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의 벼루는 모두 나의 예술품"
벼루에 예술의 혼을 새겨 넣다
- 보령남포벼루제작 충남 무형문화재 6호 명장 서암(書巖) 김진한(金鎭漢)
옛 선비들에게는 필수품이였던 문방사우 중 하나인 벼루. 이제는 전통생활용품으로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골동품이 되어 우리 생활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찾는 사람이 없으니 만드는 사람도 사라지고 그 기술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꿋꿋이 소중한 우리 정통 벼루를 만들어 가는 명인들이 있기에 우리는 아직까지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접할 수 있다.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에는 사라져가는 남포벼루의 맥을 잇는 김진한 명장(69)을 만날 수 있다. 그에게 듣는 남포벼루와 그의 삶은 어떨까.
반세기의 기술과 장인정신
“나는 3대째예요. 3대째.”
명인의 입에서 나오는 첫마디였다. 그 첫마디에는 3대를 잇는 장인기술에 대한 그만큼의 자부심이 담겨있으리라. 현재의 남포벼루는 갑작스레 만들어진 것이 아닌 3대의 기술이 단련되어 탄생된 체계화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조선말기 김진한의 조부인 김형수 장인이 남포벼루 제작기법을 터득하였고, 정식 인간문화재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에 이미남포벼루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로 인정받을 정도의 조각 솜씨를 지녔던 2대 김갑용 장인이 대를 이어 기법을 체계화 하였다. 현재 3대 김진한 장인은 충남 무형문화재 6호로 인정받아 100년의 장인기술을 쌓아가고 있다.
“누님 한분은 대천에 계시고 4형제가 다 미국으로 이민 갔어. 6남매 중에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가는 사람은 나 혼자야. 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하시는 일에 유독 관심도 많았고 좋아했다고. 하기 싫으면 못 하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의 공방에 들락거리며 물건들을 망가뜨려 혼났던 추억들을 꺼내시고는 과거를 회상하며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담겨졌다. 그러나 그 미소도 잠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이야기하며 표정은 담담해져만 갔다.
“내가 어렸을 때는 6.25사변이 한창이었어. 그 때는 의식주가 어려운 시기 아니야. 먹고 사는게 어려운 시기. 어머니는 반대하셨어. 아들이 반질거리는 옷 입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길 원하셨지. 그런데 허구언날 공장에서 돌이나 깎고 있으니 맘이 많이 상하셨을 거야. 그래도 내가 좋아했기 때문에 여태 해온 것이지.”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벼루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해 성주산에 오르내리며 좋은 벼룻돌을 구분하는 감각을 익혔고 여기에 그가 스스로 익힌 독창성 있는 조각 솜씨까지 더해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남포벼루가 탄생한다.
과거부터 인정 받아온 명품 벼루, 남포벼루
< 서암 김진한의 작품들 >
남포벼루라는 이름은 현재 청라면의 일대가 옛 남포면에 포함되어 이곳에서만 났던 남포석을 가지고 벼루를 만드는데 기원한다. 벼루의 가치를 따지는 사람들은 유난히 남포벼루를 외친다. 전국 생산량의 80~90%를 차지하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남포석으로 만든 벼루는 그 품질이 다른 벼루에 비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남포석의 석질을 상, 중, 하로 나눈다면 그 중에서 백운상석을 최상품으로 치고 중석과 하석이 그 아래이다. 백운상석은 웅천면 성주산 백운사 일대에서 많이 나와 붙여진 이름으로 검은 바탕에 흰구름 모양이 퍼져있고 단단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을 비롯하여 서유구와 성해응 등 조선시대 여러 학자들이 남긴 문헌에도 우수성이 기록돼 있다. 또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들이 선물로 벼루를 요구했음이 <조선왕족실록>에 기록돼 있으며 보물 547호인 추사 김정희의 벼루 세 개 중 두 개가 남포벼루일 정도로 남포벼루는 그 품질을 과거부터 인정받아 왔다.
“좋은 벼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단하고 질 좋은 돌을 고르는게 우선이야. 돌을 속이지 않는 것이 우선이지.”
