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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全州客舍내 풍패지관(豊沛之館)

굴어당 2011. 11. 29. 14:00

풍패지관(豊沛之館)! 풍패란 한(漢)나라 고조 유방(劉邦)이 풍현(豊縣) 패읍(沛邑) 사람이니 그의 고향이다. 그래서 풍패란 제왕의 고향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실제 용흥지지(龍興之地)는 함경도 경흥지방이지만, 그의 선조가 전주 사람이라 전주도 이성계의 고향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풍패지관이란 별칭의 현판을 내건 것이다.
이 현판 글씨를 쓴 사람은 조선 선조 때 명나라 사신으로 온 주지번(朱之蕃, 1561~1626)의 글씨이다. 그가 이곳까지 와 필적을 남긴 사연의 스토리 텔링은 참으로 깊은 사연이 있다.
여기 동양학자 조용헌 선생이 쓴 <명문가 이야기>에서 표옹 송영구 가를 소개하며 쓴 글 중 풍패지관에 얽힌 이야기 부분을 전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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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낱 지방 객사에 지나지 않은 곳에, ‘풍패지관’을 굳이 이처럼 크게 써야만 했을까. 풍패(豊沛)는 한나라 건국자 유방이 태어난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전주 역시 조선의 창업주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기 때문에 왕도(王都)로서의 권위와 품격을 드러내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런데 풍패지관은 이 근방 명필이 쓴 글씨가 아니며, 더 나아가 조선 사람이 쓴 글씨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씨는 중국인 사신 주지번(朱之蕃)이라는 인물의 작품이다. 조선을 방문한 중국의 공식 사신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다 이러한 현판을 남긴 것은 매우 희귀한 사례다.

왜 중국 사신은 전라도 전주까지 내려와서 풍패지관이라는 거창한 사이즈에 거창한 이름의 현판글씨를 남기고 돌아갔는가? 그가 이성계를 흠모해서 그랬던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주지번은 전주에서 서북쪽으로 50리 떨어진 왕궁면(王宮面) 장암리(場岩里)에 살고 있던 표옹 송영구를 만나기 위해 한양에서 내려오던 길에 전주객사에 잠시 들렀다가 기념으로 써준 것이다.


아무튼 ‘풍패지관’이라는 현판글씨는 전북지역의 명문가인 표옹 송영구 집안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달리 말하면 이 현판글씨로 인해 표옹 송영구 집안이 호남의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606년, 당시 주지번은 중국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온 공식외교 사절단의 최고책임자인 정사(正使)의 신분이었다. 주지번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한양에서는 임금과 대신들이 함께 모인 어전회의에서 그 접대 방법을 놓고 고심할 정도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서울에 오니 국왕인 선조가 교외까지 직접 나가 맞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지번은 조선으로서는 매우 비중있는 고위급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한 주지번이 교통도 매우 불편했을 당시에 한양에서 전라도 시골까지 직접 내려온 것은 오로지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사적인 이유에서였다. 주지번은 장암리에 살던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그는 공식 업무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짐을 챙겨 표옹의 거처를 방문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표옹과 주지번 사이의 아름다운 사연은 ‘표옹문집’에 기록돼 있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표옹은 임진왜란이 발생한 다음해인 1593년에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북경에 갔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때 조선의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무언가 입으로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었다. 표옹이 그 읊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가. 장작으로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여관 뽀이’인데, 그 주제에 남화경을 외우는 게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천한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다 암송할 수 있느냐?”

“저는 남월(南越)지방 출신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잣돈이 다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너, 그러면 그동안 과거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작성하였는가 종이에 써 보아라.”


표옹은 이 청년을 불쌍하게 여겨 시험 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으나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 작성 요령을 알려준 것이다. 그러고 나서 표옹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수편을 필사하여 주고, 거기에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시간을 아껴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에서였다. 그 후에 이 청년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바로 이 청년이 주지번이었다. 결과적으로 표옹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즉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뜨고 난 후에 손들면 소용없다. 뜨기 전 무명상태의 인물을 발탁하는 혜안이 바로 지인지감 아닌가!

