라 말기인 14세기 중엽부터 점차 부활하여 명(明)나라 때는 잡극을 제압하고 단연 우위에 섰다. 그 여세는 청(淸)나라 중기까지 미쳤으며, 원곡과는 전혀 다른 풍격(風格)의 희곡문학을 탄생시켰다.
이 가극에는 처음에 해염강(海鹽腔) ·여요강(餘姚腔) ·익양강(婁陽腔) 등의 타악기를 주체로 하는 저속한 곡조가 사용되었다. 하지만 16세기 전반부터 장쑤성[江蘇省] 쿤산[崑山]의 위양보(魏良輔) 등이 관악기를 주체로 하는 감미롭고 우아한 곤강(崑腔:崑曲)을 만들었다. 이것을 사용한 양진어(梁辰魚)의 희곡 《완사기(浣紗記)》가 크게 호평을 받자, 이 곤곡은 즉시 수도 베이징의 무대로 진출하면서 중국 각지에 전파되었다. 또 그것이 계기가 되어, 때마침 문화의 난숙기를 맞이하게 되자, 연극 그 자체의 흥륭(興隆)과 곡 창작의 큰 유행을 가져왔으며, 동시에 희곡 출판도 활발한 양상을 띠었다.
남곡의 작품과 특징 남곡의 중심을 이루는 가사는 아마도 느린 템포의 음악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이 되나, 일반적으로 문언색(文言色)이 뛰어나 원곡에서 볼 수 있는 구어(口語)를 뼈대로 한 활발한 표현은 적다. 이것은 또 작가층의 차이에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송 ·원 시대의 작품은 대부분이 민중을 상대로 하는 통속적 작가 집단인 ‘서회(書會)’에 의한 집체(集體) 창작이다. 그래서 단편도 있고, 소박하면서도 인생의 진실에 육박한 작품도 있었던 것 같으나, 《영락대전(永樂大典)》에 남아 있는 3편 이외는 모두 흩어져 없어졌다.
남곡은 흔히 원나라 말기의 고명(高明)이 정녀(貞女)의 고난을 그린 명작 《비파기(琵琶記)》에 의하여 부흥의 기회를 잡았다고 일컬어지며, 명나라로 들어와서 작자 미상인 《형채기(荊釵記)》 《백토기(白兎記:劉智遠)》 《배월정(拜月亭:幽閨記)》과 서진(徐 )의《살구기(殺狗記)》 등 4대작이 연이어 만들어졌다. 이렇게 되자 막(幕)의 수에 제한이 없는 이 형식의 장편화의 방향으로 굳혀졌다. 이 희곡 장르의 주안점은 인생의 파란과 갈등에 치중하게 되고, 동시에 희곡의 창작은 관료적 문인들의 여기(餘技)로서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후 곤곡(崑曲)의 융성기를 맞이하여 탕현조(湯顯祖) ·심경(沈璟) 등 작풍을 달리하는 우수한 작가가 출현하였다. 전자는 《자채기(紫釵記)》 《환혼기(還魂記:牡丹亭)》 《한단기(邯鄲記)》 《남가기(南柯記)》 등의 작품으로 우아하고 단정한 가사와 그 섬세함을 표현하게 되었으며, 후자는 《의협기(義俠記)》 《매검기(埋劍記)》 등의 작품으로 운율면을 중시하여 오히려 활발하고 소박한 것을 목표로 삼았다.
두 사람의 작풍(作風)은 모두 공명자를 얻어 탕현조 계통의 오병(吳炳) ·맹칭순(孟稱舜)의 임천파(臨川派), 심경 계통의 복세신(卜世臣) ·섭헌조(葉憲祖) ·풍몽룡(馮夢龍) 등의 오강파(吳江派), 그리고 매우금(梅禹金) ·도륭(屠隆) ·장봉익(張鳳翼) 등의 일파가 함께 제작을 다투어 남곡의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남곡의 작가들은 모두 소재를 선비의 세계에서 구하였고, 그것도 재자가인(才子佳人)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여 원곡에서 볼 수 있는 굳센 서민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또 문언(文言)을 기조(基調)로 한 가사의 조탁(彫琢)이 더욱 추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구(對句)를 사용한 대사의 문언화(文言化)까지 이루어졌다. 한편, 장편 형체를 주체 못한 작자는 ‘전기(傳奇)’라는 형체의 별명이 상징하듯 매우 부자연스럽고 진기한 줄거리를 만들어, 인생의 진실을 묘사해야 할 픽션의 문학이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청나라 때인 17세기 말의 작품인 홍승(洪昇)의 《장생전(長生殿)》, 공상임(孔尙任)의 《도화선(桃花扇)》은 명나라 말기의 이러한 타락에 대한 반성으로 출현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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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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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극 배우 /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신계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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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北京]에서 발전하였다 하여 경극이라고 하며, 서피(西皮) ·이황(二黃) 2가지의 곡조를 기초로 하므로 피황희(皮黃戱)라고도 한다. 14세기부터 널리 성행했던 중국 전통가극인 곤곡(崑曲)의 요소가 가미되어 만들어졌다.