그는 채석장에서 직접 돌을 채취해 와서 직접 최상의 돌들을 가린다. 이렇게 가리어진 커다란 돌들은 세로로 잘리어 판판하게 만들고 벼루 크기와 모양을 다듬는다. 다듬은 돌 위에 밑그림을 그리고 세밀하게 일일이 조각하고 연마석으로 벼루 바닥을 마무리 하면 남포벼루가 탄생한다. 남포석 옛벼루에 새겨진 조각은 벼루의 수가 워낙 방대하므로 조각의 다양성도 거의 모든 유형을 망라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런만큼 남포벼루에 새겨진 조각의 문양은 한 지방의 특색이거나 단순한 공예의 차원을 넘어서 한국미술의 원형질 내지는 생활정서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 새로 찾아낸 벼룻돌 백운상석에서 석난연을 가리키고 있다 >
“지금은 찾는 사람이 없어서 만드는 사람이 없지만 예전에는 서로 경쟁하느라 중석이나 하석같은 값싼 돌로 남포벼루라고 만들어서 내보냈다고. 애초에 특산물도 그런 벼루를 하지 말았어야 되는데. 그래서 가끔 남포벼루에 실망했다면서 나를 찾아와서 따지는 사람들이 많아. 보면 다 중석이나 하석으로 만든거지. 그럼 내가 만든 벼루 주고 가서 써보고 맘에 안 들면 다시 가져오라고 해. 나는 지금까지 두말 않고 다 물러줘. 내가 만든건 아니지만. 이런걸로 남포벼루 이미지가 한번 망가지면 되돌리기 힘드니까.”
모두가 생산성을 위해서 중석, 하석과 같은 질이 좋지 않은 돌로 하루에도 수십개를 만들어 남포벼루의 명찰을 달고 세상에 내비칠 때 그 부끄러움에 자신은 보령 성주산의 백운상석으로 만든 최고급의 벼루만을 고집한다는 명인. 모두가 수익성만 따질 때 가보로 이어질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진정한 명인이 될 수 있다며 그 근본을 중히 여기셨다. 최고의 벼루를 위해서는 돌을 속이지 말아야 하듯 최고의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속이지 않는 바탕이 바로 잡혀야 한다는 것이 명인의 말이다.
생계수단이 아닌 나의 길, 60년 벼루장의 길
< 작업중인 김진한 명장 >
지금의 명장에 자리에 서기까지 벼루와의 인연을 이어 온지 60년이 되어가는 장인. 무형문화재를 비롯하여 석공예 분야 대한민국 명장의 이름표를 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의 일생을 전부 벼루에 바쳤기 때문이다. 그는 의식주가 급했던 시절에도 가업을 이어가야한다는 사명감과 함께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벼루 만들기는 멈출 수가 없었다.
“자기가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또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발굴해내는 것,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인생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행복한 사람으로 봐. 난.”
지금 우리 주위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는 사람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이러한 물질만능주의 시대 속에서 그의 정신은 세상을 향해 일침을 가하는 목소리와 같았다.
“내가 홍성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벼루 만드는 것을 가르치면서 하나에 집중해서 작품을 만들라고 해도 수당만 따져서 몇 개를 만드는지 몰라. 내가 용을 5~7일 걸려 만드는 것을 이 사람들은 하루에 3~4개 만드는 거야. 그러면 용대가리도 아니고 말대가리도 아니고 개판이라구. 그런 욕심은 아무 소용없다고. 작품에 대한 것은 자기가 만들어가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멋있게 하려고 하는, 이런 생각이 돼야하는데 오늘 돈벌이로 오늘 5개는 만들어야겠다하고 밤일까지 하면 소용이 없는거야. ”
김진한 장인의 손은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혀있고 손톱은 피멍이 든 까맣고 못난 손이였다. 그가 이러한 못난 손으로 만든 벼루는 지금까지 수만점이 넘는다. 일일이 정이나 끌, 망치 등으로 깎고 새겨서 만든 각연(무늬를 넣어 조각한 벼루)만 1만여점에 달한다.
“역대 대통령들 벼루는 내가 다 만들었어. 박정희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내가 산에서 직접 캔 백운상석에 수백번의 칼질에 내 손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라 다 소중하지. 돈을 떠나서. 작품을 만들 때 거기에 빠져들면 하루가 금방 가.”
