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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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마애刻字

굴어당 2012. 3. 12. 17:38

 

 

 

 

 

 

 

 

 

 

 

 

 

 

 

 하산길에 막걸리 한잔하던 산장 아래 비선대 바위에 새겨진 마애각자들

집에 와서 책들을 뒤져 보니 예상대로 갑신정변의 김옥균과 민족대표33인 중의 한 분이신 이갑성.맨위 사진 초서는 飛仙臺.계곡물에 씻겨 마멸되어 가는 것이 아쉽습니다.

 

 

 

 

흡곡군 [歙]
요약
강원도(북한) 통천군에 폐합된 조선 말기의 행정구역.
본문

고구려 때에는 습비곡현(:)이라 하다가 통일신라경덕왕 때 습계현()으로 고치고, 고려에 이르러 흡곡현으로 다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 흡곡군으로 승격하였으나, 1914년 통천군에 폐합되어 학일면() ·학이면 ·학삼면 등으로 개편되었다.

 

 한자  張漢喆
 영어음역  Jang Hancheol
 이칭/별칭  녹담(鹿潭)
 분야  역사/전통시대
 분야  성씨·인물/전통시대인물
 유형  인물/전통인물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찬흡  
   유사검색어
 성격   문신|대정현감
 출신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
 성별   남
 생년   1744년(영조 20)
 몰년   미상
 본관   해주(海州)
 대표관직   대정현감|흡곡현감
[정의]
조선 후기 대정현감을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녹담(鹿潭). 아버지는 이차방(李次房)이다.

[활동사항]
1770년(영조 46) 향시에 합격하고 대과에 응시하려 출항하였으나 풍랑을 만나 유구(琉球: 일본 오키나와)의 호산도(虎山島)에 표착하였다. 온갖 고생 끝에 1771년(영조 47) 2월에 서울에 도착하여 식년시에 응시하였으나 불합격하자 5월 8일 귀향하여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하였다.

1774년(영조 50) 홍상성(洪相聖, 1734~?)이 제주순무어사(濟州巡撫御使)에 부임하여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인 시취(試取)를 실시하였을 때 김경회(金慶會, 1746~1799), 강봉서(姜鳳瑞, 1746~1823) 등과 함께 합격하였다. 1775년(영조 51) 5월 26일 정시 문과의 별시에 급제하여 강원도 흡곡현감을 거쳐 1788년(정조 12) 2월 홍계선(洪繼善)의 후임으로 대정현감에 부임하여 1789년(정조 13) 1월까지 재임하였다.

대정현감 재임 중인 1788년 9월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대정현 사람 이환(李還)과 함께 기민을 구제하는 데 힘써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저술 및 작품]
일기체로 된 한문 필사본의 『표해록』『녹담집(鹿潭集)』이 있다.

[참고문헌]
•  김찬흡, 『제주사인명사전』(제주문화원, 2002)
 
  관련항목
     • 과거
     • 『표해록』(장한철)
[이야기 제주사] 장한철 ‘표해록' 해양문학의 백미
하멜표류기…파란 눈에 비친 100년전 한국의 모습

 

오성찬 기자 osc@ijejutoday.com">osc@ijejutoday.com

 

섬이란 본래 바람과 파도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오로지 배에 의지해 가고 오던 시절에는 바람과 파도의 영향으로 배도 사람도, 떠가고, 떠오고…. 조선조 영조 46년(1770년) 애월 사람 장한철(張漢喆)은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오른다는 큰 뜻을 품고 일행 26명과 함께 제주항을 떠나 한양으로 가다가 육지를 바라보는 지점에서 폭풍우를 만나 서북풍에 밀려 망망대해를 헤매게 된다. 그는 마침내 유구열도(琉球列島) 중의 하나인 호산도(虎山島)에 표착하고, 여러 가지 봉변을 당하다가 결국은 8명만 살아 귀환한다.

   
▲ 용머리 해안가에 재현한 스페르웨르호

“나는 뱃사람들을 거느리고 높은 데 올라 사방을 돌아보니 보이는 것은 푸른 물결 뿐이요, 멀고 넓어서 끝이 없다. ...이것이 혹시 유구의 지경이 아닐까.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 섬은 남북의 길이가 이십 리 남짓하나, 동서는 오리도 되지 못하겠다."