허균과 주지번의 만남


‘조선왕조실록’ 시디롬에서 주지번 항목을 검색하여 보면, 그는 을미년(乙未, 1595)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표옹을 만난 지 2년 후에 수석합격한 셈이다. 당시 중국사람들은 학사문장가로 초굉, 황휘, 주지번 세 사람을 꼽았는데, 그 중에서도 주지번이 가장 유명하였다고 한다. 주지번의 벼슬은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라고 소개되는데, 한림원은 당대에 학문의 경지가 깊은 인물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그는 또 ‘한서기평(漢書奇評)’의 서문을 쓴 인물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주지번은 보통 관료가 아니라 중국 내에서 알아주는 일급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것이다.

그런 주지번이 부사 양유년과 함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하였을 때가 선조 39년인 1606년의 일이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정사 주지번의 카운터파트로 대제학인 유근(柳根, 1549∼1627)을 내세웠다. 유근은 선조 20년 일본의 승려 겐소(玄蘇)가 들어왔을 때 탁월한 문장력을 발휘하여 겐소 일행을 탄복케 한 당대의 문사이자, 풍모가 준수하고 언행에 절도가 있던 인물이었다. 유근이 바로 표옹의 고모부였다는 사실도 재미있는 점이다. 또 유근의 종사관으로는 허균(許均, 1569∼1618)이 발탁되었다. 조선에서도 일급 문사들을 내세워 주지번을 상대케 한 것이다.


이렇게 중국측의 주지번-양유년 조를 상대할 수 있는 조선의 복식조로 50대 후반의 유근과 30대 후반의 허균이 선발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양국 외교관의 만남이지만, 비공식적 차원에서는 한·중 문장가들이 재주를 겨루는 국가 대항 문장겨루기적 성격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연으로 해서 당대 중국과 조선에서 난다긴다하는 문장가인 주지번과 허균은 서로 만나게 되었고, 허균의 누님인 허난설헌의 시가 북경의 선비들에게 소개된 것도 주지번과 허균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주지번이 허난설헌의 시에 매료되어 중국에 가지고 가서 알린 것이다.


한편 주지번이 전주 북쪽 50리 거리에 위치한 장암 마을에 있던 표옹을 찾아왔을 때, 표옹의 나이는 51세였다. 표옹은 46세 때 청풍군수를 지냈고, 52세 때에는 경상도 성주의 목사를 지냈다. 따라서 주지번이 방문한 시기는 청풍군수를 지낸 다음 성주목사로 나가기 바로 전해다. 북경의 영빈관에서 만났던 때부터 계산하면 13년 만의 만남이었다. 당시 주지번의 나이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주지번이 허균과 개인적으로 친해졌다는 이야기를 감안해볼 때 허균의 당시 나이(38세)와 비슷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쯤이었지 않나 싶다.

송씨 집안의 구전에 의하면 주지번이 한양에 도착해서 전라도 왕궁에 사는 송영구라는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고 한다. 이때 주변에서는 “죽었다”고 답변하였다 한다. 그러나 주지번이 좀더 수소문한 끝에 표옹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추궁하니까 “대국인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서 시골까지 찾아가면 접대 준비 때문에 가는 곳마다 민폐가 심하니 부득이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대답이었다. 그러자 주지번 왈 “그러면 말 한 필과 하인 1명만 준비해 줘라. 다른 준비는 필요없다.” 이렇게 해서 전주객사를 거쳐 장암에 도착한 것이다.


주지번은 조선에 올 때 희귀한 책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물론 일생일대의 은인이자 스승인 표옹에게 드릴 선물이었다. 그 책 분량이 80권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책들은 나중에 규장각에 보관되었다.

주지번이 왕궁면의 장암에 위치한 표옹의 집을 방문해서 남긴 흔적은 현재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망모당(望慕堂)이라는 편액이고, 다른 하나는 표옹의 신후지지(身後之地, 묘자리)를 택지해준 것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기를 도와준 은인의 양택에는 망모당이라는 글자를, 은인의 편안한 사후를 위해서는 음택 자리를 잡아줌으로써 은혜에 보답한 셈이다.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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