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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웨이핑의 중국 25시

굴어당 2010. 6. 18. 16:36

주춤하는 시진핑, 배후에 보시라이?

"군부·태자당, 시진핑 후계 구도 방해했을수도"

등록일: 2009년 09월 22일 23시 57분 02초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을 노리는 보시라이 충칭시 당위 서기(왼쪽)는 덩샤오핑의 차녀 덩난(가운데)의 힘을 빌어 시진핑 국가 부주석을 견제하려 하고 있다.
덩샤오핑의 딸이 충칭에 간 이유

지난 7일 제11기 중국과학협회 연회가 충칭(重慶)시에서 열렸다. 겉으로 볼 때 평범한 민관(民官) 합동 회의로 보여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충칭 언론계의 유력한 소식통은 충칭시 당위 서기 보시라이(薄熙来·60)가 17기 4중전회를 앞두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진입을 위해 던진 마지막 승부수라고 지적했다.

보시라이는 연회에 참석한 덩샤오핑(鄧小平·97년 사망) 전 중국 국가주석의 차녀인 덩난(鄧楠·64) 전 과학기술부 부부장과 군부의 태자당(太子黨·공산당 원로 자제)을 설득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에게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최소한 현재 시점에서 덩난과의 밀담이 4중전회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 권력 투쟁에서 하나의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덩샤오핑은 중공의 역사에서 관건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로, 사망한지 12년이 지났지만 그의 친족과 측근들은 여전히 중공 고위층에 포진해 있다. 특히 군부와 태자당에 대한 영향력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으며, 덩난도 그 중 하나이다. 덩난은 1945년 10월생으로, 중국 공산당원이며 1970년 베이징대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중국 과학원 자동차 연구소와 반도체 연구소에서 근무한 뒤, 국가 과학위원회 정책국 부국장과 과학기술위원회 사회발전사 사장을 역임했다. 1991년 11월부터 과학위원회 부주임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8년 과학기술부 부부장(차관급)으로 승진했고 2003년 자리에서 물러났다.

충칭 언론계 소식통에 따르면, 덩난은 2003년 해임되기 한 달 전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네이멍구에서 열린 ‘‘수도권 방사치사응급기술 연구와 시범’ 세미나에도 참석했다고 한다. 아직까지 덩난의 해임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고 갖가지 추측만 난무한 상태다. 일각에서는 덩난의 나이를 문제 삼았지만 당시 덩난은 58세로 일반적인 부부장급의 재직 제한 연령인 60세에 못미친다.

덩난도 갑작스런 해임에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고, 후진타오는 부랴부랴 덩난에게 과학기술협회 당위 서기를 맡겼다. 서기는 행정직인 과학기술부 부부장보다 서열이 높다. 그제야 덩난의 마음은 풀어졌다.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의 비서 출신인 왕루이린(王瑞林)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루이린은 중앙군사위원회 총정치부 부주임을 역임한 장성 출신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군부에서 여전히 실력을 휘두르고 있다. 후진타오는 군사위 주석으로 취임한 뒤에도 군부를 장악하지 못한 상태다.

시진핑 겨눈 보시라이의 ‘강성 행보’

보시라이는 충칭시 서기 취임부터 줄곧 폭력 조직 소탕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외에도 ‘공산당 노래 부르기 운동’, ‘공산당 경전 읽기 운동’ 등을 벌였는데, 이는 모두 보시라이가 태자당과 함께 정변(政變) 예행 연습을 한 것이다. 보시라이는 차기 후계자 등극이 유력한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유약하고 정이 많아 공산당 원로가 일군 혁명 과업을 잇기 힘들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최근 중국 각지에서 잇따르고 있는 민중항쟁이 점차 폭력적으로 변하면서 관공서와 경찰을 공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윙안(瓮安) 사건과 스서우(石首) 사건이다.

보시라이는 이런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것은,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정권이 무능력하고 유약한데다, 실세를 잡고 있는 공청단파(공산주의청년단)파 태자당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또 ‘잠룡’ 시진핑의 관대함이 문제라고 여기고 있다.

랴오닝성에서 보시라이의 부패상을 고발한 투서가 공산당 중앙으로 날아갔고, 후진타오는 허궈창(賀國强) 중앙기율검사위 서기 등 관계자에게 지시를 내려 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선수를 쳤다. 그는 200개의 전담반을 편성해 충칭시 관할 지방 행정 조직의 부패를 샅샅이 조사했고, 1500명의 필진을 구성해 국내외 매체에 자신을 선전하는 문장을 발표하게 했다. 재판중인 사건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보도해 ‘악을 척결하는’ 이미지를 널리 선전했으며, 문화대혁명 당시의 선전전을 방불케 했다. 보시라이는 선전을 통해 시진핑을 대신할 핵심 인물로 등극할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베일 벗는 권력 암투

보시라이가 덩씨 일족의 지지를 얻고 베이징과 군부의 태자당 세력을 집길시킨다면 정권을 손쉽게 탈취할 수 있다. 충칭의 소식통은 과학기술협회의 연회는 세간의 이목을 분산시키는 속임수에 가까우며, 보시라이가 궁극적으로 노린 것은 덩난과 수차례 비밀회담을 가지는 데 있었다. 당시 연회에 참석한 과학시술협회 부주석 한치더(韓啓德)는 이 점을 수상하게 여겼다. 보시라이와 덩난이 어떤 논의를 나눴는지 알 수 없었다는 후문이다.

회의에 참석한 한 소식통이 전한 연회 분위기는 암투가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충칭시의 우중충한 9월 날씨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협회 주요 인사와 70여 명의 중국과학원 원사가 한 데 모인 것은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그야말로 ‘취옹지의부재주(醉翁之意不在酒·술에 취하는 뜻은 술에 있지 않고 산수를 즐기데 있다는 의미로, 딴 속셈이 있음을 가리킴)’라고 할 수 있다.