이것은 그 일행이 유구에 표착한 직후의 기록이다. 이 기록만으로도 그가 매우 침착한 사람인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같은 장한철의 <표해록>은 살아 돌아온 후 임금님의 명령에 따라 저술됐는데, 후세 학자들로부터 "국문학 사상 보기 드문 해양문학의 백미"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표해록 중에는 최부(崔溥)의 <표해록>도 있다. 최부는 성종 18년(1487) 9월 경차관(敬差官)으로 제주에서 근무 중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육지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조난했다. 그는 중국 강남(현재의 절강성)에 표착해 그곳의 문물을 보고, 특히 그곳 농부들의 자새(水車) 제조법을 살피고 돌아와 표해록에 자세히 기록했다.

   
정조 18년(1794) 송경천(宋擎天) 역시 아들 둘과 함께 진상물을 수송하다가 태풍을 만나 소주부(蘇州府)에 표착했다. 그들 부자는 육로로 귀환하다가 아버지가 중도에 사망한다. 아들 의명(義明), 인명(仁明) 형제가 아버지의 시체를 업고 돌아왔으므로 조정에서 이들을 충효자로 표창한 기록이 있다.

이같이 조선시대에 중국과 유구, 일본에 표류한 경우는 기록에 있는 것만도 40 차례 가까이 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제주로 떠내려온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중국, 일본과 유구국 사람이었다.

특기할 것은 중국의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설 무렵 명의 유민들이 제주로 떠온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일본으로 보내주기를 원했으나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트집을 걱정하여 청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은 광해군 3년(1611) 3월 유구국 왕자가 제주에 떠내려 왔을 때 제주의 나쁜 관원들이 그들이 가진 귀한 물건을 욕심 내 살해한 사건과 함께 부끄러운 기록이다. 이 때문에 장한철 일행은 유구에 표착했을 때 역경을 겪게 된다.

이들 나라 사람들이 제주로 떠온 경우도 20여 회에 이른다.
서양 사람들도 근해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떠온 경우가 있었다. 인조 5년(1627) 9월 얀 얀세 웰테부리(Jan Janse Weltevree)가 제주에 상륙했다. 그들은 오우벨 켈크(Ouwer Kerck)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다가 물을 구하기 위해 선원 2명과 함께 보트로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 사이 배가 떠나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서울로 압송됐다. 웰테부리는 나중 한국 명 박연(朴淵)으로 고치고, 조선이 서양과의 교류에 도움을 줬다.

그 후에 하멜(Hendrik Hamel)이 탄 스페르웨르(Sperwer)호가 태풍으로 대정현 해안에서 좌초했다. 일행 64명 중 36명만이 생존한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그들은 일본 나가사키로 가기를 원했으나 다음해 5월 조선 관리들에 의해 서울로 압송됐다. 나중 이들은 여수좌수영, 순천, 남원 등지로 분산 수용됐다.

현종 7년(1666) 좌수영에 있던 하멜 일행 8명이 탈출하여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네델란드로 돌아가 억류됐던 기간의 기억을 <하멜 표류기: 蘭船 濟州島 難破記>라는 책으로 풀어썼다.

이를 기념하는 비석이 산방산 앞에 세워지고, 지난해에는 남제주군이 용머리 해안에 스페르웨르호 모형을 재현하여 놨다. 그러나 아직도 이 배의 정확한 표착지가 어디냐는 논의는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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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시청각 자료
  『표해록』
 

 【성 명】 홍경모(洪敬謨)
【생몰년】 1774(영조 50)∼1851(철종 2)
【본 관】 풍산(豊山) 홍(洪)
【자·호】 경수(敬修), 관암(冠巖)
【시 호】 문정(文貞)
【저서·작품】 《관암전서(冠巖全書)》, 《관암외사(冠巖外史)》, 《관암총사(冠巖叢史)》, 《관암유사(冠巖遊史)》,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대동장고(大東掌攷)》, 《기사지(耆社志)》
【시 대】 조선 후기
【성 격】 문신

