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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대장경 팔만대장경을 둘러싼 오해와 그 시정...서지학자 박상국 강연문

굴어당 2011. 12. 11. 08:32

초조대장경 팔만대장경을 둘러싼 오해와 그 시정...서지학자 박상국 강연문 2011.12.08 08:16:37

台植注 : 아래는 초조대장경 판각 천년을 기념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개최 중인 관련 특별전 행사와 연관해 2011년 12월7일(水), 이 박물관이 주최한 전문가 특강에서의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의 발표문 抄略이다. 간단하지만 이 간단함에 박 원장의 40여 년 대장경 연구의 결정이 녹아있다.   


<내용요약>

초조대장경 판각시작 천년 기념

고려대장경의 진실을 밝힌다.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 박상국

1.

금년은 고려 초조대장경 판각을 시작한지 1000년이 되는 해라고 해서 대구박물관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대장경 전시회가 열렸고, 현재 해인사 일원에서는 단풍놀이와 더불어 대장경 천년기념행사로 연일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동안 관련자료 부족과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일본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생긴 선입견 탓으로 역사기록에 대해 잘못된 이해로 초조대장경은 1011년에 시작하여 1087년까지 77년 동안 새겼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고, 해인사 대장경판은 선원사에서 1236년에서 1251년까지 판각하였다고 잘못 알려졌다. 이렇게 대장경의 역사적인 진실이 상당부분 왜곡되었다. 금년은 초조대장경 판각시작 천년되는 해, 그동안 왜곡되었던 고려대장경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2.

초조대장경의 판각시기에 대해서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나오는 현종2년(1011)에 시작한 것은 확실한데, 고려사 선종 4년(1087)에 등장하는 “2월 甲午(11일) 幸開國寺 慶成大藏經, 3월 己未( 7일) 王如興王寺 慶成大藏殿, 4월 庚子(19일) 幸歸法寺 慶成大藏經”이란 기사를 잘못 이해하여 1087년까지 77년이 걸려 새겼다는 것이었다.

선종의 시주로 2월과 4월에 개국사와 귀법사에서 각 각 대장경을 찍어내어 한부씩 봉안하는 의식에 참석한 것이고, 3월에는 흥왕사에 대장경 판본 봉안을 위한 대장전을 지어 그 낙성식에 참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특히 흥왕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주지를 맡으면서 1091년에 교장도감을 설치하여 교장을 간행했던 사찰이다. 흥왕사의 대장전 건립은 아마도 임금이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의 교장 간행을 위해 대장경 판본과 그동안 수집한 교장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을 건립했을 것이다. 1011년에 시작한 대장경 판각을 이러한 기록을 기준으로 1087년에 와서야 판각을 완료하고 대장경 판전을 건립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최근 경도대학교 명예교수인 찌쿠사 교수에 의하면, 북송의 개보판 대장경은 판각은 971년에서 977년까지 7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고려는 중국 못지않은 인쇄문화대국이었고, 송판대장경 간행소식을 듣고 진작부터 대장경 판각을 준비했을 것이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은 갑자기 불타버려 미리 준비할 겨를도 없었고, 게다가 내용을 일일이 대교하면서 판각했는데도 준비 기간까지 합쳐서 16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더구나 초조대장경은 송 개보판 대장경을 저본으로 새겼기 때문에 그리 오래 걸릴 일이 아니다. 현존 개보판 대장경과 비교해 보면 대부분 개보판의 번각(飜刻)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고려사 고종 38년 9월 임오 조에서 "현종 때의 대장경판본이 임진년(1232) 몽고병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왕과 군신이 다시 서원하고 도감을 세워서 16년이 걸려 완성하였다." 라고 하였고, 대각국사의 문집 제16권에 실린 「선종을 대신하여 제종교장의 조인을 발원하는 소.代宣王諸宗敎藏彫印疏」에서도 "현종께서 5천 권의 비장을 새기셨고 문종께서는 10만송의 계경(契經)을 새기셨습니다....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5048권으로 구성되었던 송개보판대장경을 현종 때 모두 새겼던 것이다. 문종 때는 이와는 별도로 속장경을 간행했던 것이다. 판각기간은 현종 때의 초조대장경 판각은 1011년부터 10년, 문종 때의 속장경은 1065년부터 5년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3.

