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의 품격
선비의 삶과 사상을 담은 한시를 독자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앞장서온 강원대 김풍기 교수가 『한시의 품격』을 출간했다. 조선시대 주류 문화인 한시를 본격적으로 다루며, 그 속에서 조선 지식인 사회와 문화를 읽어낸다. 저자는 한시를 양반만의 전유물로 바라보지 않는다. 사대부의 시뿐만 아니라 속세를 벗어난 승려의 시 그리고 신분적 불평등을 문학으로 승화한 중인들의 작품까지 폭넓게 살핀다. 좋은 시작품을 읽는 가운데 자연스레 그 안에 깃든 ‘옛사람이 시를 보는 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들이 읊은 한시의 세계가 오늘날 우리 삶의 풍경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하려는 의도다.
목차
제1부 양반부터 중인까지, 그들은 왜 한시를 짓는가
조선 시인의 자존심, 조선 시인의 힘 ∥ 시 귀신이 돌아다니던 시대 ∥ 여성부터 스님까지, 삶을 닮은 시 ∥ 시절이 태평하니 시인이 넘치네 ∥ 천지의 정기 받아 시를 쓰다 ∥ 새로운 시의 가능성 ∥ 변두리 지식인, 시를 쓰다 ∥ 개성과 격조 사이에서
제2부 대필작가부터 표절시비까지, 명문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좋은 글을 탐하다 ∥ 표절과 창조, 그 미묘한 차이 ∥ 그림 속의 시, 시 속의 그림 ∥ 한시 속에 스민 음악 ∥ 좋은 글을 탐하다 ∥ 표절과 창조, 그 미묘한 차이 ∥ 그림 속의 시, 시 속의 그림 ∥ 한시 속에 스민 음악
제3부 인상비평부터 원류비평까지, 무엇으로 한시의 품격을 논하는가
음식의 맛, 작품의 맛 ∥ 인상비평을 위한 변명 ∥ 불평의 시학, 화평의 시학 ∥ 글쓰기 권력과 정전(正典)의 확립 ∥ 작품에 드리운 옛 사람의 그림자
조선 지식인에게 한시란,
풍류의 한 자락이 아닌 삶의 전부였다
선비의 삶과 사상을 담은 한시를 독자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앞장서온 강원대 김풍기 교수가 『한시의 품격』을 출간했다. 조선시대 주류 문화인 한시를 본격적으로 다루며, 그 속에서 조선 지식인 사회와 문화를 읽어낸다. 저자는 한시를 양반만의 전유물로 바라보지 않는다. 사대부의 시뿐만 아니라 속세를 벗어난 승려의 시 그리고 신분적 불평등을 문학으로 승화한 중인들의 작품까지 폭넓게 살핀다. 좋은 시작품을 읽는 가운데 자연스레 그 안에 깃든 ‘옛사람이 시를 보는 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들이 읊은 한시의 세계가 오늘날 우리 삶의 풍경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하려는 의도다.
김 교수는 한시가 조선 지식인 사회를 비추는 맑은 거울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고상한 듯 보이는 한시의 세계뿐만 아니라 한시와 더불어 살아가던 이들이 일으키는 잡음까지 포착해서 생생하게 들려준다. 옛것을 인용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문화에서 표절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자존심을 건 문인들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는지, 날선 비평의 세계에서 한시가 어떻게 살아남아 전해지는지 등 조선 지식인 문화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서슴없이 들춘다. 좋은 한시를 소개하는 책은 많지만, 어떻게 해서 그 작품들이 오래도록 남아 전해지는지 알려주는 책은 드물다. 그 배경과 과정을 찾기 어려워하는 독자들에게 『한시의 품격』은 좋은 길잡이 책이 될 것이다.
한편 시로 술을 얻고, 권력을 얻는다
: 양반의 시론, 중인의 시론
10대의 어린 총각부터 70대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함께 어울려서 답안지를 쓰고 마음 졸이며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는 것은 과거시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렇듯 입신양명을 꿈꾸며 관직에 나아갈 때도, 모든 명예를 버리고 초야에 묻힐 때도 그들 곁에는 언제나 한시가 함께했다. 그러다보니 한시에 얽힌 믿기 힘든 일이 전해지기도 한다. 시 귀신에 얽힌 이야기가 대표적인데, 글자 한 자 모르는 시골 선비가 어느날 뛰어난 시를 짓게 된다거나,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에게 귀신이 답을 알려준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본문 28~45면 ‘시 귀신이 돌아다니던 시대’ 참조). 저자는 이를 중세 지식인을 옭아맨 관직 진출에 대한 부담감이 시문(詩文)의 신비스러운 성격을 강화시킨 결과라고 해석한다.
