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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연사 사선,풍연사 지음, 김수희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01.16

굴어당 2015. 11. 30. 19:29

 


풍연사 사선,풍연사 지음, 김수희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01.16



 

풍연사 지음
역자


김수희 옮김
출판사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01.16
형태


판형 B6 | 페이지 수 143 | ISBN
ISBN 10-8964069986
ISBN 13-9788964069981
정가


18,000

인류의 유산으로 남을 만한 시들을 소개하는 「지식을만드는지식 시」 시리즈 『풍연사 사선』. 처자오민이 교정한 <온위풍사신교>를 원전으로 삼아 우리말로 옮긴 책으로, 저본의 112편 중 42편을 수록하였다. 두 임금을 섬긴 재상으로서 부귀하고 영화로운 생활을 누렸던 풍연사의 사에서 인간의 유한성과 존재론적인 비애를 발견할 수 있다.

 


저자소개

저자 : 풍연사
저자 풍연사(馮延巳, 903∼960)는 자(字)가 정중(正中)으로 광릉[廣陵,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양저우시(揚州市)] 사람이다. 그의 부친 풍령군(馮令?)은 남당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인물로 그 덕분에 풍연사는 관직에 오르기도 전인 20여 세 때 열조(烈祖) 이변(李?, 888∼943)을 알현할 수 있었다. 열조 이변은 그를 보고 학식과 예술적인 재능이 많으며 말솜씨가 좋다고 칭찬했는데 이를 계기로 풍연사는 비서랑(秘書郞)이 되어 훗날 원종(元宗)이 된 이경(李璟)과 교유할 수 있었다. 풍연사는 이경보다 열 몇 살이 많았지만 이경이 오왕(吳王)을 거쳐 제왕(齊王)이 될 때까지 줄곧 그의 막부에서 장서기(掌書記)로 지내면서 함께 교유했다. 이경은 신분이나 나이, 정치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문학적으로 소통했던 그의 소중한 친구였다. 남당은 열조 이변의 문예 정책으로 인해 한희재(韓熙載), 손성(孫晟), 강문위(江文蔚) 등 여러 인사들이 모여들면서 오대십국 가운데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성장한 이경 역시 독서를 좋아하고 시에 능했다 한다. 최고 통치 계급인 황제와 재상이 사를 짓고 즐기는 분위기는 사에 대한 인식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사의 창작을 활발하게 해 곧바로 사의 유행으로 이어졌다. 남당이 문학, 특히 사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 것은 이러한 두 사람의 문학적인 교유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풍연사는 재상을 네 차례나 지낼 정도로 득의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관직 생활이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풍연사는 진각(陳覺, ?∼958), 송제구(宋齊丘, 887∼959) 등과 한 당(黨)을 이루었는데 이들은 손성(孫晟), 강문위(江文蔚), 한희재(韓熙載) 등의 무리와 끊임없이 반목하고 갈등했다. 따라서 풍연사가 재상을 여러 번 역임했다고 해도 그 재임 시기는 그다지 길지 않았고 재상으로 재임한 시기에도 끊임없이 그들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또한 남당이 강남(江南)의 경제적인 부를 기반으로 해 사회경제적으로는 부유하고 여유로웠지만 크게 보면 당송 교체기라는 혼란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불안하고 위태로웠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남당은 주변의 여러 나라들과 자주 영토 분쟁을 일으켰는데 이에 실패하면 그 책임을 지고 재상이 물러나야만 했다. 풍연사는 영토 분쟁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세 차례나 재상직에서 물러났지만 번번이 다시 기용되는 강인한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957년 주(周)나라 군대에게 강북(江北) 유역을 잃게 된 책임을 지고 태자소부(太子小傅)로 물러나서는 끝내 복귀하지 못하고 960년 58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풍연사는 원종 이경과 후주 이욱이라는 두 황제의 지속적인 애정과 신뢰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에 걸쳐 있는 이러한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관직 생활 내내 막연한 불안감과 위기의식 속에 지낸 것으로 보인다. 몇몇 역사서에서 남당을 멸망으로 이끈 오귀(五鬼) 가운데 한 사람이라며 풍연사를 폄하하기도 하지만, 이는 역사를 기술하는 사관(史官)이 정치적으로 반목하던 반대파의 입장이나 권력투쟁의 승자인 송나라의 입장에 서서 서술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적으로 풍연사가 충신이든 간신이든 간에, 그의 사에는 임금에 대한 충성심과 시대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진지하고 깊이 있게 반영되어 있다. 풍연사 사를 통해 역사서에서 다루지 않는, 한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면모를 살펴보고 그에 대해 균형 잡힌 시선을 갖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역자 : 김수희
역자 김수희는 이화여대에서 <풍연사 사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서울대에서 <남당사의 아속공존 양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중국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연구논문으로는 <남당사의 서정화자>, <남당사의 사대부사적 특징>, <명대 기녀사에 나타난 기녀 모습과 그 의미>가 있고, 역서로는 ≪천천히 걷는 게 수레보다 좋구나-이인 시선≫이 있다. 송대 사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속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데 관심이 많으며 최근에는 명대 여성 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목차

