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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사 이항복(왼쪽), 매천 황현(오른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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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의인들〉 박석무 지음·황헌만 사진/한길사·2만원
임진왜란 때 이조참판과 형조판서, 대사헌, 도승지를 거쳐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무너진 조선을 떠받치고 재건한 일등공신 백사 이항복(1556~1618)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평생 세력가에게 머리 숙이는 글은 짓지 않았고, 집에 들어오는 선물이나 기증품을 받은 적이 없어,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으나 집안이 가난한 선비 집안과 같았다.”
다산연구소 이사장이자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박석무씨는 <조선의 의인들>에서 권율 장군의 사위이기도 했던 백사를 한음 이덕형, 서애 유성룡, 오리 이원익 등과 더불어 “한 시대를 구제한 분”이라며 “대표적인 조선의 의인이 바로 그였다”고 평했다. 전란 뒤 영의정에 오르고 오성 부원군에 봉해진 백사는 광해군이 이복형제를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서인하려 하자 한음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반대하다 삼수로 유배당해 결국 북청 유배지에서 죽었다. “백사가 63살로 세상을 떠나자 귀양지인 함경도 북청에서 선산이 있는 경기도 포천에 장사를 지낼 때까지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지위의 고하를 묻지 않고 모두 찾아와 울고 절하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장사를 지낼 때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군·관·민이 모두 찾아와 통곡하면서 제물과 제문을 바치는 사람이 끊일 줄 몰랐다.”(신흠이 쓴 ‘오성 부원군 신도비명’)
경주 이씨 백사공파는 대한제국 말 이조판서 이계조와 그의 아들로 영의정이 된 이유원으로 이어졌고, 그의 후손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이승만에 반대해 사임한 성재 이시영이다. 이시영 바로 위 형이 이회영이고 그 위로 건영, 석영, 철영 등 형이 더 있었고 아래로 동생 호영이 있었다. 일제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이들 6형제는 전 재산을 몽땅 정리해 가족과 함께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했으며 또 아나키스트가 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역사가 이덕일은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이회영과 함께 중국에서 활동했던 정화암(정현섭)이 자서전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에서 당시를 회상한 한 구절을 이렇게 인용했다. “남개의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었다.” 이덕일은 전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친 삼한갑족 출신 그 일족의 ‘집단 기획망명’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로 어찌 다 기릴 수 있겠느냐고 했다. 아나키스트가 돼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상하이 황포강 부두에서 영국 선적의 남창호 제일 밑바닥 4등 선실에 자리를 잡던” 65살 노인 이회영과 그 형제들 대다수가 이역에서 객사했을 때 그의 선조 백사의 장례식 때처럼 몰려와 통곡하며 슬퍼한 사람들이나 있었을까.
고산 윤선도까지 이어지는 호남 문학과 학문의 개산조(開山組)라는 <표해록>의 저자 최부에서부터 퇴계와 율곡, 김인후, 한백겸, 유형원, 기정진, 이진상 등을 거쳐 나라가 망하자 저항하다 또는 자진해서 목숨을 버린 최익현과 이만도, 황현으로 이어지는 24인의 삶과 사상. 그 흔적들을 더듬어가는 <조선의 의인들>은 족보학에 밝다는 지은이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해 의인들과 그 사상의 맥을 간결 명료하게 짚어주면서 전통과 역사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왜 오늘의 지식인들은 고전과 전통에 그리도 약한 것인지. 그러니 높은 수준의 역사 창조가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우리 것만 알고 거기에만 빠지는 국수주의도 좋지 않지만, 밖의 것만 알고 우리 안을 모른다면 국적 없는 국제미아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내 나라 내 강산을 노래하고 우리 옛 선조의 경륜과 의혼을 배워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보해야 한다. 이것을 위한 일단의 작업이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찾았던 긴긴 여정이었다.” 지은이는 이 작업을 위해 지난 2년간 24인의 생가와 묘소를 직접 살피고 행장을 재확인하면서 의미를 되새겼다. 20대이던 1960년대 후반 장성의 고산서원을 찾았을 때 세운 뜻을, 유신독재시절 감방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다산 정약용 공부 등 다난했던 성취와 인욕의 40여년 세월이 지난 뒤 마침내 이룬 것이다. 24인은 난세를 극복한 경세가, 성리학자, 실학자, 위정척사의 실천가, 문장가 등 몇 개의 범주로 나눠 묶을 수 있으나 서술순서는 그들의 탄생과 활동 시기를 중심으로 연대순에 따랐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역사 회고하니 글자나 아는 사람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매천의 절명시들은 언제나 사람을 전율케 한다.
