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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시 한 편(안대회) : 계사유타(溪社遺唾) 이야기

굴어당 2014. 2. 8.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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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시 한 편(안대회) : 계사유타(溪社遺唾) 이야기

安大會(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台植案 : 이 글은 안 교수가 다산연구소의 ‘실학산책’(제174호. 2010.11.26)에 기고한 글을 바탕으로 한다.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이 글을 접하고는 가슴 한 구석이 찡했거니와, 한데 애초의 기고문에는 문제의 시 1편(아래 본문 파란색 부분)을 안 교수는 소개하지 않았다. 이에 내가 직접 안 교수에게 부탁해 문제의 시편을 넣어서 새로 써 달라고 해서 받은 글이 이것이다. 아울러 위 제목 중 ‘: 계타유사(溪社遺唾) 이야기’는 植이 부친 것임을 밝히노라.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특이한 시집 한 권이 간행되었다. 1815년에 간행된 계사유타(溪社遺唾)란 책이다. 70여장에 이르는 작지 않은 분량의 책이지만 실제로는 한자로 스물여덟 자 밖에 안 되는 작은 절구(絶句) 한 편이 내용의 전부라고 할 만한 책이다. 편찬자는 지덕구(池德龜, 1760~)로 자기 아버지 지도성(池道成, 1738~1761)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시작품 한 편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이 시집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은 그 시의 형식 그대로 아버지의 친척과 친구 스물다섯 명이 써준 40여 편으로 부록처럼 실려 있다. 아버지를 뼈에 사무치게 그리워한 한 남자의 비원이 서린 시집이다.

규장각 서리를 지낸 지덕구는 태어난 지 9개월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나이 24세였다. 형제 하나도 없이 오로지 어머니와 외삼촌만 의지하여 성장한 그는 일찍부터 글솜씨를 보여 규장각 서리로 임명되었다.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한 한을 품은 그는 스무 살에 우연히 아버지 친구인 김시벽을 찾아뵈었다. 그때 뜻밖에도 그분이 “내가 자네 선친과 나이도 같고 친하기도 했는데 사는 곳도 필운대 금교(錦橋) 아래였었네. 자네 선친께서 세상을 뜬지도 벌써 19년 성상이 흘렀군. 자네 생김새를 보니 마치 선친을 보는 듯하네. 선친께선 시를 즐겨서 작품을 지으면 반드시 보여주어 내가 외운 작품이 많았네. 이제는 날이 갈수록 기억력이 감퇴하여 기억나는 게 아무 것도 없네. 오로지 내게 준 시 한 수가 책자 틈에 쓰여 있네.”라며 절구 한 수를 건네주었다. 그 시는 이랬다.  

시냇가의 키 작은 울타리에
찾는 이 없는 초가집은 온종일 그윽하구나.
주역 보는 창문에 드리운 푸른 그늘
오동잎에는 빗소리가 막 그쳤네.

短籬茅屋傍溪頭, 盡日無人坐自幽.
點易窓間沈碧影, 梧桐葉上雨初收.  

고아하고 여유롭고 해맑은 시상이 엄습하는 시이다. 젊어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작품이었다. 시인이 되고자 했던 선친의 시를 보고 감격한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둘도 없는 흔적을 받은 뒤로 26년의 세월 동안 그는 그 작품을 소중히 보관했다. 1804년 어느 날 그는 불현듯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선친의 흔적을 백에 하나도 수습하지 못한 것이 뼈에 사무친 나의 한이다. 요행히 이 하나를 얻었으나 잘못하여 이마저 사라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면 자식된 도리일까?” 그때부터 그는 시를 영구히 지킬 방법을 마련했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똑같은 형식의 시를 지어 간행함으로써 선친이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세상에서 지우지 않는 방법이었다.

우선 자신부터 똑같은 형식의 시를 두 수 짓고 세 아들에게도 짓게 했다. 막내는 너무 어려 8년 뒤인 1812년 열세 살 때에야 겨우 이런 시를 지었다. “우리 아버지 나를 불러 책상 앞에 오라시더니/남은 시편 알리고 싶다고 울면서 말씀하시네./손으로 베끼는 고충을 왜 저버리랴?/세세토록 전하여 잘 보관해야지.” 아이다운 소감과 필치로 아버지의 비원에 공감하는 심경을 담아냈다.

그는 거의 10년 동안 차례로 아버지를 기억하는 친척과 친구를 찾아뵙고 사연을 말씀드리고 시를 얻었다. 모두들 40년 묵은 기억을 더듬어 감회어린 시를 지어주었다. 선친을 그렇게나마 기념하려는 아들의 청탁을 거부할 사람은 없었다. 그에게 감동한 김낙서란 분은 이런 말로 격려도 해주었다. “황금이 있어 자손에게 준다 해도 자손이 꼭 쓴다는 보장이 없고, 이웃에게 맡겼다가 자손이 가져다 쓰게 한다는 것도 나는 못 믿겠네. 그러나 문장은 다르지. 쓰다만 작품이나 편지 쪽지가 길에 버려지면 거지가 본다 해도 꼭 자손에게 돌려주네. 게다가 얻은 사람이 친구인데다 작품이 아주 아름답지 않은가?”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선친이 남긴 짧은 시 한 편을 부둥켜안고 옛 친구를 찾아다니는 지덕구가 한편으로는 대견하면서도 연민의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지덕구는 그렇게 모은 작품을 온갖 정성을 기울여 직접 필사했다. 첫 머리에는 아버지의 시를 본래의 모습 그대로 새겼다. 그는 간행을 서둘렀는데 여기에는 또 그럴만한 의미가 있었다. 아버지가 시를 쓴 을해년(1755)의 60주년이 되는 을해년(1815)에 맞추고 싶었다. 하나 남은 작품이 얼마나 소중했으면 그리 했을까 연민의 감정이 든다. 그래서 이 시집은 을해년에 빛을 보게 되었다. 시를 처음 받은 지 36년만이고, 간행을 마음먹은 지 10년만의 일이었다.

이 시집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책으로 손꼽힌다. 편집자의 정성이 묻어나는 책이다. 하지만 한 편의 시를 가지고 이렇게 풍성하고 멋진 책을 만든 것이 부담되었던 것일까? 책의 마지막에서 “이 책을 보는 분들이 제 마음을 불쌍히 여길 뿐 사치하고 과장했다고 꾸짖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 책이 관심거리가 아니라 책을 만든 지덕구의 그리움이 곳곳에 묻어난다.

한편, 이 책에는 부록이 달려 있다. 외삼촌 조우방이 77세 때인 1805년에 쓴 시를 아버지의 시처럼 똑같이 친필로 새겨 만들고 이유를 설명했다. 시의 끝구절에서는 “아버지처럼 나를 모시며 지극한 정성 바친다.”라고 조카인 지덕구를 칭찬했다. 아버지를 잃은 자신을 자식처럼 키워준 외삼촌을 그는 아버지처럼 모셨던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