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어당

굴어당의 한시.논어.맹자

http:··blog.daum.net·k2gim·

초기 고전국역의 낙수(落穗)글쓴이 / 이계황

굴어당 2012. 1. 5. 07:07

광화문 네거리 현 고보문고 빌딩 뒤편 첫째 골목길의 이름도 없는 목로주점에서 방은(放隱) 성락훈(成樂熏) 선생과 시인 월하(月下) 김달진(金達鎭) 선생이 소주잔을 건네며 하셨던, “도라무통[드럼통]이라도 치마만 두르면 됐지.”는 진짜 술꾼(?)들의 농담이었다. 당시 두 분은 예순에 가깝고 나는 서른도 안됐지만, 방은 선생은 술의 청탁(淸濁)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강의 쉬는 시간에도 한잔 하실 정도로 술을 매우 즐기시는 분이었다. 이는 민족문화추진회(이하 민추)가 발족한 후 성락훈 선생님을 모실 때에도 가끔 있는 일이었는데 성품이 소탈을 넘어 해탈한 분 같았다.


시작부터 성락훈 선생님 얘기를 꺼낸 것은 그분이 민추의 발족과 무관치 않으며 고전국역의 중추적 역할을 하셨기 때문이다. 1960년도 중반에 정부차원의 우리고전 번역과 후진 양성이 추진되었고, 40여년 후 민추의 발전적 해체를 통해 국가의 공공사업으로서 교과부 산하에 한국고전번역원이 발족되었으니, 민추의 탄생과 그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가 마땅히 있어야 하겠지만 그 일은 추후에 있을 테고, 그보다 필자로서는 민추 현판식부터 20여 년 간 봉직한 곳으로서, 이제 여생을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라, 민추의 공식적인 기록은 있지만 잊혀져 가는 반백년 전의 관계 인사나 일들을 소소하지만 남겨두고 싶은 생각으로 이 글을 쓴다.


민추의 1966년 6월 25일 사무실 개소식에는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회장과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외솔 최현배(崔鉉培) 부회장 그리고 일산(一山) 김두종(金斗鍾) 등 학ㆍ예술원 회원님 몇 분이 참석하셨고, 김강현(金康鉉) 간사장(공화당 전문위원, 전 문교부 법무관)과 직원 4명(박종국, 노영수, 나영준, 이계황)이 함께하였다. 필자는 당시 미국의 한 대학원에 입학해놓고 여비가 없어 잠시 머문 곳이었다.


사무실은 앞서 이야기한 방은 선생님의 목로주점 옆 건물로, 세종로 골목길 약 20m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30평 정도의 2층 일본식 건물이었다. 1층은 사무실, 2층은 회장단실이자 회의실이었다. 학ㆍ예술원 원로회원 50인으로 출발한 단체인데, 지금 생각하면 당 차원의 설립단체(문교부 사회교육과 소관) 치고는 너무 빈약하고 소박하게 출발하였다. 당시의 학술 문화의 정황이나 정치적인 문제나 경제수준을 고려하여 다른 저의가 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 그런데 당시 정부의 특별한 추경사업이라는 점과 일천만원이라는 예산은 당시로는 상당한 금액이었고 비중이 큰 사업이었다.


초기 이야기를 해보자. 민추의 발족 초기부터 매월 회장단 회의에서 사무처장이 업무보고를 해왔고 편집회의도 자주하는 편이었다. 편집위원은 회장단을 비롯해 저명한 문인인 조지훈(趙芝薰), 김동리(金東里), 조연현(趙演鉉) 등 이사분들이었는데, 회장단 회의와 이사회 및 편집위원회는 예술원 회장인 월탄의 노련한 사회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회의 후 한 블록 건너 일식집 2층 방에서 가진 식사 시간이 회의시보다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식사가 끝난 후 차를 마시는데, 얌전하지만 당당하신 일석(一石) 선생이 이성 관계를 한자숙어가 섞인 농담으로 희화화하여 박장대소를 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또 늘 동행하시는 일석, 두계, 일산 세 분은 상대의 처지를 은근히 털어놓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학술원ㆍ예술원이 그 분야가 다르듯 학예소속에 따라 그 기질과 언행이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한번은 노영수 편수담당이 한글학회 사무실로 외솔의 결재를 받으러 갔는데, 팔순에 가까운 연세에 똑바른 자세로 국어사전용 원고카드에 깨알같이 쓰시고 수정하시는 모습의 의연함이 조선어학회 사건당시 함흥 감옥이 연상되었다고 한다. 그때 결재서류가 좀 부실하였던지 서류를 집어 던지며 꾸중하시던 일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서 칼 같은 성품과 국어학자들의 세밀함을 알게 되었다.


