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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판각한 두시언해의 서문[重刻杜詩諺解序]

굴어당 2014. 1. 8. 21:34

 

계곡집(谿谷集) > 계곡선생집 제6권 > 서(序) >

두 번째 판각한 두시언해의 서문[重刻杜詩諺解序]

시는 마음속으로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니 주해(注解) 따위를 낼 필요가 있겠는가. 주해도 낼 일이 없는데, 더구나 방언(方言)으로 번역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나 견식(見識)이 뛰어난 자의 입장에서 논한다면야 물론 이 말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마음속으로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을 경우 어찌 주해를 보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 주해를 보아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을 경우 어떻게 번역물을 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점이 바로 《두시언해(杜詩諺解)》가 시가(詩家)에 공이 있게 된 이유라고 하겠다.
시는 두소릉(杜少陵 두보(杜甫))에 이르러 고금(古今)을 모두 통틀어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할 것이다. 소재(素材) 선택의 범위도 그렇게 넓을 수가 없고 내포된 의미도 심오하기 그지없으며 어휘의 구사도 참으로 변화무쌍하기만 하다. 그러니 ‘흉중(胷中)에 국자감(國子監)이 들어 있지 않으면 두시(杜詩)를 볼 수가 없다.’는 옛사람의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주해를 낸 사람들이 천가(千家)로 일컬어질 만큼 많다고는 하지만 정작 비밀스러운 뜻과 오묘한 말에 대해서는 드러내 밝혀 놓은 것이 적기 때문에 읽는 이들이 이를 병통으로 여겨 온 지가 오래되었다.
이에 성화(成化) 연간에 이르러 성묘(成廟)께서 옥당(玉堂)의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여러 주해들을 참고해 보고 이를 바로잡은 뒤 언어(諺語)로 그 뜻을 번역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구설(舊說) 중에 해석이 미진했던 대목들도 한 번 보기만 하면 분명히 이해되도록 하였는데, 이때 매계(梅溪) 조 학사 위(曹學士偉)가 분부를 받들어 서문을 썼었다.
그러나 그때 간행된 판본(板本) 가운데 세상에 유행된 것들이 매우 적었는데, 내 기억으로도 어렸을 적에 언젠가 한 번 어떤 사람을 통해 빌려다가 읽어 본 일이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고 나서 뒤에 다시 한 번 보려고 하였으나 끝내 구할 수가 없었으므로 늘 이를 유감스럽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금년에 천파(天坡) 오공 숙(吳公䎘)이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으면서 인본(印本) 한 권을 구입하여 선사(繕寫 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베껴 쓰는 것)하고 교정(校定 책의 자구(字句)를 검토해서 정하는 것)한 뒤 각 고을에 분정(分定)해서 간행하게 하였는데, 대구 부사(大丘府使)인 김후 상복(金侯尙宓)이 이 일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 일이 마무리가 되자 나에게 편지를 보내 서문을 부탁해 왔다.
아, 비흥(比興 시(詩)를 뜻함)의 의미가 사문(斯文 유도(儒道))에 참여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시를 짓는 일도 당장에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를 없애서는 안 될 점이 있다고 한다면 두시를 어찌 읽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렇다면 두시를 읽을 때 언해가 있는 것이야말로 길을 잃었을 때 나침반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 언해(諺解)를 엮은 것으로 말하면 성묘(成廟)께서 일찍이 관심을 기울여 후학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는 아름다운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니 이를 재차 간행하고 널리 배포하여 시를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보관하고 사람마다 외우게 함으로써 성조(聖朝)의 온유(溫柔)하고 돈후(敦厚)한 교화에 이바지하게끔 하는 것이야말로 백성의 풍화(風化)를 담당한 자의 입장에서 볼 때 당연히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일이라고 할 것이다.
오공으로 말하면 학문을 좋아하고 문사(文詞)에 능할 뿐더러 관리로서의 직책 수행에도 민첩한 재질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번에 그야말로 관찰사로서의 바쁜 업무를 처리하는 여가에 사문(斯文)에 관심을 갖고서 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의 없어질 뻔한 책을 눈부시게도 다시금 새롭게 간행해 내었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라 하겠다. 내 입장에서는 오공의 요청을 거절하기도 어렵거니와 또 노년에 이르지 않은 지금에 와서 옛날 보려고 했다가 구해 보지 못해던 책을 다시금 보게 된 것이 스스로도 기쁘기만 하기에 마침내 사양하지 않고 서문을 쓰게 되었다.

092_114a詩須心會。何事箋解。解猶無所事。況譯之以方言乎。自達識論之。是固然矣。爲學者謀之。心有所未會。烏可無解。解有所未暢。譯亦何可已也。此杜詩諺解之所以有功於詩家也。詩至杜少陵。古今之能事畢矣。庀材也極其博。用意也極其深。造語也極其變。古人謂胸中無國子監。不可看杜詩。詎不信歟。註解者稱千家。謂其多也。至其密義粤語。鮮有發明。讀者病之久矣。成化年間。成廟命玉堂詞臣參訂諸註。以諺語譯其義。凡舊說之所未達。一覽曉然。梅溪曹學士偉奉敎序之。然其印本之092_114b行於世者甚鮮。記余少時。嘗從人一倩讀之。旣而欲再觀。而終不可得。常以爲恨。今年天坡吳公䎘按節嶺南。購得一本。繕寫校定。分刊於列邑。而大丘府使金侯尙宓實相其役。旣成。走書屬序於余。嗚呼。比興之義。謂無與於斯文。詩直可廢也。詩有未可廢者。則杜詩何可不讀。讀杜而有諺解。其不猶迷塗之指南乎。況是編也。成廟所嘗留神。以嘉惠後學者也。重刊而廣布。使學詩者。戶藏而人誦之。以裨聖朝溫柔敦厚之敎。此誠觀民風者所宜先也。吳公嗜學工文詞。又敏於吏職。乃能於092_114c蕃宣鞅掌之餘。加意斯文。百年垂廢之書。煥然復新。甚盛擧也。余旣重吳公之請。又自喜及其未老。將復睹舊所欲觀而未得者。遂不辭爲之序。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