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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北岳)의 명소, 이항복의 백사실(白沙室)

굴어당 2011. 12. 28. 04:43

- 백 아흔 일곱 번째 이야기
2011년 12월 19일 (월)
북악(北岳)의 명소, 이항복의 백사실(白沙室)

서울의 곳곳에는 숨겨진 비경이 많다.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별서(別墅)인 백사실(白沙室)은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도심 속의 무릉도원이다. 이항복의 호 중 대표적인 것이 필운(弼雲)과 백사(白沙)인데, 필운은 필운대(弼雲臺)와 관련이 깊으며, 백사는 백사실에서 유래한다. 필운대는 인왕산 자락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큰 암벽으로 이항복의 집터가 이곳에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이곳에는 원래 권율의 집이 있었는데, 권율은 이 집을 사위인 이항복에게 물려주었다. 필운대 일대는 조선후기 중인문화가 꽃을 피운 인왕산 자락 중에서 중심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중인들이 시문을 창작하고 교유했던 모습은 ‘필운대풍월’이라는 말로 후대에도 널리 회자되었다. 백사실은 필운대에서 조금 떨어진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비경이었다. 이항복은 1611년 1월 꿈속에서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이곳의 계곡과 흰 모래가 매우 인상이 깊어, 백사(白沙)라는 호를 쓰게 되었다. 『백사집』에는 그 날의 꿈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축년 정월 11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마치 공사(公事)로 인하여 비를 맞으면서 어디를 가는 듯하였다.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두 사람이고 도보로 따르는 자가 또 4, 5인쯤 되었다. 어느 한 지경을 찾아 들어가니, 산천(山川)이 기이하고 탁 트였으며, 길옆의 한 언덕을 쳐다보니, 그곳에는 새 정자가 높직하게 서 있었는데, 지나는 길이라 올라가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곧장 막다른 협곡(峽谷)에 다다르니, 협곡 안에는 마치 사찰과 같은 큰 집이 있고 그 곁에는 민가(民家)들이 죽 열지어 있었다. 인하여 그 큰 집에 들어가서는 마치 무슨 일을 한 듯하나 잊어버려서 기억하지 못하겠다. 여기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다시 아까 지나갔던 언덕에 이르니, 그 언덕 밑은 편평하게 탁 트인 광장(廣場)이 되었고 그 위에는 백사(白沙)가 죽 펼쳐져 있는데, 그 주위가 수천 보쯤 되어 보였다. 또 백위(百圍)쯤 되는 큰 나무 다섯 그루가 광장 가운데 늘어서 있는데, 일산(日傘)과 같은 소나무 가지가 은은하게 빛을 가렸다.
[辛丑正月十一日夢。若因公幹。冒雨而行。騎而從者二。步者又可四五人。尋入區。山川奇爽。行傍一崗仰見。新亭翼然。而過去不暇登覽。直到窮峽。峽中有大屋如寺社。傍有民居列置。因入其大屋。若有所爲而忘未記。了事而廻。還到前所過崗子。崗下夷爲寬塲。布以白沙。周廻可數千步。有百圍五大木。離立塲中。隱映偃盖。]


이항복은 막다른 협곡 안에 사찰과 같은 큰 집과, 그 집 주변에 민가가 이어져 있는 모습, 언덕 밑의 평평한 광장에 백사가 수천 보 가량 죽 펼쳐진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글을 써 내려 간다.