<조선의 의인들>은 한길사가 “지나치게 번역도서 비중이 높은 한국 출판계의 현주소를 반성하고, 국내 인문학 저술의 집필을 장려하며, 한국 인문학의 세계적인 위상을 높이기 위해” 시작한 야심찬 기획 ‘한길인문학문고-생각하는 사람’ 시리즈 제2권이다. 첫 책은 샹탈 무페 등 서구 정치철학자 5명과의 대화를 정리한 곽준혁 고려대 교수의 <경계와 편견을 넘어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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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안내] 조선의 의인들 -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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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송범석 기자]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p.484-매천 황현의 유서)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일생을 마친 뒤 후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또 있을까. 그래서일까, 우리나라에는 ‘의’를 위해 목숨과 사익을 초개같이 버린 자랑스러운 선현들이 참 많다.
1910년 간악한 일제의 군홧발 아래 대한제국의 통치권이 넘어가자 울분을 이기지 못한 매천 황현(1855~1910)은 사람 된 도리, 선비 된 도리를 이루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한 번도 정치에 관여한 일도 없고, 녹을 받아 생활한 적도 없었다. 단지 글을 아는 지식인의 책무 때문에 그렇게 했다.
향산 이만도(1842~1910) 역시 국치(國恥)에 단식으로 목숨을 끊어 절의를 지켰다. 백성들의 동요를 의식한 왜경이 강제로 그에게 미음을 먹이려고 하자 향산은 “나는 당당한 조선의 정2품 관리다. 어떤 놈이 감히 나를 위협하는 것이냐”고 꾸짖으며 끝내 먹을 것을 입에 대지 않았다.
이 책은 이렇듯 유교철학을 몸소 실천하며 기꺼이 ‘바르고 옳음’을 택했던 의인 스물네 명의 삶을 담았다.
저자는 2007년부터 2년 동안 나라와 의를 위해 고난을 택한 선인들의 발자취를 찾아다녔다. 유적 탐방을 통해 직접 선조들의 흔적을 더듬어가며 인의(仁義)에 충만한 삶을 길어 올렸다. 깔끔한 사진과 진솔한 글이 잘 어우러지면서 자연스러운 영혼의 울림을 이끌어 낸다. 각 유적에 대한 묘사도 자세하게 돼 있어 저자의 글을 머릿속으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유적지를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유적지를 순례하면서 400여 년 동안 잘 보존된 이항복 묘소의 빗돌을 보며 놀라는가 하면, 찾아가는 길에 푯말 하나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은 이건창의 묘소를 보고 비탄에 빠지기도 한다. 저자는 현장 사진 속 유적에 깃든 선조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매 순간 감동에 가득 찬 목소리를 전한다.
아울러 저자는 문화재를 반듯하게 보존하는 것이 후손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그들이 살다 간 땅, 그곳이 바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었고, 그들이 남긴 숨결이 곧 민족의 혼이었다.”
박석무 지음 / 한길사 펴냄
| 조선을 떠받친 선비의 흔적을 더듬다 |
이황·김인후·한백겸·유형원… 대표적 24인 ‘사상의 맥’ 되짚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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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사 이항복(왼쪽), 매천 황현(오른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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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의인들〉 박석무 지음·황헌만 사진/한길사·2만원
임진왜란 때 이조참판과 형조판서, 대사헌, 도승지를 거쳐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무너진 조선을 떠받치고 재건한 일등공신 백사 이항복(1556~1618)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평생 세력가에게 머리 숙이는 글은 짓지 않았고, 집에 들어오는 선물이나 기증품을 받은 적이 없어,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으나 집안이 가난한 선비 집안과 같았다.”
