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
저자 : 이정구(李廷龜)

젊어서 나는 나라 안의 유명한 산을 많이 유람하였다. 그러나 관동만은 그러지 못했다. 갑자기 벼슬이 높아지고 점점 나이도 들어 몸이 부자유스럽게 되니 진작에 찾아보고자 했던 뜻이 더욱 어긋나 항상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계묘년(1603년, 선조 36년)에 함흥부(咸興府)의 화릉(和陵)을 새로 고쳐 단장하였는데 반드시 예관(禮官)이 왕명을 받들어 살펴야 했다. 그 때 예부의 일을 맡고 있던 나는 외람되지만 그 곳으로 가고자 힘을 썼는데 조정의 의론도 막지 못했다. 내가 굳이 그곳으로 가려고 한 것은 돌아오는 길에 안변(安邊)에서 흡곡(歙谷), 통천(通川)을 거쳐 총석정(叢石亭), 삼일포(三日浦)를 두루 유람하고 또한 유점사(楡店寺)에서부터 금강의 내외산(內外山)을 모두 답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8월 초1일. 왕을 알현하고 겸직 중이던 비국(備局)과 빈객(賓客)의 직임을 사직시켜 줄 것을 청했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을 도와 정사를 맡아 보는 예관의 수장이 멀리 나갈 수 없다는 이유로 유보시키신 것이다. 떠나갈 날짜가 임박했다고 생각하여 다시 주청하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흡곡(歙谷)의 수령이 된 석봉(石峰) 한경홍(韓景洪)은 임금께 사은하고 동문(東門) 밖에서 나와 함께 묵었다. 나는 노비를 거느리지 않고 풍각장이 함무금(咸武金)만을 데려갔다. 내가 석봉에게, “다행스럽게도 이번 여행은 하늘이 참으로 아름다운 인연을 빌려 주어 그대가 다스리는 고을로 동행하게 되었네. 게다가 내가 간다는 소식을 들으면 간성을 다스리고 있는 간이(簡易) 최입지(崔立之)가 반드시 와서 함께 선산(仙山)에 들어갈 것이니 어찌 천고(千古)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맡은 일을 끝내고 보름 후에 돌아갈 것이니 그대는 먼저 가서 기다리시게나.” 라고 하였다. 석봉(石峰)이 말하기를, “저야말로 어르신의 막객(幕客)으로 이번에 영외(嶺外)로 함께 떠나게 되었으니 영광입니다. 더욱이 신선이 사는 곳에서 어르신의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동쪽에서 뗏목을 타고 오래도록 노는 것만이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신안(新安)역에 이르렀다. 역졸이 앞의 왼쪽 길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여기서부터 통구(通構)를 거쳐 빙돌아 단발령에 이르게 되는데, 1백 리가 조금 넘습니다." 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됐다. 가마를 멈춰 율시(律詩) 한 수를 읊조리고 무금(武金)에게 한 곡조 불게 한 뒤 지나갔다. 회양(淮陽)에 이르렀다. 태수 한수민(韓壽民)이 술자리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했는데, 술자리가 매우 훌륭했다. 내가 시를 벽 위에 남겨 놓고 떠났는데 시는 다른 문집(文集)에 있다.
11일, 함흥부에 닿았다.
13일, 화릉의 일을 끝냈다.
14일, 함경도 관찰사 한면숙(韓勉叔)이 풍패관(豐沛館)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각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모였다.
15일, 비가 많이 와서 달을 보지 못했다.
16일, 늦게 개었다.
