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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망한 뒤 주자학은 망국의 왕실처럼 온갖 수모를 다 겪어도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개명(開明)했다고 자부하는 인사일수록 더 주자학을 타기(唾棄)하는 것을 득의한 일로 여겼고 제일의(第一義)로 삼았다. 오늘에 이르러 주자학은 더 이상 세상을 지배하는 이념도 학문의 주류도 아니다. 우리 정신의 방대한 유산이면서도 형해(形骸)만 겨우 남아 있어 사람들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학문의 부용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주(寒洲)의 성리설을 처음 학계에 소개한 송찬식(宋贊植)교수의 일갈이 생각난다. “지금의 우리들은 성리학이 공리공담(空理空談)만 일삼는 학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성리학이 공리공담인지는 선인(先人)의 글을 직접 읽어 보아야 확인될 것이다. 성리학을 배척해 온 지가 너무 오래되어 이제 성리학에 조예가 있는 학자가 끊어질 위기에 처해 있다. 공리공담을 확인할 사람인들 있을 수 있겠는가?” 평묵은 살목마을[箭村] 사문 집사께 삼가 답장을 올립니다. 귀향(貴鄕)의 백암(白巖)은 우리 동천(東泉)선조께서 충전(蟲篆)의 화1) 를 만나 몸을 숨겼다가 운명하신 곳입니다. 저는 가난하고 병들고 용렬한 사람이라 한갓 선조의 사적을 읽고 비통하여 탄식할 뿐 아직도 하루 남쪽으로 가서 선조의 유적을 보고 아울러 향리의 어른들을 방문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 세상사에 골몰하다가 이제 저승으로 갈 날이 가까워 장차 널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제 나름대로는 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학설을 강명(講明)하여 취사할 때 붕당과 세론(世論)이 서로 상대편을 적국처럼 보니 입을 열어 토론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비록 음(陰)ㆍ양(陽)이 서로 이기고 지는 것이 이치상 없을 수 없는 것과 같지만 또한 외지고 작은 나라의 풍기(風氣)가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합니다. 훌륭한 왕자(王者)가 나와서 한 세대 동안 교화하여 백성들을 어질게 하지 않는다면2) 그 풍속이 바뀌기를 결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저 자기의 자취를 감추고 남들과의 교유를 그만두고 우선 예전부터 친한 사우(師友)들 중에서 토론하여 다소의 학자들을 승복하게 할 뿐인데도 역시 이런 병폐가 있으니,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제 보내신 편지를 받으니, 그 대지(大旨)는 비록 기묘년에 말씀하신 것을 벗어나지 않으나 학문의 대본(大本)이 되는 긴요한 곳은 한주(寒洲)어른이 전수하신 것이 실로 제가 예전에 화서(華西)선생께 들은 것과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부합하니, 비록 정주(程朱)가 다시 살아나신다면 빙그레 웃으면서 긍정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에 제 가슴 속이 후련하여 흠복(欽服)하는 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 중에 “마음은 리(理)의 주재(主宰)이고 그 자구(資具)는 기(氣)이다.”, “미발(未發) 상태에서는 지(智)의 덕이 마음 전체를 온전히 주재하고 이발(已發) 상태에서는 지(智)의 단서가 마음의 모든 정(情)을 묘하게 운행한다.” 한 것은 거의 전현(前賢)이 밝히지 못한 이치를 밝혀서 정주(程朱)의 본지(本旨)에 틀림없이 맞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마음의 본체의 진면목이 이렇게 분명하게 환히 드러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매우 훌륭하고 매우 훌륭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본연의 마음을 기(氣)의 근본이라 하여 마음을 리(理)로 말하는 것을 금지하는 자들은 단지 그 학문이 평소 보고 들은 바를 답습하고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잘하지 못하여, 자기가 정미한 뜻을 분석하지 못한 줄 깨닫지 못해 이렇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은 기(氣)의 측면에 나아가 본연의 정상(精爽)을 가지고 단연코 리(理)를 주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전혀 변동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 뿐이고, ‘기(氣) 이면에 모든 리(理)를 갖추고서 이 기가 리를 가지고 만사에 응한다’고 한 것은 기실은 단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 중에서 지(智)가 크다3) 는 오묘한 이치를 살펴 알지 못하고서 기(氣)를 마음이라 한 것일 뿐이니, 안목이 부족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주재가 리라는 이치로 강론하여 승복시키는 것이 또 전현(前賢)들이 강론하여 이치를 바로잡았던 덕업(德業)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학설이 터럭만큼이라도 어긋나면 그 폐해는 반드시 형기(形氣)의 사사로운 기운이 내 마음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 데 이르게 될 터이니, 매우 걱정스러운 것입니다.