경남 합천군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은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판당에 있었던 것이다. 1232년 몽고군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판이 불타 버려서 다시 새긴 것이다.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고 하며, 판수가 8만여 판에 달하고 8만4천 번뇌에 대치하는 8만4천 법문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판’이라고도 한다.

고려 대장경의 판각 시기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고종 38년 9월 임오일에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성 서문 밖에 있는 대장경판당으로 가서 현종 때의 판본이 임진년(1232) 몽고 침입 때 불타 버려 군신이 다시 발원하여 도감을 세우고 16년이 걸려 마쳤음을 고유한 고유제에 참석했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그동안 대장경 판각을 고종 38년(1251)을 기점으로 16년 전인 고종 23년(1236)에 판각을 시작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였다.

팔만대장경판의 권말에는 “정유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등으로 간행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 간기를 조사하여 정리해 본 결과,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1237년에 2종 115권을 판각한 것을 시작하여 1248년에 󰡔대장목록」 1권 판각을 마지막으로 12년이 걸려 판각을 모두 완료하였다.

< 刊記를 通해 본 大藏經板 板刻 年度別 分類表>

板刻 年度

板刻種 · 卷數

板刻 年度

板刻種 · 卷數

丁酉年(1237)

戊戌年(1238)

己亥年(1239)

更子年(1240)

辛丑年(1241)

壬寅年(1242)

2種 115卷

42種 509卷

103種 304卷

74種 292卷

107種 296卷

176種 382卷

癸卯年(1243)

甲辰年(1244)

乙巳年(1245)

丙午年(1246)

丁未年(1247)

戊申年(1248)

466種 1,317卷

286種 1736卷

280種 765卷

169種 453卷

32種 96卷

1種 1卷

刊記 無

78種 303卷

計 : 1,738種 6,568卷

實際로 構成된 大藏經 總計 : 1,496種 6,568卷

󰡔고려사」에 16년이란 기간이 걸려 판각했다고 하였으므로 이를 역산하면 1233년부터 대장경 조성 사업이 시작된 것으로 보게 된다. 결국 1233-1236년의 판각을 위한 사전 준비 기간을 거쳐, 1237-1248년까지 12년 동안 판각을 모두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1249년에 최고 권력자인 최우가 죽고 그의 아들 최항이 뒤를 잇는 집권 과도기를 거쳐 1251년(고종 38)에 와서야 의식을 치르게 된 것이다.

4.

고려대장경판각은 어디에서 했을까? 그동안 대장경 판각장소가 선원사라고 잘못 알려져 왔다. 선원사는 최우의 원찰이고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에 임금이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 온 대장경을 보러 용산강에 행차했다는 기록으로 인하여 고려대장경은 선원사에서 판각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선원사는 대장경판 판각이 거의 완료된 고종 32년(1245)에 창건되었고, 더구나 공민왕 9년(1360) 윤 5월에는 “왜가 강화를 노략질하면서 선원사와 용장사로 침입하여 300여명을 살육하고 쌀 40,000여석을 약탈하였다“는 기록으로 봐서 대장경판이 선원사에 있었다면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7년 기사는 선원사가 항구와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용산강으로 실어 나가기 위해 옮겨 놓았던 곳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선원사는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원찰이었기에 교통의 요지인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에 위치했던 것이다. 지금 선원사는 일제 때 땅을 메운 곳이라 한다. 그리고 강화도는 당시 정부가 국민을 버리고 피난 간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판각사업을 벌릴 형편도 아니었다.

고려사 열전 최이(崔怡=최우) 조를 보면,

진양공(晋陽公) 최이는 역대로 전한 대장경판이 모두 적병의 불사른바 되었으나 국가에 변고가 많아 다시 새로 만들 여가가 없었는데, 도감을 따로 세워 사재로 새긴 판이 거의 半이나 되어 나라를 福되고 이익되게 하였으니 그 공과 업적을 잊기 어렵다. 아들인 항(沆)은 가업을 계승하여 임금을 바르게 하고 난을 제압하였고 대장경판에 재물을 시주하여 공역을 독려하여 고성의 경찬을 갖게 되니, 중외가 복을 받게 되었고...