1774(영조 50)∼1851(철종 2).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경수(敬修), 호는 관암(冠巖), 조부(祖父)는
이조 판서 홍양호(洪良浩)이고 영안위(永安尉) 문의공(文懿公) 홍주원(洪柱元)의 아들로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정조 때 동몽
교관(童蒙敎官)으로 경연(經筵)에서 《효경(孝經)》을 강론했으며 오언시(五言詩)를 지어서 정조에게 서책(書冊)과 패향(佩香)을 하사받았고 순조 5년(1805)에 성균관(成均館) 유생이 되었다. 1808년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816년에 시독관(侍讀官)으로서 홍문관(弘文館)에 장서가 없음을 왕에게 계청(啓請)하여 《예기(禮記)》 · 《주역(周易)》 · 《퇴계집(退溪集)》을 간행하게 했다. 순조 24년(1824)에 관리등용에 실책이 있었다고 하여 법성 첨절제사(法聖僉節制使)로 좌천되었다. 1830년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1834년에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헌종 4년(1838)과 1840년, 1842년, 1844년 네차례에 걸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했다. 《사의당지(四宜堂志)》에서 18대 현종조(顯宗朝) 이전에 명례궁(明禮宮)은 한때 이현(泥峴)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대사헌, 이조 · 예조 · 호조 · 병조 판서를 역임하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러 죽었으며 독서를 즐겨해서 장서(藏書)가 많았으며 문장에 능하였고 글씨도 잘 썼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저서로는 《관암전서(冠巖全書)》 · 《관암외사(冠巖外史)》 · 《관암총사(冠巖叢史)》 · 《관암유사(冠巖遊史)》 등이 있다. 편서(編書)로는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 《대동장고(大東掌攷)》 · 《기사지(耆社志)》 등이 있다.

【참고문헌】 純祖實錄, 憲宗實錄, 朝鮮圖書解題, 서울六百年史 第1卷

김옥균 (한말 정치가)  [金玉均]
출처: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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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백과