작답지 제1수 鵲踏枝 其一 ··············3
작답지 제2수 鵲踏枝 其二 ··············6
작답지 제3수 鵲踏枝 其三 ··············9
작답지 제7수 鵲踏枝 其七 ··············12
작답지 제10수 鵲踏枝 其十 ·············15
작답지 제11수 鵲踏枝 其十一 ············18
작답지 제12수 鵲踏枝 其十二 ············21
작답지 제14수 鵲踏枝 其十四 ············25
채상자 제2수 采桑子 其二 ·············28
채상자 제5수 采桑子 其五 ·············31
채상자 제7수 采桑子 其七 ·············34
채상자 제10수 采桑子 其十 ·············37
채상자 제13수 采桑子 其十三 ············40
주천자 제2수 酒泉子 其二 ··············43
주천자 제4수 酒泉子 其四 ··············46
주천자 제6수 酒泉子 其六 ··············49
임강선 제1수 臨江仙 其一 ··············52
청평악 제2수 淸平樂 其二 ··············56
취화간 제2수 醉花間 其二 ··············59
취화간 제3수 醉花間 其三 ··············62
응천장 제1수 應天長 其一 ··············65
알금문 제2수 謁金門 其二 ··············68
알금문 제3수 謁金門 其三 ··············71
우미인 제2수 虞美人 其二 ··············75
우미인 제4수 虞美人 其四 ··············78
춘광호 春光好 ···················81
귀국요 제2수 歸國遙 其二 ··············84
귀국요 제3수 歸國遙 其三 ··············87
남향자 제1수 南鄕子 其一 ··············90
박명녀 薄命女 ··················94
희천앵 喜遷鶯 ···················97
방초도 芳草渡 ··················100
경루자 제1수 更漏子 其一 ·············103
경루자 제4수 更漏子 其四 ·············107
포구락 제1수 抛球樂 其一 ·············110
포구락 제7수 抛球樂 其七 ·············112
보살만 제3수 菩薩蠻 其三 ·············114
보살만 제8수 菩薩蠻 其八 ·············117
삼대령 제3수 三臺令 其三 ·············120
억진아 憶秦娥 ··················122
억강남 제2수 憶江南 其二 ·············125
장상사 長相思 ··················128

해설 ······················131
지은이에 대해 ··················138
옮긴이에 대해 ··················142