이렇게 강화정부는 대장경판을 판각할 여력이 없었고, 최이가 대장경 판각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최이는 당시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였고, 진양(진주) 지방 일원은 그의 아버지 최충헌 때부터 식읍지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만종과 만전이 각각 단속사와 쌍봉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경상도에서 비축한 쌀 50만석을 대여하여 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안(鄭晏) 조에서 보면,

안의 초명은 분(奮)이니 ...이가 그 재능을 사랑하여 임금에게 말씀드려 국자제주를 제수하니 안이 이가 전권하여 남을 시기하고 해치는 것을 보고 그 해를 멀리하고자 남해에 퇴거하여 부처님을 좋아하며 명산 승찰을 편력하고 사재를 희사하여 국가와 약속하고 대장경의 반 정도를 간행했다...

이 기록을 보면 정안이 남해에 퇴거하여 국가와 약속하고 대장경의 반 정도를 간행했다고 하였다. 정안은 국자제주를 그만둔 고종 28년(1241)이후에 남해로 내려가 대장경 판각의 운영 경비를 부담하였던 것이다. 정안의 집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하동지역의 호족출신이었고 또한 최이의 처남이었다. 그리고 대장경판각이 끝나고 난 뒤 1249년에는 남해의 자기 집을 사찰로 꾸미고 일연선사를 맞아들였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이렇게 남해는 대장경판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위의 <간기를 통해 본 대장경판 판각 연도별 분류표>에서 보듯이, 실제로 정안이 남해로 내려가서 대장경 판각에 참여한 1242년부터 5년 동안 전체 대장경 판각의 3분의 2 이상 판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안이 남해에 퇴거하여 대장경의 절반 정도를 간행했다는 내용은 정안이 당시 최우와 약속하고 이 사업을 주관했고 대장경 판각사업이 남해에서 행해졌음을 알려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대장경판의 간기를 조사해 본 결과 대장경판은 대장도감만이 아니라 분사대장도감 간기가 72종이 있다. 이 가운데 전체가 분사 판인 것은 51종이고 나머지 21종은 분사판과 대장도감 판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판각기간은 계묘년(1243)에서 정미년(1247)까지 5년간이었다. 이 가운데 경순(經順) 1404번 법원주림은 100권 가운데 12권이 대장도감 판이고, 86권이 분사 대장도감 판으로 모두 갑진년(1244)에 판각된 것이다. 여기서 각수를 조사해 본 결과, 동일한 각수가 대장도감판도 새기고 분사대장도감판도 새겼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경순 800번 불설의족경은 2권짜리 경전인데 권1은 분사 판이고 권2는 대장도감 판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는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 동일한 장소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동일한 각수가 같은 장소에서 대장도감판과 분사판을 함께 새겼던 것이다. 그러면 그 장소는 어디일까?

그리고 경판에 새겨진 각수 이름을 조사해 본 결과 동일한 각수가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 판을 같은 해에 새긴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것은 대장도감과 분사대장도감이 동일한 장소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동일한 각수가 같은 장소에서 대장도감판과 분사 판을 함께 새겼던 것이다. 그러면 그 장소는 어디일까?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식읍지가 진주일원이었고, 그의 처남 정안이 남해에 퇴거하여 국가와 약속하고 대장경의 반을 간행했다고 하였고 고종 28년(1241)이후에 남해로 내려가 대장경 판각의 운영 경비를 부담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남해는 대장경판 제작에 필요한 자금을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분사대장도감 판 가운데 『종경록』이 있는데, 권27에 “고려국 분사 남해대장도감”이란 간기가 새겨져 있어 그동안 추정해 왔던 대장경판 판각 장소가 남해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더구나 제 27권를 새긴 '최동'아란 각수는 동일한 시기에 대장도감판인 『법원주림』 권72와 『아비달마집이문족론』 권10 등 10여 종 이상의 경전 판각에 참여한 각수였다. 이로써 대장경판은 모두가 남해에서 새겨진 것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김태식 블로그(역사문화라이브러리) http://blog.yonhapnews.co.kr/ts1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