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모세의 지팡이는 동서양 성현의 지혜를 대표한다. 도연명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노래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짚은 지팡이나 퇴계 선생이 도산에서 사용한 청려장(靑藜杖)은 은퇴한 존장(尊丈)의 품위를 상징한다. 사제와 여왕, 오광대놀이의 양반도 지팡이가 없으면 허전하고, 채플린과 루팡, 삼장법사와 손오공도 지팡이가 없으면 멋스럽지 않다. 김시습과 김삿갓에게도, 히말라야의 등산가나 만화 속 마술을 부리는 소녀의 손아귀에도 지팡이가 들려 있다.
지팡이는 곧 소녀에서 노인, 동화에서 신화, 동양에서 서양을 넘나들며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권위와 영광의 상징이자, 노년과 병든 몸의 벗이었다. 또한 방랑의 그림자이자 중력에 대항하는 힘이었다.
○ 문학의 대지에 꽂힌 지팡이
‘정시자전(丁侍者傳·고려 말 승려 식영암이 지은 작품)’의 주인공은 지팡이다. 이 가전(假傳·사물을 의인화한 산문) 속에서 지팡이는 “남을 도와주는 것이 저의 직분입지요”라고 말한다.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는 지팡이의 도시다. 태양신이 자신의 자녀를 티티카카 호수에 내려 보내며 “황금 지팡이가 꽂히는 곳에 정착하라”고 말했는데 그곳이 바로 쿠스코였다고 한다.
중국의 지팡이는 색깔이 또 다르다. 고대 주(周)나라의 예절을 모은 ‘주례(周禮)’에는 ‘오십 살에는 집에서 지팡이를 짚고, 육십 살에는 마을에서 지팡이를 짚으며, 칠십 살에는 나라에서 지팡이를 짚고, 팔십 살에는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는다’는 구절이 나온다. 주나라의 성군인 무왕(武王)은 자신의 지팡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오호라, 성냄과 넘어짐에서 위태롭고 망하게 되며(於乎危亡於忿)
오호라, 기호(嗜好)와 욕심에서 길을 잃게 되며(於乎失道於嗜慾)
오호라, 부하고 귀한 데서 망각이 오는구나.(於乎相忘於富貴)
○ 지팡이의 길, 사람이 가고 싶어 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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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이 1668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석(李景奭·1595∼1671)에게 하사한 지팡이들(보물 제930호). 경기도박물관 제공
원래 김상용이 지팡이를 짚고 가고팠던 길이 비장한 죽음의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푸른 용 모양을 한 다른 지팡이를 읊은 작품을 보니 그는 그 단단한 지팡이를 짚고 구속 없는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싶어했다. ‘이 지팡이를 짚고 하늘이 허락해준 자유로움을 즐기리라(杖乎杖 樂天放, 蒼龍杖銘)’고 했던 그 희망이 김상용의 진짜 꿈이지 않았을까.
조선후기의 명필 이서(李)도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어 했다. 금강산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선물 받은 뒤 그는 꼬불꼬불 용처럼 생긴 그 지팡이와 더불어 비로봉 꼭대기에 오르기를 염원했다(蓬萊杖銘). 그러나 그 또한 파란 많은 정치사의 한복판에서 곤장을 맞고 짧은 생을 마쳐야만 했다. 두 사람은 정치적 계통상 반대편에 속했지만, 지팡이에 새긴 꿈도 같았고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던 것도 같았다.
○ 푸른 산 맑은 바람의 동반자들
지팡이의 운명도 주인 따라 갈린다. 영조대의 문장가 남유용(南有容)은 스물다섯 살에 금강산 비로봉으로 향했다. 길은 가파르고 고갯마루는 험했다. 수풀에서 잠시 쉬던 그는 어깨 높이로 자란 철쭉을 꺾어 지팡이로 삼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철쭉 지팡이를 기려 “나는 오건(烏巾·검은색 두건)과 하얀 학창의(鶴衣·선비들이 입던 평상복)를 걸치고, 일천 봉우리를 넘고 일만 골짜기를 건넜다. 비로봉으로 날개 달린 듯 올랐을 때, 나를 따랐던 이는 오직 그대였을 뿐!(杖銘)”이라며 고마워했다.
비슷한 시기의 지리학자 신경준(申景濬)은 산을 좋아하던 사람으로 유명했다.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등을 남겨 지리학의 대가가 되었던 그는 “길에는 주인이 없다. 다니는 자가 주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노년에는 그도 명아주 지팡이와 관련한 장명(杖銘)을 지어 이런 사연을 담았다.
‘명산 찾던 젊은 시절 지나 24년 벼슬길에 묶이다 보니, 어느덧 다리에 힘 풀리고 지팡이에 의지한 노년. 그래도 흰 구름 속의 산이 그리워 하염없이 눈길을 던진다. 아! 이제부터는 내 발로 걸어야지. 지팡이 너를 고생시키지 않을 수 있다면!’
홀연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떠오른다. ‘산에 들어가며(入山)’라는 시에 “스님! 청산 좋단 말 마소, 산 좋다며 어이 다시 나오시오. 훗날 내 자취 두고 보구려, 청산에 한 번 들면 영영 오지 않으리니”라고 했다. 훗날 어느 시인은 이렇게 이어받았다. “한 번 청산으로 떠나가니, 오백년 동안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一入靑山去 淸風五百年).” 청산과 청풍을 따라 고운의 지팡이가 보일 듯 말듯 가물거린다.
김동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djk2146@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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