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칠보산 그린 '조선 국보급 병풍' 첫 소개
'방긋: 한국미의 재발견'(1)
- 선승혜의 행복한 미학 머니투데이 선승혜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HK교수 입력 : 2013.06.1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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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승혜의 행복한 미학
- 미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선승혜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HK교수가 예술을 통해 발견하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선 교수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예술을 통해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하는 삶을 살게 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뜻밖의 기쁨은 우리의 매일 속에 있습니다. 선 교수의 칼럼을 통해 아름다움과 예술을 일상에서 보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칠보산은 함경북도의 명산이다. 함경북도의 남쪽 명천(明川)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동해까지 닿아있다. 원래는 고구려, 발해의 땅이었다가, 여진족이 거주하면서 궁한리촌(弓寒里村)으로도 불렸다. 1107년 고려의 윤관이 여진족을 정벌하면서, 2년 동안 고려의 통치를 받다가, 다시 여진족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1390년 공양왕 2년에 길주만호부를 두고, 조선의 관할지역이 되었다. 기암괴석이 많고, 풍경이 빼어나서 조선시대에 작은 금강산[小金剛山]으로 불렸다. 원래 일곱 산이 나란히 솟아 있었기 때문에 칠보산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여섯 산이 바다 속에 잠겼다는 전설도 있다. <칠보산 병풍>을 처음 본 것은 2000년 도쿄대학 박사과정 때 유럽, 미국 소장 한국미술품을 조사하던 시절이다. 이 병풍은 클리블랜드미술관의 아시아 갤러리에서 전시된 적은 있었지만,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필자가 2010년 클리블랜드미술관에 한국일본미술 큐레이터로 부임했다. 부임하자마자 제일 처음 본격적인 조사를 한 작품이다. 그 성과로 2012년 클리블랜드미술관 명품선의 책에 소개하여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2013년 6월 한국실 오픈에 <칠보산 병풍>을 가장 어울리는 작품으로 전시계획의 핵심작품으로 배치하였다. <칠보산 병풍>은 모두 10폭 병풍이 하나의 대형 파노라마 화면으로 펼쳐져 있다. 칠보산의 봉오리들이 조감법으로 그려져 있고, 그 지명이 촘촘하게 쓰인 작품이다. 동시대의 중국 청나라가 자랑하는 남종화 정통파들이 피력한 피마준 (마의 껍질처럼 산의 결을 그리는 필법)이나, 서양화법의 조감법(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그린 구도)을 응용했던 대형 병풍 작품들보다 그 기량이 더 뛰어난 조선시대의 대작이다. 정선의 <금강전도>에 자웅을 겨루어 볼만한 국보 중 국보급이다. 이 작품은 호주의 한 개인 소장가가 중국그림인줄 소장하였다가, 1989년 클리블랜드미술관에 양도하였다. 원래 병풍이었던 것을 개인 소장가가 축그림으로 표구하였는데, 이것을 다시 원래 병풍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칠보산에 역사 기록을 찾아보니, 놀랍게도 그 산에 올랐던 우리의 선조들의 기상은 웅혼했다. 함경북도의 칠보산은 기암절벽의 명산 이상의 상징적인 힘을 뿜어낸다. 외세의 힘을 잘 이겨내려는 선조들의 강인한 정신이 숨 쉬고 있다.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와 타협을 거부했던 척화파의 관료학자들이 칠보산에 올랐고, 그 감상을 시를 주고받았다. 척화파의 대표로 알려진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1602년 33살의 젊은 시절 칠보산을 유람하였다고 청음연보는 밝힌다. 