비로소 등성이를 타고 올라가서 비로소 새 정자에 올라가 보니, 정결하고 산뜻하여 자못 별천지와 같았다. 그 안에는 서실(書室)이 있는데, 가로로 난 복도(複道)에는 모두 새로 백악(白堊)을 발랐고 아직 단청(丹靑)은 입히지 않았다. 그 밖의 낭무(廊廡) 여러 칸은 아직 공사(工事)를 끝내지 못하여 다만 기둥을 세우고 기와만 이었을 뿐이었다. 인하여 형세를 두루 살펴보니, 사방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한가운데에 큰 들판이 펼쳐 있고, 세 개의 석봉(石峯)이 들 가운데 우뚝 일어나서 그 형세는 마치 나계(螺髻)와 같았다. 이것이 구불구불 남쪽으로 내려가서 중간에 꺾어졌다가 다시 뾰족하게 일어나서 언덕이 되었는데, 언덕의 높이는 겨우 두어 길쯤 되었고 정자는 바로 그 언덕 위에 있었다. 이 언덕의 오른쪽으로는 넓고 편평한 비옥한 들판에 수전(水田)이 크게 펼쳐 있어 향기로운 벼에 이삭이 패서 한창 바람에 흔들려 춤을 추는 푸른 벼가 백경(百頃)으로 헤아릴 만하였다. 정북향에 위치한 여러 산들은 한군데에 빽빽히 모여 뛰어오를 듯 허공에 솟아 있으며, 동학(洞壑)은 깊고 험하여 은은하게 산천의 무성한 기운이 있었다.
[緣崗而上。始登新亭。精㓗蕭洒。殆非人間有也。內有書室。橫廊皆新塗白堊。未加丹碧。其外廡數間。時未斷手。只植柱覆瓦而已。因得周覽形勢。四山屛擁。中開大野。有石峯三朶。斗起野中。勢如螺髻。逶迤而南。中折而起。融而爲崗。崗高僅數丈。亭在崗上。崗之右。沃野平衍。大開水田。香稻發穗。方搖風舞綠者。可數百頃。直北衆山。攢蹙奔騰。洞壑深嚴。隱隱有薈蔚之氣。]



▶ 백사실의 연못과 정자가 있었던 흔적

정자의 앞에는 멀리 산봉우리가 열지어 서서 동천(洞天)을 둘로 만들었다. 이 두 동천에서 나오는 물은 마치 흰 규룡(虯龍)이 구불구불 굼틀거리며 가는 것과 같은데, 한 가닥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또 한 가닥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두 가닥이 이 정자 밑에서 서로 합하여 돌아나가서 한 물줄기가 되었다. 이 물은 넓이가 수백 보쯤 되고 깊이는 사람의 어깨에 차는데, 깨끗한 모래가 밑바닥에 쫙 깔려 있어 맑기가 마치 능화경(菱花鏡)과도 같아서 오가는 물고기들이 마치 공중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시냇가에는 흰 돌이 넓고 편평하게 깔려 있어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낚시터를 이루었고, 현(玄) 자의 형세로 흐르는 시냇물은 이 정자의 삼면(三面)을 빙 둘러 안고 돌아서 남쪽의 먼 들판으로 내려갔다.
[亭之前。遠峯列竪。雙成洞天。水自雙洞來。若白虬蜿蜒屈曲。一派自北而南。一派自南而北。兩派合于亭下。匯爲一流。廣可數百步。深沒人肩。明沙爲底。淸若菱鏡。魚行往來。皆若空中遊。溪邊白石平廣。步步成磯。溪流之勢之玄。環抱繚繞于亭之三面。而南注于遠野。]


이어서 이항복은 정자에 올라 별천지와 같은 풍광을 접한 느낌을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꿈속의 기억을 너무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도 이채롭다. 마지막 부분은 “평생에 이러한 경계는 본 적이 없었다.”고 하며 꿈속의 선경을 본 기억과 함께 이 별서가 윤두수의 것임을 전하고 있다.

나는 평생 구경한 것 가운데 일찍이 이러한 경계(境界)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자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오음(梧陰)의 별서(別墅)라고 하였다. 이윽고 윤 수찬(尹修撰)이 나와 맞이하면서 말하기를, “상공(相公)이 안에 계신다.”고 하였다. 나는 이때 문 밖에서 머뭇거리다가 우연히 “도원의 골 안에는 일천 이랑이 펼쳐 있고, 녹야의 정원에는 여덟 용이 깃들었도다[桃源洞裏開千畝綠野庭中有八龍].”라는 시(詩) 한 구절을 얻었는데, 시를 미처 더 이어 짓지 못한 채 하품하고 기지개를 켜다가 꿈을 깨었다. 문창은 이미 훤해졌는데, 그 시원하던 기분은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 있고, 모발(毛髮)에는 서늘한 풍로(風露)의 기가 있었다.
[平生蓄眼。未甞見如許境界。仍問亭主。曰梧陰別墅。俄有尹修撰出迎曰。相公在內。余躊躇門限。偶得一句曰。桃源洞裏開千畒。綠野庭中有八龍。未及續成。欠呻而醒。窓紙已生白矣。餘爽猶在膈上。毛髮颯颯有風露氣。]