역사 원(元)나라 때의 잡극(雜劇:元曲)의 뒤를 이어 명나라에서 청나라에 걸친 300년 동안은 쑤저우[蘇州] 곤산(崑山)에서 일어난 곤곡(崑曲)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왕후 ·귀족의 위안물이 되고 형식에 치우쳐 쇠퇴하게 되자 18세기 중엽(청나라 중기)에는 많은 지방극이 앞을 다투게 되었다. 그 무렵 안후이성 ·후베이성 등 양쯔강 연안지방에 남곡(南曲)의 익양강(弋陽腔) 계통을 이은 이황조(二黃調)가 성행하여, 안후이성의 여자역 남자배우 고낭정(高朗亭)의 일단과 함께 베이징에 들어왔다. 이때가 1790년 고종(高宗:乾隆帝)의 80세 생일축하 잔치가 벌어진 해이다. ‘휘반(徽班)’이라는 안후이성 극단이 당시 난해하고 장황한 저음인 곤곡에 비하여, 명랑하고 쉽고 동작이 많은 이황조를 상연하자 곧 대중의 호평을 받아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신흥극종(新興劇種)인 데다가 형식상의 융통성도 있던 당시의 이황조는 곤곡을 비롯한 많은 선행 극종의 기술과 형식을 최대한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특히 1830년경 청나라 말의 북곡계(北曲系)인 진강(秦腔)의 흐름을 이은 서피라는 곡조와 합쳐 《피황희(皮黃戱)》, 즉 경극으로 발전하여 곤곡의 위치를 대신하였다. 초창기에는 정장경(程長庚), 그 후 담흠배(譚鑫培) 등의 명우가 배출되어 부단히 개혁에 개혁을 거듭하여 격조를 높였으며, 근세에 와서는 여자역 남자배우 메이란팡[梅蘭芳]이 한층 빛을 내었다. 해외에도 ‘베이징 오페라’로 알려져 그 독특한 예술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독일의 브레히트가 서사연극론(敍事演劇論)을 창안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내용형식 다른 많은 전통극종과 마찬가지로 노래·대사·동작·액션 등으로 구성되는 형식연극으로, 노래가 중시되고 무용에 가까운 동작은 격렬하면서도 아름답다. 호궁과 징·북을 중심으로 한 반주의 선율과 리듬이 극의 기조를 이룬다.
상연되는 각본은 모두 피황조에 의거한 구성·문체·시형이며, 현존하는 1,000여 종은 대부분이 작자미상이다. 대개는 사전(史傳) 소설과 전설에서 소재를 따거나 원곡과 전기(傳奇)를 개작한 것으로, 《수호전》 《삼국지연의》 등의 부분각색이 적지 않다. 대표작으로 《추강(秋江)》 《팔선과해(八仙過海)》 《손오공》 《타어살가(打魚殺家)》 《사진사(四進士)》 《우주봉(宇宙峰)》 《백사전(白蛇傳)》 《장상화(將相和)》 《양문여장(楊門女將)》 《삼차구(三岔口)》 《패왕별희(覇王別姬)》 《귀비취주(貴妃醉酒)》 《안탕산(雁蕩山)》 등이 있다.
모두 1시간 내외의 짧은 연극으로 연출과 연기 모두 지극히 서사적인 표현양식을 쓰고, 장치도 없이 상징적인 연기형식에 의하여 상황이나 행동을 나타낸다. 의상은 명(明)나라 때의 복장을 기초로 한 초시대적인 전통극 고유의 것이며, 색과 무늬에 따라 인물의 신분과 직업 등을 알 수 있다. 배역은 크게 생(生:주역), 단(旦:여자역), 정(淨:호걸·악한), 축(丑:어릿광대), 말(末:단역)으로 나뉘고, 각기 문무(文武)의 2계통 이외에 다시 세분화된다. 정과 축은 배우의 얼굴에 물감으로 선을 그리는데, 역사상 유명한 얼굴의 선을 그리는 형식은 정해져 있다.
노래·대사·춤·액션 등 어느 것에 중점을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배역에 따라 결정되며, 배우는 어릴 때부터 소질에 따라 전문적 배역을 익힌다. 이를 위한 양성소를 ‘과반(科班)’이라 하며 메이란팡 등이 연기를 익힌 부연성(富連成) 등이 유명하다.
현대경극 중공정권수립 후에는 새로 설립된 중국희곡연구원·중국경극단 등을 중심으로 '백화제방(百花齊放)', '추진출신(推陳出新)'의 기치에 따라 극 내용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봉건적인 내용을 추방하고 국민의 창조에 의한 것을 발굴한다는 각도에서 고전상연목록의 정리개편이 적극 행해졌으나, 경극무대에서 현대인과 현대인의 생활을 표현하는 일은 극도로 세련된 격조 높은 형식으로 보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958년경 소위 '대약진운동' 때 현대화의 시도가 있었으나 반대론과 신중론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1964년 베이징에서 열린 현대경극 경연대회를 계기로 현대경극은 중국의 문화계를 석권하여 예술의 새로운 선구자가 되었다. 인민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여 내용과 등장인물의 현대화에 따라 상징적인 스타일이 줄어드는 대신 연기는 사실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가사에는 고전적인 격조가 남아 있으나 대화는 알기 쉬운 현대 표준구어(標準口語)이다.
얼굴에 그리는 선이나 여자역의 남우가 없어졌으며, 무대장치를 사용하였다. 대개 2∼3시간의 장편이며 극적 요소가 강하여 자연히 대화부분도 많아졌으나 노래나 무용적인 동작, 화려한 액션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문화대혁명에 의한 경극의 변질은 전통을 상실하게 하였으나, 1980년대 이후 그 고유형태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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