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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라이 공격한 오른팔 왕리쥔 배후엔 누가…

굴어당 2012. 3. 4. 06:33

지난 2월 9일 미국 내 반(反)중국 사이트인 ‘보쉰(博訊)’에 ‘전 세계에 보내는 공개서신’이란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여러분이 이 편지를 보고 있을 때, 나는 아마 세상에 없거나 자유를 잃었을 것”이라고 시작하는 서신은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는 (공산)당내의 가장 큰 ‘위군자(僞君子·가짜군자)’ 보시라이가 계속 연극을 하는 것을 보길 원치 않는다. 그와 같은 간신(奸臣)은 장차 중국의 미래에 가장 큰 불행이자 민족의 멸난이다. 보시라이의 창홍타흑(唱紅打黑·붉은 노래를 부르고 흑사회를 친다)은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하기 위한 ‘쇼(秀)’다. 이는 보시라이의 문화대혁명이다.”
   
   미국에 서버를 둔 보쉰 측은 인터넷 사이트에 “해당 편지는 ‘왕리쥔(王立軍)의 해외친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았다”고 밝혔다. 왕리쥔은 2월 6일 청두(成都)의 미국 영사관에 돌연 진입해 신변보호를 요청하다 모처로 압송된 충칭시 전 공안국장이다. 이 편지를 쓴 주인공은 왕리쥔이라고 했다. 충격적인 편지 내용과, 중국 고위 공안 관계자의 미국 영사관 체류는 중국 정가에 핵폭탄 같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왕리쥔은 지난 2월 2일까지 충칭시 공안국장으로 일하며 조직폭력배와의 전쟁을 주도, 중국에서 전국적 명성을 얻었다. 공안국장에서 면직된 뒤에는 과학기술·문화체육 담당 부시장으로만 일하도록 됐다. 왕리쥔은 오는 10월 차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진입이 거의 확실시돼 온 보시라이(薄熙來) 충칭시 공산당 서기의 최측근으로 분류되어 왔다.
   
   왕리쥔은 1959년 네이멍구(內蒙古) 몽골족자치구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몽골족 출신의 경찰 엘리트다. 중국인민경관대학(우리의 경찰대학에 해당)을 졸업했고, 네이멍구와 랴오닝성 등 거친 동북지방에서 주로 근무했다. 랴오닝성 공안국장 때는 칼을 맞아가면서도 조폭 검거에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800여명의 조폭을 일망타진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폭들이 왕리쥔의 목에 500만위안(약 9억원)의 현상금을 걸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1999년에는 왕리쥔의 활약상을 주제로 한 ‘철혈경혼(鐵血警魂)’이란 TV드라마가 나오기도 했다.
   
   보시라이는 랴오닝성장 시절 랴오닝성에서 명성을 날리던 왕리쥔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충칭으로 간 뒤 그를 불러 중용했다. 왕리쥔은 이후 ‘타흑제악(打黑除惡·흑사회를 때려 악을 제거한다)’을 기치로 내걸며 충칭시에서도 거악(巨惡) 제거에 앞장섰다. 조폭과 결탁한 충칭시 전 사법국장 원창(文强)을 형장으로 보냈고, 104개 폭력조직을 와해시켰다. 이 과정에서 폭력조직 조직원 1500여명을 검거했다. 왕리쥔의 활약으로 보시라이는 인구 3000만명의 세계 최대 도시 충칭을 성공적으로 접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충칭에서도 왕리쥔은 인기가 치솟았다. 현대판 ‘포청천(包靑天)’에 비유되면서 ‘왕청천(王靑天)’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네티즌들은 왕리쥔의 얼굴을 포청천의 얼굴에 합성한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포청천’은 권력의 위협에도 불구,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를 척결했던 송(宋)나라 때의 사법 관료다.
   
   왕리쥔의 보좌에 힘입어 한때 “한물갔다”고 평가받던 보시라이는 다시 베이징에 있는 공산당 원로들과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보시라이는 재기에 성공, 오는 10월 18대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해 서열 8위의 중앙기율검사위원회(당 감찰총괄) 서기 또는 서열 9위의 중앙정법위원회(사법, 공안총괄) 서기에 오를 것으로 유력시돼 왔다.
   