김상헌은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 사람 이었던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의 『명악록(溟岳錄)』을 위해, 칠보산에 올라가 장백산(長白山, 백두산의 다른 이름)을 바라보았다고 시를 써주었다. 김상헌과 함께 1642년 청나라 심양(瀋陽)에 잡혀 갔다가 돌아온 이식(李植; 1584~1647)은 '눈 속을 뚫고 칠보산을 찾아가다'라는 절구 5수 시를 『북정록(北征錄)』에 남기고 있다. 조선의 척화파 관료들은 칠보산을 오르고 시를 주고받는 것은 풍경 감상,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바로 우리땅을 우리가 지켜나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토로하고, 그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칠보산은 조선의 북방경계선으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김성일(金誠一; 1583~1593)은 1579~1580 함경도 순무어사로 파견된 기간 동안 함경도 군대 주둔 일지인 『북정일록(北征日錄)』을 꼼꼼히 기록했다. 그는 1580년(선조13) 3월 5일에서 칠보산에 갔는데, 그날은 흐리고 눈발이 날리는 날씨였다고 시작한다, 그리고 전라도 나주 출신의 임형수(林亨秀; 1504~1547)가 칠보산을 가보고 싶다고 쓴 유산시(遊山詩)를 칠보산에 올라 읊었다. 김성일은 '천혜 자연을 유람하기를 부질없이 원하지만, 어느 날에 아득한 기약이 이루어질까(天遊空有願, 幾日果幽期)'라는 임형수의 바램을 대신 이루어 주었다. <칠보산 병풍>이 북방의 꼼꼼하게 진경산수로서 면모를 갖춘 것은 17세기후반 이후다. 그림은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북관 십경도기(北關十景圖記)』에서 함흥의 10경 중 하나로 알린 칠보산 소개와 일맥상통한다. 그가 묘사한 여정이 <칠보산 병풍>에 모두 그림으로 기록되었다. <세계의 문화유산 북한 1부 - 백두산, 칠보산4.> 남구만의 기록으로 읽는 <칠보산 병풍>의 여정은 이렇다. '산등성이를 따라 동남쪽으로 50리를 가면 문암(門巖)이 있는데, 문암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큰 산이 하늘과 맞닿아 사면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다. 이 가운데 석산(石山)이 있는데 색깔이 붉은 노을과 같으며, 여러 봉우리가 높이 솟아 기이하고 빼어나서 천태만상 없는 것이 없다. 이중에 가장 기이한 것은 사암(寺巖), 책암(冊巖), 주암(舟巖), 천불봉(千佛峰), 만사봉(萬寺峰), 호상대(虎像臺) 등으로 불린다. 문암에서 10리를 가면 금장사(金藏寺)가 있고, 금장사로부터 또다시 20리를 가면 개심사(開心寺)가 있다. 개심사에서 약간 동쪽으로 가면 망해대(望海臺)가 있고 망해대로부터 석봉(石峰)을 넘으면 금강굴(金剛窟)이 있으며 금강굴로부터 10리를 가면 도솔암(兜率菴)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번역 참조) 19세기가 되면 칠보산에는 러브스토리도 더해진다. 칠보산탐승기(七寶山探勝記; 좋은 경치를 찾아간 기록) 중에서 김진형(金鎭衡; 1801∼1865)의 '북천가'(北遷歌)가 인기를 끌었다. 함경도의 명천으로 귀양갔다가, 칠보산을 방문하고, 군산월이라는 기녀와의 사랑을 기록한 기행가사(紀行歌辭)이다.
학자로서 꿈이 있다면, 실제로 보는 경치를 그렸다는 '진경산수'로서 칠보산 그림을 명실상부하게 답사하면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희망한다. 큐레이터로서 꿈이 있다면, 우리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남북 구분 없이 그림과 함께 전시하며 우리 선조들의 웅혼함을 주제로 전시를 기획하기를 소망한다. 문화의 잃어버린 반쪽을 서로 보완하여, 정서적 통합과 융합의 물꼬가 트이기를 염원한다. 이러한 문화적 공동 연구가 선행되어, 국내적으로 당국 간 회담의 토대가 되며, 국제적으로 한국학의 새로운 경지가 개척되기를 바란다. 최근 가장 사회 키워드가 된 융합.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남북의 문화 융합이 아닐까? 그것은 세계적으로 문화 콘텐츠가 핵심 국가경쟁력이 되고 있는 요즘 우리 민족과 문화의 융성을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그 역사적인 숙제 앞에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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