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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학사의 전반적 흐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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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陳伯海, {中國文學의 거시적 이해}, 中國社會科學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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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분법에 따른 중국문학사 조감 : 陳伯海, {中國文學의 거시적 이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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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구분의 문제가 문학사 작업의 중심이 된 것은 그것이 중국 문학의 역사발전에 대한 사람들의 기본적 관념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합리적인 시기구분이 없이는 문학의 역사운동을 밝힐 수도 없고 더 더욱 그 내재적 논리를 파악할 수도 없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시기구분은 단지 일종의 수단일 뿐이다. 그것은 문학사의 내재논리를 제시하기 위해서만 사용될 뿐, 그 자체는 결코 독립적인 의의가 없다. 문학사 내재적 논리를 탐구하는 출발점이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시기구분에 있어서도 상이한 기준이 있을 수 있다. 기존의 몇몇 시기구분의 방법은 단순히 연대에 따라 사실을 나열하는 것 외에, 사회역사의 변혁에 착안하든 문학 자체의 발전에 착안하든, 문학정신의 수립을 중시하든 문학형체의 발전을 중시하든, 민족문학의 발전을 근거로 삼든 아니면 각 민족간의 교류를 근거로 삼든 간에 모두 상대적인 가치와 존재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통일된 시기구분의 방법을 가지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하기란 어렵지만, 해결할 문제의 성질을 보고 합리적인 시기구분의 방법을 선택하여 확정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논제는 중국 문학사의 관조를 통해서 민족문학의 기본성질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민족문학의 질적 전개와 발전을 둘러싸고 문학사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구상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사회사 혹은 일반 문학진화사의 시기구분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중국 전통문학을 그 질적 형성•발전 및 탈변의 역사적 진화과정 속에 두고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先秦•兩漢, 漢•魏에서 隋•唐까지, 宋•元 이하를 상응하는 세 단계로 여겨 문학시기를 구분하고, 이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물론 전후계승의 문학현상을 잘라 말하기란 매우 어렵다. 각종 조류의 기복과 흥망성쇠는 서로 교차되고 중첩되기 마련이다. 문학사의 서술에 있어서 이 또한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1.형성기 먼저 형성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른바 중국 문학의 형성은 문학이 독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점차 독립적인 상태로 가는 과정을 가리키는데, 이는 중국문학사에 있어서 상고시기에서 殷·周·秦·漢에 이르는 이러한 하나의 긴 역사시기를 말하며, 이 시기 내에도 전후 상이한 역사적 발전단계가 존재한다. 초기의 문학창작은 종종 원시적 주술과 종교 및 음악 무용 회화 공예 등 각종 문화형태와 한데 혼합되어 있어서 아직 독립적인 문학양식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원시 신화와 가요, 大汶口 시기의 채도문자, 殷商의 甲骨卜辭, {주역} 중의 卦爻辭로부터 아래로 {시경}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러한 종류의 작품에 속한다. 