떠나려고 하니 관찰사가 한사코 붙들며 만세교 유람을 청했다. 저녁 무렵 성밖 1리쯤에 있는 낙민정(樂民亭)에 함께 올랐다. 병란에 불타버리고 터만 남아 있었지만 자못 맑고 상쾌하였다. 만세교는 그 아래에 있었다. 그 깊이가 한 길 남짓은 되어 보이는 강은 넓거나 좁지도 않고 얕거나 깊지도 않았다. 강물의 고르기가 마치 소반 같고 물가의 모래는 마치 하얀 눈 같았다. 다리 길이는 약 3리 정도나 되었다. 큰 비가 방금 그치고, 하늘이 맑아지니 달빛이 대낮처럼 밝았다. 잔치를 끝내고 다리로 걸어 내려와 앉아서 무금(武金)에게 피리를 불게 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물은 아득히 넓고 몸이 하늘 속에 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이 물에 거꾸로 비쳐 있고, 물결마저 잔잔하니 영혼과 뼈 속이 상쾌해지는 듯 했다. 술기운이 금새 사라져 가득 몇 잔을 돌렸는데 취기에 젖어 돌아가는 것도 잊었다. 술자리에 기녀들이나 악공들이 없고 다만 피리소리만이 맑게 물밑 속을 뚫으니 더욱 아름다운 흥취를 자아냈다. 조금 있자 기생을 실은 작은 배 너댓 척이 눈에 띄었는데, 북 치고 피리 불며 멀리서부터 가까이 와 다리 아래에서 흔들거리며 오갔다. 노래 소리로 서로 답하는데 그림자가 너울너울 춤을 춘다. 역시 장관이다. 뱃사람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니 어떤 것은 서어요, 어떤 것은 방어인데 큰 것은 한자 남짓하고 작은 것도 부채만 했다. 회도 뜨고 굽기도 하니 그 맛이 매우 좋아 자주 술잔을 비웠다. 간성 군수(杆城郡守) 최립지(崔立之), 통천 군수(通川郡守) 안경용(安景容), 흡곡 현령(歙谷縣令) 한경홍(韓景洪)이 매일 편지를 보내와 언제 떠나는지를 물었다. 기타 관동의 고을 원들도 공문서를 보내면서 일정을 알기 위해 한면숙에게 사람을 보내왔다. 그러면서 내게는 잘 지은 문장으로 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하나하나 자세히 알려 주며 농담으로, “이 벼슬을 버리고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한입니다. 함께 갈 수 없으니 차라리 조정에서 공(公)을 급히 부르시어 공이 이 여행을 할 수 없게 했으면 합니다.” 라고도 했다. 서로 크게 즐기면서 끝냈다.
17일. 관찰사와 헤어져 영흥(永興)에 이르렀다.
18일. 북병사(北兵使)가 올리는 급한 글이 지나갔다. 관찰사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오랑캐 수백 기가 종성(鍾城)을 포위했고, 부사 정시회(鄭時晦)가 그 속에 있는데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놀라고 근심스러워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
22일. 안변에 이르렀다. 안변 태수(安邊太守) 남자유(南子有)가 그 아우 남자안(南子安)와 함께 계곡 옆 정자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다음날 나를 또 머물게 하고 그의 어미의 장수를 비는 술자리를 열었다. 결국 이틀이나 머물렀다. 그러면서 북쪽 동태의 완급을 기다렸다. 관동 각 읍의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서 기다렸다. 최립지는 고성에서 왔고 도사(都事) 및 은계 찰방(銀溪察訪)은 인마(人馬)를 인솔하여 흡곡(歙谷)에서 기다렸다. 다른 읍의 수령들은 각자 읍의 경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종성을 포위한 오랑캐를 하찮게 여겨 곧 물러갈 것이라 생각하고 안변(安邊)에 머물면서 귀 기울여 기다렸다. 그러나 매일 우서(羽書) 가 질주하였고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떨고 두려워했다. 내가 떠나올 때 아직 비국(備局)에서 해임되지 않았으나 조정에서 대책을 세워 어려움을 이기는 방법을 도모할 것이라 생각하며 길을 돌아 산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이 들어 마침내 여러 태수들에게 편지를 써서 서울로 가야 될 사정을 밝히고, 그동안의 환대에 대해 사례하였다.
