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선원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유래하였고 동천은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합니다.강화도에 함허동천,북한산에 백운동천이 있습니다.남하면에 무릉리가 있는데 본래 무덤실이고 일제하에 한글지명을 없애면서 무릉리로 개명.
난정집서 [蘭亭集序] 중국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307∼365)의 산문. 《삼월삼일난정시서(三月三日蘭亭詩序)》라고도 한다. 353년(永和 9) 3월 3일에 사안(謝安)·지둔(支遁) 등 41인이 회계산(會稽山) 양란저(陽蘭渚)의 정자에 모여서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는데, 기사(記事)와 영회(詠懷)를 모아 문집을 만들고 왕희지가 서를 지었다. 서(序)에는 우선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경치를 묘사하고 이어서 모인 사람의 감상을 적었는데, 소리와 색이 어울려 정경이 서로 일어나서 성대한 모임을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문장을 지어 의론을 발표하는 데 있어서도 자연스럽고 적절한 배치를 했다. 계속해서 성대한 일도 영원하지 못하고 길고 짧은 것도 서로 변하듯이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온다는 감탄을 표현했다. 마지막에는 서를 지은 연유를 밝혀 후대 사람들에게 감흥과 회포를 제공했다. 문장은 삶과 죽음, 그리고 장수와 요절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황당무계한 것으로 생각해 당시 성행하던 허무주의 사상과 언론을 비판하며 현실에 대한 낙관적인 자세를 중시했다. 이것은 높은 사상적 경지를 보인 것은 아닐지라도 서로 속고 속이는 과정에서 구차히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맑은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
음악에 악성樂聖 베토벤이 있듯이 서예에는 書聖 왕희지가 있습니다 1500년이 흘렀어도 서예 잘 하는 아티스트는 많지만 왕희지를 능가하는 서예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대에도 왕희지는 통합니다.
그 서성書聖이 남긴 교본이 있으니 그것이 난정집서蘭亭集序 입니다. 대체로 이 교본을 보고 서예 공부를 하지요...
지금으로부터 307-365년에 살았던 왕희지는 역사적인 서첩 난정서를 남기는데 당대(진나라)의 지식인들이 풍경이 수려한 숲속 정자 난정에 모여 한사람씩 나서 시를 짓고 정치 문화를 토론합니다. 냇가에 술 한잔을 동동 띄우고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한잔씩 마셔야 합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현세의 지식인들이 어데로 갔는지 보이지 않지만 호텔 룸에 모여 포도주를 마시며 정치 이야기는 안하는게 예의지만 그래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목소리를 낮추고 시대의 문제를 나누겠지요..
그 시절의 카페이름인 난정에 모인 지식인들도 당대의 정치에 대해서 비판을 하였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과 철학을 짧은 글로 지었던
영화(永和) 9년 3월 3일에 있었던 이 모임의 풀 스토리를 왕희지는 당대 최고의 서예인답게 귀티나는 력셔리한 글씨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서첩 난정집서의 참 기막힌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400년전 당나라의 왕인 태종이 왕희지의 아름다운 글씨를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그만 이 난정서첩을 무덤까지 안고 갔다지 뭡니까 요즘식으로 말하면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만큼이나 되나 봅니다.
그래서 원본 난정집서의 오리지날은 영원히 무덤에 묻히고 애통하고 아쉬웠던 후세의 사람들은 8가지 탁본으로 난정집서를 남기게 됩니다.
서로 자신들이 만든 탁본이 원본과 같다지만 초미의 안목을 가진 탁본 전문가들은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고 하여 후세의 사람들은 이 8가지 난정집서의 탁본을 비교하며 서예 공부를 하게 되었지요.. 실기위주의 서예 심미안들이 더 많아지고 평론가들의 부재속에 서예예술은 그 기세가 점점 꺽여지게 됩니다..