당시의 문학창작은 결코 우리들이 오늘날 자주 보는 것과 같은 다듬어진 서면 문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대부분이 말하고 노래하고 연출하고 그린 것들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보자면, 이것은 문학이 아니고 단지 초기 문화혼합체 중 문학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의식요소의 융합 속에서 주술(巫術) 즉 종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각종 신화와 전설·시가와 樂舞·토템형상·채색무늬장식 등은 거의 모두 종교적 내용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상고시대 사회의 생산력과 지식수준이 빈약한 관계로 자연현상을 해석하거나 스스로 대자연과 싸워 이기려는 바램을 갖을 때 종종 그런 생각을 초자연적인 환상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원시적인 철학이나 과학 및 도덕·예술·문학 등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를 포함한 원시 종교신앙이 생겨나 전체적인 세계관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계급사회에 접어들면서 통치계급은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원시 종교를 天命神權의 신앙으로 발전시켜 인간의 모든 정신생활을 강력히 억압하고자 했다. 이점이 바로 초기 문학창작에서 주술이나 종교적 흔적이 특별히 중시되는 이유이다. 이 단계의 문학을 일단 '巫官문학'이라고 칭하기로 하자. 물론 巫官문학에도 그 자체의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 있다. 만일 원시 신화와 가요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면, {詩經}의 '雅' '頌'에서 신을 칭송하고 조상에게 제사하는 樂章은 그것의 흥성을 대표한다. 그렇다면 西周 후기에서 東周 초기까지의 '變風' '變雅'는 아무리 형태상 詩와 樂의 합일 혹은 詩·樂·舞의 합일이란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지만, 시 작품의 내용은 이미 종교적인 것에서 인간세상의 일로 바뀌어서 巫官문학이 해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巫官문학은 역대 왕조에서의 종묘제사의 악장과 민간에서 추수감사에 행해지는 가무 중에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전승되어 오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유적이요 고대 생물의 화석과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巫官문학에 이어 생겨난 것은 '史官문학'이다. 巫官문학이 원시 종교문화에서 기원한 것인데 반해, 史官문학은 고대 종법식 농업사회와 정신문명의 산물이다. 종법식 농업사회는 정치교화와 도덕윤리을 중시하여 王公 貴族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에도 훈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말과 행적을 기록하는 역사서들이 등장하였다. 甲骨文·金文과 {周易}에 이미 史官문학의 싹이 보인다. {尙書}와 각국 {春秋}는 그것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춘추전국 교체기에 이르러서는 제자백가의 산문과 역사 산문이 활발히 지어져 다시 한번 극도의 번영을 이루었다.(주:先秦시기의 제자백가들은 비록 사관은 아니었지만, 정치교화와 윤리도덕의 주제를 표달함에 있어서는 史官문학과 일맥상통한다.) 史官문학의 단계에서 문학창작은 이미 巫術·종교·음악·무용 등이 혼합된 문화형태에서 벗어나 독립된 서면문체의 형식을 갖추었지만, 내용면에 있어서는 여전히 역사 정치 철학 윤리 등 여러 학술사상과 결합되어 아직 자신의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전 단계의 신화나 시가가 비문학적 형태 속에 문학적 영혼을 담았다면, 이 단계의 산문 작품은 공교롭게도 문학적 형식 중에 비문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巫官문학에서 史官문학으로 다시 독립적인 작가문학으로 가는 과정은 '正·反·合'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이루고 있다. 戰國시대 중·후기의 산문 저작 중에 작자의 개성이 날로 선명해지고 문학적 색채가 점차 농후해지며 篇章의 체제가 점차 완성되어 가는 경향을 보인 것은 史官문학에서 전문 작가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반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정한 작가문학은 楚辭에서 시작되었다. 屈原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시인이고 그의 작품은 고대 작가문학를 확립하는 기초가 되었으며, 또한 전통문학이 기타 문화형태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위치를 확립해 가는 최초의 표지이기도 하다. 楚辭는 문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이정표로서 {시경}과 더불어 고전 시가의 양대 원천을 이루게 된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 그러나 楚辭의 출현은 문학사상 매우 특기할 만한 현상이다. "{시경}이 사라진 연후에 {春秋}가 지어졌다."