25일, 직로(直路)를 따라 철령(鐵嶺)을 넘었다. 40년 동안 정성을 들인 계획이 실현될 뻔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해 혀를 차며 갔다. 마루에 올라 멀리 선구(仙區) 를 바라보니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 졌다. 저녁 무렵 회양의 앞내에 이르렀을때 북쪽에서 말이 나는 듯 달려와 적이 물러갔다는 보고를 하였다. 안변에서 조금 더 지체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곧바로 가마에서 내려 길을 바꾸고자 하였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저녁에 회양부(淮陽府)에 들어갔다. 부사는 나를 기다리다 이미 사흘 전에 산 속으로 갔다고 한다. 빈집에 쓸쓸히 앉아 있으니 마음이 답답하여 여기서부터 산속 길까지 몇 리나 되느지 물었다. 아전이 아뢰기를, “화천(和川) 길로 가면 180리이고, 통구(通構) 길로 가면 160리이나, 산길이 몹시 험합니다.” 라고 했다. 내가 좌랑(佐郞) 이형원(李馨遠)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길을 떠나올 때 처음에는 기이한 절경을 반드시 보리라 마음먹었었으나 마침내 조물주의 시기로 뜻밖의 장애를 만났으니 참으로 천고에 다시 없는 슬픔이다. 만약 산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여 속세로 돌아간다면 죽어서도 탄식하며 한할 것이다. 지금 북쪽의 적이 이미 물러가 돌아가는 것도 바쁘지 않으니, 며칠 소비해서 내산(內山)을 두루 돌아보면 처음 먹은 마음에 다소라도 보상이 되지 않겠는가? 이미 마음속으로 작정하여 떠나려 하니 잠이 오지 않는다. 닭이 울기 전에 말에게 꼴을 먹이고 길을 떠나면 하루만에 산중(山中)에 닿을 것이니 그대는 나를 따라 나서겠는가?” 라고 했다. 이에 이형원이 말하기를, “몹시 고생스럽기는 하겠지만 어찌 감히 뒤로 미루겠습니까?” 라고 했다. 내가 마침내 관인(官人)들에게 사흘간의 양식을 갖추게 하고, 각자 하루의 밥을 소지토록 하였다. 4경 초엽에 이부자리 안에서 식사를 하고 떠나 신안역(新安驛)에 이르렀다. 이미 40여 리를 왔는데도 하늘은 아직도 어두컴컴하였다. 이곳은 지난번에 가마를 멈추고 길을 묻던 곳이다. 조금 쉬면서 말에게 먹이를 먹이려고 하는데 관인 예닐곱 명이 길 왼쪽에서 절하며 나를 맞이했다. 물으니 간성, 통천, 흡곡 사람들로 최립지, 안경용, 한경홍이 보내 나를 기다린 것이었다. 내가 곧바로 서울로 향한다는 말을 듣고 쓸쓸하게 흩어지며 편지와 술과 안주를 보내왔다. 한경홍은 별도로 편지를 보내, “공(公)의 은덕에 감동받은 고을 노인들이 공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서 마을 밖을 깨끗이 하고 쇠고기와 술을 마련하여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곧바로 돌아가신다고 하니 모든 사람들의 정성이 부족한 듯 하여 모두 이 길에서 뵙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한나라 유조영(劉祖榮)이 산음 태수(山陰太守)의 직을 이임할 때 그 동안의 밝은 정사에 감동된 그곳 노인들이 직접 길에 나와 송별했던 옛 일을 흉내내어 장로(長老) 세 사람에게 안주와 술동이를 골라서 가져가게 했습니다.” 라고 했다. 아마도 내가 경자년(庚子年, 1600년, 선조 33년)에 호조(戶曹)의 일을 볼 때, 흡곡의 백성들이 글을 올려 세금을 감해 줄 것을 청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딱한 처지를 측은히 여겨 답장을 써서 덜어주고 면제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관을 쓴 백발의 노인들이 감사의 절을 하며 번갈아 잔을 올려, 몇 잔을 마셨더니 나도 모르게 취하였다. 세 태수가 보내온 술과 안주를 함께 따라 온 역참의 하급관리들에게 나누어 지게 하고 산에 들어가서 쓰도록 했다. 가마를 역촌에 놓아두고, 두 마리의 튼튼한 말을 골라 바꿔 타면서 갔다. 따르는 사람은 풍각쟁이 함무금, 소리(小吏) 장응선(張應善), 그림쟁이 표응현(表應賢)이었다.
