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佛敎)와 한시(漢詩) 이은영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西紀 1세기 경부터 佛經이 한문으로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동안 공부한 스님이 아니면 한자로 된 불경을 읽어도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반 사람들이 알기 쉽고 외우기 쉽도록 한문으로 글자 수를 맞추어 풀이해놓았으니 이를 偈頌(게송)이라 한다.
偈頌은 운율을 따르지 않았으며, 내용도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거나 교리를 소개한 것이기 때문에 詩라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지금도 여러 스님들이 偈頌을 쓰고 있으며, 스님들과 신도들이 교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지침으로 삼고 있다.
몇 가지 偈를 소개한다.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無常偈>
모든 일은 덧없고 항상 일정치 않은 것이니 이점이 곧 생겨나고 없어지는 법이라
생겨나고 없어짐을 모두 다 버리면 헛되고 망령됨이 사라지고 큰 즐거움이 온다. (열반경)
諸法從緣生 如來說是因 是法從緣滅 是大沙門說 (제법종연생 여래설시임 제법종연멸 시대사문설) <法身偈>
모든 법은 인연에 따라 생겨난다. 여래불이 그 인연을 설법한다.
이 법은 인연에 따라 없어진다. 이것이 대사문의 설법이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지 약 500년이 지난 6세기 초 達磨大師(달마대사)가 少林寺(소림사)에 자리 잡고
禪宗(선종)을 創始(창시)하였다. 禪宗은 깨달음을 중시하는 종파이기 때문에
단순히 교리나 경전을 번역하는 수준을 넘어 깨달음을 한자로 표현해야 하게 되었다.
자연히 偈頌은 이때부터 상징과 비유 등 시적 표현기법과 운율을 갖춘 시의 형식을 띄게 되었다. 이를 禪詩라 한다.
선시는 漢詩가 발달한 그 당시 당나라의 문학적 풍토에 영향을 받았음은 당연하다.
게송과 선시의 차이는 한마디로 내용에서 禪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 할 수 있겠다.
달마대사가 창시한 선종은 不立文字(불립문자), 敎外別傳(교외별전)을 宗旨로 삼았다.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고(불립문자) 가르침의 본뜻으로 전해오는 진리(교외별전)를 추구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이 원칙 아래에서 수행하는 방법의 차이로 인한 慧能(혜능)과 神秀(신수)의 頓悟漸修論爭(돈오점수논쟁)이
다음과 같은 詩로 전해 내려온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 (신시보리수 심여명경대 시시근불식 물사야진애) <神秀>
이 몸은 보리수 마음은 맑은 거울 자주자주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와 때 묻지 않게 하리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보리본무수 명경역비대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 <慧能>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거울 역시 바탕이 아니네 본래 아무 것도 없을 진데 어느 곳에 때가 묻겠는가
선종의 제5대 祖師인 弘忍(홍인)이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제자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였다.
신수는 귀족 출신의 지식인이었으나 혜능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꾼으로 살다 절에서 부엌일을 하던 미천한 신분이었다.
신수는 지식인답게 열심히 배우고 익혀 도를 깨닫겠다고 勇猛精進(용맹정진)의 각오를 내세운 반면에
혜능은 無念無想(무념무상)에서 홀연한 깨달음이 나온다는 頓悟의 뜻을 설파했다.
결국 혜능이 제 6대 조사로 법맥을 잇게 된다. 선종의 교리 상 頓悟가 漸修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이 난 것이다.
이후에도 불교에서 한시는 대부분 문학 이전에 진리와 깨달음을 전달하는 매체로 활용되었다.
사대부들의 한시가 주로 도교와 유학의 영향을 받았다면,
선시는 불교의 영역에서 일반 한시와는 달리 彼岸의 세계를 표현하는 독자적인 주제를 가진다.
그래서 선시와 한시의 차이는 역시 禪의 有無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禪이란 무엇인가? 禪이란 집착에서 벗어나 본성과 실체를 추구하는 정신활동이다.