(주: {孟子·離婁} "{詩經}亡然後{春秋}作.") 戰國시기 동안 시가는 쇠하고 산문이 성행하였는데, 유독 남방 초나라 지역 한 모퉁이에서 이렇듯 서정문학의 꽃이 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것이 첫 번째 의문이다. 대개 하나의 문학양식이 배양되어 성숙하기까지는 수십 수백의 기간 혹은 그보다 훨씬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 漢 이후 5·7언시, 唐代 律體, 唐宋 曲子詞, 金元 散曲 그리고 고전 희곡과 소설 등이 모두 그러하였다. 그러나 초사의 발흥은 매우 갑작스런 일이었다.(주: '兮'자구를 띤 楚나라 지역의 가요는 물론 楚辭 체제의 先聲이지만, 이들 가요는 시종 대단히 간단하고 질박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초사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는 매우 커다란 변화이자 비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屈原이 기초를 다지고 굴원의 손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했기 때문이다. 이후에 비록 宋玉 景差 唐勒 등 몇몇 초나라 사람들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성취면에서 볼 때 굴원에 비할 바가 못되고 그들의 초사 작품 또한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秦 왕조 통일에 이르러 초사의 발전은 종말을 고하고, 후세 초사체의 賦는 대개 이를 모방한 흔적일 뿐이다. 따라서 초사란 문학양식의 발흥과 번영 및 쇠락은 다 합쳐서 수십년 간의 시간에 불과하며, 거의 굴원 혼자서 완성한 셈이다. 이것 또한 난해한 '수수께끼'이다. 이상의 문제에 관해 조금씩 살펴보기로 하자. 플레하노프는 일찍이 "우연성은 일종의 상대적인 것이고 그것은 단지 여러 필연적인 과정의 교차점에서만 출현할 수 있다"(주: 플레하노프, [역사상 인간의 역할문제를 논함(論個人在歷史上的作用問題)] {普列漢諾夫哲學著作選集} 제2권, 三聯書店, 1961년판, 361쪽.)라고 말한 바 있다. 초사와 같은 이런 문학의 '기적적인' 출현 또한 여러 요소가 결합되어 작용한 결과이다. 우선, 초사는 남방 초나라 문화의 전통을 계승했다. 초사는 초사 체제가 '兮' 자구를 가진 楚지방의 노래 가사에서 연원한 것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楚語' '楚聲' '楚歌' '楚舞' '楚風' '楚物' 등과 같은 남방의 楚문화 전체를 포괄하기도 한다. 이것들은 모두 초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초나라는 문명세계에 진입한 것이 비교적 늦고 원시사회의 遺習으로서의 巫風이 성행하여 초사 창작에 보다 깊은 영향을 미쳤다. 초사 가운데 [九歌] [招魂] [大招] 등의 작품은 초나라 지방의 제사의식과 풍습의 직접적인 반영이다. 초사의 낭만적인 상상력에는 고대 신화나 전설의 자료들이 많이 담겨 있다. 초사의 농후한 서정성과 화려한 언어표현은 제사의식에서 노래와 춤을 곁들이며 화려하게 치장한 장면과도 관련되어 있다. 심지어 굴원의 작품 속에서 남녀 간의 사사로운 감정을 군신의 관계에 비유함으로써(소위 美人香草) 일시에 크게 유행하였던 이러한 예술수법은 흡사 신에게 제사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가운데 남녀가 서로 좋아하고 서로 사모하는 내용을 빌어 '신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것(神人以和)'으로 비유하는 연극적 전통을 유도할 수 있다. 요컨데 풍부하고 오랜 역사를 지닌 남방 초나라의 문화가 초사라는 특색있고 선명한 꽃을 피웠다는 점은 결코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초사가 屈原이나 宋玉 등의 작품들처럼 폭넓은 내용과 거대한 체제, 다양한 표현수법을 지닌 문학양식을 형성한 것은 남방 초나라 문화와 중원문화가 교류하고 융합하여 낳은 산물이기 때문이다. 초사에 담겨 있는 풍부한 정치적 史料와 도덕적 이야기는 {시경} {서경} 등 고대 전적에서 연원한다. 초사의 작가 굴원 등의 사상은 유가·도가·법가·음양가 및 신선가 등 先秦시기 여러 학파들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초사 작품 중 나열식 수법은 당시 종횡으로 유세를 다니던 풍조와 서로 연관되어 있다. 比興體式의 발전은 {시경}에서 연원하는 것 이외에도 春秋시기 이래 '시를 읊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말하거나(賦詩言志)' '자신의 생각을 숨긴 채 넌즈시 말함으로써(隱語)' 풍간하는 습관과 연관되어 있다. 문구의 장단이 일정치 않고 음절이 둘쑥날쑥한 것은 또 분명 전국시기 시가의 산문화 경향을 보여준다. 