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어당

굴어당의 한시.논어.맹자

http:··blog.daum.net·k2gim·

열하를 여행하며 시를 짓다.유득공 지음 |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김 | 휴머니스트

굴어당 2010. 8. 15. 23:30

조선 후기 대표적 지식인 유득공의 시로 열하를 가다!

조선 후기 정조 시절의 북학파를 대표하는 문인 유득공의 『열하를 여행하며 시를 짓다』. 저자가 1790년 청나라 건륭제의 팔순 생일 축하 사절단으로서 열하에 다녀와 저술한 연행록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를 현대적 감각으로 역주한 것이다. 열하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날카로운 관점과 섬세한 문체로 형상화한 빼어난 시로 이루어져 있다. 시마다 저자의 친절한 해설이 덧붙여져 있어 이해를 도와준다. 조선 후기에 유행처럼 번진 중국중심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주체적 역사 의식도 엿볼 수 있다.

☞ 북소믈리에 한마디!
저자가 열하뿐 아니라, 북경에서 만난 지식인들과 활발히 지식을 교류하면서 주체적 관점으로 아시아를 조망한 것이다. 연행의 개인적 감상을 시로 형상화하여 연행문학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그러나 시는 굉장히 함축적이므로 꼭 해설을 참고해야지만 이해가 쉽다. 아시아에 사는 민족에 대해 생생하게 소개한다. 특히 18세기 한국과 중국의 문화 교류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저자소개

저자 유득공 柳得恭, 1748~1807
자는 혜보(惠甫), 호는 영재(泠齋)·고운(古芸)이며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서족 출신으로, 20대부터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북학파’ 또는 ‘이용후생학파’로 불린다. 정조의 지우를 입어 규장각 검서(檢書)로 발탁된 뒤, 제천·포천·양근 군수 및 풍천부사를 역임하는 등 내외직을 오가며 국고·문헌 정리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시에도 뛰어나 이덕무·박제가·이서구와 함께 조선후기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역사에 관심이 많아 《발해고(渤海考)》를 편찬하였으며, 우리나라 옛 도읍지를 돌아보고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를 지었다. 연행을 세 차례 다녀왔는데, 1790년 열하를 다녀온 뒤에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를 지었다. 이 작품에는 연행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예리한 시선과 섬세한 필치로 형상화한 유득공의 빼어난 시들이 실려 있을 뿐 아니라, 화이론(華夷論)과 같은 중국중심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주체적 역사의식이 담겨 있어 여타의 연행록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받고 있다. 이외에도 《영재집》, 《사군지四郡志》,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경도잡지京都雜誌》,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 《병세집竝世集》, 《발합경》, 《삼한시기三韓詩紀》 등의 저술이 있다.

역자 실시학사實是學舍 고전문학연구회古典文學硏究會
벽사 이우성 선생과 젊은 제자들이 모여 우리의 한문 고전을 정독하고 연구하는 모임이다. 1993년부터 매주 한 차례씩 독회를 열어 고전을 강독해왔고, 그 결과물의 일부를 《이향견문록》, 《조희룡 전집》, 《변영만 전집》 《완역 이옥 전집》 등으로 정리해 출간하였다. 고전 텍스트의 정독이야말로 인문학의 기초이자 출발점임을 명심하며 회원들은 이 모임의 의미를 각별히 여기고 있다.

김영죽(金玲竹)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강사
김용태(金龍泰)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김진균(金鎭均)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수석연구원
김형섭(金炯燮) 경기도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원
서경희(徐京希) 성균관대학교 학부대학 강사
손혜리(孫惠莉)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신익철(申翼澈)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윤세순(尹世旬)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연구교수
이신영(李信暎) 한국고전번역원 전문 역자
이철희(李澈熙)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이현우(李鉉祐)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연구교수
최영옥(崔煐玉)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연구원
한재표 세명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강사

