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대개 조선은 주자학을 숭상하여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빠진 나라로 인식된다. 주체성이 없는 비겁한 나라로 쉽게 매도해 버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만 조선은 건국과 함께 천자의 칭호인 조(祖)ㆍ종(宗)을 사용하였다. 원나라에 복속되면서 잃었던 천자국의 자존심을 다시 세웠던 것이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위협하면서 조ㆍ종의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아 시정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국력을 소진할 만큼 막대한 군사력을 쏟아부어 조선을 구원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입김이 셀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조선은 끝까지 이 요구를 거부하였다. 이와 같이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의 사활이 걸린 참혹한 전란의 와중에서도 나라의 자존을 잃지 않은 조선을 두고 누가 감히 사대주의에 빠진 자존심 없는 나라로 쉽게 매도할 수 있는가.
조(祖)ㆍ종(宗)이란 칭호를 사용하는 문제로 말하자면, 소방(小邦)은 해외의 먼 나라로서 삼국시대 이래 예의(禮義)의 명호는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서로 비슷한 것이 많았습니다. 우리 선신(先臣) 강헌왕(康獻王)에 이르러서는 무릇 분수에 넘치는 것들을 일절 고치고 바로잡아 미세한 절목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중을 기함으로써 상하의 분한(分限)을 분명히 밝히고 이를 자손에게 전하여 금석처럼 굳게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유독 칭호만은 신라ㆍ고려 때부터 이러한 잘못이 있어왔는데 신민(新民)들이 잘못된 옛 습속을 그대로 이어받아 외람되이 존칭(尊稱)을 계속 사용하면서 고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는 실로 무지하여 모르고 저지른 죄이니, 이 문제로 죄를 받는다면 신은 만 번의 죽음도 사양하지 않고 달게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를 두고 참칭(僭稱)했다고 한다면 사실과 다릅니다.
소방은 선신(先臣) 이래 일편단심으로 황상을 섬기어 예의와 충성을 다하였으니, 율법은 대명률(大明律)을 사용하고 역법은 대통력(大統曆)을 사용하였으며 복색이며 예의 모두 상국(上國)의 것을 숭상하여 따르지 않음이 없습니다. 천자의 사신이 올 때는 영조의(迎詔儀 천자의 조칙을 맞이하는 의절)가 있고 배신(陪臣)이 상국으로 갈 때는 배표례(拜表禮 절하고 천자에게 올리는 표문(表文)을 봉하는 예)가 있으며 정월 초하루와 동지(冬至)ㆍ하지(夏至)ㆍ성절(聖節)에는 망궐례(望闕禮)가 있는데 모두 흡사 천자의 용안을 직접 뵙듯이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엄숙히 거행하니, 이는 모두 선조가 서로 전수해온 제도로서 터럭만큼도 감히 소홀히 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여염집의 하천(下賤)한 삼척동자조차도 겨우 한 마디 말을 더듬거리면 곧 천조(天朝)를 알고 아직 한 글자도 배워 알지 못할 때에도 정삭(正朔)을 먼저 익히며, 각종 문권과 공사(公私)간의 서찰에도 모두 천조의 연호를 사용하여 통상의 정식(定式)으로 삼고 있으니, 이는 떳떳한 이치와 의리는 우주를 지탱하는 것이라 중국과 외국의 구별이 없으며 어리석은 사람이나 어진 사람이나 모두 아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감히 구구한 호칭 하나 때문에 스스로 참람한 짓을 한 죄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근자에 천조가 소방을 마치 한 집안처럼 보아온 터라 소방의 서적, 이를테면 국승(國乘)과 패설(稗說) 등이 많이 중국으로 들어가 소방의 사적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전란이 일어난 뒤 7년 동안 대소의 아문(衙門)과 각 군영(軍營)의 장령(將領), 내왕하는 군병과 교역하는 상인들이 줄을 이어서 안팎의 구분 없이 중국과 소방이 서로 소통되었으니 소방의 행위는 터럭만큼도 숨기기 어렵고 정의(情意)로 서로 믿어서 만 리가 지척의 거리처럼 가까워졌거늘 신이 어찌 감히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하여 스스로 천자를 기만한 죄에 빠지겠습니까. [至於稱祖一事, 則小邦海外荒僻, 自三國以來, 禮義名號, 慕倣中朝, 多有侔擬, 至我先臣康獻王, 凡有干犯者, 一切釐正, 以至微細節目, 亦未嘗不謹, 以爲上下截然之分, 傳之子孫, 守如金石, 而獨其稱號, 則自新羅․高麗, 有此謬誤. 蓋以臣民襲舊承訛, 猥加尊稱, 相沿而不知改, 此實無知妄作之罪. 以此受罪, 臣雖萬死, 固無所辭, 若謂之僭則非其情也. 小邦自先臣以來, 血心事上, 盡禮盡誠, 律用大明律, 曆用大統曆, 服色禮儀, 無不慕尙, 而天使之來, 有迎詔儀, 陪臣之去, 有拜表禮, 正至聖節, 有望闕之禮, 率皆虔心精白, 肅敬將事, 一如對越天威, 是皆祖先相傳之制而毫髮不敢怠忽者也. 以至閭閻下賤三尺孩童, 纔辨一語, 便知天朝, 未解隻字, 先習正朔, 各樣文券, 公私簡牘, 皆奉年號, 習爲恒式. 此蓋常經通義, 撑柱宇宙, 不以內外而有間, 無論智愚而皆知者也. 豈敢以區區一號自陷於僭上之憲哉! 況玆者天朝之視小邦如一家, 小邦書籍如國乘稗說, 多入於中國, 小邦事迹, 班班可見, 且兵興七年之間, 大小衙門及各營將領, 往來軍兵及買賣商賈, 項背相望, 表裏無間, 小邦所爲, 纖芥難掩, 情意交孚, 萬里咫尺. 臣安敢以有爲無, 自陷欺罔之誅哉!]