덩난이 진심으로 보시라이에게 협력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덩난이 충칭시까지 왔다는 사실에서, 태자당이 후진타오와 원바자오에 대한 반기를 들 준비를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2년 예정된 제18차 전국대표대회를 앞두고 태자당과 공청단파 사이의 내부 투쟁이 점차 베일을 벗고 있다.


토론토에서 장웨이핑
홍콩 유력일간지 문회보(文匯報)의 동북지사장을 역임한 장웨이핑(姜維平)은 1999년 6~9월 당시 다롄 시장 보시라이(薄熙來)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이듬해 체포됐다. 2002년 국가를 전복하고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8년형(이후 6년으로 감형)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 캐나다 정부의 배려로 지난 2월 캐나다에 입국한 뒤 중국 정세를 분석한 칼럼을 쓰고 있다.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16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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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권력 분배 이렇게 한다

장웨이핑 칼럼, 헤이룽장성 인사서 드러난 방정식

등록일: 2009년 09월 09일 02시 56분 34초

 
왼쪽부터 차례로 두위신(杜宇新) 헤이룽장성 당위 부서기, 왕위푸(王玉普) 헤이룽장성 부성장, 가이루인(蓋如垠) 하얼빈시 당위 서기
중국 동북단 헤이룽장(黑龍江)성의 공산당과 행정부 고위직 인사 이동이 완료됐다.

중신왕(中新網) 8월 21일 보도에 따르면, 20일 헤이룽장의 성도 하얼빈에서 열린 당정(黨政) 간부대회에 참석한 성 당위원회(이하 黨委·당위) 조직부장 쉬쩌저우(徐澤洲)는 공산당 중앙의 인사 결정을 발표했다. 두위신(杜宇新) 하얼빈시 당위 서기를 헤이룽장성 당위 부서기로 승진 발탁하고, 가이루인(蓋如垠) 헤이룽장성 부성장을 공석이 된 하얼빈시 당위 서기로 임명했다. 또 같은 날 열린 헤이룽장성 11기 인민대표 상무위원회 제 12차 회의에서 헤이룽장성 부성장으로 왕위푸(王玉普) 다칭(大慶)석유유한공사 회장을 전격 발탁했다.

필자는 홍콩 문회보(文匯報) 동북지사장 재임 시절 두위신과 가이루인을 수차례 접촉한 바 있다. 당시 정보와 중공 관리직 운영 규칙을 토대로 헤이룽장의 인사 이동이 중공 최고위층의 동향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연쇄 인사 이동은 중공 고위층이 헤이룽장성의 핵심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도가 낮다는 것을 설명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다음 번 인사 이동에서 두위신은 헤이룽장성 당위 서기가 유력하며, 왕위푸는 성장, 가이루인은 헤이룽장성 기율검사위원회 서기가 유력하다.

당위 부서기 : 두위신은 태자당 출신

두위신 신임 헤이룽장성 당위 부서기(성내 서열 2위)의 아버지는 헤이룽장 부성장을 역임한 두센중(杜顯忠)이다. 필자는 부성장으로 재직중이던 두센중을 만난 적이 있다.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두센중은 제1회 하얼빈 무역전시회를 유치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뒀다. 이 전시회를 통해 헤이룽장성의 개방 정책이 급진전됐고, 자연스레 성내 간부들의 두젠중에 대한 신망도 두터워졌다. 두위신은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승승장구했다. 2005년 1월부터 헤이룽장성 성위원회 하얼빈시 서기직을 맡았다. 두위신이 다싱안링(大興安嶺) 지구 당위 서기직을 맡고 있을 때 회의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농업이 발달하고 자원이 풍부한 헤이룽장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가 다져 놓은 인맥을 바탕으로 현지에서 잘 나가는 인사로 손꼽혔다. 두위신을 등용한 목적은 아마도 헤이룽장의 복잡한 생태 환경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얼빈시 당위 서기: 가이루인은 공청단파

가이루인은 선양(瀋陽) 사람으로 필자는 아직까지 그를 만나본 적이 없다. 다만 정부에서 발표한 경력을 보면, 가이루인은 1953년 4월 랴오닝(遼寧)성 둥강(東港)에서 태어났으며 동북대학 공상관리공정과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70년대 초 가이루인은 랴오닝성 선양기압기 공장에서 일반직으로 시작해 1974년 4월부터 1975년 1월까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선양시위원회 직원으로 근무했다. 1975년 1월부터 1978년 9월까지는 공청단 선양시위원회 학교부 부장으로 일했다. 여기까지만 봐도 그는 명백한 공청단파 인물이다. 가이루인은 1989년 11월부터 1992년 12월까지 다시 공청단으로 돌아가 선양시 서기로 일했다. 랴오닝성 언론은 가이루인이 공청단 선양시 서기로 재직하면서 후진타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전했다. 후진타오의 측근은 대부분 공청단 출신으로 채워져 있다.

가이루인은 이후 1998년 12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하얼빈시 부시장을 역임했다. 그가 갑자기 랴오닝을 떠나 헤이룽장으로 진출한 것은 공청단파 고위층의 배려로 볼 수 있다. 고위직으로 키우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두루 경력을 쌓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 헤이룽장성 다칭시 당위 부서기, 시장, 당위 서기로 일했으며, 2008년 헤이룽장성 부성장으로 임명됐다.