목차

책을 펴내며
해제 - 1790년 유득공의 열하 여행과 《열하기행시주》
일러두기

서문
압록강鴨綠江
심양서원瀋陽書院
주류하周流河
신점新店
세하細河
의주義州
만자령蠻子嶺
조양현朝陽縣
라마구喇嘛溝
야불수夜不收
건창현建昌縣
평천주平泉州
홍석령紅石嶺
열하熱河
분장한 배우들의 연극扮戱
연회에 참석하다入宴
만주滿洲의 여러 왕諸王
몽고蒙古의 여러 왕諸王
회회回回의 여러 왕諸王
안남왕安南王
남장南掌의 사자使者
면전緬甸의 사자使者
대만臺灣의 생번生番
발발餑餑
시표時標
난평현灤平縣
고북구古北口
원명원圓明園
결채結綵
가산假山
서직문 밖에서西直門外
감달한堪達漢
산호수珊瑚樹
서산궁전西山宮殿
기효람紀曉嵐 대종백大宗伯
어사御史 반추루潘秋●
이묵장李墨莊·이부당李鳧塘 두 태사二太史
연성공衍聖公
나양봉羅兩峰
장수옥張水屋
오백암吳白菴
장복조莊復朝 중서中書
유환지劉鐶之·완원阮元 두 태사二太史
웅방수熊方受·장상지蔣祥墀 두 서상二庶常
철야정鐵冶亭 시랑侍郞
복건장군福建將軍
신점新店
심양瀋陽
봉성鳳城

열하기행시주 원문
1790년 사은사행 여정
유득공이 교유한 외국인들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유득공은 열하와 북경에서 만난 아시아의 각국 인사들과 활발히 접촉하면서 주체적 시각으로 아시아를 조망하였다. 박지원이 산문을 통해 연행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면, 유득공은 한시를 통해 연행문학의 또 다른 경지를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 조선후기 대표 지식인 유득공, 열하를 여행하며 시를 쓰다

<이 책의 개요>


이 책 《열하를 여행하며 시를 짓다》는 18세기 대표적 지식인 유득공이 1790년 건륭제의 80회 만수절을 맞아 조선에서 파견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열하와 연경(북경)을 다녀온 후 쓴 연행록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를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에서 옮기고 엮은 책이다.
유득공은 조선후기 정조 때의 북학파 문인으로서 빼어난 시적 재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학자적 면모도 유감없이 발휘했던 인물이다. 그는 세 차례 중국 땅을 밟았는데, 첫 번째는 그의 나이 31세 때인 1778년, 두 번째는 1790년, 세 번째는 1801년이다. 《열하기행시주》는 바로 두 번째 사행(使行)인 1790년의 기록이다.
이 책은 가장 큰 특징은 기록의 형식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연행록이 일기체의 산문 형식인 것과 달리 《열하기행시주》는 시(詩) 형식으로, 총 49편의 7언절구(七言絶句)와 각 시편들에 대한 작자의 상세한 주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유득공은 이덕무·박제가·이서구와 함께 조선후기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불렸을 만큼 시로써 이름을 드높였다. 《열하기행시주》는 평면적 산문 기록을 넘어 연행의 개인적 소회를 시로써 형상화한 점이 돋보이는데,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산문으로 연행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면, 유득공은 한시를 통해 연행문학의 또 다른 경지를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열하기행시주》에는 다른 연행록에는 없는 안남(安南 : 베트남), 남장(南掌 : 라오스), 면전(緬甸 : 미얀마) 등과 같이 아시아 여러 민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실려 있어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더불어 18세기 조선의 지식인 유득공이 지닌 중국(청)과 아시아 여러 민족에 대한 역사 인식을 읽을 수 있다는 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유득공은 규장각 검서로 있으면서 박학한 지식을 쌓아온 만큼, 연행의 내용이 다른 연행록에 비해 풍부하다. 특히 그의 시와 주석의 행간에서 아시아를 향한 열린 시각을 읽을 수 있다.
부록으로 《열하기행시주》의 원문, ‘1790년 사은사행 여정’, 당시 ‘유득공이 교유한 외국인들’에 대한 짤막한 소개글을 실었다. 특히 ‘사은사행 여정’은 1790년 사절단의 일행이었던 서호수의 《연행기》의 기록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이다. 《열하기행시주》 역주본의 출간을 계기로 동일한 시기 쓰인 다른 여러 연행록과의 비교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2. 역사적 통찰력으로 가득한 시와 주석

<자료적 가치 1>


《열하기행시주》은 7언절구 연작시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시들은 열하를 가기까지의 여정, 열하에서 만난 동아시아 제 민족에 대한 단상, 인물평 등을 주제어로 삼은 것들로, 이 함축적인 시 작품의 이해를 위해서 유득공은 시마다 상세한 ‘주석’을 덧붙이고 있다. 주석에는 열하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역사에 대한 고증, 그리고 작자의 견해를 펼치는 논설적 성격의 글로 가득하다. 유득공 하면 《발해고(渤海考)》와 《사군지(四郡志)》를 쓴 역사가의 이미지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열하기행시주》에서도 바로 그러한 역사적 통찰력을 확인할 수 있다.

