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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법고창신] 그 참다운 의미를 되묻는다.[주강현 / 한국민속연구소 소장]

굴어당 2011. 11. 27. 17:54

[전통의 법고창신] 그 참다운 의미를 되묻는다.

[주강현 / 한국민속연구소 소장]
전통의 법고창신, 그 참다운 의미를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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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시내를 다녀본 이들은 거리 간판들이 우리와 사뭇 다른 것을 보고 잠시 놀란다. 가령 ‘인터콘티넨털호텔’도 ‘오대양주점’이라 큼지막하게 쓰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영어를 보일 듯 말듯 병기했다. 중국에서 발간한 그리스 신화집을 보면 모든 신들이 중국식으로 표시되어있고 동시에 원어가 병기된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하늘에서 사라진 개밥바라기, 샛별…

우리의 하늘에는 안드로메다, 카시오페가 떠있다. 오로지 그리스이름의 별자리와 신화가 떠있을 뿐이다. 우리의 고유 별자리는 없었던가. 하루에 2번 떠오르는 금성의 본디 우리말은 해질 무렵에는 ‘개밥바라기’, 새벽녘에는 ‘샛별’이다. 그러나 별자리를 찾아 우주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아이들의 지식 어디에도 개밥바라기와 샛별은 없다. 우주마저 서구의 지적 식민지가 되어버린 결과다. 우리의 별은 어디에 있을까.
한마디로 줏대 없이 살아온 결과이다. 21세기 초반의 문화지형도는 세계화를 핑계로 만사를 오로지 세계적 차원의 담론으로 내몰고 있다. 세계 단일문화체제의 등장이 21세기의 정당한 대안인가. 우리같이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닌 나라치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 이처럼 미국화되고 자존의 것을 모조리 내던진 나라가 있는가. 각 나라마다의 민족문화의 문맥을 부정하고 시공간을 뛰어넘는 단일문화체제의 등장에 도사린 국제자본의 논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히려 세계화시대가 될수록 정체성은 확보하고 있어야할 것이 아닌가.
그러한 점에서 수세기 전에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의미를 알려주었던 연암 박지원의 전통에 관한 생각을 떠올려본다. 박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조선사회의 낙후성을 타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벽돌사용론, 수레통용론, 중국에 대한 적극 통상론, 말의 사육과 증식법을 개선하기 위한 마정馬政개혁론 같은 경세책을 제시하였다. 박연암이 제시한 경세책으로서의 북학론은 청조淸朝문물의 적극적 수용을 근간으로 한 부국강병의 방법론이었다.

박연암은 과거의 양한兩漢, 또는 성당盛唐의 글을 무분별하게 모방·표절하는 의고적擬古的인 당시 문단풍조를 비판하고, 작가가 처한 현실을 배경으로 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문학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박연암이 고문古文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니, 고문을 본받되 현실에 알맞도록 창조적으로 수용하여 써야한다는 이른바 ‘선변善變의 문학’을 제시하였다. 선변의 문학을 이루는 구체적 방법으로 그는 법고창신을 논하였다.
그는 법고에 기울지도 않았고, 창신에 기울지도 않았다. 지나친 법고와 창신을 모두 부정하고 비판하였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선변을 통한 법고에 있었다. 편벽된 ‘법고’와 ‘창신’, 즉 맹목적인 ‘법고’와 ‘법고’를 전혀 무시한 ‘창신’ 모두를 비판하고는, “진실로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할 줄 알고, 새 것을 창안해낼지라도 능히 전아할 수 있다면, 금문今文이 고문과 같아지는 것이다”고 하였다. 지나치게 새로운 것만 찾는 극단과 오로지 과거에만 집착하는 극단을 모두 비판한 것이다.

전통을 ‘현재’에서 수용할 때 힘이 솟는다

필자는 수년 전에 발간한 어느 책자의 서문에서 ‘식혜는 우리시대가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의 전리품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 왜 식혜가 승리의 전리품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식혜는 훌륭한 민족음식의 하나이다. 그러나 식혜의 단점은 이동성·장기 보관성 등에서 지나치게 전통적일 뿐 기동성이 없다. 항아리째 들고 다니면서 한여름에 식혜를 즐길 수는 없는 일.
어느 날 갑자기 ‘깡통식혜’가 등장하였다. 식혜가 깡통에 담겨지는 순간, 식혜 자신의 운명이 바뀌었다. 전통의 법고창신이 가져온 놀라운 결과이다. 식혜의 성공은 배음료나 수정과, 대추, 심지어 쌀뜨물까지 흉내낸 민족음료혁명을 일으켰다. 지난 2002년에는 가히 매실혁명이 일어나 식품판매대를 매실음료가 점령하였다.
전통의 계승이란 이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과거 전통이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이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탁월한 차원에서의 자기 혁신이 이루어질 때, 전통은 그 생명력을 더욱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조상들의 성묘나 차례문화도 법고창신을 거듭해야한다. 필자 자신은 화장선호론자로서 이 비좁은 땅 위에서 호화분묘는 물론이고 매장풍습 자체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강조한다. 과거에 무덤풍습을 지고의 가치로 했다고 해서 오늘날에까지 지고의 가치로 칭송할 어떤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다.
금년에도 설날에는 어김없이 조상차례를 모실 것이다. 필자의 집에서는 차례에 딸아이도 참여시킨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원래 주자가례 어디에도 아들만 절한다는 예법이 나와있질 않다. 잘못된 것은 마땅히 고칠 일이다.
전통의 계승은 과거의 것이되 현재적 관점에서 수용할 때 그 힘이 솟구치는 법이다. 혹시나 우리는 옛사람의 노예가 되어있지나 않은지. 그도 아니면 다른 나라 사람의 노예가 되어있지나 않은지. 양자의 극단을 피하고 법고창신을 부르짖은 연암 박지원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법고창신의 21세기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다.

<교육마당 21>에서 인용  -- 2003. 0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