56세에 불과한 가이루인은 직급에서 두위신보다 한 단계 낮다. (편집자 주: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행정 조직보다 상위 기관이다. 따라서 하얼빈시 시위 서기는 상급 기관인 헤이룽장성 서기와 부서기보다 서열이 낮지만, 성장과 부성장보다 영향력이 강하다. 가이루인도 부성장을 역임하다 하얼빈시 서기로 임명됐으며 이는 진급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직할시를 총괄하는 위치로 올라서면서 자신의 능력을 전면적으로 드러낼 기회를 얻게 됐다. 가이루인의 미래는 공청단파가 향후 인사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부성장 : 혜성처럼 나타난 CEO 왕위푸

왕위푸의 이력을 살펴보자. 1982년 1월부터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으며, 중국석유대에서 석유천연가스 공정을 공부했다. 졸업 후 다칭석유대학원 광산기계과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이후 다칭석유관리국에서 기술원 부대장과 대대장을 거쳐 다칭석유유한공사 회장으로 취임한다. 필자가 다칭에 취재차 들르면서 알게 된 왕위푸는 석유 전문가일 뿐 아니라 회사의 경영 상황을 파악하고 조직을 잘 이끈다는 평가를 받는 전도유망한 인물이었다. 회사 내에서도 인관관계가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중공 당국이 그를 중용한 이유가 담겨 있다. 최근 중공 지도다들은 국유기업의 사유화 과정에서 발생한 노사 분쟁과 무력 충돌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중공 중앙은 왕위푸 신임 부성장의 능력과 경험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특히 헤이룽장성에는 국유기업이 밀집해 있다. 해당 지역 간부들은 사유화 과정에서 거액의 차이를 남기고 있으며, 분배 불균형과 빈부격차 심화로 갈수록 모순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왕위푸는 국유기업을 직접 경영한 귀중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3대 산맥’은 권력 투쟁 산물

현재 중공 중앙의 권력투쟁은 후진타오의 공천단파와 장쩌민 전 주석이 배후로 있는 태자당파의 대결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양상은 지방 정부의 인사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헤이룽장성 지도층은 공산당을 태자당인 두위신에게 맡겼고, 행정부는 이도 저도 아닌 기업인 왕위푸에게 줬으며, 직할시 하얼빈의 공산당 조직은 공청단파에게 넘겼다. 그야말로 3대 산맥이 양립하는 구조다. 공청단파와 태자당파는 서로 격렬한 투쟁을 벌이고 있지만, 절충 지점도 설정하고 있다. 왕위푸가 여기서 그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이는 아직 공산당 고위층에서 권력투쟁으로 인한 최후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9월 말에 열리는 17기 4중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도 공존은 이어질 전망이다.

토론토에서 장웨이핑
홍콩 유력일간지 문회보(文匯報)의 동북지사장을 역임한 장웨이핑(姜維平)은 1999년 6~9월 당시 다롄 시장 보시라이(薄熙來)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이듬해 체포됐다. 2002년 국가를 전복하고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8년형(이후 6년으로 감형)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 캐나다 정부의 배려로 지난 2월 캐나다에 입국한 뒤 중국 정세를 분석한 칼럼을 쓰고 있다.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15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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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1999년 다롄서 무슨 일이…

등록일: 2009년 09월 02일 10시 21분 06초

 
어느덧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지만 장쩌민의 1999년 8월 다롄(大連)행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관영 언론의 허위 보도로 당시 장쩌민과 접촉했던 사람들의 소식은 바다 속의 암초처럼 은폐됐다. 공포를 걷어내면 사건의 진상은 생생하게 드러난다.

중국 북방의 진주로 불리는 다롄은 1999년 시 건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 행사 준비로 분주했다. 당시 다롄시장이자 위원회 서기였던 보시라이(薄熙來)는 100주년 행사를 계기로 중공 중앙위원회 혹은 랴오닝성 성장이나 성위원회 서기로 올라서고 싶었다. 보시라이는 이미 토지 임대, 국유 기업 양도 등의 수법으로 베이징의 권력자들과 많은 친분을 쌓아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랴오닝성 위원회 서기였던 원스전(聞世震)을 비롯한 정적들을 누르기는 역부족이었다. 보시라이는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에 빌붙기로 결심했다.

보시라이는 ‘다롄시 100주년을 맞아 다롄시민 551만 5천명이 지도자의 제자(題字·책이나 비석 따위에 새기는 글)를 간절히 바란다’는 명분으로 베이징의 장쩌민 관저를 찾았다. 책상 위에 돈봉투를 조심스럽게 놓으며 찾아 온 보시라이를 장쩌민은 반갑게 맞이하면서 제자를 써주기로 했다. 문학적 소양이 없었던 장쩌민은 문구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보시라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롄시 판공청의 문장가 황푸머우타오(皇甫某濤)가 작성한 5가지 문장을 제시했다. 장쩌민은 ‘백년풍우세례, 북방명주생휘(百年風雨洗禮,北方明珠生輝-백년 풍우가 세례하니 북방의 밝은 진주가 빛을 발하네)’를 택했다. 보시라이는 사실 그 문장은 자신이 며칠간 고민하며 만든 것이라고 말한 뒤 책상 위에 놓았던 봉투를 건넸다. 봉투는 얇았지만 안에는 카드와 비밀번호를 적은 종이가 담겨 있었다. 장쩌민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훗날 보시라이를 수행했던 황푸머우타오는 내게 이 이야기를 털어놨다. 황푸에 따르면 사실 장쩌민이 고른 문장은 제일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보시라이가 보기에는 제일 좋았다고 한다. 문장 중에 북방의 밝은 진주는 다롄을 뜻하며 곧 보시라이의 치적(治積)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시라이는 황푸에게 제자를 받은 과정은 국가 기밀이므로 절대로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장쩌민은 보시라이에게 8월 중순경 다롄을 시찰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보시라이는 국무원 총리직은 떼논 당상으로 여겼다고 한다. 보시라이는 왜 그렇게 장담했을까? 황푸에게 들은 이야기는 실로 놀라웠다.

보시라이, 한 편의 영화를 찍다

1999년 8월 10일부터 15일까지 장쩌민은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총리 등을 대동하고 선양과 안산을 시찰한 뒤 다롄을 방문했다. 당시 신화사는 “(장쩌민이) 동북 지역과 화북 지역 8개 성의 국유기업 개혁 좌담회에 참가했으며, 랴오닝성을 시찰해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국유개혁을 추진할 것을 강조했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보시라이는 장쩌민의 동선을 미리 파악해 사전 정비 작업을 완료했고, 장쩌민의 지인들로부터 요긴한 정보를 수집했다.

