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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中대사관, 美대사관의 두배(연면적)… '차이나 파워' 상징으로

굴어당 2013. 9. 24. 19:49

새 中대사관, 美대사관의 두배(연면적)… '차이나 파워' 상징으로

[연말 명동으로 11년 만에 귀환… 주한 대사관 중 최대규모]

대만과 단교 후 中이 사용, 공사 전보다 4배 이상 넓어져… 24층 숙소동엔 52가구 입주
전세계 중국대사관 중 워싱턴 이어 두번째 규모


	중국대사관 위치 지도
지난 16일 서울 중구 명동 주한(駐韓) 중국대사관 신축 공사 현장. 성인 키 네 배 높이의 공사장 가림 벽 뒤로 내정(內庭) 공사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90m 높이의 대사관 건물, 중국식 기와로 장식한 정문, 마당의 정자(亭子)는 도색까지 마친 상태였다.

중국대사관이 연말 명동에 문을 연다. 신축 공사를 위해 2002년 청와대 근처 효자동으로 이전한 지 11년 만의 귀환이다. 중국대사관이 준공 계획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이르면 11월쯤 문을 열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 문을 여는 주한 중국대사관은 커진 중국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다. 연면적 1만7199㎡로 국내 주한 외교공관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러시아대사관(1만2012㎡·서울 중구 정동)보다 크고, 광화문 주한미국대사관(9871㎡) 건물보다 두 배 넓다. 해외 중국대사관 가운데는 워싱턴 중국대사관(2만3000㎡) 다음 규모로 알려졌다.

1960년대 지어진 6층 콘크리트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대리석으로 외벽을 장식한 10층짜리 업무동과 24층짜리 숙소동이 들어섰다. 지붕은 기와지붕 형태로 멋을 냈다. 건물 연면적은 전보다 네 배 이상 넓어졌다.

신축 대사관 내부는 아직 공개된 적이 없다. 2008년 서울시가 승인한 신축 계획안에 따르면 숙소동에는 소형 오피스텔(57㎡)부터 중형 아파트(126㎡) 크기까지 총 52가구가 들어간다. 일부 방은 외빈 숙소로 쓰이고 나머지는 외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중국 대사관 직원들이 사용할 예정이다. 체력단련장·수영장, 이·미용실 등 편의시설도 갖췄다.

명동 중국대사관 자리는 임오군란(1882년) 이후 위안스카이(袁世凱) 등 조선에 파견 나온 청나라 관리가 머물던 곳이다. 광복 후 대만대사관으로 쓰이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에 따라 중국이 넘겨받았다.


	주한 중국대사관 사진과 개요
당시 중국은 수교 조건으로 대만대사관 건물을 중국에 넘길 것을 우리 정부에 요구했고, 대만은 건물이 중국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매각을 추진했다. 한국은 대사관 문제와 관련 차관급 대책반을 만들고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가 일일동향보고를 할 정도로 민감하게 다뤘다. 결국 중국 요구가 관철됐다. 현재 주한 타이베이대표부는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빌딩에 입주해 있다.

10년간 대만대사관 건물을 그대로 쓰던 중국 정부는 2001년 연말 대사관 신축 계획을 발표하고 2002년 효자동으로 이전했다. 예산 문제와 노무현 정부의 행정수도 이전 논의로 신축 계획이 두 차례 이상 보류된 끝에 2010년 정식 착공했다.

관영 환구시보(環球時報) 등 중국 언론은 새 중국대사관이 "명동 일대의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명동 핵심 상권이 인접해 있는 새 대사관은 땅값만 올해 공시지가 기준으로 1600억원이 넘는다. 2008년에 서울시에 보고한 건축비만 312억원이었다. 실제 건축비는 훨씬 더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명동 일대 직장을 다니는 박성준(32)씨는 "높은 대사관 건물을 올려다보면서 자연스레 강대국이 된 중국의 힘을 떠올리게 된다"며 "대사관 건물인 만큼 보안도 중요하겠지만 서울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곳인 만큼 한국인들에게 친근한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홍콩총영사를 지낸 석동연 동북아역사재단 사무총장은 "현재 효자동에 있는 중국대사관은 규모 면에서 날로 커지는 한·중 관계에 걸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왔다"며 "새 대사관 건물이 연간 교역액 3000억달러를 눈앞에 둔 한·중 관계 발전을 위한 외교 인프라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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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동에 있는 주한 미국 대사 관저(官邸)에는 130년 전의 분위기가 꽤 남아 있다. 조선시대 전통 기와집 모양과 대들보, 한국식 정원, 격자무늬 창살…. 이곳은 1883년 초대 주한 공사 푸트가 고종(高宗) 임금의 권유로 사들였다. 키가 컸던 푸트는 한옥에 익숙지 않았던지 "일어서면 모자가 천장에 닿아 불편하므로 대사관을 새로 짓든지 해야겠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그러자 국무부는 "조선에서는 실내에서 모자를 쓰는 법이 아니다"고 회신했다고 한다.

▶미국 공사관에 이어 영국·프랑스·러시아 공관이 들어서면서 덕수궁 뒤편 정동은 유럽·미국 타운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의 종주국 행세를 하던 청나라 사람들은 길 건너 북창동 지금의 플라자호텔 주변과 명동에 모여 살며 차이나타운을 이루었다. 1882년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조약에 따라 서울에 온 청나라 대표가 명동 입구의 집 한 채를 매입해 공관으로 사용했다. 대원군 심복으로 포도대장을 지낸 이경하의 집이었다.


	만물상 일러스트

▶1885년 스물일곱 나이에 조선 주재 총리 교섭 통상대신으로 온 원세개(袁世凱)는 이 집을 무대로 10년 동안 조선의 정치·경제·외교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 관료들은 그를 '원대인' '감국대신'이라 불렀다. '감국(監國)'이란 중국이 속국에 파견하는 감독관을 말한다. 조선에 온 외교사절 중 원세개만이 앉아서 고종을 알현했다.

▶원세개는 각국 공사들이 회의하는 자리에도 언제나 통역관을 대신 보냈다. 나는 너희들과 격이 다르다는 거드름이었다. 1887년 고종은 박정양을 초대 주미 공사로 임명했다. 원세개는 청나라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니 발령을 취소하고 북경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라고 고종을 압박했다. 명동 청나라 공관은 광복 후 대만 대사관으로 쓰이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자 다시 중국 소유로 넘어갔다.

▶2010년 신축 공사에 들어갔던 명동 중국 대사관이 올 연말 안 입주를 목표로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라고 한다. 10층짜리 업무용 건물과 24층 숙소용 빌딩으로 이뤄진 새 중국 대사관은 주한 외교 공관 중 가장 크고 중국의 해외 공관 가운데 워싱턴DC 다음 둘째 크기다. 보안을 위해 중국 국영 건설업체가 직접 시공을 맡았고 철근·시멘트 같은 건자재까지 중국서 들여왔다. 작업 인부들 역시 중국 국적자로 제한했다. 서울 중심가에 치솟은 새 중국 대사관 건물에 세계의 수퍼파워로 떠오른 중국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물론 대한민국도 구한말처럼 작고 힘없는 나라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