   하지만 왕리쥔의 미 총영사관 체류 사건과 편지 공개로 보시라이의 베이징 복귀에 급제동이 걸렸다. 2월 10일까지 나온 관련 보도를 종합해 보면 왕리쥔의 미국 대사관행은 보시라이와의 불화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인은 분명치 않으나 왕리쥔이 돌연 칼끝을 보시라이에게 겨누면서 둘 사이의 파국이 시작됐다고 홍콩과 대만 언론은 보고 있다.
   
   왕리쥔이 보시라이 가족의 재산 해외 밀반출 수사에 나선 게 사건의 발단이다. 보시라이의 아내인 구카이라이(谷開來)와 아들 보과과(薄瓜瓜)의 비리가 표적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왕리쥔이 보시라이에게 왜 칼을 겨눴고, 그게 단독 행동인지, 배후세력이 있는지이다. 이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왕리쥔이 표적으로 삼았던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는 신장(新疆)자치구 제2서기를 지낸 구징성(谷景生) 장군의 다섯째 딸이다. 베이징대 법학과를 졸업한 구카이라이는 베이징대 동문인 보시라이와 결혼했다. 보시라이는 두 번째 결혼이다. 구카이라이는 현재 베이징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카이라이(開來) 법률사무소를 운영한다. 화려한 집안 배경으로 인해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 중 한 명으로 오르내린다.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가 낳은 아들이 보과과(1987년생)다. 보과과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유학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태자당(太子黨) 3세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는 유학생 지원 단장을 지냈다. 그는 2009년 옥스퍼드대 유학 시절 현지 여성들과 술에 취해 어울리는 사진이 공개돼 아버지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보시라이는 자신이 키운 부하 왕리쥔이 자기를 물려고 한 데 대해 격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때문에 보시라이는 2월 2일 왕리쥔을 공안국장 자리에서 면직했다는 것.
   
   현지 보도에 따르면, 왕리쥔의 대응 역시 만만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보시라이 당서기의 재산 밀반출과 부패의혹을 베이징의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에 넘기려고 했다는 것이다. 공산당의 부정과 부패문제를 다루는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의 서기는 당 서열 8위인 허궈창(賀國强). 허궈창은 충칭시 서기를 역임, 충칭 내부 사정에 누구보다 밝다.
   
   보시라이는 베이징의 당 중앙기율위가 충칭에 내려오기 전에 선수를 쳤다. 언론에는 “왕리쥔의 운전기사, 요리사, 2명의 경호원 등 19명이 잡혔고, 그중 2명이 맞아 죽었고, 1명이 자살했다”는 미확인 보도마저 나온다. 홍위병 출신의 보시라이가 휘두를 ‘홍색(紅色) 테러’의 공포에 사로잡힌 왕리쥔이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청두의 미국 총영사관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왕리쥔이 청두의 미국 총영사관에 들어갔다가 모처로 압송되는 과정도 긴박했다. 쓰촨성의 성도인 청두는 보시라이의 관할권 밖이다. 일부에서는 “왕리쥔이 변장을 한 채 직접 차를 몰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충칭에서 청두는 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 보시라이 중국 충칭시 공산당 서기 photo AP·연합

왕리쥔의 미국 총영사관 진입 후 중국과 미국은 상당한 충돌을 빚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웨이보에서는 “경찰차 70대가 동원돼 청두의 미 영사관 부근을 에워쌌다”는 얘기가 사진과 함께 퍼지고 있다. 더욱이 현장에서 왕리쥔을 압송하려는 국가안전부 요원과 거부하는 왕리쥔 간에 한바탕 충돌이 벌어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보쉰은 당시 현장에서 왕리쥔이 “나는 보시라이의 희생품이다. 보시라이는 야심가다. 나는 그와 ‘어사망파(魚死網破·물고기도 죽고 어망도 터진다)’ 할 생각이다. 재료는 이미 해외에 옮겨져 준비돼 있다”고 외쳤다고 전하고 있다.
   
