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길에 막걸리 한잔하던 산장 아래 비선대 바위에 새겨진 마애각자들
집에 와서 책들을 뒤져 보니 예상대로 갑신정변의 김옥균과 민족대표33인 중의 한 분이신 이갑성.맨위 사진 초서는 飛仙臺.계곡물에 씻겨 마멸되어 가는 것이 아쉽습니다.
흡곡군 [歙谷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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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대정현감을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녹담(鹿潭). 아버지는 이차방(李次房)이다. [활동사항] 1770년(영조 46) 향시에 합격하고 대과에 응시하려 출항하였으나 풍랑을 만나 유구(琉球: 일본 오키나와)의 호산도(虎山島)에 표착하였다. 온갖 고생 끝에 1771년(영조 47) 2월에 서울에 도착하여 식년시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하자 5월 8일 귀향하여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하였다. 1774년(영조 50) 홍상성(洪相聖, 1734~?)이 제주순무어사(濟州巡撫御使)에 부임하여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인 시취(試取)를 실시하였을 때 김경회(金慶會, 1746~1799), 강봉서(姜鳳瑞, 1746~1823) 등과 함께 합격하였다. 1775년(영조 51) 5월 26일 정시 문과의 별시에 급제하여 강원도 흡곡현감을 거쳐 1788년(정조 12) 2월 홍계선(洪繼善)의 후임으로 대정현감에 부임하여 1789년(정조 13) 1월까지 재임하였다. 대정현감 재임 중인 1788년 9월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대정현 사람 이환(李還)과 함께 기민을 구제하는 데 힘써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저술 및 작품] 일기체로 된 한문 필사본의 『표해록』과 『녹담집(鹿潭集)』이 있다. [참고문헌] • 김찬흡, 『제주사인명사전』(제주문화원, 2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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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홍경모(洪敬謨)
【생몰년】 1774(영조 50)∼1851(철종 2)
【본 관】 풍산(豊山) 홍(洪)
【자·호】 경수(敬修), 관암(冠巖)
【시 호】 문정(文貞)
【저서·작품】 《관암전서(冠巖全書)》, 《관암외사(冠巖外史)》, 《관암총사(冠巖叢史)》, 《관암유사(冠巖遊史)》,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대동장고(大東掌攷)》, 《기사지(耆社志)》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1774(영조 50)∼1851(철종 2).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수(敬修), 호는 관암(冠巖), 조부(祖父)는 이조 판서 홍양호(洪良浩)이고 영안위(永安尉) 문의공(文懿公) 홍주원(洪柱元)의 아들로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정조 때 동몽 교관(童蒙敎官)으로 경연(經筵)에서 《효경(孝經)》을 강론했으며 오언시(五言詩)를 지어서 정조에게 서책(書冊)과 패향(佩香)을 하사받았고 순조 5년(1805)에 성균관(成均館) 유생이 되었다. 1808년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816년에 시독관(侍讀官)으로서 홍문관(弘文館)에 장서가 없음을 왕에게 계청(啓請)하여 《예기(禮記)》 · 《주역(周易)》 · 《퇴계집(退溪集)》을 간행하게 했다. 순조 24년(1824)에 관리등용에 실책이 있었다고 하여 법성 첨절제사(法聖僉節制使)로 좌천되었다. 1830년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1834년에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헌종 4년(1838)과 1840년, 1842년, 1844년 네차례에 걸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했다. 《사의당지(四宜堂志)》에서 18대 현종조(顯宗朝) 이전에 명례궁(明禮宮)은 한때 이현(泥峴)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대사헌, 이조 · 예조 · 호조 · 병조 판서를 역임하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러 죽었으며 독서를 즐겨해서 장서(藏書)가 많았으며 문장에 능하였고 글씨도 잘 썼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저서로는 《관암전서(冠巖全書)》 · 《관암외사(冠巖外史)》 · 《관암총사(冠巖叢史)》 · 《관암유사(冠巖遊史)》 등이 있다. 편서(編書)로는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 《대동장고(大東掌攷)》 · 《기사지(耆社志)》 등이 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朝鮮圖書解題, 서울六百年史 第1卷
이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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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성(李甲成, 일본식 이름: 이와모토 세이이치(岩本正一), 1889년 10월 23일 ~ 1981년 3월 25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가이다. 아호는 연당(硏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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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편집]
생애 초반 [편집]
대구 출생으로 약학을 전공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수학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날 때는 학교를 중퇴하고 병원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민족대표 33인에 기독교 대표로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원로격인 33인과 학생들과의 매개 역할을 맡아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으며,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가한 공을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서훈 받았다.
출옥 후 1920년대까지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신간회, 흥업구락부 등에 참가하여 기독교 계통의 청년 운동을 계속하다가 1933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가 이때부터 일제의 밀정으로 일했다는 증언들이 다수 있다.[1] 이갑성은 민족대표 33인 중 최린, 정춘수와 함께 창씨개명을 한 세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9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서 훈장 서훈자 중 친일 혐의가 있는 자의 명단을 발표할 때, 과거 독립유공자 심사위원까지 맡았던 이갑성의 이름이 포함되었다.[2] 하지만 밀정 혐의의 특성상 세월이 흐른 뒤 근거를 찾기 힘들었고 관련자 대부분이 사망한 상태가 되어 버린데다, 더 이상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의혹만 남았을 뿐 명확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광복 이후 [편집]
이갑성은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45년 반탁운동을 위해 결성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1947년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을 역임했고, 1950년에는 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민의원(民議院) 의원에 당선되었다. 1953년 집권당이던 자유당의 최고위원과 정무부장이 되었고, 1963년 민정 이양 시기에는 김종필이 주도한 공화당 창당 작업에 발기위원으로 참여했다.
3·1 운동 당시 김창준, 박희도와 함께 30대 초반으로 가장 연소한 편이었으며, 93세까지 장수함으로써 33인 중 가장 늦게까지 생존했다.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낸 정치외교학자 이용희가 이갑성의 아들이다.
상훈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자료 [편집]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이갑성 : 독립 유공자로 훈장받은 친일 밀정 (이광일)〉, 《청산하지 못한 역사 2》.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38
- 이갑성 - 대한민국헌정회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 이갑성
주석 [편집]
- ↑ 박도. “"'친일파 세상'이 싫어 고국을 떠났습니다" - [이메일 대담] 순국선열 왕산 허위선생 후손 재미동포 허도성씨”, 《오마이뉴스》, 2005년 1월 31일 작성. 2008년 8월 6일 확인.
- ↑ 길윤형. 김성수 훈장은 치탈될 것인가. 《한겨레21》 (제565호).
전 임 (대구부 갑)최윤동 (대구부 을)서상일 (대구부 병)백남채 |
제2대 국회의원(대구시 병)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무소속 (대구시 갑)조경규 (대구시 을)박성하 |
후 임 (대구시 갑)서동진 (대구시 을)조병옥 (대구시 병)이우줄 |
[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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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 |
천도교 |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
불교 | 한용운 백용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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