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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미스터리

굴어당 2012. 3. 4. 05:43

 

 

‘오성제자고(五聲制字攷)’란 표제가 붙은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8년 7월이었다. “상주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샀다”며 골동품수집가 배모씨가 이를 공개했다. 이 판본은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받으면서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1조원 가치가 있다”는 일부의 평가도 주목을 받았다. ‘국보’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법원은 2012년 2월 배모씨에게 절도 혐의를 적용,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배씨는 훈민정음의 향방에 대해서는 재판 과정에서 모르쇠로 일관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과 같은 고문서는 어떻게 유통되는 것일까. ‘1조원’이란 평가의 근거는 무엇일까.

옥션단 김영복 대표 “300억가량 본다”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고서를 포함한 문화재의 가치 역시 ‘시장’에서 결정된다. 시장은 유사한 다른 고서의 판매가를 기준 삼아 매물로 새로 나온 고서의 금전적 가치를 평가한다. 예를 들어 15세기의 어떤 책이 매물로 나왔다면 같은 시기의 다른 책은 과거 얼마에 거래됐는지를 참고해 그에 준하는 가격을 매긴다. 물론 수요가 공급보다 많으면 가격이 올라가고 그 반대면 가격은 떨어진다. 미술품 경매를 담당하는 옥션단의 김영복 대표는 ‘경자자(庚子字)’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경자자는 계미자에 이어 세종 연간에 두 번째로 만든 금속활자다.
   
   “경자자 판본 가격이 10여년 전엔 1000만원가량 했어요. 그런데 어느 집에 보관돼 있던 판본이 한꺼번에 60여점가량 쏟아져 나온 적이 있습니다. 가격이 어떻게 됐겠어요. 곧바로 500만원 정도로 내려갔습니다. 요즘엔 귀해져서 다시 가격이 올랐지만 고미술품 가격이란 게 이렇게 정해집니다. 원칙이란 게 딱 서있질 않아요.”
   
   김 대표는 근사록(近思錄·주자의 학문 지침을 기록한 송나라 때의 서적)의 사례를 다시 들었다. “세종 때 나온 근사록의 경우엔 3권 1책(옛 사람들은 통상 2~3권을 하나의 책으로 묶었다)이 1500만~2000만원 선에 가격이 형성돼 있습니다.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 이전엔 가격이 더 많이 나갔지만 이후 거래가가 떨어졌지요. 만약 세종 시대의 다른 고서가 새로 발견됐다면 그 고서의 가격은 근사록을 참고해서 설정하게 됩니다. 이보다 터무니없이 비싸거나 거꾸로 터무니없이 싸게 책정될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김 대표는 이번에 새로 등장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으로 말을 이었다. “문제는 이번의 ‘훈민정음 상주본’은 다른 것과 비교할 대상이 없는 국보급 고서란 점입니다. 그동안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본’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번에 서체가 깨끗한 판본이 새로 발견된 것이지요. 이런 문화재는 가격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비교할 대상이 아예 없으니까요.” 김 대표는 “아무리 그렇다 해도 1조원은 말이 안된다”며 “굳이 가격을 매긴다면 한 300억원가량 볼 수 있지 않겠나 싶다”고 답했다.
   
   
   한국고서협회 박민철 회장 “객관적으로 300억”
   
   한국고서협회의 박민철 회장도 “1조원은 너무 많다”고 했다. 박 회장은 “고서나 고미술품의 가격은 실거래의 기준이 되는 현실가와, 상징적으로 붙이는 상징가가 있다”라며 “1조원이란 가격은 우리나라에서 한글과 훈민정음이 갖는 특수한 가치를 인정해 상징적으로 붙인 상징가”라고 말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결(直指心體要訣)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직지심체요결 역시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지요. 게다가 가격을 비교할 대상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굳이 가격을 매긴다면 정서적 요소를 감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박 회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라고 한다면 300억원 정도라고 본다”고 말했다.
   