마침내 일어나서 그 경치를 마음속으로 더듬어 찾아서 화공(畵工)을 시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이 시를 붙여 쓰려다가 갑자기 스스로 생각하기를, ‘도원(桃源)의 뛰어난 경치에다 천묘(千畝)의 부(富)를 얻고 녹야(綠野)의 한적함을 누리며 팔룡(八龍)의 복을 소유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지극한 소원이다. 다행히 내가 이런 기이한 꿈을 꾸었으니, 왜 굳이 오음(梧陰)에게 양여(讓與)하고 스스로 곁에서 구경이나 하는 냉객(冷客)이 된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푸줏간을 지나면서 고기 씹는 시늉이나 내는 데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러니 비밀에 붙여 남에게 말하지 않고 인하여 스스로 취하는 것이 낫겠다.’ 하고, 그 정자를 ‘필운별서(弼雲別墅)’라 고치고 절대로 윤씨(尹氏) 집 사람들에게 천기(天機)를 누설하지 않았다.-(이튿날 아침에 기록하다.) 이달 27일 밤 꿈에 재차 이 별서에서 오음과 함께 평소와 같이 즐겁게 희학질하며 노닐었는데, 산천의 뛰어난 경치는 지난번의 꿈과 같았으나, 다만 정사(亭舍)의 체제(體制)가 조금 달랐을 뿐이었다. 하늘이 오음에게 내려준 곳을 내가 사사로이 훔칠 수 없으므로, 인하여 ‘오음별서(梧陰別墅)’로 복호(復號)시켰다.-(오음의 성명은 윤두수(尹斗壽)이다.)
[起而尋之。欲債倩工爲圖。附詩其上。忽自思曰。以桃源之勝。得千畒之富。享綠野之閑。有八龍之福。斯乃人間至願。幸我得此奇夢。何必讓與梧陰。自爲傍觀冷客。不幾於屠門之嚼耶。不如秘而不傳。因而自取。改其亭曰弼雲別墅。絶不向尹家人透漏天機也 (翌朝記) 是月二十七日夜夢。再遊是墅。與梧陰歡謔如平日。山川形勝。如前所夢。只亭舍體制。差異耳。天之所眷。不可私竊。因復號曰梧陰別墅(名斗壽)]
- 이항복, 「기몽(記夢)」, 『백사별집』4권 잡기(雜記)


이항복은 자신이 꿈속에서 본 별서가 윤두수의 것임을 알고도, 그것이 너무나 탐이 나 ‘필운별서’로 그 이름을 고쳤다가, 다시 하늘이 윤두수에게 내려준 곳을 자신이 훔칠 수 없다 하여 ‘오음별서’로 고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곳이 ‘백사실’로 전해지는 것을 보면 결국 이곳 최후의 소유자는 이항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인왕산 자락의 필운대(弼雲臺)에 거주하면서, 백사실을 별서로 삼은 이항복의 서울 시절은 무척이나 행복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항복은 서인(西人)으로 활약했지만 당색이 뚜렷한 인물은 아니었다. 실무 관료로 자질을 발휘하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주로 피난을 가는 선조를 호종(扈從)하여 전란 후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극심한 정쟁의 소용돌이는 이항복에게도 예외가 되지는 못했다. 광해군 즉위 후에 폐모론(廢母論)이 전개되자, 이항복은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결국 유배지 북청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배지에서도 이항복은 그토록 풍취가 좋았던 인왕산의 필운대와 북악산의 백사실을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 '백석동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

백사실은 북악산 뒷자락에 북한산을 배경으로 조성된 동천(洞天 : 경치 좋은 곳)으로, 비교적 높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백사실 입구의 큰 바위에 새겨진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자는 이곳이 별세계임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백사실의 중심부에는 정자를 지은 터와 연못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선비의 별장으로 매우 적합한 지역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곳은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의 배경이 되었던 인왕산 자락의 무계동(武溪洞) 계곡과도 인접해 있어서, 북악산과 인왕산이 만나는 곳에 절경이 형성되었음을 체험하게 한다. 백사실은 명승 유적과 함께 자연 생태가 어우러진 지역으로서 도롱뇽, 버들치, 가재 등이 서식하여 청정무구의 공간임을 선언한다. 서울 도심 지척의 거리에 있으면서도 선경(仙境)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백사실. 백사실을 찾아 옛 선인들의 학문과 풍류를 접해볼 것을 권한다.

신병주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주요저서
    •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