방은 선생은 사업초기부터 번역을 주도하셨는데 놀라운 일이 있었다. 당시 방은 선생이 주석을 구술(口述)하면 노영수 편수담당이 적어놓고 확인했는데, 이십오사(二十五史)의 자료를 찾아 대조하면 모두 정확한 것이었다. 소시(少時)에 신동이라 불리었다는 이야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처럼 당시 한학대가들은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시문(詩文)을 줄줄 외우는 ‘워킹 딕셔너리(Walking Dictionary)’라 할 수 있는 분들이었다. 방은 선생의 회갑연이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개최될 때, 두계 선생이 축사 중에 “회갑잔치에 말이 좀 지나치지만 방은은 한문귀신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두계도 한문에는 방은을 선생으로 대접한 것 같았다.


신설동 시절 국역연수원(고전번역교육원의 전신)의 제1회 연수생은 한학을 한 연수생이 많았는데, 40세 전후가 많았다. 선생이 강의 휴식시간 중 연수생을 끌고 가 아래층 선술집에 자주 들렀던 일은 지금도 옛날 친구들이 모이면 가끔 이야기를 하는데, 약주도 세시지만 건강한 체력도 부러울 정도였다. 앞서 세종로의 목로주점에서의 일이다. 말하기 거북하지만 가끔 젊은 접대부를 앉혀놓고 대작을 하면 그 연세에 어느 덧 바지가 불룩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영웅이나 천재는 정력에서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은은 많은 제자를 두고 있었는데 성균관대(교수 역임)와 서울대 출신 강사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어느 독지가가 전 서울고교 동편에 한 사무실을 주시어 동방고전연구회(?)를 설립하여 연수시키다가 민추와 연합하여 운영했는데, 그 후 민추의 국역연수원에서 강독하시면서 교수반을 별도로 마련하여 지도하였다. 이제는 그 수강생 분들도 모두 정년퇴직하고 몇 분은 후학을 지도하고 있다.


그 후 민추가 문화재관리국 등과 함께 문교부 소관에서 신생 문화공보부로 이관되었는데, 그 때 고전적 현대화 사업도 문공부의 중요사업으로 등장했다. 민추가 정당(政黨)에서 행정부에 맡겨져 재단법인으로 개편되고 문공부 장관이 이사장을 맡게 된 것이 이때부터였다. 원로 학자들의 고령화로 번역후계자 양성이 시급하여 박대통령의 지시로 번역자 양성기관을 설립키로 되었는데, 학술원과 서울대, 국사편찬위원회와 성균관대 등에서 유치하려다, 원로학자가 민추에 집중되었기에 민추에 설치된 것이 번역자 양성과정이다. 학계에 번역 이상의 공헌을 하여 온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박대통령과 김종필, 백남억 의장 등의 문화정책에 관한 협의에서, 민추를 설립한 형식적인 발기 취지는 민족문화 연구 계발과 학ㆍ예술의 지원과 문화시설 확충으로 문화 정체성을 찾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의 평은 군사혁명의 역사문화적 취약성을 보완하고, 앞으로 역사 기술(記述)의 주체들인 학예술계를 회유하고자 하는 정책이라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혁명 주체의 민족주의적 성격으로 일본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정신을 우리에게 적용할 무대로 보았으나, 노학자들이고 시기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부적당하여 그 연장선에서 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 운영하였다는 설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된다.


박대통령은 원로들이 생존해 계신 동안에 번역을 해야 하니 신속한 방법으로 원로의 번역 녹음을 기초로 번역을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에 따라 여러 번 시험했지만 작업의 성격상 현토와 변역어휘, 주석 등은 학술적 연구 작업이므로 잘못하면 부실한 번역이 되겠기에 채택되지 못했다. 여하를 막론하고 당시 국가 원수가 그런 관심을 가진 것은 고전번역 촉진과 지원에 상당한 영향을 줬고, 공직자의 고전 필독서로 목민심서를 강조하시고 그 책에 제자(題字)한 것도 한 일화라 하겠다.