사실 한시는 선비에겐 지식의 감옥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대부 커뮤니티에 끼기 위해서도 한시를 짓는 능력은 반드시 필요했다. 허름한 행색의 선비가 좋은 시구 하나로 상석에 앉아 명주를 얻어먹는 일화는 수두룩하다. 이렇듯 저자는 선비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한시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좋은 한시 작품을 소개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일견 어려워 보이는 시운론(時運論), 천기론(天氣論), 성령론(性靈論) 등의 문학이론을 깊이 있게 다루는 이유다. 하지만 그 핵심을 설명할 때에는 서거정, 이규보, 허균 등의 문집에 실린 글과 시작품을 직접 인용해 옛사람의 생각을 직접 대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예를 들어 중인의 성장을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당대의 뛰어난 중인 출신 시인인 홍세태의 「좋은 비」(본문 106면 참조)를 직접 들려주고, 시운론을 말하면서는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원대의 기상을 품은 시(본문 81면 참조)와, 또 이를 받아 태평성대를 노래한 정도전의 시(본문 72면 참조)를 소개하는 식이다. 천기론을 설명하면서는 천기누설에 얽힌 이덕형의 일화(본문 86~88면 참조)나 권필의 「큰바람」 같은 작품(본문 98면 참조)을 꺼내 든다. 옛사람의 일화와 옛시를 읽는 가운데 자연스레 그 안에 깃든 문학이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새로운 시 창작 집단인 중인계층에 대한 설명이다. 양반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사회에서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돈을 벌어서 생계를 유지하거나 벼슬자리 하나 얻을 수 없는 불필요한 지식을 습득한 이들로서 갈등을 겪었다. 이들은 천기론을 재해석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굳힌다. 성리학적 수양을 통해 올바름에 도달해야 하며, 이것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시라고 하는 양반에 맞서 본연의 순수함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 시라는 견해를 밝힌 것이다. 문학이론의 재해석은 궁노(宮奴) 출신의 최기남, 역관(譯官) 출신의 홍세태 등이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참된 시문의 절대적인 기준이 없어지고 작가의 개성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게 된 것이다(본문 84~100면 ‘새로운 시의 가능성’ 참조).
권력을 쥐려는 자, 시를 써라
: 조선시대의 표절, 그림자 작가
조선시대는 시를 짓는 능력 자체가 권력을 쥐는 열쇠인 시대였다. 그런 까닭에 과거를 준비하는 이들은 모두 시를 짓는 방법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 시를 써야 한다거나, 한자 자체의 소리와 높낮이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거나, 작품의 구성과 글자의 배치를 섬세하게 배려해 깊은 뜻을 숨겨놓아야 한다는 식의 한시 작법론은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많이 읽고[多讀], 많이 써보고[多作], 많이 생각하라[多商量]”라는 말은 가장 널리 알려진 비법이었다.
때론 그 비결을 대대로 전하기도 했다. 대학자 정약용은 그의 아들에게 “전혀 용사(用事, 옛이야기를 인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작시 방법)를 하지 않고 바람과 달을 읊조리거나 바둑과 술 이야기를 한다면 진실로 압운을 하는 것에 능숙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는 궁벽한 시골훈장의 시작품이다”라는 엄정한 말로 아들에게 시 작법을 전하기도 했다(본문 140면 참조). 집 떠난 괴로움이 시격(詩格)을 높인다는 생각도 일반적이었다. 허균은 조선 후기 관료문인들 사이에서 아계 이산해의 시작품을 으뜸으로 꼽는데, 늙어서 평해로 귀양을 가면서 작품의 수준이 극치에 이르렀다고 평가한다. 즉 문장은 부귀영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겪으면서 강산의 도움을 받은 뒤에라야 신묘한 경제 들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본문 198~207면 ‘일상과 비일상 사이에서 서성거리기’ 참조).
하지만 조선의 선비들이 모두 이같이 올곧은 방법으로 작품활동에 매진한 것만은 아니다. 글이 하나의 권력인 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표절의 유혹에 직면하게 마련인데, 그 양상은 오늘날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아예 표절과 창조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하기 수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화장을 해서 아름답게 꾸민다는 의미의 장점(粧點)이나 이미 존재하는 작품들의 생각과 표현을 활용하여 나만의 독특한 풍격을 만들어내는 환골탈태법(換骨奪胎法)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수법이 가지는 치명적 문제점인 표절시비를 의식해 글자만 슬쩍 바꾸기만 하는 것을 도습(蹈襲), 즉 훔치는 것으로 보고 경계의 뜻을 비치기도 한다. 때로는 권력자가 대작(大作)이라는 관행을 빌미 삼아 남의 작품을 자신의 것인 양 내놓기도 했다. 일례로 영의정 유영경은 중국의 사신들 사이에서 “동방 최고의 문장”이라는 칭송을 받았는데, 그 작품은 모두 당시 동지중추사로 있던 최립의 작품이었다. 최립 자신이 이미 당대에 8문장가로 꼽힐 만큼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었음에도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 대신 문장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본문 144~58면 ‘표절과 창조, 그 미묘한 차이’ 참조).
