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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鍾繇의 大敍事詩 千字文 易解(종요의 대서사시 천자문 역해) 발간사

굴어당 2010. 6. 28. 10:10

인류문명이 발전을 거듭해오는 역사속에서 지금과 같은 풍요와 번영을 누리던 때는 없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가장 큰 공헌을 하였으며, 그 속도는 더욱 급격히 빨라지고 있다. 개방과 경쟁 그리고 정보화와 세계화로 상징되는 현대사회의 변화속도는 ‘생각의 속도’라 할 만큼 눈이 부시고 현란하다. 한국인에게 딱 맞는 방식이라고 한다.

한국은 1945년 식민지해방 이래 동족간 전쟁의 폐허와 분단이라는 악조건속에서도 세계경제규모 10위권과 GNP 2만 달러를 달성하면서 세계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른 변화를 겪어왔기 때문이다. 초고속 경제성장을 통해 편리한 가전제품, 인터넷, 아파트, 자동차, 풍부한 먹거리, 화려한 의상, 레저여행 등의 풍족한 소비를 하면서 우리나라는 풍요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두 번의 정권교체를 통해 민주주의에 체제도 웬만큼 갖추었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여전히 ‘대한민국 성공신화’를 이어가기 위해 불철주야 분투하고 있다. OECD 국가 중에 한국이 근로시간이 가장 긴 점이나, 입시전쟁을 치르느라 공부시간이 가장 긴 데다, 생계비를 압박할 정도의 사교육비 부담 등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반면 풍요와 번영의 다른 한편으로 개방과 경쟁에서 소외되고 탈락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경제규모에 비해 사회안전망이 취약하다보니 개인적으로 탈락하지 않기 위한 생존경쟁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오로지 경제성장만을 추구해온 사회체제의 부작용과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빈부 격차를 비롯해 각 분야에서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자살률은 세계 1위에 달하며,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인 탓에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것 등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지상주의와 물질주의, 속도주의의 가치관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회병리현상의 배경에는 일시에 달아올랐다가 일시에 식어 버리는 한국인의 조급한 기질과 성급한 ‘빨리 빨리’ 문화와 맞물려 있다. 물론 ‘빨리 빨리’ 기질과 문화 덕분에 한국은 서구의 선진국들이 2~3백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 근대화, 민주화를 5~60년 만에 초고속으로 압축적으로 달성했다. 이는 우리 자신이 자랑스러워할 만한 역사이며 세계가 부러워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이 뒤돌아볼 경황도 없이 앞만 보고 질주하다보니 한국인에게 자기성찰의 문화가 없다는 비판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할 지적이다. 또한 성공지상주의와 물질주의, 속도주의가 횡행하는 사회는 반드시 그 댓가를 치루고 만다는 사실도 가슴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댓가는 혹독했다. 한강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되고, 지하철 공사장이 폭발하고, 유람선이 뒤집혀졌다. 마침내 1997년에 IMF 경제위기까지 겪었다. 더 큰 문제는 한국사회가 혹독한 댓가를 치루고도 현실은 여전히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지고 마는 ‘달리는 자전거’에 올라탄 형국이란 점이다. 勿

이로 인해 한국인의 내면의식(심성)에는 ‘생존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인한 불안 심리’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사회를 획일적으로 지배하는 중심가치관인 성공지상주의와 물질주의, 속도주의가 ‘낙오하거나 도태되거나 탈락하면 (인생)끝이라는 불안심리’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강박관념에 의한 불안 심리는 한국인을 더욱 더 개인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로 내몰고 있다. 그 결과 세계경제 10위권의 경제대국인 한국의 행복지수와 신뢰지수는 저개발 후진국 수준보다도 못하다. 풍요와 번영을 누리고 있는 풍족한 한국사회의 또 다른 불행한 얼굴이다.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풀어나갈 것인가?

漢字인 千字文 공부하는데 왜 한국사회 문제를 장황히 늘어놓는 식의 뜬금없는 소리인가?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본서는 철저히 이러한 문제인식을 토대로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기준에 의하면 한국사회의 불신수준은 위험사회라고 할 정도로 그 도를 넘어섰다. 2008년 법무부 설문조사에 의하면 91%의 사람이 ‘법보다 재산이나 권력의 위력이 더 크다’ 고 답변했다.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부끄러울 정도이다. 동양 최고의 철학서인 주역에 의하면 이러한 한국사회 현상에 대해 ‘否塞(비색)’한 사회라고 한다. ‘否塞’한 사회에서는 ‘인문학적 소양과 사고’가 발 디딜 수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인문학적 소양과 사고’를 등한시 하다 보니 ‘否塞’한 사회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동북아에서 인문학의 역사가 제법 뿌리 깊은 우리나라에서 대학교수들이 해방이후 처음으로 ‘인문학의 위기’를 호소하고 나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무한경쟁의 세계화로 인해 성공지상주의와 물질주의, 속도주의 가치관이 더욱 기승을 부리는데다, 서구의 물질문화가 동양의 정신문화를 압도하면서 동양고전 중심의 인문학은 그 싹마저 멸실될 위기에 처해 있다. 이는 한국이 지난 수십년간 한글전용정책을 강력히 실시하고, 한문문화로부터 이탈하면서 이미 예고된 바였다. 중국의 위세가 급부상하면서 한자의 가치가 높아지자 , 한문 초학자의 입문서로 가장 많이 사용되던 천자문 공부가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 또한 주로 경제적 효용성만을 추구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천자문이 매우 어려운 책이라는 점이다. 천자문이 단순히 1,000글자의 한자를 조합 것이 아니라 동양의 고전문학과, 철학, 역사, 저자의 인생역정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대서사시이자 동양경전 종합교양 입문서이기 때문이다. 그 어렵다고 하는 주역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철학적인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다른 외국어와 달리 뜻글자인 한자는 외우기만 한다고 공부를 다한 것이 아닌 이유이다.이러한 기초 지식없이 천자문 공부를 하다가는 오히려 한문공부에 싫증을 내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어린아이에게 천자문 공부를 억지로 시키는 일이 천수 백년간 되풀이되고 있다. 한문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표의문자(뜻글자)이다. 뜻글자 문화권은 소리글자인 표음문자 문화권에 비해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다. 한문문화 자체가 인문학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동양경전을 바탕으로 하는 한문문화를 복원하고 확산시키는 것 자체가 죽어가는 인문학을 살리는 방안의 하나라고 본다.

따라서 본서는 단지 1,000글자의 한자를 외우고 익히자는 차원에서 집필한 책이 결코 아니다. 천자문의 글귀마다 관련 경전의 출처와 배경과 의미를 밝히고 아울러 관련된 경전 내용을 인용하여 종합적으로 해설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한자의 기원이 주역의 괘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혀내고, 주역의 이치를 담은 數와 象에 근거해서 글자를 파자(破字)하여 해설하였다.
단언하건대 천자문 공부야말로 한자 외우기를 넘어 窮理盡誠의 인문학적 소양과 사고를 키우는 학습이라는 의미이다. 부디 이 책이 동양경전에 대한 인문학 공부길에서 하나의 밀알로 싹 틔워지기를 바랄 뿐이다.

2008.10
발행인 政山 이 달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