한주(寒洲)의 어짊에 대해서는 내가 궁벽한 곳에 살아 견문이 부족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인지 상세히 알아보고서 마침내 등용문(登龍門)4) 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학문의 큰 근본이 이와 같은 데서 그 사우(師友)간에 전수한 학문의 실상을 알 수 있었으니, 이런 분이 계셨다는 것은 우리 학문의 다행입니다. 멀리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지극히 향모(向慕)하여 마지않습니다.
동짓달을 맞아서 학문하시며 지내시는 정황이 좋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접때 금강산을 유람했을 때에는 발과 눈이 함께 진경(眞景)에 도달하셨으리라 사료되니, 사마자장(司馬子長)이 강회(江淮)를 유람했던 것5) 과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빈집에서 앉은뱅이처럼 틀어박힌 채 그저 선정(先正)의 “풍악산 맑은 기운은 천년토록 쌓였고 동해의 푸른 물결은 만 길이나 깊어라.[楓山灝氣千年積 蓬海滄波萬丈深]”6) 와 선사(先師)의 “천 봉우리 머리 조아리니 모두 덕이 같고 만 물줄기 바다로 향하여 한 집안을 이루도다.[千峯揖讓皆同德 萬水朝宗作大家]”7) 라는 시구를 읊조리노라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금강산으로 달려가는 듯하였습니다.
나는 학식은 없고 몸만 노쇠한 채 겨우 사람 축에 끼어 살고 있지만 하는 일마다 화패(禍敗)를 부르고 하는 말마다 기휘(忌諱)에 저촉될 뿐8) 학문에는 이치를 밝힌 바가 없으니, 예전에 보여드린 두 편의 글을 보면 세상에 없어도 될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병석에 누워 겨우 숨만 붙은 몸으로 대략 이렇게 답장을 올립니다. 지하에 가서나 다시 뵐 수 있을 듯합니다. 다시금 바라건대 부디 보중(保重)하시기 바랍니다.
[平默謹覆箭村斯文執事. 仙鄕之白巖, 東泉先祖, 遭蟲篆之禍, 竄身畢命之地也. 貧病拙劣, 徒能追講先蹟, 盡然傷歎, 而?不得一日南爲, 兼訪鄕里之長德, ?沒許多年, 因今鬼事日迫, 行將就木矣. 平日妄竊有志於斯事, 無奈講明趨舍之際, 朋黨世論, 相爲敵國, 不可開口相謀. 此雖陰陽予奪, 理之所不能無者, 而亦見偏邦風氣使之然. 自非有王者作而及於世仁, 則不可望其風移而俗易也. 只得?跡息交, 姑就舊日師友, 講服多少, 而亦種種有是弊, 無如之何矣. 今奉辱書, 大旨不出於己卯之緖餘, 而大本緊要, 寒州爺爺之所傳授, 實與舊所聞於靑華函丈者不約相符, 則雖未知程朱復起, 當莞爾與否, 而當場灑然欽服, 卽不容名言也. 其曰: “心者, 理之主宰, 其資具則氣也.” 其曰: “未發而智之德, 專一心 ; 已發而智之端, 妙衆情”者, 則庶幾發前賢所未發, 而?合乎程朱之本旨者矣. 盖不圖今天之下, 心之本體眞面目, 軒豁呈露, 若是其端的也. 甚盛甚盛. 但世之喚本心以爲氣之本, 禁其以理言者, 特其學溺於蹈襲見聞而?於溫故知新, 不悟夫微言之未析而至此耳. 第其意就氣上, 以本然精爽, 斷爲此理之主, 而要移動不得, 爲失之. 其以此氣裏面含具衆理, 而此氣以理應事云爾, 則其實特不察智爲大之妙, 而喚做氣爲心, 眼所未到也. 故以此講服, 亦不害爲前賢之德業. 若其毫釐之差, 其弊必至於形私擅政, 是深可憂者也. 寒洲之賢, 緣索居孤陋, 不得詳究其世而卒遂其登龍門之願. 然卽此大本端的如此, 見師友傳受之實, 是吾道之幸也. 引領南望, 不勝嚮之至. 履玆陽來, 伏惟味道體?, 金重玉毖. 向來東遊, 竊計足目俱到, 未知子長之江淮爲如何. 空堂??, 惟誦先正詩“楓山灝氣千年積, 蓬海滄波萬丈深” ? 先師“千峯揖讓皆同德, 萬水朝宗作大家”之句, 不覺其神也. 某不學老衰, 妄目?身於世間, ?手覆羹, 轉喉觸諱, 無所發明, 只向時兩箇文字, 可見殊可少9) 也. 病枕??(?+先)(?+先), 略此奉謝. 拜?期泉下, 更祈千萬珍重.]