   
   국학진흥원 임노직 연구원 “1조원 지나치다”
   
   “1조원이 지나치다”는 점엔 문제의 상주본을 직접 본 유일한 학자인 한국국학진흥원의 임노직 연구원도 공감을 표했다. 그는 “고서의 가격은 사겠다는 사람과 팔겠다는 사람의 의사가 맞아야 정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임 연구원은 “이번 훈민정음 상주본이 발견된 직후 서울에서 30억원에 사겠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며 “거래가 성립되지 않자 또 다른 사람이 50억원을 제안했다는 말도 돌고 있다”고 전했다.
   
   임 연구원은 “검사가 구형을 하려면 훔친 물건의 가격을 알아야 하는데 알 수가 없으니 문화재청에 문의를 했던 것으로 안다”며 “이번에 발견된 상주본은 훈민정음 목판본 중에서도 초간본에 가깝기 때문에 가치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상주본은 나무판을 깎아 인쇄한 목판본으로, 목판본을 계속해서 찍을 경우 글자가 문드러질 수 있기 때문에 초기에 찍은 판본의 글자 형태가 더 깔끔하다고 한다. 임 연구원은 “그렇다 하더라도 1조원은 좀 과하다”고 말했다.
   
   
   경북대 남권희 교수 “1조원 가치 추정”
   
   하지만 경북대 남권희 교수는 “1조원 가치를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직지심체요결의 경우 전시 사료로서의 가치와 부대 사업적 가치를 모두 합치면 8000억원 정도 된다는 평가가 인터넷에 있다”며 “이를 참고로 보면 훈민정음의 가치가 그보다 적다고 볼 수 없으므로 1조원이라는 상징적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지학의 권위자로 알려진 남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훈민정음 상주본에 대해 “종이의 재질이 당시의 종이와 일치하고, 먹 또한 당시에 사용된 것이며, 서체가 당시 유행했던 서체이고, 실로 꿰맨 형태가 간송본과 동일하며, 판본의 모습이 간송본과 일치한다”며 “진품임을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아예 목판 새로 짜 복각하는 경우도
   
   고문서의 거래는 소장자→1차 거간 또는 위탁상(대부분 지방)→2차 거간 또는 위탁상(주로 서울)→상인의 유통과정을 거친다고 고서상들은 말한다. 시장 구조를 잘 모르는 사람이 소장자일 경우엔 거간 또는 위탁상 단계를 더 많이 거칠 수도 있다.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고문서 역시 유통단계가 많아질수록 유통 마진이 커진다.
   
   고문서는 도자기나 미술품 등 다른 고미술품에 비해 위조 가능성이 적다. 대부분 집안에서 조상 대대로 전해내려 왔거나 사찰 궁궐에 묻혀있다 발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이번 훈민정음 상주본의 경우처럼 문화재라는 특성상 절도 시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고문서 위조의 대표적 형태가 분책(分冊)이다. 고문서는 대부분 2권 또는 3권이 1책(冊)으로 돼 있다. 그런데 이를 분절해서 2개 내지 3개의 책으로 나눠 파는 것이다. 이 경우 판매자는 산술적으로 2~3배의 이익을 거둘 수 있다. 김영복 대표는 “3개의 책으로 나눈 3권 1책을 한꺼번에 팔면 3배 값을 받지 못하겠지만, 나눠서 팔면 사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3배의 가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위조의 또 다른 형태가 책장을 뜯는 것이다. 수백 년 전 종이는 여러 장을 덧댄 형태로 돼 있다. 따라서 한 장의 종이 위에 쓰인 것을 뜯어내 여러 권의 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고미술업계의 한 관계자는 “예전엔 이런 방식을 많이 사용했지만 최근엔 잘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업계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고발한다. 아예 판을 새로 짜서 복각을 하는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동의보감, 오륜행실도, 삼강행실도 등 조선 초기의 고문서는 주로 목판본이다. 목판은 금속활자와 달리 위조가 손쉽다. “목판 위에 원본 또는 원본의 복사본을 뒤집어 놓고 그대로 각을 뜬 뒤 이 목판에 당시의 먹을 묻혀 당시 종이에 찍어내면 감쪽같다”는 것이다. 금속활자와 달리 목활자는 수명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조선 초기의 경우 통상적으로 100부 이상의 판본을 찍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목판본을 복각한 가짜를 유통할 경우 업자가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은 상당하다. 위조 시비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학자들 “복각본일 가능성은 없어”
   