아침에 신안(新安)을 떠나 30여 리를 가서 통구현에 이르렀다. 해는 아직 중천에 이르지 못했다. 백성들이 고요하게 거처하고, 골짜기가 깊으니 벌써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여기서부터는 수목이 빽빽한 산들이 빙 둘러싸여 길이 끊겼고 나무를 치우면서 나아갔다. 세 개의 큰 고개와 다섯 개의 작은 언덕을 넘어 단발령(斷髮嶺)에 올랐다. 낮은 하늘에 홀연히 겹겹이 모양을 드러낸 1만 층의 하얀 옥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모골(毛骨)이 송연해졌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 산에 놀러 왔다가 이 곳에 이르러 즉시 머리를 깎고 선승(禪僧)이 되었다고 하여 ‘단발령’이라고 한다고 세상에 전한다. 신안에서 여기까지 100여 리 길을 오는데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주위를 막아 산세를 볼 수 없더니 이곳에 이르러서야 한쪽 면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도 산의 신령스러움과 기이함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쉬면서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채찍으로 재촉하며 가는데 멀리 한 사람의 관인이 보였다. 화천(和川) 길로 따라 가는데 회양(淮陽)의 수령이라고 했다. 내가 곧 바로 서울로 간다는 말을 듣고 급히 돌아오는 길인데, 멀리 떨어져 있어 부를 수 없었다. 철이현(鐵伊峴)을 넘어 넓은 들을 지나니 바로 장안동(長安洞)이었다.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고, 산은 더욱 기이하니 더이상 인간 세상의 경치가 아닌 듯 했다. 계곡의 물은 만폭동(萬瀑洞)의 하류인데, 모두 아홉 번의 물을 건너야 장안사 정문에 이른다고 한다. 무금(武金)에게 말 위에서 피리를 불게 하며 앞서 가게 하니, 노승이 맞아 선당으로 들이며 어디에서 오셨느냐고 물었다. 내가 처음에, “나는 서생(書生)인데, 서울에서 왔다.” 라고 하고 놀러온 손님이 있는지를 물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며칠 전에 객이 다녀갔다’고 하며, “근래 듣자니, 예조판서께서 함흥에서 왕명을 수행하시고 외산(外山)으로부터 오신다고 하여 각읍(各邑)이 채비를 하고 여러 날 기다렸는데,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곧바로 서울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라고 말했다. 나와 이형원은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술로 갈증을 풀고, 피곤하여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준비했던 음식을 찾아 먹었다. 승려들이 역졸들에게 물어 비로소 내가 예조판서인줄 알고, 합장하고 사죄하여 말하기를, “미처 상공(相公)을 알아보지 못하고 늙은 중이 망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골짜기로 오셨습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그 연유를 자세히 말하니, 여러 승려들이 말하기를, “여기는 회양과 이틀 거리인데, 하루만에 도착하였으니 어찌나 신기한지요.” 라고 하였다. 막 말을 나누고 있는 차에 어린 승려가 와서 윗 절에 손님이 오셨다고 알려왔다. 자세히 물어보니 바로 도사와 은계 찰방이었다. 윗 절이란 표훈사(表訓寺)였다. 여기서 5리 정도 떨어져 있다. 어린 승려에게 빨리 가서 내가 왔다고 알리게 했다. 시간은 이미 초저녁을 넘어 서고 있었다. 도사 윤길(尹趌)과 찰방 이여기(李汝機)와 집경전 참봉 노승(盧勝)은 모두 흡곡현에서 나를 기다리다 내가 곧바로 서울로 갔다는 말을 듣고, 이곳으로 놀러 왔다가 승려의 얘기를 전해 듣고 한편으로는 놀라고 한편으로는 의아스럽게 여기면서 바삐 달려 내려왔다. 나를 맞아 절을 올리면서 말하기를, “상공께서는 하늘에서 내려 오셨습니까?” 라고 묻고 이어서 연회에 쓰는 기물에 대해 물었다. 