1) 1519년(중종 14)에 일어난 기묘사화를 가리킨다.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이 궁중의 나뭇잎에다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하고 그 나뭇잎을 왕에게 보여 조(趙)씨인 조광조가 왕이 될 것으로 모함하여 기묘사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2) 공자(孔子)가 “만일 왕자(王者)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백성들이 인(仁)해질 것이다.” 3) 주자(朱子)가 “사단 중에서 인과 지가 가장 크다.……지가 큰 까닭은 앎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四端仁智最大……智之所以爲大者以其有知也廣]” 하였다. 《朱子語類》 60권 〈廣錄〉 한주 이진상이 이 구절을 마음의 주재(主宰)가 리(理)임을 밝히는 근거로 여러 곳에서 인용하였다. 4) 훌륭한 인물을 만남을 뜻한다. 후한(後漢) 이응(李膺)은 명망이 매우 높아서 선비들이 그를 만나 인정을 받으면 평판이 높아졌다. 그래서 그를 만나는 것을 등용문(登龍門), 즉 용문(龍門)에 오른다 하였다. 《後漢書 卷97 李膺列傳》 5) 사마자장(司馬子長)이 강회(江淮)를 유람했던 : 자장(子長)은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의 자인데, 사마천은 20여 세 때 천하를 유람(遊覽)하고자 하여 남으로 강회(江淮), 회계(會稽), 우혈(禹穴), 구의(九疑), 원상(沅湘) 등지를 유람하였다 한다. 6) 선정(先正)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宋子大全》4권〈遊楓嶽次尹美村韻〉 7) 선사(先師)는 화서 이항로를 가리킨다. 《華西集》 1권〈毘盧峯〉 8) 하는……저촉될 : 세상에 맞지 않아서 매우 가난하게 산다는 뜻이다.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에 지궁(智窮)ㆍ학궁(學窮)ㆍ문궁(文窮)ㆍ명궁(命窮)ㆍ교궁(交窮)의 다섯 궁귀(窮鬼)가 자신을 괴롭히는 행위를 말하기를 “다섯이 각기 주장한 바가 있고 사사로이 이름자를 세워서, 내 손을 비틀어 뜨거운 국을 엎지르게 하고 목청을 냈다 하면 남의 기휘를 저촉하게 하여, 나로 하여금 면목을 가증스럽게 하고 언어를 무미건조하게 하는 것이 모두 그대들의 뜻이다.[各有主張 私立名字 ?手覆羹 轉喉觸諱 凡所以使吾面目可憎 語言無味者 皆子之志也]” 한 데서 온 말이다. 9) 可少 : 적게 할 수 있다. 없애도 좋다는 뜻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35권 〈燾錄〉에 “‘問君子人與君子人也’ 曰‘所謂君子這三句都是不可少底’” 하였고, 《주자어류》 123권 〈?祖錄〉 “陳同父祭東萊文云‘在天下無一事之可少而人心有萬變之難’” 하였다.