   전문가들은 하지만 이번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에 대해서는 “위조 가능성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어미(인쇄 과정에서 찍히는 고문서 하단의 무늬)의 모양이나 형태, 서체의 모습, 장정된 책의 구조 등이 모두 간송본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남권희 경북대 교수는 “한국의 전통적 서책 형태는 5개의 구멍을 뚫어 책을 묶는 5침안(針眼)인데 간송본은 4침안으로 돼 있다”며 “이번 발견된 상주본은 5침안의 형태로 돼 있지만 그 속을 살펴보면 4침안으로 돼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남 교수는 “이는 원래 4침안으로 돼 있던 것을 5침안 형태로 다시 묶었음을 의미한다”며 “이 같은 편제 형태나 서체가 당시의 독특한 형태와 일치하기 때문에 진본이 아닐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김용복 대표는 “훈민정음 상주본의 글자체는 당시 유행했던 송설체로 조선 초기 송설체의 대가였던 안평대군이나 세조가 쓴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상주본을 실제로 본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은 “훈민정음의 자본(字本)이 당시 서체와 일치한다”며 “지질이나 형태로 판단할 때 복각의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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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수많은 문자 가운데 한글, 즉 훈민정음은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얘기된다. 세계의 문자 가운데 오직 한글만이 그것을 만든 사람을 알고, 반포한 날짜를 알며,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글을 만든 동기부터 제작 원리와 음가, 운용 방법 등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세계적으로 창제된 문자도 거의 없는 데다, 문자를 만든 사람이 제작 원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무후무한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1446년 이 책이 출간되고, 500년 만에 경북 안동의 한 사가에서 그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때까지 한글의 제자(製字)원리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이후 ‘해례본’을 통해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훈민정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이제 거의 모든 것이 밝혀졌다.
   
   책의 내용도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책 자체도 세계기록유산으로 남을 만하다. 서양에서도 500년 이상 된 책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역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활자 인쇄본 구텐베르크 성서(1454~1460)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종이가 아니라 양피지나 송아지 가죽에 인쇄된 것이다. 조선의 종이는 중국에서도 극상품으로 인정받을 만큼 질이 좋았다.
   
   
   언해본과 해례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풀이하자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이유는 한글을 창제하기 전에는 글자를 쓸 때 한자(漢子)나 한자를 빌려 만든 글자를 사용했는데 이러한 것으로는 생각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하기 힘들었고, 특히나 일반 백성들이 배우기에 한자는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세종대왕은 1443년 집현전의 여러 학자들과 함께 백성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글자를 창제했고, 글자가 만들어진 지 3년이 지난 1446년 9월에 세상에 반포하게 됐다. 이것이 바로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은 해례본과 이를 한글로 풀이한 언해본이 있다. 언해본은 훈민정음에 대해 간결하게 요점을 밝혀놓은 것으로, 세종 말년부터 세조 때까지 다양한 형태의 판본이 존재하고 단일본 형태는 아니다. 그중 월인석보(1459) 제1권에 실려 있는 것이 가장 완벽한 형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첫 문장 “우리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로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일이 있어도 마침내 제 생각을 얻어 내어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이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익히어 날로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로 시작되는 문장이 바로 월인석보에 실린 언해본의 서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몇 가지의 이본이 전해지는 언해본에 비해서 해례본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판본이 유일했으나 2008년 7월 경북 상주에서 간송본과 동일한 진본이 발견되어 그 소장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해례본의 내용과 의의
   