내가 가지고 온 술과 안주를 내어 따르면서 그것이 생긴 연유에 대해 말하자, 두 사람이 말하기를, “아름답다하면 아름답다 할 것이나, 주(州)나 군(郡)에서 올린 음식이 이미 식어서 차고 담박하니 어찌 드시겠습니까?” 라고 했다. 오래지 않아 여러 군(郡)에서 각각 술잔을 올려 따르고 권하여 밤중에까지 이르렀다. 반쯤 취한 채 월대(月臺)로 걸어 갔다. 이미 동쪽에는 반달이 떠올랐다. 가을 밤, 언덕은 고요하고, 신선이 사는 마을은 밝았다. 달빛에 젖어 희미한 여러 봉우리가 옥처럼 우뚝 서있는 것을 올려다보니, 나도 모르게 위압감을 느꼈다. 북쪽에 있는 것은 관음봉(觀音峯), 그 다음은 지장봉(地藏峯), 그 다음은 보현봉(普賢峯)이라고 한다. 동쪽 요사채에 묵고 있는 승려 담유(曇裕)는 나이 80이 넘었는데 눈썹은 희고 길며 두 눈동자가 화기를 뿜는 듯 형형했고, 절의 옛일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 나는 먼저 일어나 옷을 입고 걸어서 전(殿) 뒤의 조그만 언덕에 올랐다. 사방의 산 빛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처음엔 밤새 눈이 내려 쌓였는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돌이었다. 아침식사를 재촉하고 가볍게 행장을 꾸렸다. 어린 승려가 내 가마를 인도하고 큰 내를 건너 시왕 백천동(十王百川洞)으로 들어갔다. 길에 불쑥불쑥 솟은 기이한 돌들은 참대가 둘러싸고 있었으며, 길가의 삼나무와 소나무는 그 푸른빛으로 사람을 엄습하였다. 맑은 물이 고인 못〔潭〕이 있었는데, 못의 동쪽에는 옛 성이 있고 성 북쪽에는 큰 봉우리가 공중에 우뚝 솟아있었는데 높아서 올려다 볼 수 없었다. 지난밤 보았던 지장봉이었다. 골짜기는 끝없이 감아 돌고, 봉우리들은 즐비하여 창과 칼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듯했다. 한 봉우리를 넘어서면 한 골짜기가 나타나고, 한 골짜기가 다하면 또 한 골짜기가 나오는데 골짜기에는 모두 맑은 물이 흘렀다. 계곡에는 모두 폭포와 못이 있었는데, 생긴 모양 하나하나가 별나고 기이하였다. 잠시 미타암(彌陀庵)에서 쉬고 드디어 명연(嗚淵)으로 내려갔다.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없는 매우 깊은 못이 있었는데 쏜살같은 물줄기는 항아리가 울리는 소리 같았다. 밝은 대낮 으슥한 그늘 속에서 우레를 치며 맑은 하늘을 향해 물보라를 일으키니 그 기이하고 신비함에 현기증마저 생겨 내려다 볼 수 없었다. 여기서부터 길은 모두 우뚝우뚝 솟은 돌로, 돌이 끊기면 잔도(棧道)로 이어진다. 우리들은 모두 가마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낭떠러지를 따라 물길을 건너기도 하고 뛰어 넘기도 하며 갔다. 큰 내가 다투어 흐르는데 부딪혀 폭포가 되고, 고여 못이 되기도 했다. 그 중에 발담(鉢潭), 화룡담(火龍潭), 흑룡담(黑龍潭), 벽하담(碧霞潭), 응벽담(擬碧潭)은 특히 큰 것들이고 그 중 작은 것들은 하나하나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만폭동(萬瀑洞)이다. 만폭동은 바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듯한 하나의 큰 돌이다. 몹시 피곤하여 넓게 퍼져 있는 만폭동 위에 쓰러져 누웠다. 아전이 술과 포를 올려 빙 둘러앉아 마셨다. 돌에 봉래(逢萊) 양사언(楊士彦)이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있는데, 글자는 크기가 사슴의 정강이만 하다. 왼쪽에 금강대(金剛臺)가 있고 금강대 위의 돌 틈에는 학의 둥지가 있는데 학은 없고 빈 둥지만 있었다. 승려가 말하기를, “때때로 날아와 울며 빙빙 돌다가 가는데 털은 푸르고 머리는 붉습니다.” 라고 하였다. 술이 익자 내가 무금(武金)에게 몰래 향로봉 가장 높은 곳, 소나무 우거진 곳에 올라가 가늘게 한 곡조 불게 했다. 그 소리가 아득하여 마치 하늘에서 울리는 듯 했다. 앉았던 손님들이 놀란 눈으로 귀를 기울여 들으며 말하기를, “상공께서도 저 소리가 들리십니까?” 라고 했다. 내가 거짓으로 듣지 못하는 것처럼 하자 좌우에서 아무 말없이 침묵했다. 그러다가, “이상도하다! 하늘의 음악이여. 사람들이 이 봉우리에 신선이 있다고 하던데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라고 했다. 