남당사의 대표 작가 풍연사의 작품을 모았다. 남당의 두 임금을 섬기며 재상으로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렸으면서도 인간의 유한성과 존재론적인 비애에 대해 노래한다. 풍연사가 없었더라면 구양수와 안수의 북송사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사(詞)는 송대(宋代)에 가장 유행한 문학 양식으로 음악에 맞춰 노래하는 노래 가사라고 할 수 있다. 민가(民歌)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악부 민가(樂府民歌)와 유사한데 음악적인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악부 민가가 가사를 먼저 쓴 후 음악에 맞춘다면 사는 음악에 맞추어 가사를 짓는 방식이며, 악부 민가가 주로 쟁(箏)과 종고(鐘鼓, 종과 북)를 반주 악기로 하는 청상악(淸商樂)을 기반으로 한다면 사는 당대(唐代) 서역에서 들어온 호비파(胡琵琶)를 반주 악기로 하는 연악(燕樂, 또는 宴樂)을 기반으로 한다. 따라서 사는 악부 민가보다 음악이 더욱 중시된다.
사는 길이에 따라 크게 소령(小令)과 만사(慢詞)로 나뉘는데 글자 수를 기준으로 해서 62자 이내의 작품을 소령이라 하고 63자 이상의 작품을 만사라고 한다. 소령은 다시 한 편(片)으로 이루어지는 단조(單調)와 상하 두 편으로 이루어지는 쌍조(雙調)로 나뉘는데 단조에서 쌍조로 발전해 간다. 중당(中唐) 시기 몇몇 문인들이 민간에서 유행하는 사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창작하는데 이들은 시와 유사한 형식의 단조를 먼저 선택했다. 하지만 점차 창작 경험이 누적되고 사를 짓는 문인들도 증가하면서 단조보다 쌍조가 더 많이 창작되는데, 오대(五代) 시기에 이르면 쌍조가 대세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쌍조로의 발전 과정은 오대사를 대표하는 화간사(花間詞)와 남당사(南唐詞)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남당사가 화간사에 비해 그 시기가 다소 늦으므로 쌍조의 비율이 더 높은 편이다. 따라서 남당사는 쌍조의 양적 증가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질적 변화까지 살펴보는 데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남당사의 대표 작가로는 풍연사(馮延巳, 903∼960), 이경(李璟, 916∼961), 이욱(李煜, 961∼975)을 들 수 있는데 창작 시기나 작품 수량 면에서 풍연사 사가 단연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풍연사의 사는 모두 112수로 형식상 쌍조가 96수이고 내용상 주로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노래했다. 먼저 형식을 살펴보면, 풍연사는 쌍조를 운용할 때 상편과 하편의 결합 방식에 주의했다. 그는 상편과 하편에 각각 풍경과 감정, 낮과 밤, 과거와 현재 등 다른 장면을 설정하면서도 각 장면들이 서로 연결되도록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 인해 그의 사는 단절된 듯 연결되는 묘미가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그의 사는 여전히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이는 화간사와 비슷한 점이지만 표현 면에서는 화간사보다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 준다. 즉, 화간사가 주로 여인의 용모와 복식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면 풍연사 사는 여인의 내면 심리를 묘사하는 데 치중하며, 화간사가 좁은 규방 안에 갇혀 있다면 풍연사 사는 드넓은 자연의 세계로 나아간다. 특히 그는 봄의 순환과 대비되는 인간의 유한성을 절감하고 인간의 존재론적인 비애를 노래하는데, 이로 인해 그의 사는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더라도 보다 깊이 있는 슬픔의 세계를 보여 준다. 풍연사 자신의 감정을 노래한 사는 주로 술자리가 끝난 뒤 홀로 남아 느끼는 외로움과 슬픔, 불안함 등을 노래한 것으로 즐거움 속의 슬픔이라는 모순 심리를 드러낸다. 이로 인해 그의 사는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모두 슬픔이 깊이 가라앉아 있는 ‘비애’의 절정을 보여 준다.
풍연사 사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비애를 노래하거나 깊이 있는 슬픔의 세계를 노래하는 경향은 송대 안수(晏殊)와 구양수(歐陽修) 사에 각각 계승되었다. 안수 사는 존재론적인 비애를 극복하고자 때맞춰 즐겨야 한다는 급시행락(及時行樂)을 주장하는데, 인간의 존재론적인 비애를 인식한다는 점에서 풍연사 사를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구양수 사는 즐겁고 호쾌한 가운데 깊이 침잠해 있는 슬픔을 표현하는데, 즐거움 속의 슬픔이라는 모순 심리를 통해 감정의 깊이를 심화한다는 점에서 풍연사 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청대 유희재(劉熙載, 1813∼1881)는 ≪예개(藝槪)·사곡개(詞曲槪)≫에서 안수가 풍연사 사의 빼어남[俊]을 얻었고 구양수가 풍연사 사의 깊이[深]를 얻었다고 평했는데 안수와 구양수가 모두 북송사(北宋詞)의 대표 작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북송사에 대한 풍연사 사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책속으로

●무성한 가지에서 떨어지는 저 수많은 매화
여전히 정이 많아
눈송이처럼 바람 따라 나뒹군다.
어젯밤 생가 소리 쉽게도 흩어지더니
술 깨면서 한없는 수심만 더하누나.

누대의 봄추위는 사방의 산 때문인데
기러기 떼 지나가니
저녁 풍경에 안개 짙은 곳도 있구나.
한동안 난간에 기대어도 그 사람 보이지 않아
붉은 비단으로 눈물 훔치니 그리움만 생겨난다.

●봄이 아름답고도 아름답다.
강가의 저녁 산 서너 봉우리
실버들은 자른 듯 꽃은 물들인 듯.

향긋한 규방 적막한데 문을 반쯤 닫는다.
수심 어린 눈썹 찌푸리다
눈물방울이 연지 바른 얼굴에 떨어진다.

●봄날 연회에
좋은 술 한 잔과 노래 한 곡.
다시 절하면서 세 가지 소원을 말하지요.
첫째 소원은 당신이 천수를 누리는 것이고
둘째 소원은 제가 항상 건강한 것이고
셋째 소원은 들보 위의 제비처럼
해마다 늘 보는 것이지요.

●하루 종일 높은 곳에 올라 노닐어도 흥이 다하질 않아
붉은 누대에 사람들 흩어져도 혼자 배회하네.
안개에 싸늘해진 고리로 주렴을 걸어 두고
얼굴 가득 서풍 맞으며 옥난간에 기대 있네.
돌아가려면 깊이 취해야 하는데
작은 정원 새 연못에 달빛이 갑자기 싸늘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