   ‘훈민정음’ 해례본은 목판본으로 1책 33장으로 이뤄져 있다. 이 책은 한문본으로 훈민정음에 대한 해설과 예의(禮儀)가 적혀 있다고 해서 해례본이라고 불린다. 33장 중 세종의 서문·예의가 4장 분량이고, 집현전 학자들의 훈민정음에 대한 설명, 즉 해례(解禮)가 29장 분량이다. 해례 부분은 다섯 개의 ‘解’와 한 개의 ‘例’로 이루어져 있다.
   
   다섯 개의 해란 제자해(글자를 만든 원리에 대한 해설), 초성해(초성에 대한 해설), 중성해(중성에 대한 해설), 종성해(종성에 대한 해설), 합자해(초성·중성·종성의 세 글자를 합쳐서 쓰는 방법에 대한 해설)이다. 한 개의 예는 용자례(用字例)를 일컫는데 실제의 예를 들어서 설명한 것이다.
   
   세종은 이 책에서 새로 만든 글자에 대하여 창제의 목적을 밝힌 서문과 한글 하나하나에 대해 개괄적으로 예시하고 설명하였고,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용례를 짓도록 하여 이것을 백성들에게 공표하였다. 집필자들은 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의 학자 8인이다.
   
   그중 정인지는 서문에서 임금의 명에 의해 해례를 지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서문에서 정인지는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을 마치지 않아도 깨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 못 되어 배울 수 있다”라고 적고 “바람소리, 학의 울음, 닭의 울음, 개 짖는 소리라도 능히 쓸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서문이 쓰인 연대가 ‘政統十一年九月上澣’(정통십일년구월상한)이라고 적혀 있음에 따라 상한(상순·1일부터 10일)의 끝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확정했다.
   
   
   간송본
   

▲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간송본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것 두 종류가 존재한다.
   
   간송본은 표지 2장에 본문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로 20㎝, 세로 32.3㎝이고, 표지와 앞의 두 장이 떨어져 나갔으며 전체적으로 책의 모서리가 많이 닳아 있는데, 특히 처음 몇 장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그리고 각 장마다 종이의 이면(裏面)에 붓으로 글씨를 많이 써 넣었기 때문에 얼룩져 있다. 떨어져 나간 앞의 두 장은 발견될 당시에 원래의 모습을 추론해 복원했다. 그리고 원래 우리나라만의 고유 제책 방법인 5침안정법이 아니라 4침안정법으로 되어 있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 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이 책은 안동 광산 김씨 종가인 긍구당가 소장으로 일제 강점기인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어 일제 당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우리 문화재를 수집한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이 사들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훈민정음 혜례본은 조선어학회(1946), 각자장 오옥진(1979), 한글학회(1997) 등에서 여러 차례 복원된 바가 있다.
   
   
   상주본
   
   상주본은 2008년 7월 처음 발견되어 전문가의 감정을 거쳐 간송본과 동일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진본임이 확인됐다. 상주본의 대체적인 특징과 상태는 다음과 같다.
   
