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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兪吉濬 : 1856〜1914)

굴어당 2010. 6. 23. 01:46

유길준(兪吉濬 : 1856〜1914)은 서울 계동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이다. 외조부 이경직(李耕稙)에게 한학을 배웠으며, 낙산서재에서 민영익(閔泳翊)을 만났고, 박규수(朴珪壽)를 만나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해국도지》등을 탐독하면서 세계정세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김옥균(金玉均),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김윤식(金允植) 등 개화 사상가들과 교우하였다. 

   1881년(고종 18) 민영익의 천거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자와가 운영하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1882년 6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1883년 외무낭관(外務郞官)에 임명되었으며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漢城旬報)》 발간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주미 전권대사 민영익(閔泳翊)을 수행원으로 발탁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에 남아 국비유학생으로 덤머 아카데미(Dummer Academy)를 다녔다. 2년 뒤 국내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고종의 친서를 받고 귀국하는 도중 1885년 대서양을 건너 영국, 포르투갈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인도양을 건너 싱가포르, 홍콩, 일본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길에 일본에서 김옥균을 만났고, 귀국하자마자 개화당으로 몰려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구금기간에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1889년에 탈고했다. 《서유견문》을 통하여 서양의 근대문명을 소개하며 개혁론을 전개하여 갑오개혁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였다. 거문도사건 등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대립이 심하자 조선 중립화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1892년 연금에서 해제되어 외무(外務)의 주사로 발탁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외무참의 등을 역임하며 개혁을 주도하였으며, 1895년 김홍집 내각의 내무협판(內務協辦)을 역임하면서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우체사 설치, 소학교 설치 등을 추진하였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적극 후원하였으며 내부대신에 올랐으나 아관파천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저서를 집필하기도 하고 혁명일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일본 내에서 3년의 유배 생활을 겪었으며, 러일전쟁 후 1907년 순종황제의 특사로 귀국했다. 그는 조선이 개혁에 실패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자초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토 히로부미의 계략인 조선의 '자치육성책'을 오판하여 을사늑약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였지만 한일병합을 용인하지는 않았으며 조선이 부강해지면 국권을 다시 회복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국권을 상실한 뒤 일본정부에서 주는 남작(男爵)의 작위를 거절했으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교육과 계몽 사업에 헌신하였으나 조국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효과로 나타나지는 못했다. 1914년 9월 5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답사 예정지 : 〇 송현동과 재동을 포함한 계동 일대(유길준생가, 민영익 및 박규수의 집) - 출생에서 망명 전까지 〇 한규설의 집과 취운정 - 감금기 〇 소호정, 은로초등학교 등 노량진 흑석동 일대 - 귀국 후 계몽운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