준비는 치밀했다. 장쩌민이 지나가기로 한 선다(沈大)고속도로에서 방추이다오(棒棰島) 호텔로 이어지는 도로 양쪽에 잔디를 심고 보도 블럭을 깔았다. 중산(中山)로에 장쩌민의 거대한 초상을 걸고, 장쩌민이 ‘지은’ 문구를 크게 걸었다. 원래 이곳에는 한 기업이 대형 광고판을 설치했지만, 보시라이는 광고 계약서를 찢어버린 뒤 초상을 대신 걸었다. 그 기업체 사장은 나중에 나에게 당시 큰 손실을 봤다고 털어놨다.

보시라이는 국가안전국, 중앙경위국과 밀접하게 연계해 장쩌민의 숙소인 방추이다오 호텔을 물샐 틈 없이 지켰다. 사실은 보시라이의 반대파가 장쩌민과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와 함께 37명을 블랙리스트로 올려 집중 관리했다. 보시라이는 ‘이런 놈’을 잘 단속하라고 명령했다. 보시라이는 사람을 욕할 때 ‘나쁜 놈’, ‘멍청한 놈’ 등 사투리로 ‘놈’을 즐겨 사용했다. 부하 직원들에게는 ‘이번 기회에 내가 위로 올라간다면 너희들에게도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떨어진다면 원스전 등 반대파가 너희들을 숙청할 것이다’라고 협박해 순순히 명령에 따르게 했다.

보시라이는 또 장쩌민이 시찰하기로 한 곳과 주요 도로에 시민을 가장한 측근을 미리 배치했다. 그들은 장쩌민 일행을 만나면 다롄 사투리로 보시라이의 치적을 칭송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500위안 정도를 수고비로 받았다.

장쩌민, 입을 다물지 못하다

다롄을 찾은 장쩌민은 뚜꺼비(장쩌민의 별명)처럼 입을 벌리고 웃기 바빴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톈안먼에 초상이 걸린 뒤, 덩샤오핑 마저도 감히 자신의 초상을 걸고 인민들에게 경배하게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파격적으로 장쩌민의 대형 초상을 다롄 시내 곳곳에 걸어 장쩌민을 흡족하게 했다. 장쩌민은 시찰 코스 중의 하나인 중국과학원 화학물리연구소로 가던 중 자신의 초상과 친필 제자를 보게 됐다. 장쩌민을 수행하던 랴오닝성 성장 장궈광(張國光)은 이를 보고 보시라이가 지나치게 아첨한다면서 주룽지(朱鎔基) 총리가 봤다면 화를 냈을 것이라고 말해 장쩌민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장궈광은 이후 후난성 성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각한 뒤 감옥에 갇혔다.

보시라이의 측근에 따르면, 당시 다롄시 국가안전국은 독일에서 감청 장비를 수입해 장쩌민이 주변인과 나누는 대화를 모두 도청했다. 이 내용은 보시라이에게 전달됐고 보시라이가 아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당시 감청 장비는 100m 이내의 모든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고, 장쩌민은 자신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보시라이를 ‘충신’으로 여기게 됐다.

특명:장쩌민의 처제롤 왕비처럼 모셔라

보시라이는 부임 초기 장쩌민의 처제 왕씨가 다롄해운학원에서 교사로 일한다는 것을 알고서, 다롄해사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예물을 보낸 뒤 좋은 자리를 왕씨에게 내줬다. 이후 왕씨가 언니 왕예핑(王冶平)과 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왕래가 뜸해졌지만, 장쩌민이 처제의 집을 방문하겠다는 말을 듣고 다시 왕씨에게 접근했다.

보시라이는 즉각 신축 아파트와 가전 제품을 왕씨에게 선물했다. 아직도 모자라다고 생각한 보시라이는 아파트 앞에 잔디를 깔고 화단을 조성했으며 길을 내고 보도 블록도 깔았다. 보시라이는 측근들에게 “일의 성패(成敗)는 세밀한 부분에 달려 있다. 우리의 운명이 왕씨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더없는 친절을 베풀라”고 말했다.

장쩌민의 손자를 끌어들이다

장쩌민은 다롄 시찰에 부인 왕예핑과 미국에서 유학중인 손자도 데리고 갔다. 장쩌민의 비서 자팅안(賈廷安)은 이 사실을 보시라이에게 통보했다. 보시라이는 즉시 장쩌민의 손자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보시라이는 쾌재를 불렀다. 장쩌민의 손자가 시찰 기간 중 생일을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가장 좋아하는 축구스타가 다롄의 프로축구팀인 다롄스더의 리밍(李明)과 리잉파(李應發) 감독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리고 주홍색 넥타이를 즐겨 매고 해산물을 좋아한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보시라이는 장쩌민이 손자를 대동하고 다롄스더를 방문하게 했다. 현장에는 주홍색 넥타이를 맨 리밍과 리잉파가 기다리고 있었고, 장쩌민 일행과 기념촬영도 했다. 장쩌민의 손자는 ‘놀라운 우연’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보시라이는 장쩌민의 시찰 코스를 세밀하게 기획했지만, 장쩌민은 수시로 다른 코스를 선택했다. 보시라이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당시 눈부신 경제성장을 거둔 다롄시 이면에는 감추고 싶은 어두운 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보시라이가 택한 방법은 장쩌민의 손자를 구슬려 당초 기획한 경로로 가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쩌민의 손자와 수행원들에게 신용카드를 한 장씩 나눠줘 환심을 샀다. 소식통에 따르면 당시 나눠준 카드의 한도는 최소 8만 위안(1500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일반 근로자의 10년 치 연봉을 훌쩍 넘는 거금이다.