   표지의 상태는 한눈에도 오래된 것으로 보이며 종이의 색이 많이 변해 있었다. 특히 표지에는 희미한 붓글씨로 ‘五聲制字攷(오성제자고)’라고 쓰여 있었다. 이 기록과 관련해 간송본과 상주본의 경우 모두 원본의 앞 부분이 몇 장이 떨어져 나가 일반적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통칭되는 이 책의 원래 서명이 불확실한 상태였으나, 개장된 표지에 이와 같은 글씨가 적혀 있어 당시 이 책이 ‘五聲制字攷’라 통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주본의 본문 내에는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공부한 흔적이 묵서를 통해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 한글 표기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묵서의 대체적 시기를 보면, 표기 중 ‘ㅅ’ ‘ㅈ’의 자음 표기가 한글 창제 시기가 아닌 후대의 표기로 되어 있어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표지의 개장 또한 이 시기에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상주본의 제책은 낱장으로 분리돼 있어 본래의 제책 상태는 알 수 없으나 각 면에 구멍이 뚫린 상태로 보아 원래는 4군데의 구멍을 뚫은 4침안정법이었으나 후대에 5침안정법으로 개장(改裝)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각 장마다 한 장 한 장씩 낱장의 비닐로 보관되고 있었다. 전체적인 본문의 상태는 하단 부분에 모두 물이 침입해 얼룩진 부분이 많이 나타나며 면의 모서리 부분에 훼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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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은 오랫동안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다.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만든 해례본이 500년 만에 세상에 존재를 드러낸 것은 한 스승과 제자의 대화에서 비롯됐다. 스승은 천태산인(天台山人)이라는 필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국문학자이자 사상가 김태준(1905~1949)이고, 제자는 김태준이 가장 총애했던 서예가 이용준(李容準·1916~?)이다.
   
   김태준은 경성제국대학에서 중국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경학원(지금의 성균관대학교)과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문학을 강의했다. 1931년에는 이희승·조윤제 등과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했다. 같은 해에 ‘조선 한문학사’를 발간, 한문학과 국문학을 접목시킴으로써 한국문학사를 정립했다. 김태준은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총명했고 발표하는 글의 수준이 높아 따르는 제자가 많았다. 김태준은 여러 제자 중에서도 이용준을 가장 총애했다. 이용준은 경북 안동군 와룡면 주하리에 사는 진성 이씨 한걸의 셋째 아들로, 글씨도 잘 쓰고 한학에도 밝았다. 그가 어느날 스승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가문의 선조가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으로 세종대왕으로부터 ‘훈민정음’을 하사받아 세전가보(世傳家寶)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김태준은 훈민정음이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했다.
   
   “집에 내려가서 ‘훈민정음’을 볼 수 있겠나?”
   
   “제가 언제든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훈민정음을 찾아라
   
   김태준은 며칠 후 이용준과 함께 그의 시골집으로 갔다. 이용준이 내어준 ‘훈민정음’을 살펴보니, 자신이 경성제대 도서관 깊숙한 곳에서 본 ‘세종실록’의 훈민정음 관련 기록과 상당 부분 일치했다. 훈민정음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더 자세했다. ‘실록’에 언급된 ‘해례본’이 틀림없었다. 이용준은 김태준에게 “‘훈민정음’은 이렇게 집에 놔둘 책이 아닌 것 같다. 꼭 필요로 하고 잘 간수할 사람에게 넘기고 싶다”고 했다.
   
   김태준은 자신을 만날 때마다 ‘훈민정음’ 타령을 하던 간송 전형필(1906~1962)을 바로 떠올렸다.
   
   간송은 192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유산을 물려받아 조선 40대 부자로 꼽혔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세 살,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재벌이 된 청년은 사업하거나 유유자적 편안하게 사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으로 유출되던 옛 그림과 고려청자, 조선백자, 삼국시대 불상, 고서적 등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문화재를 지키는 일이 민족의 자존심과 존엄을 지키고 되찾는 ‘문화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수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우리나라에 꼭 남아야 할 문화재라고 판단되면 값을 따지지 않고 구입했고,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 중에서도 되찾아 와야 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했다.
   
   간송은 문화재 수집을 위해 골동품과 옛 책이 많이 거래되던 인사동에 있는 한남서림을 인수해 수집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그는 다른 수집과는 달리 그림이나 도자기뿐 아니라 귀한 활자로 만든 고서도 중요한 문화재라고 판단했고, 한남서림으로 들어오는 책 중 진서(珍書)나 희본(稀本), 호본(好本)이 보이면 원로나 학자들과 함께 살폈다. 그래서 그 가치가 확인되면 1938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지금의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설치한 ‘간송문고’로 옮겼다.
   