- 김평묵(金平? 1819-1888)〈살목마을 사문 윤집사에게 답함[答尹箭村-胄夏-]〉,《중암집(重菴集)》
〈해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제자인 중암(重菴) 김평묵(金平? 1819-1888)이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제자인 교우(膠宇) 윤주하(尹?夏 1846-1906)에게 보낸 답장이다.
백암(白巖)은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넘터마을에 있는 바위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사람인 동천(東泉) 김식(金湜)이 사화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이 바위 밑에 숨어 있다가 바위에 ‘백암’이라 써놓고 자결했다고 한다.
성리학에서는 우주 만물이 모두 리(理)와 기(氣)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따라서 리 없는 기가 없고 기 없는 리가 없는 것이 마치 형상과 질료의 관계와도 같다. 사람의 마음은 당연히 리와 기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퇴계는 마음은 리와 기가 합한 것이라는 심합리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하였고 율곡은 마음은 기라는 심즉기설(心卽氣說)을 주장하였다. 이후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는 각각 퇴계와 율곡의 설을 굳게 지켜서 대체로 큰 변화는 없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성리학계의 흐름은 여러 갈래로 매우 큰 변화를 보인다. 이 변화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경기도의 화서 이항로, 전라도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경상도의 한주 이진상의 등장이다. 화서와 노사는 모두 기호학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성리설에 있어서는 주리론(主理論)을 주장, 한주와 유사한 학설을 보인다. 이항로의 경우는 한주와 심설(心說)이 거의 일치한다. 이들은 비록 서로 직접적으로 교감한 적은 없지만 화서ㆍ노사ㆍ한주의 문인들은 서로 교유하면서 서로의 학설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한주의 제자인 후산(后山) 허유(許愈)는 “화서의 말은 대체로 한주의 설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위 편지에서 중암은 학파끼리 서로 원수처럼 미워하여 학설을 함께 토론할 수 없고, 심지어는 자기 학파의 동문들조차도 다른 학설을 주장하면 상대편을 용납하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스승인 화서 이항로의 심설(心說)에 대해 중암 김평묵과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가 서로 대립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중암은 스승의 학설을 그대로 계승하였고 성재는 기호학파 정통의 학설과 다르다고 하여 스승의 학설을 수정하였다.
조선의 성리학은 당쟁과 맞물리면서 영남과 기호 두 학파가 줄곧 상대편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고 자기 학설만 고집하는 지나친 편협성을 보였다. 그 와중에서도 자기 학설을 다듬으면서 논리가 더욱 정교해진 면도 있지만 상대편과 토론을 하겠다는 진지하고 긍정적인 자세가 없었다. 조선이 망할 무렵에 이르러서야 두 학파가 상통하는 학설을 내어놓았고 정주(程朱)의 학설, 특히 소위 주자의 만년정론(晩年定論)을 규명하는 작업을 통하여 정밀한 논변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논변은 겨우 첫발을 내딛고는 그치고 말았다. 조선의 성리학사는 미완으로 남고 말았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 것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이 이룩해 놓은 주자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국을 능가하는 위대한 학문적 성과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실학과 대비하여 성리학은 무시하고 공리공론이라 폄하해 왔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무엇이 공리공론(空理空論)이고 무엇이 실학(實學)인가. 성리학을 공리공론으로 매도하는 나는 과연 실학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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