절정은 다롄조선소 시찰 후 호화 군용선에 열린 생일 파티였다. 산해진미를 총출동시켰으며 유명한 경극 배우 양츠(楊赤) 등 스타들도 불렀다. 패션 모델들이 시중을 들었고 보시라이는 장쩌민 일행의 시중을 들었다. 보시라이는 여름 방학을 맞아 잠시 고향에 들른 미국 국적의 20세도 안되는 손자를 위해 생일 축가를 부르고 케익을 자르며 야단법석을 피웠다. 당시 행사에 참석했던 한 관리는 “젖을 주는 사람이 엄마라는 말이 떠올랐다. 보시라이는 승진을 위해 장쩌민의 손자를 아버지처럼 극진히 모셨다”라고 전했다.

'공든 탑' 배탈에 무너지다?

소식통에 따르면 한 치의 오차도 없었던 보시라이의 연출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흐트러졌다. 생일 파티에 내놓은 산해진미를 먹은 장쩌민 일행이 복통을 일으킨 것이다. 식탐이 많은 장쩌민은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으며 장쩌민의 손자도 소염제와 설사약을 먹어야 했다. 경호원과 의료진은 비상이 걸렸다. 혹시 보시라이측에 불순한 의도는 없었는지 조사했지만 아무런 혐의나 문제점을 찾지 못했다. 배탈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다롄시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사실 자연 환경을 희생한 대가였다. 폐유로 더러워진 바다에서 잡은 해산물은 오염되어 있었다. 보시라이를 비롯한 현지인들은 오랜 기간 섭취하면서 면역이 생겼지만 처음 접한 장쩌민 일행은 배탈을 일으킨 것이다.

이후 일정에서 보시라이는 장쩌민의 손자를 구슬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장쩌민을 다롄상품무역교역소로 향하게 했다. 보시라이는 장쩌민에게 자신이 주식 시장과 자본 운영에 능통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국무원 총리를 맡아도 문제없을 정도의 능력가라는 것을 과시하고자 했다.

보시라이는 장쩌민을 극진히 대접함으로써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당초 그가 생각했던 국무원 총리 자리는 결국 원자바오에게 돌아갔다. 2002년 열린 제1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원자바오는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했고 이듬해 국무원 총리에 올랐다. 하지만 보시라이에게 16차 전대는 남의 잔치였다. 보시라이는 2001년 랴오닝성 성장으로 승진했지만 2004년이 되어서야 상무부 부장으로 중앙 정계에 등장할 수 있었다.

다롄 사람들은 지금도 1999년 8월 있었던 일을 안주거리 삼아 이야기하고 있다. 2007년 2월 평소 알고 지내던 현지 기자는 “장쩌민이 16차 전대가 열릴 때 보시라이를 중앙 정치국에 넣었다면 보시라이가 후진타오를 대신해 총서기가 됐을 수도 있었다. 장쩌민이 (후진타오를 견제하기는) 한 발 늦었다”라고 말했다.

토론토에서 장웨이핑
홍콩 유력일간지 문회보(文匯報)의 동북지사장을 역임한 장웨이핑(姜維平)은 1999년 6~9월 당시 다롄 시장 보시라이(薄熙來)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이듬해 체포됐다. 2002년 국가를 전복하고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8년형(이후 6년으로 감형)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 캐나다 정부의 배려로 지난 2월 캐나다에 입국한 뒤 중국 정세를 분석한 칼럼을 쓰고 있다.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15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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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광 잃은 보시라이의 음험한 승부수

등록일: 2009년 08월 24일 21시 41분 03초

 
왼쪽 위에서부터 반시계방향으로 왕양(汪洋) 광둥성 당서기, 허궈창(賀國强) 중앙기율검사위 서기, 보시라이(薄熙來) 충칭시 당서기. 최근 세 사람은 차기 전인대에서 약진하기 위해 전면적인 권력 투쟁에 나섰다.ⓒ 대기원
9월 중공 권력층에 큰 변화

오는 9월 중순, 중국공산당 17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17기 4중전회)가 열린다. 18차 전국대표회의(18차 전대)가 머지 않았다. 나는 이번 17기 전회에서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날 것이고, 18차 전대에서는 중국의 미래를 결정할 정치판 개편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최근 중난하이(中南海·베이징 소재, 중공 권력의 심장부) 고위층에 권력 암투가 벌써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보시라이(薄熙來) 충칭시 당서기, 왕양(汪洋) 광둥성 당서기, 허궈창(賀國强) 중앙기율검사위 서기(서열 8위)이다. 이들은 모두 부패 척결을 기치로 내걸고 매스컴을 동원해 청렴 이미지 구축에 나섰다. 현재로서는 태자당(중공 원로 2세)인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가 앞서가는 모양새다. 이들은 차기 전인대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보시라이, 왕양) 혹은 약진(허궈창)을 노리고 있다.

충칭시 주요 공안관계자 모조리 체포돼

지난 9일 전국 사법기관장 회의 참석차 베이징을 방문한 충칭시 사법국장 원창(文强. 54) 폭력조직과 결탁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번 체포 작전은 보시라이가 충칭시 공안국장 왕리쥔(王立軍)에게 지시를 내려 이뤄졌다. 원창의 체포 소식은 곧바로 전국에 알려졌고 법원의 판결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원창의 혐의는 사실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공안 부국장 출신인 원창 외에도 충칭시 산하 21개 공안국의 6개 공안국장도 체포됐다.

또 충칭시 인민대표와 정협 상무위원을 역임한 기업가 리창(黎强)을 체포했고, 천밍량(陳明亮),궁강모(龔剛模) 등 폭력조직을 이끌고 있는 지역 부호를 잡아 들였다. 이 소식은 곧바로 언론을 통해 전해졌고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사회과학원 신문연구원 출신인 보시라이는 당시 구축한 조직을 통해 언론과 인터넷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세하고 있다.