- 이정귀(李廷龜)〈정주사[응태]참론본국변무주(丁主事[應泰]參論本國辨誣奏)〉《월사집(月沙集)》
〈해설〉 이 글은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1635)가 35세 때인 무술년(1598) 선조 31년에 지은 것으로 모두 3309자로 된 장문에서 일부만 발췌하였다. 원제목은 <정주사[응태]참론본국변무주(丁主事[應泰]參論本國辨誣奏)>인데 통상 무술변무주(戊戌辨誣奏)라 한다. 월사는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일컬어지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요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외교관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조(祖)와 종(宗)은 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업적을 평가하여 신위(神位)를 종묘에 모실 때 올리는 칭호이다. 즉 왕의 묘호(廟號)인 것이다. 대개 창업하거나 국난을 극복한 왕은 조(祖)라 부르고 그렇지 않은 왕은 종(宗)이라 부른다.
임진왜란 때 찬획주사(贊畫主事)로 조선에 들어온 정응태(丁應泰)가 군사 총책임자격인 경리(經理)를 맡고 있던 양호(楊鎬)와 사이가 벌어졌는데 선조(宣祖)가 양호를 두둔하자 이에 앙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무술년 9월 2일에 정응태가 관리의 죄상을 적발하여 조정에 보고하는 글인 참본(參本)을 올려 터무니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조선을 무함(誣陷)하였다. 조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해 일본과 내통하여 일본 군대를 끌어들였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고, 그 근거 중 하나로 조선이 참람되게 천자의 묘호인 조ㆍ종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들었던 것이다.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은 조정 신료들에게 이 문제를 하달하여 논의하게 하였는데, 명나라 조정에서 조선을 비판하는 논의가 매우 준엄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 대책을 강구하여 당시 문장에 뛰어난 몇 사람을 엄선하여 각자 황제에게 올릴 주문(奏文)을 짓게 하고 그중 잘 된 것을 가려 뽑았는데 월사가 지은 글이 채택되었다.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상사(上使)가 되고, 월사는 부사(副使)가 되어 주문을 가지고 명나라로 갔다.
북경에 들어가 주문을 올리니, 명나라 조정의 대신들이 주문을 보고 모두 칭찬하기를 “좋은 문장이다. 명백하고 명백하구나.” 하였고, 주문 중에서 특히 이 조(祖)ㆍ종(宗)에 관해 해명한 부분을 가리키면서 “황상(皇上)에게 사실을 숨김없이 고하였으니, 조선은 참으로 예의(禮義)의 나라로다.” 하였다. 중국 조정의 관원들이 월사의 주문을 보고 매우 칭찬하였고, 원근에서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주문을 베껴 갔으며, 신종(神宗)은 오해를 풀어 조선은 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조선의 노인(魯認)이란 사람이 바다에 표류하여 중국 소주(蘇州)ㆍ항주(杭州) 지역에 갔는데, 그 지역 선비들이 모두 월사의 무술변무주를 외면서 “조선사람 이정귀의 글이다.” 하였으며, 숭정(崇禎) 을해년(1635)에 동지사(冬至使)로 홍명형(洪命亨)이 중국에 갔더니 광녕(廣寧) 옥전(玉田)의 선비가 역시 이 무술변무주를 베껴 써서 가지고 와서는 월사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무술변무주는 당시 천하 사람들이 인정한 명문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월사의 무술변무주를 너무 사대적이라 폄하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만 주(奏) 자체가 국왕이 신하의 신분으로 천자에게 올리는 글임을 이해하고, 이 글을 읽어야 할 것이다. 또한 참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외교상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을 굳이 어려워할 까닭이 무엇인가. 더구나 당시는 국가의 명운이 오락가락하는 전란의 와중이었다.
역사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신라 때부터 우리는 중국의 속국이 되어 주체성을 잃었다고 하면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한 것을 철천지한(徹天之恨)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만 중국은 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로 줄곧 인구로 보나 물산으로 보나 문물로 보나 세계 최대의 막강한 나라가 되어 왔다. 원나라와 청나라가 일시 중국을 지배한 적이 있었으나 원나라는 몽골이라는 작은 나라로 남았고 청나라는 자기 민족을 잃고 말았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어땠을까. 혹 중국을 일시 정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오래 그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드라마 주몽, 연개소문을 보면서 통쾌해 가슴을 펴고, 조선을 보면서 왜 저리 못났을까 이맛살을 찌푸리는 심정도, 유난히 외세에 의한 굴욕이 잦았던 우리 역사를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된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유충열전》, 《조웅전》을 읽는 식으로 우리 역사의 한을 풀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그 시대의 실정을 이해하려는 조금의 노력도 없이, 공이 날아오지 않는 외야석에 안일하게 앉아서 신중히 다루어야 할 우리의 역사를 쉽게 매도해서야 되겠는가. 언제까지나 격변의 시대에 의한 충격, 아픈 기억을 현실 위에 덧씌울 것인가. 나는 조선이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슬기로운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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