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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유교에서 인민의 유교로 가는 길목, 공교(孔敎)

굴어당 2015. 10. 1. 09:01

제왕의 유교에서 인민의 유교로 가는 길목, 공교(孔敎)


 儒敎는 哲學인가? 아니면 宗敎인가? 儒敎에는 仁義와 心性이 있으니 哲學이라 할 수도 있겠고 예(禮)와 악(樂)이 있으니 宗敎라 할 수도 있겠다. 哲學科에서도 宗敎學科에서도 儒敎를 공부할 수 있으니 둘 다 옳지 않을까? 그러면, 孔子는 哲學者인가? 아니면 宗敎家인가? 《論語》에서 만나는 孔子는, 特히 《論語集註》에서 만나는 孔子는 아무래도 哲學者에 가깝지 宗敎家는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권도용(權道鎔)은 孔子는 哲學者가 아니라 宗敎家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아! 공자는 만세토록 인도(人道)의 종주이다. 그 가르침이 충분히 천지의 질서가 되고 우주를 포괄할 만하니 백성이 있었던 이래 누구도 이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 공자의 도를 알았던 사람은 당시에 안자(顔子) 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 밖에는 오직 자사자(子思子)가 이를 알았다. 그 말에 “중니(仲尼)는 위로 천시(天時)를 본받고 아래로 수토(水土)를 이어서 명성이 중국에 양양하였고 만맥(蠻貊)에도 미쳤으니 배와 수레가 이르는 곳마다 사람의 힘이 통하는 곳마다 해와 달이 비추는 곳마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마다 무릇 혈기가 있는 것은 존경하고 친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 때문에 하늘과 짝을 이룬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그 밖에는 오직 장생(莊生)이 이를 알았다. 그 말에 “옛사람은 천지와 짝하고 만물을 기르고 상하를 화합하여 근본을 밝히고 말단에 관계하여 위아래 사방과 네 계절과 크고 작은 일과 정밀하고 조악한 일에 어디에든 그 운이 있지 아니함이 없으니 안으로 성인(聖人)이 되고 밖으로 왕자(王者)가 되는 학문이다.”라고 하였다. 지극하구나, 이 말이여! 이를 넘어설 수 없겠다.


  지금 유럽과 미국 사람들은 공자를 종교가가 아니라고 하지만 종교라고 하는 것은 세계에서 익숙하게 쓰는 말이니 자기가 말하는 종교와 같아야 종교인 것은 아니다. 또, 공자를 겨우 철학자라고 하는데 모두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세상의 유자는 육경(六經)을 읽어도 반드시 성인을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 이른바 가지는 보아도 뿌리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시험 삼아 육경의 큰 뜻을 논해 보겠다. 이를테면 《역(易)》의 궁변(窮變)은 알맞게 변통하여 장구하고 거대한 기업(基業)을 만드는 것이고, 《시(詩)》의 유신(維新)은 선정을 베풀고 천시에 순종하여 낡은 것을 미루어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고, 《서(書)》의 집중(執中)은 정일(精一)을 구하기를 힘써서 백성에게 중(中)을 사용하는 것이고, 《춘추(春秋)》의 삼세(三世)는 진화(進化)의 공례를 밝혀서 지치(至治)의 세상을 보게 하는 것이고, 《예기(禮記)》의 대동(大同)은 천하에 공(公)이 실현되어 어질고 장수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고, 《논어(論語)》의 손익(損益)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추측하여 만세토록 폐단이 없는 정책을 만드는 것이다. 이 모두 공자가 천지의 질서가 되고 우주를 포괄하는 까닭이다.


  이로써 보건대 공자의 가르침은 충분히 만세의 법도가 되고도 남음이 있지 아니한가? 참으로 그 큰 뜻을 모른다면 공자의 가르침이 오늘날에 적합하지 않아 미루면 궁함이 있는 듯이 보일 것이다. 우리 유자도 그런데 하물며 유럽과 미국 사람은 어떻겠는가? 다만, 요즈음 독일 사람이 교주만(膠州灣)을 점령하고는 “중국이 공자의 육경에 중독되어 세계에서 가장 빈약하고 무능한 나라가 되었다”고 확언하고 야만으로 지목하니 무엇 때문인가? 송(宋)나라 가정(嘉定, 1208~1224) 이후 유자가 공교(孔敎)의 큰 뜻을 밝게 선포하지 못하고 편안하게 할거하여 한갓 실제 쓸모도 없고 결론도 나지 않을 성명이기(性命理氣) 등의 학설에 힘써서 기치를 높이 세우고 순전히 헛된 명성을 훔쳤기 때문이다. 대개 오천 년 문명의 땅이 오늘날 윤리가 무너지고 강토가 침식되어 힘 없이 설설 기며 거의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공교의 효과가 본디 이렇다고 인식하는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은가.


  누군가는 말하리라. “세계에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모두 미신에서 발생하여 의례가 이루어져 허무로 귀착하는 것으로 결국엔 다시 정치와 분리되었다. 공자의 도는 하늘의 드러난 도와 백성을 공경함에 근본하여 예악형정(禮樂刑政)을 제정하니 문물전장이 해와 별처럼 밝게 빛나 만세토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잡교(雜敎)와 더불어 종교라고 병칭한다면 성인이 심하게 굴욕을 받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대답하겠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같아도 종교가 되는 까닭이 다른 것이다. 공자는 대개 ‘밝은 임금이 나타나지 않으면 천하에 누가 나를 종(宗)으로 삼겠는가’ 하였는데, 여기서 종(宗)으로 삼는다는 것은 높인다는 말이니 자신의 도를 높이는 것을 말한다. 자사(子思)는 말하기를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공자의 도가 역시 종교(宗敎)라고 부를 수 있는 까닭이다. 하물며 근세 중화민국의 대총통이 공자를 높여 호천(昊天) 상제(上帝)에 배향하고 이어서 공교를 국교로 삼았음은 세계에서 공인한 사실이 아니던가!”