청아한 선율이 저녁노을 속으로 흩어지며 때때로 바람결에 끊겼다 이어졌다 했다. 내가 꾸민 것이지만 정말로 신선의 피리 소리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한참 있다 비로소 깨닫고 서로 손뼉을 치니 역시 하나의 유쾌한 놀이였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흥이 다하자 계곡물을 따라 내려와 저물녘에 표훈사에 들었다. 절문 안에 비(碑)가 있는데 지원(至元) 4년(1267년)에 세운 것으로 양재(梁載)가 글을 지었고 고려 때 정승 권한공(權漢功)이 글씨를 썼다. 원나라 영종(英宗)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절을 지어 주었다는 내용의 비석이었다. 원(元)나라는 부처를 숭상하여 사신을 보내 향을 내리고 불당을 건축하도록 했다. 여러 봉우리에 절이 많다고 하는데, 그 중 이 절이 가장 크다고 했다. 임진년에 불탄 것을 여러 승려들이 다시 지었는데 아직 단청은 입히지 못했다. 밤에 여러 사람들과 술자리를 벌여 즐거움을 다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정양사(正陽寺)로 올라갔다. 절은 봉우리 꼭대기에 있었는데 길이 몹시 가파르고 위험해 가마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죽 늘어서 나아갔다. 절 서쪽에 진헐대(眞歇臺)가 있었다. 골짜기 좌우에 푸른 노송나무〔檜〕수백 그루가 서 있었다. 바람이 일어 상쾌한 기운은 뼛속까지 느껴졌다. 오랫동안 대 위에 앉아 몇 잔 술로 속을 덥히고 이내 절로 들어왔다. 절은 폐사가 되어 승려가 없었다. 서쪽 누각의 시야가 가장 맑아 깨끗이 치우고 자리를 폈다. 난간에 의지해서 다가오는 듯한 여러 봉우리들이 바라보니 모두 손에 잡힐 듯 하였다. 노승이 이르기를, “이 산은 바다와 나란히 있어 항상 운무가 걷히지 않고 습한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유람 온 사람들이 십여 일을 묵고도 산의 한쪽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기 일쑤입니다. 오늘은 가랑비가 그쳐 산 빛이 마치 씻어낸 거울과 같이 맑으니 일만 이천 봉우리는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하고 단풍잎은 얕지도 깊지도 않은 것이 마치 새롭게 물들인 것처럼 붉습니다. 이같이 아름다운 정경은 수십 년 동안 있은 적이 없습니다. 상공께서는 참으로 청복(淸福) 이 있으십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 옆에 앉아 자주 산봉우리들을 가리키며, “저기 동북쪽에서 웅장하게 용트림하고 있는 봉우리는 금강의 제일 어른인 비로봉(毘盧峯)입니다. 높이 치솟아 우뚝 서 있는 것은 혈망봉(穴望峰)이고, 두 개가 뾰족이 하늘에 꽂혀 있는 것은 향로봉이며, 기이한 돌이 불쑥 솟아올라 나누어져 신령스럽게 보이는 것은 금강대입니다. 온갖 영령들을 고리처럼 둘러싸고 기운을 쌓아 밖으로 쏟아내지 않는 것은 중향성(衆香城)입니다. 그밖에 나는 봉황의 형상, 용솟음치는 용의 형상,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의 형상, 싸우는 고래의 형상, 달리고 뛰어 오르는 형상, 조알하는 형상, 공손히 두 손 마주잡은 형상은 영랑재(永郞岾), 수정봉(水晶峯), 사자봉(獅子峯), 가섭봉(伽葉峯), 선암봉(船巖峯), 백운봉(白雲峯), 만회봉(萬灰峯), 원적봉(圓寂峯), 망고봉(望高峯), 석응봉(石鷹峯), 승상봉(僧床峯), 일출(日出)ㆍ월출봉(月出峯), 마하연봉(摩訶衍峯)들입니다. 이들은 그 많은 봉우리 가운데서 빼어난 것들입니다. 그 나머지 것들은 이름이 곱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름이 없는 것들도 역시 하나 하나 모양이 기이하고 깍아지른 듯 높아 그 자태가 뛰어났다. 돌은 희고, 단풍은 붉고, 소나무와 회나무는 푸르르니 한 폭의 살아있는 그림이었다. 여산(廬山) 의 참모습이 여기에서 전부 드러났으니, 눈에 넣고자 정신을 쏟다보니 날이 저무는 줄도 몰랐다. 마침내 북쪽으로 산줄기를 타고 개심암(開心庵)에 이르렀다. 암자의 지세는 정양사(正陽寺)보다도 험했지만 그윽하고 고요한 멋이 느껴졌다. 