8월 10일 오후 3시 42분, 한 인터넷 토론 사이트에 필명 진스이(金世遺)가 성한 ‘보시라이는 암흑가의 저승사자’라는 글이 올라왔다. 주요 내용은 보시라이의 소탕 작전에 대찬 찬사다. 오후 4시 44분에는 ‘천애해각’이라는 필명으로 왕양을 강도 높게 비판한 ‘왕양이여 너를 위해 양탄자를 까는 사람을 마땅히 조심하라’는 글이 발표됐다. 심혈을 기울여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두 편의 문장이 어떻게 1시간 간격으로 발표된 것일까? 언론의 자유가 없는 중국에서 어떻게 이런 보도를 내도록 조종한 힘이 있는 것은 아닐까?

보시라이의 숙청이 낯설지 않은 이유

옛 사람들은 온고지신을 말했다. 나는 보시라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기자로서 9년 전 다롄(大連, 당시 보시라이는 다롄시장)에서 발생한 일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하자면 보시라이가 최근 충칭에서 한 일련의 행동은 옛 수법을 다시 쓴 것에 불과하다. 2000년 말, 정적이었던 성 위원회 서기 원스전(聞世震), 전 다롄시 서기 위쉐샹(於學祥), 및 부시장 가오쯔(高姿)를 제거하기 위해 똑같은 행동을 했다.

당시 보시라이는 법적 근거 없이 다롄시 법원 부원장 류샤오빈(劉曉濱)을 체포했다. 이유는 류 부원장을 체포함으로써 공산당 내의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류샤오빈은 가오쯔(高姿) 전 부시장의 비서로 공산주의 청년단 다롄시 서기를 지낸 인물이다. 보시라이는 후진타오의 안방인 공산주의 청년단과는 적대적인 관계다. 아니나다를까 류 부원장 체포 이후 가오쯔에 대한 감찰에 들어갔고, 동시에 다롄시 외무주임 장부닝(張步寧), 보시라이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던 나, 그리고 나를 변호했던 천더후이(陳德惠) 변호사, 다롄 천천어항의 장융샹(張永祥) 4형제, 그밖에 다롄 가신국제호텔 사장 한샤오광(韓曉光) 등 10여 명이 줄줄이 체포됐다.

당시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보시라이와 사이가 좋지 않거나 정부의 무리한 찬조비 요구를 거절했던 경력이 있다. 혹은 보시라이의 지원 세력과 마찰을 빚었거나 사업상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경우다. 공산당 일당 독재는 다롄시와 같은 작은 도시에서도 그대로 적용됐고 보시라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봉건 군왕’으로 군림했다.

보시라이의 전횡 앞에 원스전(聞世震)이 이끄는 성위원회만 부단히 저항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보시라이가 다롄시장을 그만두자 류샤오빈 등은 결국 판결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훗날 보시라이가 랴오닝성을 떠난 뒤 류샤오빈은 부국장 직을 회복했고 교통국 부국장으로 전보되었으며, 천변호사 역시 무죄를 선고 받았고, 장부닝과 한샤오광은 아직도 심리 중에 있다. 재판 과정에서 모두 무혐의가 드러난 것으로 처음부터 모함을 당한 것이다. 이들은 공산당 내 권력 투쟁의 희생자다.

이후 보시라이는 다롄시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오히려 승승장구해 성장, 상무부장,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했다. 2007년 충칭으로 밀려난 이후에도 여전히 반성의 기미가 없으며, 다롄시에서 했던 악행을 교묘히 답습해 다시 한번 체포의 악순환에 들어갔다. 충칭시를 붉은 공포로 물들이고 있다.

왜 갑자기 폭력 조직 소탕일까?

지난해 7월 10일부터 9월 30일까지 불과 80일 동안 충칭시에서 폭력 조직 관련 기소만 3만 2천 771건에 달했다. 결과 9천 521명이 체포되고 92개 조직이 와해됐다. 충칭시 내 교도소에는 폭력배들로 넘쳐났다.

상술한 필명 진스이(金世遺)가 작성한 글에서 사실 천기누설을 했다. 글에는 리창이 충칭시 인민대회 대표로 정치 경제적으로 강력한 배후가 있다고 밝혔다. 사실 충칭의 폭력 조직이 오늘날까지 발전하여 ‘억만장자’가 되고 ‘인민대회 대표’까지 성장한 것은 하루 아침에 이뤄진 일이 아니다. 이것을 폭로한 보시라이의 진짜 목적은 배후의 인물인 허궈창(賀國強)과 왕양(汪洋)을 노출시키려는 것이다. 또 최고위층에 포진된 보시라이의 정적을 겨눈 것이다.

8월 9일 체포된 충칭시 사법국장 원창의 약력을 간단히 살펴보면 1992년 9월 쓰촨성(四川省) 충칭시 공안부국장으로 임명됐고, 2000년 1월 청국장급으로 승진했으며, 2003년에는 공안국 당부서기로, 2008년 7월에는 사법국장에 임명됐다. 사람들은 허궈창과 왕양을 같이 놓고 앞뒤로 충칭에서의 근무 경력을 비교한다. 그들의 질긴 인연과 경제적인 밀착은 부인할 수 없는데, 단지 후원(胡溫,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이 이 사건을 조사하려는 결심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원창은 십여 년을 공안국장으로 일했는데 보시라이의 밀정이 2년 동안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부패 정도를 의심할 여지는 없다. 허궈창과 왕양이 만약 부패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기적이다. 리밍(黎明), 천밍량(陳明亮), 궁강모(龔剛模)도 역시 같다. 미래가 불투명한 기업체의 사장으로서 관리에게 뇌물을 주지 않고 사업할 수는 없다. 그래서 큰 돈을 만지지 못한 담당 관리가 별로 없다. 이를테면 이런 사람들의 비호세력이 허궈창과 왕양일 가능성이 매우 많다. 이 한 점을 보고 보시라이는 전쟁을 한 것이고 여론을 조성하고 중공 18기 전인대가 소집되기 전에 먼저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2007년 보시라이가 정치국위원으로 죽어 지낼 때도 원래는 충칭으로 가려는 생각이 없었다. 다롄의 정치 선배들에게도 ‘충친은 너무 덥다, 찜통 같다. 나는 다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후원(胡溫)이 그를 부총리에서 배척한 뒤 왕양 일파가 충칭파로부터 광둥성 당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보시라이를 찜통같은 충칭으로 보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원한에 사무친 보시라이의 보복은 예견됐던 일이다. 동시에 부패를 척결하는 청렴한 관료 이미지를 구축해 충칭시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마치 닭을 죽여 원숭이를 길들이 듯, 다른 당원과 관리들까지 순종하게 하는 효과를 거뒀다.

