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우암연보(尤庵年譜)>를 보니 아무래도 미심쩍은 곳이 있었습니다. 효종(孝宗) 무술년(1658, 효종 9) 겨울 11월에 여강(驪江)이 9품의 말단 벼슬아치로서 우암(尤庵)에게 발탁되어 여덟 품계를 뛰어넘어 진선(進善)1)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니, 우암이 이조(吏曹)를 맡은 지 겨우 50여 일 남짓 되던 때였습니다. <연보>에서 말한 말의(末擬)2)란 우리 조정의 인사행정 격식에서 명망이 매우 높은 사람을 모두 말망(末望)으로 단통(單通)하는 것이니, 지금의 소위 부응교(副應敎)를 말망단통(末望單通)한다, 부제학(副提學)을 말망단통한다 하는 것이 바로 그 법입니다. 이 당시 효종은 어진 이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우암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임명, 인재를 발탁하는 일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암이 이조를 맡은 지 수십 일도 지나지 않아서 맨 먼저 여강을 여덟 품계나 뛰어넘어 바로 진선(進善)에 의망(擬望)하였고, 이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자 여강을 체직한 다음 우암이 연석(筵席)에서 또 주청(奏請)하여 여강을 잉임(仍任)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이때에는 우암이 여강을 아직 배척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아직 배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여강을 특별히 높은 자리에 발탁하여 나라 일을 함께 해보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연보>에서는 이보다 6년 전인 황산(黃山)의 모임3)에서 이미 여강을 이단(異端),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왕망(王莽)ㆍ조조(曹操)ㆍ동탁(董卓)ㆍ유유(劉裕)4) 등에 비겼다고 하니,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황산의 모임이 있기 12년 전에 우암이 벌써 <이기설(理氣說)>을 지어 여강을 이적금수(夷狄禽獸), 난신적자(亂臣賊子)라 했다고 했으니,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그러했다면 그 사이 수십 년 동안 여강에 대한 우암의 언론은 줄곧 변함없이 여강을 난신적자라 하다가 갑자기 난신적자를 여덟 품계나 뛰어넘어 곧바로 진선(進善)에 임명하게 한 것이니, 매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대저 붕당(朋黨)이 나뉜 이래 기록들은 이와 같이 대부분 믿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이미 십여 년 전에 여강이 난신적자임을 알았고 또 그가 개과천선했음을 분명한 알 수 있는 사실도 없거늘 막 이조를 맡자마자 여덟 품계나 뛰어넘어 발탁하여 세자(世子)를 보도(輔導)하는 자리에 제수했다는 것이 될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설혹 미촌(美村)5)이 밤낮으로 여강을 천거하지 않는다고 책망했다 하더라도 단순히 책망했다는 이유로 난신적자를 특별히 높은 자리에 추천할 수 있겠습니까? 또 여강이 미촌을 강도부노(江都俘奴)6)라고 매도하자 이 때문에 미촌이 겁을 먹고 여강에게 빌붙었다고 한 것도 아마 사실이 아닐 듯합니다. 미촌 부자7)는 누구든 강화도 사건을 제기하기만 하면 반드시 절치부심하여 그 사람과 각립(角立)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겁을 먹고 여강과 친밀해졌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종합해 말하면, 우암이 여강과 사이가 벌어진 것은 기실 기해예론(己亥禮論)8) 이후의 일로서 사적(事跡)이 명료하니 굳이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공정한 마음과 공정한 눈으로 보면 엊그제 일처럼 또렷이 알 수 있습니다. 