禪을 수행하려면 잊고, 벗어버리고, 끊고, 뛰어넘는, 忘脫斷超(망탈단초)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시를 짓는 마음 또한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선과 시를 설명하는 元好問의 이 글이 지금까지 많이 인용되고 있다.
詩爲禪客添花錦 禪爲詩家切玉刀 (시위선객첨화금 선위시가절옥도)
시는 선에게 비단에 꽃을 더하는 것이요 선은 시에게 옥을 다듬는 칼과 같다
詩는 禪에게 있어 모양을 예쁘게 꾸며주는 錦上添花(금상첨화)의 역할을 하고,
선은 시에게 알맹이를 넣어 주는 切磋琢磨(절차탁마)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후세에 어느 시인은 ‘선이면서 선이 없는 것이 시요, 시이면서 시가 없는 것이 선이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이 말대로 하자면 선시를 음미하는 것이 禪을 행하는 것임은 자명하고,
그냥 시를 읽는 것 또한 禪일 터이니 參禪하는 마음으로 이 시들을 음미하면 마음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 것이다.
月夜瞻鄕路 浮雲颯颯歸 (월야첨향로 부운삽삽귀)
緘書參去便 風急不聽廻 (함서참거편 풍급불청회)
我國天涯北 他邦地角西 (아국천애북 타방지각서)
日南無有雁 誰爲向林飛 (일남무유안 수위향림비)
달밤에 고향 가는 길 쳐다보니 뜬구름이 바람 타고 돌아가네
저 구름 편에 편지를 부치려하나 바람이 급해 하고픈 말 들리지 않겠네
우리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는데 남의 나라 서쪽 모퉁이까지 왔노라
남쪽 나라 천축에는 기러기도 없는데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날아서 가려나 - 慧超(혜초)
往五天竺國傳(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출신 당나라 유학승 慧超(혜초)의 詩다.
인도에 가서 성지를 순례하고 佛道를 닦으면서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스님이 지었다고 모두 선시는 아니다. 이 시는 나그네 길에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표현한 일반적인 한시라 하겠다.
이제부터 대표적인 선시 몇 수를 소개한다.
懷州牛喫草 益州馬腹脹 (회주우끽초 익주마복창)
天下覓醫人 灸猪左膊上 (천하멱의인 구저좌박상)
회주 땅의 소가 풀을 뜯어 먹는데 익주에 있는 말의 배가 뻥뻥하다
내가 아파 이름 난 의사를 찾았더니 돼지 왼쪽 어깨에다 뜸을 떠주더라
고려시대 선승 眞覺國師 慧諶(진각국사 혜심)이 깨달음의 경지를 설명하며 예를 들어 던진 선시다.
회주와 익주는 부산과 신의주 보다 더 멀어 수만리 떨어져 있다. 아픈 사람은 따로 있는데 엉뚱하게도 돼지에게 뜸을 뜬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너와 나를 분별하지 않으며,
우주 삼라만상과 모든 생명이 하나가 되는 解脫(해탈)의 세계를 어찌 조리에 맞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위에 소개한 시가 佛法을 가르치는 일종의 傳法詩(전법시)다.
逍遙堂 太能(소요당 태능)스님의 전법시 한 수를 소개한다.
百千經卷如標指 因指當觀月在天 (백천경권여표지 인지당관월재천)
月落指忘無一事 飢來喫飯困來眠 (월락지망무일사 기래끽반곤래면)
수만 권의 경전은 손가락질 같아서 손가락 따라서 하늘에 있는 달을 보지만
달이 지고 손가락 또한 잊어도 아무 일 없으니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게나
온갖 경전에 쓰인 교리는 그저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보면 뭐하나. 달은 진리 또는 본질이요, 손가락은 경전 또는 수행법을 의미한다.
수단이나 도구에 집착하지 말고 목적이나 본질을 추구하라는 뜻으로 손가락만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이 스님은 진리건 경전이건 모두 다 헛된 것이라 말한다.