하지만 여전히 보시라이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다. 최근 몇 년간 보시라이가 다롄시로부터 랴오닝성에 이르기까지 도입했다 실패한 정책들,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추진했던 기소, 각국 언론의 보시라이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장쩌민의 심복인 보시라이는 파룬궁 탄압을 주도했고, 각국으로부터 집단학살죄 혐의로 고소된 상태다)는 최고위층이 보시라이를 좌천시키게 한 결정적인 이유다.

훗날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지목된 리커창이 랴오닝성에 파견돼 둥하이보(冬海波) 등 보시라이와 밀접한 부패 인사들을 소탕한 점, 허궈창 등이 후진타오의 지지를 업고 보시라이의 범행을 파헤친 점, 보시라이는 이에 대해 명백하게 알고 있다.

예전에 보시라이는 중공 원로인 아버지 보이보(薄一波)의 후광을 업고, 평지풍파를 일으켜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2007년 중공 8대 원로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보이보가 사망하면서 상황
이 변했다.

궁극적 목표는 왕양·허궈창 약점 잡기

보시라이의 다음 행보는 다음과 같이 예상할 수 있다. 원창 등 이미 체포한 부패 관리들에게 사형 가능성을 넌지시 비추며 협박할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관료들의 부패 사실을 추가로 자백하는 것 밖에 없다고 알려줘, 이를 통해 입수한 증거로 추가로 체포에 나설 것이다. 보시라이가 만약 이런 방법을 통해 허궈창과 왕양의 약점을 더욱 많이 잡게 될 경우 보시라이가 완승을 거둘 수 있다. 그리고 후원(胡溫)에게도 건네 줄 정보가 생기게 될 것이고, 다음 전인대에서 권토중래를 노릴 수 있다.

상술한 진스이는 문장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충칭 암흑세력이 놀랄만한 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칭에 온지 얼마 안 되는 보시라이의 손에 잡혔다. 어찌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시라이가 어떤 생각으로 소탕 작전을 펼쳤든 체포된 일당은 탐관오리와 폭력배다. 이로써 사회에 미칠 긍정적인 영향을 나는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지적할 뿐이다. 사람들에게 보시라이의 진면목을 똑똑히 알게 해서, 정치 체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긴박감을 가지게 하고 싶다.

나는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에게 권한다.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지방 관료들을 맞바꿔 보라. 서로의 부패를 밝힐 기회를 줘서, 현재의 충칭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방적이고 임시변통적인 상황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토론토에서 장웨이핑

* 기고·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장웨이핑은
* 홍콩 유력일간지 문회보(文匯報)의 동북지사장을 역임한 장웨이핑(姜維平)은 1999년 6~9월 당시 다롄 시장 보시라이(薄熙來)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이듬해 체포됐다. 2002년 국가를 전복하고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8년형(이후 6년으로 감형)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 캐나다 정부의 배려로 지난 2월 캐나다에 입국한 뒤 중국 정세를 분석한 칼럼을 쓰고 있다.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15272
 

서열 7위 리커창의 폭력 조직 소탕 작전

2009.08.16 17:52 | 장웨이핑의 중국 25시 | 고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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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 7위 리커창의 폭력 조직 소탕 작전

등록일: 2009년 08월 16일 02시 53분 22초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서열 7위 리커창 부총리.ⓒ Guang Niu/Getty Images
2001년 랴오닝성 성장을 거쳐 2004년 상무부 부장으로 승진한 보시라이(薄熙來, 59)는 한 때 중국 공산당에서 차기 권력의 핵심으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하지만 장쩌민의 직계 파벌이자 태자당(太子黨, 공산당 원로 후손) 멤버인 보시라이는 권력 다툼에서 밀려 2007년 충칭시 서기로 좌천당하면서 핵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인상이다. 대신 3년 후 대권을 장악할 것으로 점쳐지는 서열 6위 시진핑(習近平) 부주석과 서열 7위 리커창(李克强) 부총리가 약진했다.

여기서는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불리는 리커창과 보시라이 사이에 얽힌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2004년 보시라이가 중앙으로 진출함과 동시에 리커창은 랴오닝성 서기로 전보 발령된다. 리커창은 2006년, 1개 대대의 무장경찰 병력을 투입해 다롄 정부도 모르게 랴오닝성 다롄시의 최대 폭력조직을 이끌고 있던 둥하이보(冬海波, 49)를 체포한다.

당시 다롄시 국가안전국 서기였던 처커민(車克民)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베이징에 있던 보시라이에게 알렸다. 소식통에 따르면 보시라이는 리커창의 소탕 작전에 적잖은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다롄 일대에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보시라이가 다롄 시장으로 재직하면서부터 둥하이보와 밀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시라이는 리커창의 배후에 후진타오가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좌불안석 할 수밖에 없었다.

보시라이, 폭력조직과 손잡다

보시라이가 다롄시장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1993년, 둥하이보는 오락실을 가장한 비밀 도박장을 개설했다. 보시라이의 정적인 차오보춘(曹伯純)이 다롄시 당서기로 부임하면서 둥하이보를 도박장에서 체포했고 1994년 2월 영업정지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국무원의 연줄을 이용해 둥하이보가 석방되도록 했고, 풀려난 둥하이보는 1994년 겨울부터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오락실을 열어 엄청난 부를 쌓기 시작했다.