1851(철종 2)~1894(고종31).
한말의 정치가.
개요
김옥균 /김옥균
근대 부르주아 혁명을 지향했던 급진개화파의 지도자로서 갑신정변(1884)을 주도했으며, 우리나라 개화사상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개화사상의 형성
본관은 안동.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고우(古愚), 별호는 두타거사(頭陀居士). 아버지는 병태(炳台)로 안동김씨 가문이나 몰락한 양반이고, 어머니는 송씨이다. 7세 때 천안에 사는 당숙인 병기(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했다. 11세 때 병기가 강릉부사로 가게 되자, 16세까지 강릉 송담서원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했다. 1872년(고종 9)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전적을 거쳐 1874년 교리·정언을 지냈다. 이때 그는 개화통상론자이며 정계의 거물이었던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유대치(劉大致)·오경석(吳慶錫) 등의 지도를 받고,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과 교유하는 가운데 개화사상을 배우고 발전시켜나갔다. 한편 동지를 규합하여 일종의 정치적 결사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무렵 집권층이 문호개방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개화파는 각광을 받으면서 개화운동을 추진했다. 개화파는 조선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정치세력을 확보하고 군사력을 양성하는 동시에, 통리아문 설치 등 정부기구의 개편, 군제개혁, 〈한성순보 漢城旬報〉의 간행 등을 주장했다. 나아가 식산흥업을 위하여 공장제도에 따른 공업건설, 광업개발, 선진과학기술의 도입, 상회사제도의 장려, 농업의 개발과 양잠의 장려, 임업의 개발, 어업과 포경업의 개발, 기선해운업의 도입 등을 추진했다. 또한 1879년 일본 근대화의 실태를 알아보도록 신사유람단의 파견을 주선했다. 그 자신도 1882년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明治]유신의 진행상황을 살펴보고 일본 정치가들과 민간 지도자들을 접촉하는 한편, 일본과 중국의 지식인이 결성한 '흥아회'(興亞會)라는 친목회에 참가하여 토론도 했다. 귀국 도중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한 뒤 승정원우부승지·참의교섭통상사무에 이어 이조참의·호조참판·외아문협판 등의 요직을 거치며, 일본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조선의 근대화를 급격히 추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자금력이 대단히 부족했을 뿐 아니라 정치 실세였던 민씨정권과 그 배후세력인 청의 방해로 개화파들이 구상한 개화정책의 추진은 상당히 어려웠다. 당시 청은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대원군을 납치해가고 임오군란을 진압한 뒤에도 군대를 서울에 그대로 주둔시킨 채 민씨정권을 재수립하고, 조선을 실질적인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내정간섭을 자행했다. 이러한 정치정세 속에서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으로부터 벗어나 일본식의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려 한 개화파의 행동반경은 대단히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옥균은 1882년 9월 수신사(修信使) 박영효 일행의 고문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서 17만 원의 차관을 얻는 한편, 서광범과 함께 서재필(徐載弼) 등 본국에서 선발해보낸 청년 유학생을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킨 뒤 1883년 3월에 돌아왔다. 1883년 6월 고종의 신임장을 가지고 3차로 일본에 건너가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했다. 이 일은 P. G. 묄렌도르프와 민씨 일파의 반대공작, 일본의 거부로 실패했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일본정부나 민간재계에서 당시 일본 1년 조세수입의 22분의 1이나 되는 300만 원이란 거액을 투자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3차례의 일본 방문을 통해 메이지유신의 성과를 보고 근대화가 더욱 시급함을 깨닫고 개화정책을 서둘렀지만, 그럴수록 소극적이면서도 온건하게 개화를 추진하던 청과 민영익(閔泳翊)을 비롯한 민씨세도정권과는 더욱 날카롭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한성판윤 박영효의 좌천, 화폐주조문제를 둘러싼 의견충돌, 일본 고야마[戶山]육군학교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서재필의 축출 등 집권파의 압력은 계속 가중되었다. 개혁 방식을 둘러싸고 이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에 정치적 위기에 빠진 김옥균 등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법을 써서, 정한론(征韓論)의 분위기가 팽배한 일본을 이용하여 이들을 타도하고자 했다. 즉 정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다음, '위로부터의' 급진적인 방법으로 개혁정책을 추진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엿보았다.
때마침 청은 베트남 문제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1884년 5월 조선주둔군 1,500명을 안남(安南)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 주둔한 청군은 1,500명만 남게 되었다. 그해 8월 일어난 청·프 전쟁에서 청군은 패배를 거듭했다. 김옥균은 이를 정변의 호기로 판단, 개화파 정치인을 규합하여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또한 11월 서울에 귀임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조선에서의 일본의 약세를 만회하기 위해 그동안 개화파에 냉대하던 태도를 바꿔 군사지원을 약속하자 김옥균은 이들과 화해하고 정변에 착수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에서 개화파는 자신들의 군사력과 일본군을 동원하여 윤태준(尹泰駿)·한규직(韓圭稷)·민태호(閔台鎬)·민영목(閔泳穆) 등 민씨일파의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튿날 이재원(李載元)을 영의정, 홍영식을 좌의정으로 한 새 내각이 조직되었다. 김옥균은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참판을 맡아 국가재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준비된 혁신정강을 12월 6일 공포했다. 이 모든 정권수립과정은 국왕의 전교(傳敎)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조보(朝報)로 서울 장안에 알려졌다. 이때 발표된 개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치면에서는 청과의 전통적 관계를 단절하고 근대적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왕의 전제권을 축소하고 내각의 권한을 확대한 내각제도, 근대적 경찰제도·군제를 도입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경제면에서는 지주자본을 이용하여 농상공업을 육성하고, 국력을 진흥시켜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중세적 부세제도를 근대적 조세제도로 개혁하기 위한 지조(地租)개정도 뒤따랐다. 사회면에서는 문벌·신분제의 폐지를 통한 만민평등을 지향했다. 이는 자본제를 수립하기 위해 신분적인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노동력을 창출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국왕은 이를 추인하고 개혁정치를 천명하는 대정유신(大政維新)의 조서(詔書)를 내렸다. 그러나 청군은 6일 오후 정변을 무너뜨리려고 무력개입을 시작하여 궁궐로 공격해들어왔다. 외위(外衛)를 담당한 조선군이 청군에 저항하다 패퇴하자, 중위(中衛)를 맡은 일본군은 무기력하게 배신하고 도망 철수했다. 이결과 갑신정변은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그들을 뒷받침할 만큼 시민계층이 성숙하지 못했고, 개혁방향도 지주적 입장에서 추진하였기 때문에 당시 변혁세력이었던 농민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 데도 있었다.
망명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1885년 1월부터 1894년 3월까지 10년간에 걸친 망명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다시 집권한 민씨정권은 이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일본정부에 이들을 체포하여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정부는 만국공법(萬國公法)상 망명한 정치범을 송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정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용가치가 떨어진 김옥균을 1886년 8월 태평양상의 고도(孤島) 오가사와라 섬[小笠原]으로 강제추방하고, 1888년 7월에는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札幌]에 연금하였으며, 1890년에야 도쿄로 돌아오게 했다. 1894년 3월 일본에 실망한 김옥균은 청의 이홍장(李鴻章)과 담판할 생각으로 상하이[上海]로 건너갔으나, 민씨정권이 보낸 자객인 홍종우(洪鐘宇)에게 동화양행(同和洋行) 객실에서 암살되었다. 이 일이 터지자 청은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조선정부에 인도했다.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楊花津)에서 능지처참되어 전국에 효시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의 민간인과 언론기관은 김씨우인회(金氏友人會)를 조직하여 도쿄의 혼간 사[本願寺]에서 장례식을 거행하는 한편, 조선과 청을 응징하자는 시위를 벌여 청일전쟁을 촉발시키는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그해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이 승리하고 개화파의 갑오정권이 수립되자 이듬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김홍집이 상소하여 사면복권되었다. 1910년(융희 4) 규장각대제학으로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기화근사 箕和近事〉·〈치도약론 治道略論〉·〈갑신일록 甲申日錄〉 등이 있다.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갑신정변
李潤甲 글