다산연구소 이사장이자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박석무씨는 <조선의 의인들>에서 권율 장군의 사위이기도 했던 백사를 한음 이덕형, 서애 유성룡, 오리 이원익 등과 더불어 “한 시대를 구제한 분”이라며 “대표적인 조선의 의인이 바로 그였다”고 평했다. 전란 뒤 영의정에 오르고 오성 부원군에 봉해진 백사는 광해군이 이복형제를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서인하려 하자 한음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반대하다 삼수로 유배당해 결국 북청 유배지에서 죽었다. “백사가 63살로 세상을 떠나자 귀양지인 함경도 북청에서 선산이 있는 경기도 포천에 장사를 지낼 때까지 소식을 들은 백성들이 지위의 고하를 묻지 않고 모두 찾아와 울고 절하면서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장사를 지낼 때는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군·관·민이 모두 찾아와 통곡하면서 제물과 제문을 바치는 사람이 끊일 줄 몰랐다.”(신흠이 쓴 ‘오성 부원군 신도비명’)
경주 이씨 백사공파는 대한제국 말 이조판서 이계조와 그의 아들로 영의정이 된 이유원으로 이어졌고, 그의 후손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이승만에 반대해 사임한 성재 이시영이다. 이시영 바로 위 형이 이회영이고 그 위로 건영, 석영, 철영 등 형이 더 있었고 아래로 동생 호영이 있었다. 일제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이들 6형제는 전 재산을 몽땅 정리해 가족과 함께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했으며 또 아나키스트가 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역사가 이덕일은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 이회영과 함께 중국에서 활동했던 정화암(정현섭)이 자서전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에서 당시를 회상한 한 구절을 이렇게 인용했다. “남개의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도 못 잇고 굶은 채 누워 있었다.” 이덕일은 전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친 삼한갑족 출신 그 일족의 ‘집단 기획망명’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로 어찌 다 기릴 수 있겠느냐고 했다. 아나키스트가 돼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상하이 황포강 부두에서 영국 선적의 남창호 제일 밑바닥 4등 선실에 자리를 잡던” 65살 노인 이회영과 그 형제들 대다수가 이역에서 객사했을 때 그의 선조 백사의 장례식 때처럼 몰려와 통곡하며 슬퍼한 사람들이나 있었을까.
고산 윤선도까지 이어지는 호남 문학과 학문의 개산조(開山組)라는 <표해록>의 저자 최부에서부터 퇴계와 율곡, 김인후, 한백겸, 유형원, 기정진, 이진상 등을 거쳐 나라가 망하자 저항하다 또는 자진해서 목숨을 버린 최익현과 이만도, 황현으로 이어지는 24인의 삶과 사상. 그 흔적들을 더듬어가는 <조선의 의인들>은 족보학에 밝다는 지은이의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해 의인들과 그 사상의 맥을 간결 명료하게 짚어주면서 전통과 역사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왜 오늘의 지식인들은 고전과 전통에 그리도 약한 것인지. 그러니 높은 수준의 역사 창조가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우리 것만 알고 거기에만 빠지는 국수주의도 좋지 않지만, 밖의 것만 알고 우리 안을 모른다면 국적 없는 국제미아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내 나라 내 강산을 노래하고 우리 옛 선조의 경륜과 의혼을 배워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보해야 한다. 이것을 위한 일단의 작업이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찾았던 긴긴 여정이었다.” 지은이는 이 작업을 위해 지난 2년간 24인의 생가와 묘소를 직접 살피고 행장을 재확인하면서 의미를 되새겼다. 20대이던 1960년대 후반 장성의 고산서원을 찾았을 때 세운 뜻을, 유신독재시절 감방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다산 정약용 공부 등 다난했던 성취와 인욕의 40여년 세월이 지난 뒤 마침내 이룬 것이다. 24인은 난세를 극복한 경세가, 성리학자, 실학자, 위정척사의 실천가, 문장가 등 몇 개의 범주로 나눠 묶을 수 있으나 서술순서는 그들의 탄생과 활동 시기를 중심으로 연대순에 따랐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한 지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역사 회고하니 글자나 아는 사람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매천의 절명시들은 언제나 사람을 전율케 한다.