이런 역사를 가진 중국의 서예미술이 미국의 잭슨 폴록만큼 위세를 떨쳤어도 전세계로 그 위상을 떨치며 서예의 열풍이 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예술은 권력이다'라고 누군가의 글에서 봤습니다. 어떻게 쓰다보니 주제가 샛길로 새는군요
난정집서 이미지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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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꽃 피는 아름다운 곳이란 말로, 속세를 떠난 이상향을 뜻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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桃 : 복숭아 도 동진(東晉) 때의 시인 도잠(陶潛:자는 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한 어부가 고기를 잡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참을 가다 보니 물 위로 복숭아 꽃잎이 떠내려오는데 향기롭기 그지없었다. 향기에 취해 꽃잎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앞에 커다란 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양쪽으로 복숭아꽃이 만발하였다. [출처] 도원경 [桃源境 ] | 네이버 백과사전 ,,,,,,,,,,,,,,,,,,,,,,,,,,,,,,,,,,,, 도원향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도원향(桃源鄕)은 동양의 한자 문화권에서 일컬어지는 이상향이다.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선경(仙境) 이야기에서 나오는 세속을 떠난 별천지[1]인 무릉도원을 가리키기도 한다. [편집] 주석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였던 이곳은 신라로 가는 백제 사신들을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수송대(愁送臺)'라 불렸다. 그런데 퇴계 이황이 이곳의 풍경을 예찬하는 시를 한 수 읊은 뒤부터 수승대(搜勝臺)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황의 개명시와 갈천 임훈(林薰)의 화답시가 전한다. 가까이에 거창의 대표적인 정자 요수정(樂水亭)과, 구연서원의 문루격인 관수루(觀水樓), 그리고 거북 형상의 돌출된 바위가 잘 남아 있어 경관이 좋기로 이름나 있다. 거창군이 관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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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5일 사적 제462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1월 8일 명승 제36호로 변경되었다. 1800년대 도성 가까이에 조성되었던 별서 관련 유적으로, 지정면적은 50,861㎡이다. 백악산(북악산의 옛이름) 뒷자락에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백사골에 조성된 동천(洞天: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의 하나로 주변에 흰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백석동천”이라 불린다. ‘백석’이란 중국의 명산인 ‘백석산(白石山)’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흰 돌이 많은 백악산을 ‘백석산’에 비견한 이름이다. 백석동천은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지와 연못지 등이 남아 있다. 약 3.78m 정도의 높은 대지 위에 사랑채와 안채의 건물지가 있고 사랑채는 담장과 석축 일부가 남아 있다. 건물지 아래쪽으로 연못지가 남아 있고 연못 한쪽으로 육각정자의 주춧돌과 돌계단이 남아 있다. 인근에 '백석동천(白石洞天)' '월암(月巖)'이라 새긴 바위가 남아 있다. 자연 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지와 연못, 각자바위 등이 잘 남아 있는 등 격조높은 별서유적지이다. 종로구가 관리한다. [출처]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付岩洞白石洞天 ]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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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란지계 [金蘭之契]
출처: 시사상식사전
친한 친구끼리 마음을 합치면 단단한 쇠도 자를 수 있고, 그 우정은 난초의 향기처럼 아름답다는 뜻으로, 벗 사이의 우정이 깊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ㆍ절친한 친구:水魚之交(수어지교), 金蘭之契(금란지계), 莫逆之友(막역지우), 刎頸之交(문경지교), 斷金之交(단금지교), 竹馬之友(죽마지우), 竹馬故友(죽마고우), 竹馬舊誼(죽마구의), 蔥竹之交(총죽지교), 肝膽相照(간담상조), 金石之交(금석지교), 伯牙絶鉉(백아절현), 知音(지음) ,,,,,,,,,,,,,,,,,,,,,,,,,,,,,,,,,,,,,,,,,,,,,
금란지교 / 金蘭之交 金 쇠 금 蘭 난초 란(난) 之 갈 지 交 사귈 교
겉뜻 : 단단하기가 황금과 같고 아름답기가 난초 향기와 같은 사귐이라는 뜻 속뜻 : 두 사람간에 서로 마음이 맞고 교분이 두터워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해 나갈 만큼 우정이 깊은 사귐을 이르는 말
유래 : 사람들과 한가지로 하여 먼저는 울부짖고 뒤에는 웃는다." 공자는 말씀하셨다. "군자의 도는 혹은 나가 벼슬하고 혹은 물러나 집에 있으며 혹은 침묵을 지키지만 혹은 크게 말한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고 마음 을 하나로 하여 말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 몹시 친밀한 사이를 금란지교(金蘭之交)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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