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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 5위 리창춘, 중앙선전부 굴욕 사건

굴어당 2010. 6. 18. 16:38

서열 5위 리창춘, 중앙선전부 굴욕 사건

[대기원 독점 연재] 장웨이핑의 ‘중국 25시’

등록일: 2009년 08월 12일 09시 26분 58초

홍콩 유력일간지 문회보(文匯報)의 동북지사장을 역임한 장웨이핑(姜維平)은 1999년 6~9월 당시 다롄 시장 보시라이(薄熙來)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이듬해 체포됐다. 2002년 국가를 전복하고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8년형(이후 6년으로 감형)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 캐나다 정부의 배려로 지난 2월 캐나다에 입국한 뒤 중국 정세를 분석한 칼럼을 쓰고 있다. 대기원시보는 장웨이핑의 ‘중국 25시’를 독점 연재한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 서열 5위 리창춘. 차기 대표대회에서 2선으로 밀려날 확률이 높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OSCAR FARJE/AFP/Getty Images
중앙선전부에 측근 배치 저지당한 리창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 서열 5위로 중앙정신문명건설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는 리창춘(李長春)은 선전, 언론, 이데올로기, 민족문제, 통일전선을 총괄하고 있다.

리창춘은 중공 18기 대표대회에서 권력 핵심에서 밀려날 것이 확실시 되는 가운데, 뒷일을 대비해 측근을 중앙선전부 등 요직에 배치하려 하고 있다. 비서인 장장(張江)의 인사 이동은 중국 정계에 관심사로 떠오른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해외 순방에 나선 리창춘을 수행해 언론에도 널리 알려졌다. 리창춘이 담당한 언론과 선전부문 통제는 사실 장장이 실무를 담당해 왔고, 리창춘의 연설 원고도 장장이 작성했다.

리창춘은 원래 적당한 시기를 기다려 장장을 중앙선전부 부부장을 발탁하려 했다. 현재 중공 최고위층들은 18기 대표대회를 앞두고 심복을 요직에 심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비서 장장의 중앙선전부 배치는 리창춘이 가장 고대하던 묘수였다.

하지만 베이징의 한 언론인이 알려온 바에 따르면, 장쩌민 전 주석의 친척인 리창춘은 이번 인사이동에서 후진타오측의 견제를 받아 결국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중앙조직부 리위안차오(李源潮) 부장이 장장의 경력이 일천하다며 부부장 선임을 거절했다. 대신 랴오닝일보 기자와 랴오닝성 위원회 선전부장을 역임한 자오리(焦利)를 부부장으로 승진시켰다. 리창춘은 하는 수 없이 장장을 랴오닝성 선전부 부장으로 보내는 데 동의해야 했다.

후진타오의 직계 세력이 집중 포진하고 있는 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인 리위안차오 부장의 이번 결정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오리는 지난 5월 신임 CCTV 사장으로 발탁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다.

리창춘의 ‘그림자’ 장장은 누구인가

장장은 다롄 출신으로 베이징 중국인민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70년대 중반 ‘지식청년’이 되어 다롄으로 돌아왔다. 글쓰기를 좋아했던 장장은 현지 지식청년과 함께 장펑칭을 스승으로 모시고 문학 창작을 공부했으며, 현지에서 제법 명성을 떨치면서 ‘문학방’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나중에 극작가로 명성을 떨친 가오만탕(高滿堂) 등이 동문수학했다.

장장은 80년대 중반 문학도의 길에서 벗어나 정계에 진출한다. 다롄시 공산당 위원회에서 정책 연구원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시위원회 차오보춘(曹伯純)의 비서가 되었다. 당시 다롄의 권력은 태자당 출신의 보시라이에게 있었고 장장은 차오보춘이 보시라이에게 공격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보시라이와 접촉하기 시작한다. 차오보춘은 이후 티베트 자치구 서기로 임명됐을 때 장장을 비서 겸 판공실 주임으로 데려간다.

장장은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두루 섭렵했으며 글솜씨가 뛰어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언행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정계에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가족과 친구에게 전화할 때도 두세 마디에 불과했다. 보시라이가 감청을 통해 장장을 공격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것도 장장의 신중함 때문이었다. 90년대 말 장장은 차오보춘의 추천으로 광둥성 선전부 부무위원으로 옮겼고, 당시 광둥성 당서기 리창춘의 눈에 띄게 된다. 장장은 리창춘의 뜻대로 남방도시보 등 현지 언론 탄압에 앞장섰고, 이후 리창춘이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비서로 발탁된다. 이후에도 선전부 업무를 주로 맡으며 언론 통제 업무를 담당했고 중국 언론계에 악명을 떨쳤다.

‘내 친구’ 장장의 변절

리창춘은 다롄 사람으로 가족은 아직까지 다롄에 남아 있다. 리창춘은 고향 사람인 장장을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다.

장장은 베이징과 다롄을 오가지만 가오만탕 외에는 다른 친구를 만나지 않는다. 장장은 가오만탕이 극본을 쓴 TV 드라마를 리창춘에게 추천해 그해 전국 대상을 받게 도왔다. 올해 설날에는 가오만탕을 리창춘의 집으로 초대했다. 다롄 제 1 부호의 집으로 가오만탕을 초대해 격려금 30만 위안을 줬다. 가오만탕의 연속극은 회당 6만 위안의 원고료가 책정됐고 그는 원고료로 총 312만 위안을 벌어 문학계의 갑부로 떠올랐다.

사실 나와 장장, 가오만탕은 동고동락한 친구다. 2006년 출소 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을 때 장장은 나를 초대해 식사를 함께 했고 나를 위해 시를 읊어 주었다. 하지만 보시라이를 비판한 기사를 적다 탄압당한 기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 문학방에서 같이 활동했던 한 친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장은 바쁘다며 장례식에 불참해 실망감을 안겨줬다.

현재 50세의 전과자로 토론토에 살고 있지만 1973년 장장을 만나던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당시 나는 다롄 제 15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문학 청년이었다. 연작시를 발표해 제법 이름이 나 있었는데 장장이 나의 시를 읽고 감동했다며 찾아왔다. 나중에 문학 스승인 장펑칭 선생 밑에서 문학 친구가 됐고 가오만탕 등과 함께 글을 쓰고 서로 돌려보며 젊은 날을 함께 했다.

1975년 장장은 장칭을 풍자하는 편지를 썼으며 나와 같이 수정했는데 그는 선비의 의기가 있었다. 나중에 장장은 베이징 중국인민대학에 합격해 호적을 바꿔야 했고 나는 그 과정을 도와줬다. 이후 장장의 첫사랑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나는 진심으로 그를 위로해주고 도와줬다. 장장과 나는 해변에서 시를 자주 읊었다.

90년대 장장이 차오보춘의 비서로 있을 때 나는 몇 번 장장과 일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장장이 관료사회에 물들어 성격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번은 내가 차오보춘을 인터뷰해 탐방 기사를 쓰겠다고 제안했는데 장장은 차오보춘에게 자신이 제안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 초안을 장장과 같이 검토해 발표했는데 어느새 장장의 성과로 되어 있었다.

장장의 마음 속에는 옛날 함께 추구했던 이상과 지향 대신 옛 친구에 대한 냉담, 저속함, 속물 근성이 자리잡았다. 이후 장장이 언론 통제의 선봉에 서게 되었을 때는 참을 수 없는 비통함을 느꼈다. 대만 작가 바이양이 “사람이 관료성이 생기면 인성이 사라진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리위안차오가 장장의 승진을 저지한 것은 잘못된 점이 없다. 리창춘의 악행의 상당수는 장장이 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웨이핑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14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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