3. 아시아 여러 민족에 대한 생생한 기록과 열린 자세

<사료적 가치 2>


18세기에 박학(博學)으로 유명했던 성해응은 자신의 필기 《난실담총(蘭室譚叢)》에서 《열하기행시주》의 주석 내용을 발췌, 초록하였으며, 19세기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열하기행시주》를 활용하였다. 한중 문화교류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로 선구적 업적을 남긴 후지쓰카 지카시(藤塚?)는 조선시대 연행과 관련된 대표적 기록으로 《담헌연기(湛軒燕記)》, 《열하일기》와 함께 《열하기행시주》를 거론하고 있는데, 이러한 정황을 미루어 《열하기행시주》에 수록된 각종 정보가 당시에 매우 요긴한 것이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정보가 그러할까?
《열하기행시주》에 드러난 유득공의 행적과 관련하여 가장 인상적인 면모는 그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자세이다. 유득공은 서호수의 종관 신분이었던 만큼, 공식 외교업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그는 박제가와 함께 아시아 각국에서 모인 축하사절단 인사들과 자유롭게 만나며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는 몽고(蒙古)와 회회(回回)의 제왕(諸王)들과 친해져 온갖 농담을 하며 못하는 말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안남(安南 : 베트남), 남장(南掌 : 라오스), 면전(緬甸 : 미얀마) 사절단에 대한 기록과 묘사가 치밀하다. 한중 문화교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각국 사신들과의 교류를 통해 아시아를 향한 열린 그의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유득공은 당시 동아시아를 시야에 둔 거시적 안목을 지닌 학자였다.

4. 18세기 한중 문화교류의 생생한 보고(報告)

<사료적 가치 3>


최근 학계에서는 일국 중심적 역사 연구에서 벗어나 더 넓은 국제적 안목으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고 있다. 따라서 연행록과 일본통신사 관련 자료들을 통해 한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열하기행시주》는 한국과 중국의 문화교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에는 중국의 학자들과 교류한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는데, 조선에서의 일방적 요구가 아닌 청국 학자들 또한 교류를 원하고 있었고, 이런 교류가 일회적인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어, 당시 청조의 지식인들의 모습과 그들의 고민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책속으로 추가>
장수옥의 이름은 도악(道渥)이고, 강소성 양주부 사람이다. (중략) 양봉 나빙의 처소에서 서로 보게 되었는데, 부채에 시를 써서 내게 주었다. (중략) 나와 차수를 청하여 가서 술을 마시려 하는데 양봉이 화를 내며 손님을 빼앗아 간다고 하자, 수옥 또한 성을 내어 그 자리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남고 차수가 떠나서 겨우 미봉이 되었다.
- 본문 <장수옥> 중에서(151쪽)

완원의 자는 백원(伯元)이니, 강소 의징(儀徵) 사람으로 한림편수(翰林編修)이다. 유환지의 자는 패순(佩循), 호는 신방(信芳), 산동 제성현(諸城縣) 사람으로, 한림검토(翰林檢討)이다. 내가 객관에 머물 때 두 사람이 함께 수레를 타고 와서 객관의 앞에 배회하였지만 누구도 맞아서 접대하는 사람이 없자 섭섭한 태도로 돌아가려 하였다. 내가 그들을 청하여 캉에 이르게 하여 함께 말을 해보니 모두 명망 있는 선비였다. 그들이 말하기를, “지난해 우리 모두 서길사(庶吉士)로 있으면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신들과 서로 알고 지냈습니다. 지난해 왔던 사람이 어찌 한 사람도 오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꼭 다시 오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완백원의 저서 중에 《거제고기(車制考紀)》가 있는데, 대종백이 그 고증한 것이 정밀하고 자세하다고 자주 칭찬하였다는 것을 내가 열거하며 말하였더니 백원이 환한 얼굴로 좋아하였다. - 본문 <유환지ㆍ완원 두 태사> 중에서(159~160쪽)

책속으로

주지하다시피 연행록은 일기체의 산문 형식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열하기행시주》는 자신의 체험을 단순히 기록하는 평면적 차원에서 성큼 나아가 여정을 시로써 형상화하여 연행록을 더욱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게다가 유득공은 사절단의 막하(幕下)였기 때문에 공식 임무를 수행해야 되는 정사나 부사보다 행동이 자유로웠고, 규장각 검서로서 많은 책을 접했던 박학다식한 교양을 바탕으로 다양한 견문을 읊고 적어서 연행의 내용도 풍성하다.
이제 역주된 《열하기행시주》가 출간되었으니 유득공의 연행길을 시로써 음미하며 찾아가는 색다른 독서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시 한 편 한 편에 대한 유득공의 친절한 해설은 이 연행시집의 길잡이가 되어 독자들이 좀 더 쉽게 연행시들을 감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한편 학계에서는 유득공의 연행록 연구뿐 아니라 1790년 연행에서 산생된 다른 연행록들과의 비교 연구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 <책을 펴내며> 중에서(5~6쪽)