깨달음의 경지는 생각과 분별 모두를 버리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듯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자연스런 상태는 삶과 죽음에서 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스님들이 죽음을 맞이하며 그 느낌을 표현한 涅槃頌(열반송)이나, 임종하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臨終偈(임종게)가 있다. 이 시들을 통해 스님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閱過行年六十七 及到今朝萬事畢 (열과행년육십칠 급도금조만사필)
故鄕歸路坦然平 路頭分明曾未失 (고향귀로탄연평 로두분명증미실)
手中纔有一枝筇 且喜途中脚不倦 (수중만유일지공 차희도중각불권)
지나온 세월 예순 일곱 해 오늘 아침 이르러 모든 일 마쳤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넓고 평탄해 앞길이 분명하니 헤맬 일 없겠다
내 수중엔 겨우 지팡이 하나뿐이지만 발걸음 가볍게 하리니 이 역시 기쁘다 - 圓鑑國師 沖止(원감국사 충지)
고려시대 圓鑑國師 沖止(원감국사 충지)스님의 열반송이다.
숙제를 다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향 찾아가듯 저승으로 가는 이 스님의 경지를 속세의 인간이 어찌 알 수 있으랴.
千思萬思量 紅爐一點雪 (천사만사량 홍로일점설)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니우수상행 대지허공렬)
천 가지 만 가지 생각들이 붉은 화로 속의 눈송이 한 점
진흙 소가 물 위를 걸어가니 하늘과 땅이 찢겨 진다 - 西山大師
임진왜란 당시 승군장이었던 西山大師의 임종게다.
이승에서 일어났던 여러 일들을 생각해 보니 모두 헛될 뿐이다.
사람 한평생이 화롯불에 떨어져 금세 사그라지는 눈송이 하나에 불과하다.
진흙이 물에 녹아 없어지듯 이 육신도 먼지가 되어 흩어지리니 하늘과 땅이 열려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도다.
近世(근세)에 들어 畵家(화가)들이 抽象畵(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추상화를 보면서 이 그림이 무슨 형태를 묘사 하였나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혹은 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 추상화다.
선시도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하늘과 땅이 찢어진다는 마지막 구절은 읽는 이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도 있으리라.
선시는 내용에 따라 앞에서 소개한 傳法詩와 涅槃頌(臨終偈라고도 함) 외에 悟道頌(오도송)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남아도처시고향 기인장재객수중)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紅 (일성갈파삼천계 설리도화편편홍)
남아가 가는 곳 그 어디나 고향이건만 나그네 시름에 겨운 사람 그 몇 이던가
한 소리 질러 온 우주를 깨우쳐 밝히니 펄펄 날리는 눈 속에 복사꽃이 보인다. - 卍海(만해) 한용운
항일운동가, 불교사상가, 시인으로 집약되는 卍海(만해) 한용운 스님의 오도송이다.
스님은 기미독립선언(3.1운동)을 주도하고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민족지사다.
1917년 12월 3일 밤 10시 경 설악산 오세암에서 좌선 중 홀연히 깨달음을 얻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진리는 피안의 세계가 아닌 현실 속에서 찾아야 한다.
눈보라와 삭풍이 몰아치는 춥고 엄혹한 세상이지만 나의 일편단심은 붉은 꽃과 같다”고 일갈하였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현존하는 세계 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의 원 제목은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록)이다. 줄여서 直指라고 한다.
1377년 우리나라에서 간행되어 구텐베르그 보다 약 70년 앞선다.
이 활자본의 著者인 白雲和尙 景閑(백운화상 경한)스님의 禪詩에서 성철스님이 빌려와 유명해진 法言이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原典을 소개한다.
平常心是道 諸法觀體眞 (평상심시도 제법관체진)
法法不相到 山山水是水 (법법불상도 산산수시수)
평상시의 마음이 바로 도라네 모든 법은 보이는 그대로가 진실일세
법과 법은 서로 상관하지 않으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세
평상심이 곧 禪이요.
있는 그대로가 진리일 터이니 禪이든 法이든 분별 말을 일이다.
禪은 禪이요 詩는 詩다. 그리고 禪詩는 禪이자 詩다.
출처 :선도회 영하산방 원문보기▶ 글쓴이 : 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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