장인의 손끝을 따라 끌이 움직이면서 학의 날개가 꿈틀거리고 용이 하늘로 춤을 추며 치솟고 새가 매화 위로 날아든다. 손을 조금만 잘못 그려도 죽은 동물이 되어 버려서 명인은 그의 작품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다해 조각을 한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듯 완상의 즐거움이 있는 그의 벼루는 그 품질까지 뛰어나 한국을 뛰어 넘어 해외에서도 그의 벼루를 찾는다.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천주교 측의 요청으로 지구 형상을 담은 둥근 형태의 벼루를 만들기도 했고 이번년도에는 일본 수상에게 선물로 건네는 벼루로 직접 제작했다 한다. 좋은 돌과 거친 칼 그리고 못난 손이 만나서 만들어진 그의 작품은 특일품의 벼루로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돈 많이 버는 친구들도 있고 교육계통의 친구들도 많아. 그런데 사람이라는게 다 그런게 있어. 누구는 잘나가고 돈에 대한 욕심은 다 있겠지만 나는 내가 갈 길이 이거고 이걸로 남이 펼쳐내지 못 한걸 개척해 내야겠다는 그런 욕심. 누가 어떻게 됐고 얼마나 버는지 이런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돌을 만드는 예술세계를 더 멋있게 발전하고 성화시켜서 돌을 속이지 않고 최고의 벼루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양심껏 만들어서 후대에 ‘김진한이란 사람은 벼루를 진짜 좋은 돌로 해서 여럿에게 보급해줬다.’ 이런 소릴 듣고 싶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있다. 그의 벼루인생이 끝나도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몇 백년, 몇 천년 후까지 길게 남겨질 것이다. 최고의 벼루, 명품 벼루로써.
끝나지 않은 도전 속에서 걷는 벼루 인생
< 자신의 작품을 어루만지는 김진한 장인 >
"아직도 내 생애에 가장 완벽한 벼루는 못 만들었어. 갈수록 눈만 높아져서 성에 안 차지."
아직까지도 최고의 명장으로 거듭나기 위한 욕심에 미술을 배워보고 싶다는 모습을 보며 배움의 끝이 없다는 말을 되새겨 보았다. 명인의 꿈은 단순히 최고의 벼루를 만들어내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1989년 설립한 전통한국연개발원에서 고연(古硯) 재현과 현대벼루 개발에 몰두하는 한편 도비와 시비 지원을 받아 작업장 옆에 벼루 전시관과 체험장을 짓고 있다.
“지금 벼루박물관을 설립하는게 가장 큰 계획이자 목표야. 창덕궁에 가보면 벼루 한두점밖에 없다고. 부여박물관에도 옛날 흙으로 만든거 몇 점 밖에 없잖아. 우리나라 전체 벼루를 재현해서 한눈에 보고 체험할 수 있는 한국벼루박물관을 개관하고 싶어. 한 1000여점이상 해서. 건물은 지어놨으니까 작품 만들기에 총력을 다 하려고.”
김진한 장인은 벼루 제작기술을 당장 대물림하기보다 앞으로 자신의 평생의 역작을 남기기 위해 도전하려는 뜻이 더 커 보였다. 남포벼루의 맥을 잇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으나 대부분이 단단한 돌과 거친 칼을 다루는 것이 힘들어 금방 그만둔다고 한다.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야 익숙해지고 숙달되는 것은 빨리 하려다보니 안 되는 것이라며 요즘 사람들은 인내심이 부족하다며 한숨을 내쉬는 장인의 얼굴에는 금방 그늘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가 남포벼루를 알리기 위해 '벼루 만들기 체험교실'을 운영하고 벼루전시관과 체험장을 건립하는데 주력하는 것은 남포벼루의 맥을 잇는 또다른 방법이 아닐까.
“사회가 급변하니까 서예도 점점 쇠퇴해요. 어린 학생들이 정서적인 교육을 못 받고 크는 게 가장 아쉬워요. 한자 공부를 시키지 않은 것도 그렇고.”
전통문화에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벼루에 대한 걱정을 벗어나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걱정을 내비치는 김진한 장인의 모습은 진정한 장인의 모습이었다. 그가 ‘벼루 만들기 체험교실’을 운영하는 것도 단순히 남포벼루 알리기를 떠나 서예교육을 되살려 예절과 인성교육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도 담겨있다.
“벼루는 단순히 먹을 가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소박한 정서와 순수함, 선인들의 생활이 담겨 있는 유산이야.”
그가 만드는 것은 벼루지만 그 속에는 선조들의 삶과 역사가 살아있고 민족의 혼이 담겨져 있었다. 벼루장을 비롯한 전통공예를 하는 모든 이들이 힘든 현실 속에서도 손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 자부심과 긍지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전통공예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이 과연 그들만의 몫일까?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을 지키고 알리는 것 역시 우리 모두의 몫이다. 모두가 전통공예의 맥이 끊어졌다고 말만 할뿐 진정으로 이를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김진한 장인은 오늘도 작업실 한쪽에서 조각도를 잡고 우리 전통을 잇고 있다. 우리가 만난 김진한 장인은 벼루를 위해 온 일생을 바치고 한국의 전통문화를 걱정하는 진정한 명장이었다.
▲ 문화재청 블로그 기자단 박여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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