당시에는 고전적 현대화에 대한 체계적 이론이나 번역론 등을 연구한 전문가가 없어서 역사와 문화 분야 연구자들의 단편적인 의견과 국어학계의 의견을 사무적으로 종합하여 몇 차례 계획을 수립하여 수행해왔다. 처음에는 김강현 간사장의 주도하에 방대한 한국 고전적 자료조사로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계획과 시행이 차질을 빚었었다.


그 후 당시 고려대 강사이자 민추의 윤문위원이었던 이동환 현 고전번역원 원장과 필자가 주축이 되어 좀 더 전문적이고 치밀하게 장기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후에도 정부의 종합계획으로 국역조정심의위원회에서 몇 곳에서 수행되고 있는 고전국역을 민추로 통합하여 수행하는 것으로 계획되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몇 곳의 번역사업 추진 내용을 보면, 불경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번역하는 동국대 역경원(譯經院), 세종대왕과 한글연구를 위한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세종실록 번역, 한국고전의 국역과 국역자 양성 등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문화추진회, 한국고법전(韓國古法典) 번역을 하는 법제처, 그리고 정신문화연구원도 번역에 참여하였으나 미비하였고, 각각 대학에서 필요에 따라 번역하는 등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물론 자유교양추진회와 일반 출판사에서는 교양 수준의 번역물이 양산되었는데 이것도 그런대로 고전의 대중화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실제로 국역사업 수행의 이론이나 인력이나 공구류 등 자료나 여건 등이 갖춰있는 곳이 거의 없다보니 대부분 부실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물론 국역과 후진양성이 목적사업인 민추가 정통으로 국역과 교육에 관련된 인력과 공구류(工具類), 재정과 열정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몇 년 전에 국가의 공공사업으로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아직도 우리의 고전 현대화는 여러 면으로 부실하고 여전히 시험단계에 있다 하겠다. 한국고전적의 방대한 사업량으로 인한 물량 위주의 사업수행은 큰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정부의 사업이라면 협동 연구번역으로 전문가들의 학술적 연구번역을 수행하고 그 수준을 국제수준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번역 사업의 초기에는 번역에 대한 철학이나 수행방법이 미숙하고 행정지원도 미비하여, 한때 어떤 단체는 모든 여건이 미비한 채 운영을 위한 사업추진이란 비난을 받고, 아마추어 인력이 담당하여 그 성과물이 휴지에 지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한학 원로의 지도 없이 수행하는 번역에 문제점이 야기되고 있어, 지금도 여전히 여건이 개선되지 않은 채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원어번역의 시대까지 왔음에도 대학에 있는 분들이 당당하고도 뻔뻔한 중역(重譯)을 일삼는 등 번역의 풍토를 훼손하는 경우가 있음을 본다. 한국 문화의 수준이라고 위안해야 하나?


민추의 이야기 중 학예술계와 정계 등 각계에 빼놓을 수 없는 분들이 많다. 그 중 학자로는 김성희 교수가 공화당 정책위에 있으면서 학계와 당과의 정책개발 중재역을 하셨다. 은퇴 후 구기동 회관마련 축하연에서 ‘본인이 정계에 있으면서 한 가장 큰 업적은 민추의 고전현대화 사업이다’고 말한 것은 여러 면으로 음미할 일이라 생각된다.


우리 번역과 후진 양성의 초기 방은(放隱) 성락훈(成樂熏), 우인(于人) 조규철(曺圭喆), 심재(心齋) 조국원(趙國元), 우전(雨田) 신호열(辛鎬烈), 하성재(河性在), 이식(李植), 계산(桂山) 정원태(鄭元泰), 용전(龍田) 김철희(金喆熙), 연청(硏靑) 오호영(吳虎泳), 동초(東樵) 이진영(李鎭泳), 나갑주(羅鉀柱), 무애(无涯) 양주동(梁柱東),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홍이섭(洪以燮) 등 많은 원로학자들의 일화나, 학계와 정부 인사들과 사업에 대한 낙수(落穗)가 더 많지만 후일로 미루고자 한다.



글쓴이 / 이계황

 

* 전통문화연구회 회장
* 전 민족문화추진회 이사 겸 사무국장
* 한자한문교육학회 고문
* 한국어문회 이사

* 저서
  교양목민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