“시를 알아보는 것은 시를 짓는 것보다 어렵다”(홍만종)
: 맛으로 평하고, 인상으로 평하고
당대인에게 한시란 그저 난해하고 어려운 것만은 아니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즐겨하는 오락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열기도 하고, 뛰어난 작품은 여러 사람의 입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품평하기도 했다. 경연 프로그램에서 참가자의 실력을 음식 맛으로 비유하듯, 한시를 품평하는 가장 흔한 방법 역시 음식 맛에 비유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남북조시대에 활동했던 종영이다. 그는 사건의 서술, 사물의 상세한 묘사, 인간 감정의 진솔한 표현 등이 잘 어우러져서 작품에 녹아 있을 때 그 작품을 ‘좋은 맛[滋味]’을 지닌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같은 종영의 문학론을 ‘자미설(滋味說)’이라고 한다. 시작품을 맛에 비유했다고 해서 ‘시미설(詩味說)’이라고도 한다. 조선에서는 허균이 맛으로 문학론의 얼개를 만든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한대(漢代) 이전의 작품만을 최고로 여기는 이들을 “대궐 푸줏간의 쇠고기며 표범의 태와 곰 발바닥 등을 맛보고 나서 스스로 천하의 음식을 다 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평하며, 일상의 음식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굶어죽기 십상이라고 지적한다(본문 239~49 ‘음식의 맛, 작품의 맛’ 참조).
작품만이 아니라 작가 자체를 짧은 평어(評語)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를 인상비평이라고 한다. 예컨대 김종직은 경걸(勁傑, 굳세고 호걸스러움), 임억령은 비동(飛動, 날아올라 약동함), 이달은 고절(孤絶, 외롭기 그지없음) 등으로 요약하는 것이다. 인상비평이 가능한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시대에도 좋은 작가란 일정한 수준 이하의 작품을 쓰지 않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본문 250~60 ‘인상비평을 위한 변명’ 참조). 혹은 누구의 시 정신을 계승했느냐를 따져 “소동파를 배웠으므로 반듯하고 충실하며” “이태백의 시어를 체득하여 기세가 있었다” 하는 식으로 평하는 원류비평도 애용되었다(본문 284~298 ‘작품에 드리운 옛사람의 그림자’ 참조).
김풍기 교수는 고전문학론 혹은 고전비평론이라 불리는 학계의 연구경향과 한시를 이해하려는 독자들의 바람이 결코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학계의 이론은 사실 옛사람들이 문학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론화하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한시의 품격』은 옛사람들이 한시를 대하는 시선을 따라가며 한시를 감상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일종의 안내서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한시론, 한시작법, 한시비평론이라는 어려운 이름에서 벗어나 한시 자체에 주목하며 ‘한시의 품격’과 그 속에 깊이 밴 ‘선비 문화’를 이해하는 안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정도전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나라의 기틀을 만든 주역이다. 그의 문집에 의하면 이 작품은 경복궁을 새로 짓고 나서 군신들이 모여 잔치를 하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에 걸맞게 사용된 단어나 비유가 다분히 공식적이면서도 화려하다. 꽃이 활짝 핀 깊은 봄날 궁궐의 잔치, 상 위의 금빛 술동이를 의미하는 금준(金尊) 등은 화려한 느낌을 한껏 드러낸다. (…) 시대를 만나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된 이들에게 삶이란 얼마나 풍요롭고 여유 넘치는 것인가. 시운은 언제나 그들 편이다. 권력의 편에서 느긋한 마음으로 문학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시운이란 좋은 작가와 작품을 만들어주는 최상의 환경이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문학론으로서의 시운론은 기득권을 옹호하는 논리로 이용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 본문 73면
중국의 사신은 영의정 유영경의 문장을 읽을 때면 매번 감탄하면서 “동방 최고의 문장”이라고 칭탄했다. 그러나 유영경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글들은 당시 동지중추사(同知中樞使)로 있던 최립의 작품이었다. 중국 사신들이 왔을 때 주고받은 시문을 모아놓은 『황화집(皇華集)』이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에 수록된 유영경의 작품은 모두 최립이 대신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 근대 이전에도 표절은 여전히 논란거리였다. 남의 나라 글자, 그것도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한자를 가지고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더욱이 한문을 배우는 과정에서 과거의 뛰어난 문장가의 글을 전범으로 익히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글을 모방하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표절의 경계를 오락가락하게 되었다. ― 본문 148~49면
율곡은 시를 읽고 매우 칭찬을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시가 좋기는 한데, 마지막 구절에 무언가 평온치 못한 뜻이 있는 건 무슨 까닭이오” 홍적이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율곡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꽃이 바람에 불려서 들쭉날쭉 가지런하지 못한 뜻이 있습니다. 만약 마음속이 평온했다면 필시 이런 시어들이 들어갈 일이 없겠지요.” 그러자 홍적이 웃으며 사례하였다. “사실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공(公)을 탄핵하려는 마음이 있는 걸 보고 글을 좀 쓰다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연히 이 시를 지었습니다. 시를 알아보는 밝은 눈[明鑑]이 이 정도이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 임경은 이 이야기를 기록한 뒤 끝부분에 “시가 사람의 성정(性情)을 감동시켜서 펼쳐내는 것이 이와 같다”라고 평을 덧붙였다. ― 본문 261~6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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