<조선의 의인들>은 한길사가 “지나치게 번역도서 비중이 높은 한국 출판계의 현주소를 반성하고, 국내 인문학 저술의 집필을 장려하며, 한국 인문학의 세계적인 위상을 높이기 위해” 시작한 야심찬 기획 ‘한길인문학문고-생각하는 사람’ 시리즈 제2권이다. 첫 책은 샹탈 무페 등 서구 정치철학자 5명과의 대화를 정리한 곽준혁 고려대 교수의 <경계와 편견을 넘어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책과 삶]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한 ‘진짜 보수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ㅣ경향신문
ㆍ전쟁 일어나고 나라 망했을 때 자신부터 버릴 사람 있나 물어▲조선의 의인들…박석무 | 한길사
자신이나 가족보다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한다. 의를 위해선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세상에 뜻이 통하지 않으면 미련 없이 물러나 학문에 정진한다.<조선의 의인들>은 조선 시대를 살아낸 24명의 선비들과 그들의 흔적이 남은 땅을 발로 찾아 쓴 역사서이며 기행문이다. 큰 뜻을 위해서라면 무엇에도 꿇리지 않았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진짜 보수의 이야기다. 때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고지식함에 가슴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이해타산이 개입되지 않은 이들의 행동은 순수하기 이를 데 없다.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 | 한길사 제공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퇴계 이황은 몸이 관직에 있을 때에도 마음은 학문을 향했다. 난진이퇴(難進易退), 즉 벼슬에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는 쉽게 여겼던 그는 벼슬을 받을 때마다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당대 최고 명성을 가진 58세의 대학자가 23세의 청년 율곡 이이를 한눈에 알아보고 충고를 아끼지 않은 대목도 의미심장하다.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에 난리가 나면 훌륭한 재상이 생각난다”는 옛말이 있다. 학문의 성취를 현실의 결과로 이어낸 명재상도 많다. 퇴계의 문하에서 배운 서애 유성룡은 조화와 조정의 대가였다. 조선이 임진왜란의 상처를 극복한 배경에는 서애의 공이 컸다. 백사 이항복은 조선의 의도를 의심하던 명에 필마단기로 들어가 황제의 오해를 푼 재상이었다.
서애 유성룡의 병산서원. | 한길사 제공 나라 위해 목숨을 팽개친 선비들의 기개가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면암 최익현은 세도가의 입에 든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임금의 신하가 되어 마땅히 상소를 해야 할 사건이 있게 마련인데, 입을 꼭 다물고 묵살하며 그저 국록이나 타먹는다면 이는 매우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이다”라는 교훈을 새긴 면암. 그는 대원군의 치세기엔 대원군을 비판하고, 고종의 치세기엔 고종을 비판했다.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1876년에는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꿇어앉아 상소를 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뜻이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대마도의 감옥에 갇혀서는 “왜놈이 주는 것은 쌀 한 톨,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다”며 단식하다가 세상을 떴다. 퇴계의 11대 후손인 향산 이만도는 대대로 학문과 벼슬로 이름이 높았으나, 나라가 망하자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24일간 단식하다가 눈을 감았다. 일본 경찰이 주사기로 미음을 먹이려 하자 “죽이려면 총포로 죽여라”고 소리를 질러 모두를 쫓아냈다. 전쟁이 일어나거나 나라가 망하게 된다면, 자신의 몸부터 버릴 사람이 있는가. 이 책은 묻고 있다. 2007년부터 2년간 경향신문에 연재된 글을 보완해 묶었다. 사진작가 황헌만씨가 저자인 박석무 한국고전번역원 원장과 함께 국토를 누비며 셔터를 눌렀다. 2만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