   당시 한남서림에는 고서화나 골동 거간들뿐 아니라 학자도 많이 드나들었다. 일부 학자와 고서 전문가들은 간송에게 “세종실록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사용을 설명한 책이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면서 “한글을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설명한 책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 훈민정음과 관련된 책은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전형필에게 그 책을 꼭 찾으라는 말들을 했다. 어문학 연구에 조예가 깊었던 김태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기와 열 채 값도 부족하오”
   
   훈민정음 해례본의 존재를 확인한 김태준은 한남서림으로 달려가 간송을 만났다. “안동에서 ‘훈민정음’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어 직접 확인해봤더니 진품이 틀림없었다”며 “간송이 구입하면 좋을 것 같은데 값이 좀 비싸다”고 말했다. 간송은 걱정하지 말고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김태준은 조심스럽게 기와집 한 채 값인 천원을 달란다고 했다. 당시 지방 양반집에서 올라오는 책값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옛 책의 가치가 서화나 도자기와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간들이 지방에서 책을 구입할 때 아무리 귀한 책도 쌀 한 말 이상을 쳐주지 않던 시대였다.
   
   그러나 간송은 달랐다. “그런 귀한 보물의 가치는 집 한 채가 아니라 열 채라도 부족하오”라고 말하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은행으로 달려갔다. 간송은 두 개의 보자기에 나눠 담은 돈보따리를 들고와 그중 작은 것을 김태준에게 밀었다.
   
   “이건 훈민정음 값이 아니라 천태산인께 드리는 사례요. 제가 성의로 천원을 준비했소.”
   
   김태준이 놀란 눈빛으로 전형필을 바라봤다. 사례비가 너무 많다고 말하려는데, 간송이 또 다른 보자기를 내놓으며 말을 이었다.
   
   “훈민정음 값으로는 만원을 쳤습니다.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기와집 열 채 값이었으니 지금 서울의 아파트 값으로 환산하면 최소 30억원이다. 세로 23.3㎝, 가로 16.8㎝의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렇게 간송의 손에 들어왔다. 책이 만들어진 지 500년 만에 세상으로 나온 보물 중의 보물이었고, 간송이 문화재 수집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성취한 대발굴이었다.
   
   간송은 광복이 될 때까지 훈민정음 해례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일제가 한글 말살에 혈안이 되어 조선어학회 학자들까지 잡아들이는 상황에서 훈민정음의 존재가 알려지면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간송은 훈민정음을 자신의 수장품 중 최고의 보물로 여겼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런 간송의 노력으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무사히 지켜졌다. 1956년 통문관에서 학계의 연구를 위해 영인본으로 출판하고 싶다고 하자, 간송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손수 한 장 한 장 해체해서 사진을 찍게 했다. 이렇게 출판된 훈민정음 영인본을 통해 많은 학자가 체계적으로 한글 연구를 할 수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광복 후 국보 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출처
   
   원소장자는 이용준이 아닌 처가 광산 김씨
   
   광복 후 60년 동안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용준 집안의 세전가보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2005년 해례본의 출처가 이용준 본가가 아니라 처갓집인 광산 김씨 종택 긍구당(肯構堂)에 소장되어 있던 책으로 밝혀졌다. 이용준이 장인이자 당시 광산 김씨 종손이던 김응수 옹에게 해례본을 처분한 전후 사정을 설명하는 편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용준은 김태준이나 간송 전형필에게 그런 세세한 집안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간송 또한 이용준의 본가에 가서 확인까지 하고 온 김태준의 말을 듣고, 196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출처를 안동 이용준 본가로 알았다.
   
   현재 광산 김씨 종손인 김대중씨는 “출처가 우리 집인 것은 맞지만 고모부(이용준)께서 하신 일”이라며 유출과 매매에 대해서는 밖에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다. 그는 “간송 선생이 그걸 밝혀주기 전에는 그렇게 소중한 책인지도 몰랐다. 우리 집에 계속 있었을 경우,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상에 알리고 잘 보관해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