  만약 육경(六經)의 큰 뜻을 한 두 마디로 다하기 어렵다면, 이 뜻은 남해(南海) 강선생(康先生 강유위(康有爲))이 창명하고 박사(博士) 진중원(陳重遠 진환장(陳煥章))이 이어 받아 참으로 중국에 만 길의 빛나는 불꽃을 발산하고 있다. 근래 다시 세계종교평화대회에서 강연이 있었으니 서쪽 대륙의 선비는 생각건대 능히 그 요령을 얻었다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유자는 모름지기 이 점에 대해 발휘하여 발란반정(撥亂反正)의 입지로 삼아 공교 교과서를 편찬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진상을 명시한 후에야 전 지구의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똑같이 존경하고 다른 말이 없을 것이며, 이에 성인의 신령한 교화가 크게 행해지고 성인의 후손의 말이 부절을 합한 듯 들어맞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권도용(權道鎔),「공교범위만세론(孔敎範圍萬世論)」,『추범문원전집(秋帆文苑全集)』


▶ 권도용의 《추문문원원집(秋帆文苑原集)》(국립중앙도서관 제공)


해설


1988년 어느 일간지를 보면 “민중유교는 유교의 민중화를 선언한다.”로 시작하는 작은 글과 만난다. 그 글에는 요순(堯舜)의 제왕 유교를 극복하고 민주공화의 체제로 전환하자는 주장, 탕무(湯武)의 관료 유교를 극복하고 민중자치로 전환하자는 주장, 유교의 사랑ㆍ정의ㆍ예절ㆍ지혜를 통해서 새로운 도덕을 확립해 화평세계를 건설하자는 주장 등이 담겨 있다. 민중유교라는 말은 낯설지만 민중이라는 말이 홍수처럼 유행하던 시기에 나온 말이니 그렇게 이상한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이 주장을 가만이 듣노라면 마치 1909년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한 박은식의 주장이 약 80년 후에 다시 변주되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롭다.


   박은식은 유교구신론에서 한국 유교계의 삼대 문제점을 거론하고 그것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였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바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유교 내용을 전환하자는 논의는 그저 세 번째 항목으로 거론된 것이었고, 정작 첫 번째 항목으로 거론된 것은 다름 아니라 제왕의 유교에서 인민의 유교로 유교의 정신을 변통하여 민지(民智)를 개발하고 민권(民權)을 신장하자는 것이었다. 제왕의 유교에서 인민의 유교로! 역사의 운회가 민권시대로 접어들었으니 민권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인도(人道)를 창조할 막중한 책임이 유교에 있다는 생각이었다. 


    1988년에도 제왕의 유교를 극복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마당인데 1909년 당시 수천 년간 왕정 시대를 살아 왔던 사람들에게 그것이 과연 어떤 파장을 미쳤을까 싶지만 비록 일제의 탄압으로 단명했다 할지라도 중국에서 공교(孔敎)가 정착하기 전에 한국에서 조금 먼저 대동교(大同敎)가 창도되어 유교 종교화 운동이 추진된 것은 뜻 깊은 일이었다고 하겠다.


   종교라는 제도를 통해 제왕의 유교에서 탈피하여 인민의 유교를 수립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뒤를 이어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공교운동이 전개되었다. 금문경학에 입각한 새로운 교리서, 민립(!) 문묘가 갖추어진 강학 건물, 조선 공교운동의 제일인자 이병헌(李炳憲)은 한국 공교의 메카 배산서당(培山書堂)에서 향교 유교를 넘어 교회 유교를 부르짖었다.


   권도용 역시 유교가 다른 ‘잡교’와 병칭되는 것을 무릅쓰고서라도 종교 제도로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천하의 유교, 만세(萬世)의 유교로 거듭나기를 희구하였다. 이병헌은 박은식을 추종하였고 권도용은 장지연을 추종했는데, 공교롭게 공교 1세대의 추종자로부터 공교 2세대가 출현하는 것 같아 흥미로움을 느낀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공교운동이 성공했다면 동아시아에 로마 카톨릭식의 유교 교회가 퍼져 나가 세속 국가의 제약을 받지 않는 지역사회의 유교로 기능했을지 모르겠다. 실제로 초창기 공교운동의 열기는 대단하여 중국 전역은 물론 인도네시아 화교 사회까지 공교가 확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병헌이 관계한 공교 조선 지부, 김정규(金鼎奎)가 관계한 공교 연길(延吉) 지회, 이승희(李承熙)가 참여한 공교 동삼성(東三省) 한인 지부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20세기 공교의 동아시아적인 확산 과정이었다고 하겠다. 그러한 팽창의 열기가 있었기에 권도용은 유교를 공교로 개혁함으로써 유교가 천하에 포고되어 만세의 법도가 되리라고 꿈꾼 것은 아니었을까.


글쓴이 : 노관범 박사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