 

 

 

이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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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성(李甲成, 일본식 이름: 이와모토 세이이치(岩本正一), 1889년 10월 23일 ~ 1981년 3월 25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며 정치가이다. 아호는 연당(硏堂).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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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편집]

생애 초반 [편집]

대구 출생으로 약학을 전공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수학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날 때는 학교를 중퇴하고 병원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민족대표 33인기독교 대표로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원로격인 33인과 학생들과의 매개 역할을 맡아 학생 시위를 조직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으며,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가한 공을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서훈 받았다.

출옥 후 1920년대까지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신간회, 흥업구락부 등에 참가하여 기독교 계통의 청년 운동을 계속하다가 1933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가 이때부터 일제의 밀정으로 일했다는 증언들이 다수 있다.[1] 이갑성은 민족대표 33인 중 최린, 정춘수와 함께 창씨개명을 한 세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9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서 훈장 서훈자 중 친일 혐의가 있는 자의 명단을 발표할 때, 과거 독립유공자 심사위원까지 맡았던 이갑성의 이름이 포함되었다.[2] 하지만 밀정 혐의의 특성상 세월이 흐른 뒤 근거를 찾기 힘들었고 관련자 대부분이 사망한 상태가 되어 버린데다, 더 이상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의혹만 남았을 뿐 명확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광복 이후 [편집]

이갑성은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45년 반탁운동을 위해 결성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1947년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을 역임했고, 1950년에는 국민회 소속으로 대구에서 민의원(民議院) 의원에 당선되었다. 1953년 집권당이던 자유당의 최고위원과 정무부장이 되었고, 1963년 민정 이양 시기에는 김종필이 주도한 공화당 창당 작업에 발기위원으로 참여했다.

3·1 운동 당시 김창준, 박희도와 함께 30대 초반으로 가장 연소한 편이었으며, 93세까지 장수함으로써 33인 중 가장 늦게까지 생존했다. 국토통일원 장관을 지낸 정치외교학자 이용희가 이갑성의 아들이다.

상훈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참고자료 [편집]

주석 [편집]

  1. 박도. “"'친일파 세상'이 싫어 고국을 떠났습니다" - [이메일 대담] 순국선열 왕산 허위선생 후손 재미동포 허도성씨”, 《오마이뉴스》, 2005년 1월 31일 작성. 2008년 8월 6일 확인.
  2. 길윤형. 김성수 훈장은 치탈될 것인가. 《한겨레21》 (제565호).


전 임
(대구부 갑)최윤동
(대구부 을)서상일
(대구부 병)백남채
제2대 국회의원(대구시 병)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무소속
(대구시 갑)조경규
(대구시 을)박성하
후 임
(대구시 갑)서동진
(대구시 을)조병옥
(대구시 병)이우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