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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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원필경집 번역.조면희.고전번역원에서

굴어당 2012. 1. 4. 13:46
본 글은 지금부터 4년 전인 2008. 1. 2. 동년 8. 2.까지 시간 날 때마다 <계원필경집 20권>을 한 권에 한편씩 번역하여
본인의 블로그 <맑고푸른개울물아 :http://cmh1022.egloos.com/6923170>에 올렸던 것입니다. 지금 새삼스럽게 들여다보다가 사문斯文의 학자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싶어서 여기 옮겨보았습니다. 지금보니 문자도 메끄럽지 못하고 서툰점이 있습니다마는 그점 이해하시고 1주일 정도에 한번씩 올리려고 하니 참고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2012. 1. 3. 조면희 백

Ps. : 지금 보니 <계원필경집>이 번역되었다고 있는데 고전번역원 DB 에는 찾을 수 없군요. 아마도 개인이 번역하여 출판하였기 때문인데 이런 글은 번역원에서 국고로 출판하여 국민이 누구나 읽도록 하여야 될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문집 총간 제1권에 있는 국보적인 글은 번역해 올리지 않고 다른 글부터 올린다는 것은 국가적인 수치일 것 같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본인이 못 찾아서 그런지는...
2012. 1. 3. pm 3:00 필자 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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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른 학자들의 시문은 대학의 한문연구기관이나 기타 전문 번역기관 같은데서 앞다투어 번역을 하면서도 우리 나라 최고이며 최초의 문집인 <계원필경집>은 모두 손을 대지 않는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최고운의 토황소격문으로 알려진 <격황소서> 도 본인이 10년 전에 <우리 옛글백가지>에 번역해 올린 이후 고등학교국어교과서에 2003년부터 실려 오며 아직까지 누구하나 그 글에 대한 논평을 하는 사람도 없고 달리 완역한 것도 보지 못했다. 그렁저렁 그 작품은 국학자들에게 잘 읽혀 내려 온다.

본인은 <계원필경집>을 국가의 체면이 걸린 글이기 때문에 완역해 보고 싶다. 각기관이 번역을 한다면 몰라도 누군가 해야한다. 그런데 못하는 이유는 이글이 당송시대 4.6병려체로서 고사가 많이 인용되고 또 글의 상대방이 전부 당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당시의 제도가 또한 낯설므로 번역을 잘 해 놓아야 누가 그리 달갑게 읽어주지도 않을 것이고 조금만 잘못 짚으면 마치 자기가 훨씬 나은양 떠들어 댈 터이니 그래서 손을 못 대는 것이다. 남의 조그마한 잘못은 어떻게 해서라도 끄집어내어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다. 이러한 것을 吹毛求瑕라고 한다,

이렇게 비난을 받더라도 눈군가 먼저 번역을 해 놓으면 다른 학자가 보탤 점은 보태어 나가게 되어 학문적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냥 그 작품이 우리 고전의 濫觴이니 白眉니 하고 떠들긴 하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아는 이가 없으니 딱한 일이다. 본인이 그 총대를 메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글쎄 그래도 해야할까? <춘추전국시대이야기> 저자 조면희 백
석상류천石上流泉

작자 : 최치원
번역 : 조면희
출전 :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금곡수과묘수탄, 원수운저향산산.
琴曲誰誇妙手彈。遠輸雲底響珊珊。

정무섬구침금경, 시유경시촉옥반.
靜無纖垢侵金鏡。時有輕颸觸玉盤。

오열장량언미요, 자원손초침응한.
嗚咽張良言未用。潺湲孫楚枕應寒。

심사감석청령색, 유입창명편일반.
尋思堪惜淸泠色。流入滄溟便一般。

*해설 : 바윗돌 위에 흐르는 샘물

거문고를 묘수가 자랑스럽게 연주하는 것인가?
저 멀리 구름 아래서 청량한 소리가 들려오네.

물이 고요히 머물 때는 티끌 하나 없는 금빛 거울이고,
때로는 가벼운 바람따라 옥이 쟁반에 굴리는 소리일세.

흐느끼는 소린 장량의 말이 안 쓰릴까 두려워하는 듯하고,
졸졸 소리는 손초가 벤 베갯돌이 더 차게 느껴질 듯하지.

생각하면 아까구나, 저 맑고도 시원스러운 색깔들이
넓은 바다에 들어가면 모두 평범한 것으로 될터이니.

*형식 : 仄起式七言律詩
*압운 : 상명성 14 ‘寒’운.

*初聯 內句에 원래 ‘雖’자는 ‘誰’가 평측은 둘 다 같지만 혹시 오식 되지 않았는가 싶어서 바꾸어 보았습니다.
“琴曲雖誇妙手彈 : 거문고 소리는 아무리 자랑하여도 묘수가 타야하고, 또는 거문고를 아무리 묘수가 탄다고 자랑한들.” 두 가지로 해석되는데 외구와 어울리려면 뒤쪽 해석을 할 수 있으나 외구의 먼 산에서 들리는 청량한 소리와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다. “저 거문고 어느 묘수가 자랑 삼아 타는지 멀리 구름 낀 산 밑에서 들려오네.”하는 것이 훨씬 시상이 좋다.

*낱말
1.嗚咽張良言未用 : 여기에 대한 출전은 어디서 왔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黃石公이 장량에게 <태공병법>을 전하여 주고 13년 뒤에 濟北에서 黃石으로 변하여 장량을 만났다는 고사가 있으니 장량의 간언이 세상에 먹혀들지 않을까봐 그 돌 위에 흐르는 소리가 흐는꼈다고 한 것이 아닌지? 계명산 추야월에 흐느끼는 옥 통소 소리는 ‘言未用’가 뜻이 맞지 않음.

2.孫楚 : 晉나라 사람 孫楚는 어릴 때부터 벼슬하지 않고 은거생활을 하여 늘 돌을 베고 흐르는 물로 입을 가시었다고 함. ‘침석수류枕石漱流’의 고사가 있음.

*작자소개(백과사전 인용) : 최치원 (崔致遠 857∼?(문성왕 19∼?)) : 신라 말기 학자·문장가·경주(慶州)최씨 시조.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

경주최씨 가문에서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 6두품 출신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869년(경문왕 9) 12세의 나이로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고, 876년(헌강왕 2)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879년 황소(黃巢)의 난에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4년간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직접 지었고, 특히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전중시어사내공봉(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에 올라 포장으로 비은어대를 하사받았다.

885년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으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계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하여 대산군(大山郡)·천령군(天嶺郡)·부성군(富城郡) 등의 태수를 지냈다.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당나라에 가지 못하고,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린 것이 받아들여져 6두품 신분으로서는 최고 관등인 아찬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현실에서는 자신의 개혁안이 실현될 수 없음을 비관,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은 뒤, 각지를 유랑하다가 만년에는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그는 유교·불교 이외에 도교·노장사상·풍수지리설 등에도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특히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 화랑도를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문창후(文昌侯)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咸陽)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계원필경》 《금체시》 《잡시부》 《중산복궤집》 등의 시문집과, 사서(史書)인 《제왕연대력》, 불교관계의 《부석존자전》 《법장화상전》 《석이장전》 등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사산비명》만이 전한다.

그 밖에 <숭복사비(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등 비문의 글씨가 남아 있다. 약력은 <백과사전>에서 인용해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