사세를 확장한 둥하이보는 1995년 하이양 오락실, 동방오락실, 북성환락천지 민생점 등 오락실을 12개로 확장했으며 정관계 인사와 연계를 강화했다. 둥하이보는 든든한 배경을 바탕으로 위법 행위를 일삼았다. 국가에서 금지한 사행성 오락기를 대량으로 덤핑으로 구입한 뒤 팔아 1억 위안을 남기기도 했다.

다롄시 세계무역센터 58층에 위치한 둥하이보의 사무실 정면에는 보시라이와 찍은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보시라이가 2001년 랴오닝성 성장으로 발탁되고 상무부장으로 진급하자 둥하이보도 덩달아 건설업과 금융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고, 대량의 투자이민을 통해 캐나다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보시라이가 총리까지 오를 것으로 확신했고 자신도 사업을 베이징으로 확장하겠다고 선포했다.

보시라이가 둥하이보의 경제적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둥하이보의 안하무인의 태도는 보시라이에게도 걱정거리였다. 1998년 이후 보시라이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둥하이보를 만난 적이 없으며, 관계자와 비밀리에 만나는 정도였다.

‘믿는 구석’ 있는 둥하이보의 악행

1998년 6월 둥하이보는 도박장에서 체포됐지만, 공안국장 쑨훙진(孫洪金)에게 1차 5천 위안, 2차 10만 위안의 뇌물을 주고 풀려났다. 2003년에는 한 도박장에서 성매매를 하다 적발됐지만 2만 위안의 뇌물을 주고 풀려났다. 2003년 11월 자신의 건설사 협력업체 사장을 때려 불구로 만들었고, 2005년에는 주택 계약을 해지하려는 고객을 때리는 등 숱한 폭력 사건을 일으켰다. 다롄시의 한 언론인은 보시라이가 다롄을 떠난 뒤에도 둥하이보의 배후에는 여전히 보시라이의 후광이 드리워져 있었다고 밝혔다.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고 점점 악행은 극에 치달았다고 한다.

2004년 둥하이보는 다롄시와 톈진시의 요지에 5천㎡ 넓이의 대형 사우나를 개설했다. 맑은 샘을 뜻하는 ‘칭촨(淸泉)’이라는 이름의 이 업소는 사실은 대형 성매매 업소다. 101명의 성매매 여성을 고용해 2년간 5만 건의 성매매를 알선했으며 그 중 수백명이 다롄시 공직자들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보씨 성을 가진 성매매 여성을 간판으로 내세워 보시라이의 종친이라고 소개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이 업소는 2007년 2월 고발당하면서 타격을 받았다.

리커창의 소탕 작전이 용두사미가 된 이유

2006년 초 리커창은 둥하이보와 조직원 38명을 일망타진했다. 당시 나는 수감생활을 마치고 요양중이었다. 언론계에 있던 친구들은 둥하이보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보시라이가 수사망에 떠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다롄시의 많은 고위 관리들의 부정이 속속 드러났지만 보시라이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둥하이보의 체포는 중국에서 흔히 발생하는 그렇고 그런 폭력조직 사건으로 끝나 버렸다.

다롄시의 언론계에 종사하고 있는 한 소식통은 ‘용두사미’의 원인으로 세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캐나다 국적을 가진 둥하이보로서는 사형을 당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무리하게 보시라이와 관계를 자백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둥하이보는 줄곧 묵비권을 행세했다.

두 번째 이유는 랴오닝성 법조계에 보시라이와 둥하이보의 측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세 번째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2006년 당시 보시라이가 상무부장으로 리커창보다 서열에서 우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리커창으로서는 중앙 정부에서 견고한 조직을 구축한 보시라이를 처벌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산을 두드려 호랑이만 놀라게 한다’는 식으로 시늉만 했다는 분석도 이 때문이다.

비록 리커창이 다롄시 세력들의 방해 공작을 피하기 위해 둥하이보 일당에 대한 재판을 랴오닝성 고등법원으로 넘겼지만, 이미 둥하이보 세력이 심리를 담당한 톄링(鐵嶺)시 중급인민법원에 손을 써놨다는 사실을 몰랐다.

결국 둥하이보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해외 추방되는 ‘기쁨’을 누렸고, 37명의 조직원도 각각 1년형에서 20년형으로 죄질에 비해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이례적으로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언론이 없었고, 다롄 지방지도 마찬가지였다.

보시라이의 폭력 조직 소탕의 ‘진의’

보시라이는 충칭시 서기로 부임하면서, 90일간 392개 폭력 조직을 소탕하고 2만 3천명을 체포해 주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하지만 보시라이의 진의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시라이는 이미 둥하이보 등과 내통하면서 폭력조직의 생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충칭시의 폭력조직이 어떤 권력자와 내통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으며, 이번에 소탕당한 폭력조직은 대개 보시라이의 정적과 얽혀 있는 세력일 가능성이 크다. 보시라이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뒤 한 바탕 이벤트를 펼쳐 정치권에서 다시 한 번 발언권을 확보하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정적에 대한 압박이라는 부수적인 성과까지 거뒀다.

다롄의 한 언론인은 리커창 또한 이익집단에 얽힌 인물로 애초에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또 보시라이가 만약 다시 권력을 잡게 될 경우 리커창이 보복당할 가능성이 있어 체면을 살려주는 선에서 멈췄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글/ 장웨이핑


* 홍콩 유력일간지 문회보(文匯報)의 동북지사장을 역임한 장웨이핑(姜維平)은 1999년 6~9월 당시 다롄 시장 보시라이(薄熙來)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이듬해 체포됐다. 2002년 국가를 전복하고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8년형(이후 6년으로 감형)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 캐나다 정부의 배려로 지난 2월 캐나다에 입국한 뒤 중국 정세를 분석한 칼럼을 쓰고 있다.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15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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