   미국 측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왕리쥔은 청두의 미국 총영사관에서 24시간 동안 머물며 미국 측과 대화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과정에서 보시라이의 비리와 차기 중국 대권에 관한 상당한 첩보가 미국 측으로 건네졌을 것”으로 중국 언론은 추측하고 있다. 때문에 이번 사건 진화 과정에서 작년 8월 부임한 중국계 게리 로크 주중 미국대사가 어떤 판단을 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미국 워싱턴 국무부와 중국 베이징의 주중 미국대사관은 2월 8일 브리핑을 통해 “왕리쥔이 청두의 미국 총영사관을 찾았다가 스스로 걸어나갔다”고 밝혔다. 하지만 “왜 ‘스스로’라는 표현을 쓰나” “왜 충칭의 왕리쥔이 청두의 미국 영사관을 찾았나”와 같은 기자들의 질문에 속시원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중국 외교부는 대변인판공실 명의로 지난 2월 9일 밤 “왕리쥔 충칭시 부시장이 지난 2월 6일 청두 미국 총영사관에 들어가 체류 1일 후에 나왔다. 유관 부문이 현재 조사 중이다”라고 밝힌 후 일체의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청두의 미국 총영사관에서 ‘스스로’ 걸어나온 것으로 알려진 왕리쥔의 정확한 소재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홍콩과 대만 언론도 청두에서 벌어진 사건을 대서특필하고 있다. 현재 중화권 웨이보에는 왕리쥔의 청두 미국 영사관 진입 사건을 ‘충칭경변(重慶警變·충칭경찰의 난)’으로 부르며, 관련 글에는 각종 댓글이 도배되고 있다. 당국의 언론통제가 심한 중국의 특성상 사실 확인이 거의 불가능한 미확인 보도 역시 웨이보를 통해 무수히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이번 사건이 중국 안팎에서 큰 관심을 사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오는 가을 공산당 지도부 교체를 앞둔 중국 정가에 미치게 될 정치적 파장 때문이다. 오는 10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임되는 게 확실시되는 보시라이가 낙마하면, 9명의 상무위 구성과 각 파벌 간 세력 균형이 꼬이게 된다. 현재로서는 보시라이의 정치국 상무위 진입은 좌절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이 경우 보시라이의 정적인 왕양(汪洋) 광둥성 서기가 반사이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된다. 왕양은 후진타오의 측근으로, 광둥성 서기로 일하기 전에 충칭시 당서기를 지냈다. 그는 보시라이가 충칭시 서기에 오른 후 자신의 재임 당시 치부를 뒤져 상당한 곤경에 처했었다. 이들은 상무위 진입을 두고 경쟁관계에 있다.
   
   후진타오와 장쩌민 전 주석과의 역학 관계에도 변화가 생긴다. 후진타오와 장쩌민은 각각 왕양과 보시라이의 후견인이다. 과거 장쩌민은 보시라이의 부친이자 8대 원로 중 한 명이던 보이보(薄一波)의 도움으로 정적 차오스(喬石)를 꺾고 공산당 총서기직을 거머쥐었다. 장쩌민 집권 후 보시라이는 상무부장으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후진타오 집권 후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7년에는 아버지 보이보의 사망으로 더욱 궁지에 몰렸었다. 특히 후진타오의 최측근인 리커창 부총리는 랴오닝성 당서기로 재직 시 보시라이를 밀어내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보시라이는 후진타오, 리커창, 왕양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일부에서는 왕리쥔의 미국 영사관행을 과거 마오쩌둥(毛澤東) 집권 시절 벌어진 린뱌오(林彪)의 병변(兵變)에 비유하기도 한다. 문화대혁명과 마오쩌둥 개인 숭배를 주도한 린뱌오는 한때 마오쩌둥이 공식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후계승계가 미뤄지자 마오쩌둥 암살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소련으로 도주하려 했다. 린뱌오는 A급 기밀문서와 함께 군용기를 타고 소련으로 도주하다 몽골에서 추락사했다. 당시 연료 부족으로 비행기가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금까지도 정확한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다. 당시 린뱌오의 소련 도주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중국 권부 내부의 암투를 외부 세계에 충격적인 방법으로 보여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