편집의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1) 진선(進善) : 조선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속한 벼슬로 정4품의 청요직(淸要職)이다. 2) 말의(末擬) : 말망(末望)으로 비의(備擬)한다는 뜻이다. 관직에 한 사람을 임명하기 위해 세 사람을 추천하는데 이를 삼망(三望)이라 한다. 말망은 세 사람 중 끝자리에 이름이 적혀 추천되는 것이다. 3) 황산(黃山)의 모임 : 황산은 충청남도 연기군(燕岐郡)에 있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가리킨다. 송시열(宋時烈)이 47세 때 황산서원에서 유계(兪棨)ㆍ윤선거(尹宣擧) 등과 모여 황산서원에서 유숙하면서 송시열이 윤휴(尹鑴)가 《중용장구(中庸長句)》 주(註)를 고친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宋子大全附錄 2권 年譜1 癸巳條》 4)왕망(王莽)ㆍ조조(曹操)ㆍ동탁(董卓)ㆍ유유(劉裕) : 왕망은 전한(前漢) 말엽의 역적으로 평제(平帝)를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아 신(新)이란 나라를 세웠다. 동탁(董卓)은 후한(後漢) 말엽의 역적으로 영제(靈帝)가 죽자 소제(少帝)를 폐위하고 헌제(獻帝)를 세웠다. 조조(曹操)는 후한 말엽의 역적으로 동탁이 제거된 뒤 실권을 장악하였다. 유유는 남조(南朝) 시대의 송 무제(宋武帝)의 이름이다. 그는 진 공제(晉恭帝)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어 송(宋)을 세웠다. 5) 미촌(美村) :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호이다. 6) 강도부노(江都俘奴) : 병자호란 때 강도(江都), 즉 강화도(江華島)로 부인과 함께 피난갔다가 부인 이씨(李氏)는 자결하였는데 혼자 종의 복장으로 위장하여 살아난 윤선거(尹宣擧)를 비하하는 말이다. 부노(俘奴)란 포로가 된 종이라는 뜻이다. 7) 미촌(美村) 부자 : 윤선거와 그의 아들 윤증(尹拯)을 가리킨다. 8) 기해예론(己亥禮論) : 기해년(1659)에 효종(孝宗)이 승하하였을 때 효종의 상사(喪事)에 모후(母后)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의 복상(服喪)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윤휴(尹鑴) 등 남인(南人)은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하였고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西人)은 기년설(期年說)을 건의(建議)하여 기년설이 채택된 것을 가리킨다. 《燃藜室記述 31권 顯宗朝故事本末》 |
[近觀尤菴年譜, 有不能無疑者, 孝宗戊戌冬十一月, 驪江以九品末官爲尤菴所拔擢, 超八階特拜進善; 此時尤菴掌銓纔五十餘日也. 其云末擬者, 我朝政格, 凡極望之人, 皆以末望單通; 今所謂副應敎末望單通, 副提學末望單通, 乃其法也. 此時孝宗側席求賢, 而以尤菴爲天官冢宰, 俾掌其事; 乃尤菴掌銓不過數旬, 首以驪江超八階直擬進善, 及有人言而遞, 尤菴又筵奏仍任, 則此時尤菴未及擯棄, 可知. 不唯未及擯棄, 抑將超遷冥升, 與共國事, 可知. 乃於六年之前, 黃山之會, 已以驪江爲異端, 爲斯文亂賊, 比之於莽卓操裕, 有是理乎? 又黃山十二年之前, 尤菴已著<理氣說>, 以驪江爲夷狄禽獸亂臣賊子, 有是理乎? 誠如是也, 前後數十年之間, 尤菴言論, 一直無變, 以驪江爲亂賊, 而忽以亂賊超八階直拜進善, 太不近理. 大抵朋分以來, 文字之多不可盡信, 有如是矣. 旣於數十年前知其爲亂賊, 彼人亦無改過遷善之明驗, 而掌銓之初, 超八階而擢用, 授之以輔導春宮之職, 可乎? 設使美村日夜誚責, 豈可以誚責之故超遷亂賊乎? 且云“驪江罵美村爲江都俘奴, 以此之故, 恐怯蝨附於驪江.” 亦恐不然. 美村父子, 一有人提起江都之事, 則必切齒腐心, 與之角立; 以此生怯, 與之親密, 亦恐無此理. 總之, 尤菴之有隙於驪江, 實在己亥禮論之後, 事跡瞭然, 不必諱也. 臨之以公心公眼, 歷歷如昨日事. 惜乎! 編輯之難, 有如是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