천덕(天德)과 원통(圓通)을 거쳐 마하연에 이르렀다. 맑고 아름다운 것이 산 속에서 첫째 간다. 중향성 봉우리들이 호위하듯 감싸 몹시 엄숙한 느낌을 주고 마음이 절로 숙연해졌다. 좌우에는 붉은 소나무, 오가피나무, 늙은 삼나무, 키 큰 회나무, 측백, 해송들만이 무성하고 다른 나무들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한 마리의 새도 울지 않고, 날짐승과 들짐승도 날거나 뛰지 않았다. 승려가 이르기를, “중향성에서 여기까지 벌레, 뱀, 지렁이와 같은 짐승들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한다. 쌀을 먹지 않고 생식만을 해서 깨끗하고 하얀 모습을 한 승려가 있었는데 참으로 아름다웠다. 문 밖에 나무가 있었는데 빛깔은 해송 같고, 껍질은 붉은 것이 계수나무 같아 사람들이 계수나무라고 불렀다. 껍질을 벗겨 맛보니 약간 시면서 달지 않고 맵다. 비록 계수나무는 아닐지라도 아름다운 나무임에는 틀림없다. 날이 아직 일러 여러 사람들과 불지암(佛知庵), 묘길상(妙吉祥)에 오르려고 여기까지 왔으나 마음과 정신이 맑고 편안해져 차마 그대로 떠날 수 없어 이곳에서 머무를 뜻을 갖게 되었다. 뜰을 산보하는데 돌구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냉랭하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떠서 먹어보니 사탕수수 즙처럼 달았다. 승려와 함께 잤다. 밤이 깊어지자 멀리 여러 암자들의 불등(佛燈)이 깜빡거렸는데 반딧불이 흩어져 날아다니는 듯 했다. 처마 가의 별은 매우 가깝게 보여 고개를 들고 따면 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보덕굴(普德窟)로 가고자 걸어서 중향성을 나섰다. 화룡담 상류로부터 산허리를 따라 돌비탈길이 공중에 걸렸다. 돌비탈길이 끝나자 나무를 걸쳐 사다리를 만들었는데 모두 40여 층이나 되었다. 사다리가 끝나자 석대(石臺)가 나타났는데 석대 좌측에 두어 칸 남짓의 암자가 돌 위에 걸쳐져 있었다. 두 개의 기둥을 세웠는데, 높이가 약 100장(丈)정도다. 반 칸은 기둥 꼭대기에 엮고 안에는 관음의 소상(塑像)을 안치해 놓았다. 두 줄의 쇠줄을 이용하여 하나는 기둥에 박고, 하나는 그 집을 둘러매어 돌에다 녹여 붙여 견고하게 했다. 암자의 반쯤은 공중에 있는데 바람이 불어 떨구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위험하여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보덕대에 올라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실컷 마셨다. 홀연히 화룡담(火龍潭) 위에 한 조각 흰구름이 보이는데 화로의 연기처럼 일어나 조금 위로 올라오자 돗자리보다 크게 됐다. 조금 뒤 여러 못과 골짜기가 각기 구름 기운을 내보내 마치 한 필의 비스듬히 늘어놓은 비단과 같더니 빠르게 내려와 서로 만났다. 만나면 굽이쳐서 여러 골짜기와 못이 모두 하얀 옥인 듯 하였다. 음식을 시중드는 사람들과 따라온 종들을 돌아다보니 그들은 보이지 않고 단지 소리만 들려와 아득한 가운데 서로 부르고 답할 뿐이었다. 잠깐 사이에 밝은 태양이 맑고 명랑했다가 발 아래의 하늘과 땅이 아득해져 혼돈한 모습으로 변하니 역시 장관이다. 골짜기의 물과 돌을 두루 찾아 즐기며 마음대로 다녔더니 다리가 아파 가마에 의지해서 내려왔다. 저녁에 돌아와 표훈사에 묵었다. 여러 사람들이 크게 술자리를 벌려 나를 송별하려 했으나 매우 피곤하여 다만 몇 잔 술로 잠자리에 들었다.
30일. 행장을 꾸려 표훈사를 떠나 장안사(長安寺)를 거쳐 골짜기를 나왔다. 노승은 강릉으로 돌아가고 도사와 찰방은 각각 임지로 돌아갔다. 시냇물도 흐느껴 이별의 정한을 돕는 듯 했다. 그 동안 여행길에 피리를 앞세워 앉아 쉴 때는 항상 불게 했다. 한낮즈음 단발령에 닿았다. 나를 보고자 영서(嶺西)로부터 바삐 1백여 리를 달려온 감사 이광준(李光俊)과 산봉우리에서 만났다. 그의 혈손 이민원(李民寏) 역시 따라왔다. 동문수학한 그와 가져온 술을 몇 잔 기울이며 회포를 나누고 헤어졌다. 저녁 통구에서 자고 서울을 향해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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