수레가 산등성이를 따라 수십 리를 가니 큰 고개가 있었는데 시속에 만자령이라고 불렀으며, 만자령 아래에 거주하는 100여 호의 민가를 만자촌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혹 잘 모르고 그들에게 “당신은 몽고인입니까?”라고 물으면, 고개를 흔들며, “아니오. 우리는 만자(蠻子)입니다”라고 말했다. 부녀들이 빼곡하게 문에 서서 구경하는데, 의상이 남루했고 또한 모두 전족을 하고 있으니, 대개 만자는 한인(漢人)인 것이다. 원나라 때부터 이미 만군의 칭호가 있었는데, 만(蠻)은 아름다운 칭호가 아닌데도 그들은 스스로 자랑삼으니 가히 우습고 연민할 만하다.
그곳은 만자와 몽고인이 섞여 살고 있으며, 만자는 몽고 땅을 경작하고 몽고에 그 조세를 바쳤는데, 몽고는 목축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은 흙담, 초가집, 네모 창, 판잣집의 풍속이 마치 우리나라 시골의 것과 흡사했다. 내 수레를 모는 자가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바로 몽고인으로 분별해냈다. 내가 그것을 기이하게 여겨 물었다. “만주·몽고·만자의 면목이 서로 비슷하고 의상과 모자도 비슷한데, 너는 어떻게 그것을 구분하는가?” 그러자 수레를 모는 자가 웃으며, “바지 입구가 넓게 트여서 느슨하게 허리띠를 매고, 바지 입구를 뒤집어서 거꾸로 드리워 배와 배꼽이 전부 드러난 자가 몽고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풍속 또한 그러함을 깨달았다. 고려 때 원나라를 본받은 것이다. - 본문 <만자령> 중에서(49~50쪽)

내가 가만히 안남의 사정을 생각해보매, 저 여씨란 자가 대대로 극악한 짓을 저질러 백성들은 원망하고 귀신들은 노하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천명과 단절한 것이다. (중략) 그러한 사정이 없이 하루아침에 임금과 신하를 바꾸었다면, 안남이 비록 바다 밖의 작은 나라라고 하지만 어찌 충의의 선비가 없었겠는가? 황제가 팔기의 군대를 동원하여 남쪽을 정벌한 여세를 몰아 옛 임금을 붙잡아 없애고, 새로운 임금을 불러다가 의관을 하사하여 어루만지고 총애하여 보냈는데도 안남의 선비들은 장차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었을 뿐이란 말인가? 여씨 왕조 3백년의 은택이 남아 있었다면, 반드시 팔뚝을 휘두르고 눈물을 뿌리며 격문을 돌려 광평의 죄를 성토하며 무리 지어 일어나 완씨를 공격하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황제가 내버려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권위가 손상되는 것이고, 군사를 일으켜 벌준다면 아무리 죽여도 다시 일어날 것이다. 창기(?氣)와 역병이 창궐하는 땅에서 군대를 자주 일으킨다면 승패는 알 수 없는 것이요, 양광(兩廣) 땅도 소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 본문 <안남왕> 중에서(91~92쪽)

(중략) 열하에 온 자는 합밀왕과 오십왕(백극과 비슷하지만 또한 왕이라 칭한다)으로, 나와 가장 친하였다. (중략) 그 왕들은 한어와 몽고어, 청나라 말을 잘하였다. 매일 서로 만나 내가 우리나라 말을 하면 회회왕은 회회 글자로 번역하고, 회회왕이 회회 말을 하면 나는 우리나라 글자로 번역하였는데, 한어로 질정하였다. 왕들은 매우 총명하여 한 번 번역하면 곧바로 암송하였다. 만주?몽고?회회의 여러 왕들은 대개 모두 각국의 말을 하여 이야기하는 중에 아무 나라의 말로 물으면 그 나라의 말로 대답하니, 매우 짧은 시간에 변환하고 끝없이 순환하여 웃으며 즐거워하였다. 이것은 천하가 크게 힘써야 하는 바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이것에 매우 어두워 회회?몽고?만주어는 말할 것도 없고, 비록 한어라도 또한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무식한 자는 한어를 오랑캐 말이라고 하는데, 오랑캐 말을 배우는 것이 또한 어찌 쓰일 때가 없겠는가? - 본문 <회회의 여러 왕> 중에서(82~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