中原지역 사상문화의 여러 가지 영향이 없었다면, 단순하고 질박한 초나라 지방의 가요는 초사와 같이 획기적인 문학거작으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戰國시대 중·후기 초사의 부각은 또한 당시 초나라의 사회모순이 집중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남방 초나라 지역은 역사적으로 개발이 비교적 느려서 장기간 다른 사람들에게 황폐한 땅으로 비춰져 왔다. 춘추시대 이래 초나라의 세력은 북쪽으로 확장되어 齊·晉과 중원의 패권을 다투었고, 이 과정에서 폭넓게 중원문화와 접촉하고 이를 흡수함으로써 문명왕국으로 급성장하였다. 전국시대 이후 중원 각국은 앞다투어 사회개혁적인 성격의 '변법'운동을 일으켜 각기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었다. 초나라에서도 悼王 때 吳起에 의해 변법운동이 일어난 바 있다. 그런데 종실과 중신들의 강력한 반발로 말미암아 일년 이후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그 이후 점차 국세가 쇠약해졌다. 굴원이 생활하던 懷王과 頃襄王의 시대에 와서는 밖으로는 강한 秦나라가 점점 압박해 들어왔고, 안으로는 '초나라 장군 莊蹻가 郢에서 폭동을 일으킨 것'과 같은 사회동란으로 인해 굴원을 우두머리로 하는 혁신파 인사까지도 보수세력에 의해 심한 억압과 배척을 받았다. 이런 여러 가지 모순이 한데 결합되어 심각한 사회적 위기를 낳았고, 이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커다란 동요와 불안을 야기하였다. 아울러 시가를 통해 정감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내심의 울분을 표달할 절박한 필요성이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중원 각국이 '처사들의 의론이 횡행하는(處士橫議)' 산문의 발흥단계에 놓여 있을 때, 왜 초나라만이 비극적인 심리를 깊이있게 묘사한 초사체의 문학이 발전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조류가 갑자기 등장했다가 금방 사라져 버린 것(秦나라가 통일된 이후 남방 초나라 지역의 독특한 사회적 위기는 종말을 고하였다) 역시 이러한 원인으로부터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초나라 지방의 문화적 전통, 중원문화의 영향과 초나라의 당시 사회정치적 형세의 변화 등 세 가지 역량의 상호작용은 참으로 아름다운 문학양식인 초사를 창조했다. 초사가 巫官문학의 餘音이자 史官문학의 곁가지이며 동시에 작가문학의 선구이기도 하다는 이러한 독특한 역사적 위상 또한 이상에서 기술한 바의 정황에 근거하고 있다. 만일 초나라의 특수한 사회적 형세와 문화발전의 과정이 없었다면, 戰國시기 동안 내내 온통 제자산문과 역사산문 일색이어서 작가문학의 탄생은 한 세기 정도 그 시기를 늦추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초사가 작가문학의 신기원을 열었지만, 이는 단지 남방 초나라란 한 모퉁이의 현상이었을 뿐이다. 작가문학의 보편적인 전개는 漢代에 가서야 가능했다. 한대 문학의 가장 중요한 표지는 辭賦의 흥성이다. 그러한 "수식을 늘어놓고 사물을 본떠 생각을 묘사한"(주: 劉勰 {文心彫龍.典賦} "鋪采摛文, 體物寫志") 궁정의 大賦는 단지 '曲終奏雅'식의 풍유형태상 유가의 교리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번화하고 수식이 많고 화려한 장면이나 경물묘사는 특히 제국을 통일하고 국위를 선양할 필요에도 부합할 수 있다. 이에 문채 자체를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 문학창작은 통치자의 격려와 제창을 받았고 독립적인 문학양식은 漢賦라는 형식 속에서 가장 먼저 보급되었다. 물론 한인의 문학창작은 결코 사부 한 쟝르에 한정되지 않는다. 五·七言 古詩와 樂府의 생성 및 論·策·書·疎·序·說·記·傳·碑·志·銘·誄 등 각종 문체의 형성은 일을 서술하고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감정을 표현하고 사물을 묘사하며 이치를 설명하고 어려움을 역설하는 여러 가지 창작방법의 운용 및 문학언어의 진화는 중국 고전문학이 이미 그 토대를 확립하여 독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전문 작가들이 대량으로 출현하여 초보적이나마 經書·子書·史書 이외에 여러 작가의 문집 또한 편찬되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독립적인 문학관념이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당시 그것을 '文章' 혹은 '辭章'이라고 이름함으로써 일반 학술문화를 나타내는 '文學' 혹은 '儒學'과 구별하였다. 漢末에 이르러 曹丕가 {典論·論文}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일이요 영원히 변치 않는 위대한 일이다"(주: 曹丕 {典論·論文} "經國之大業, 不朽之盛事.")라고 하여 문학창작의 중요성을 전에 없이 높은 위치에까지 고양시킨 것은 바로 문학의 독립과정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는 문학의 거대한 가치가 드디어 사회적 공인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先秦 兩漢의 문학사 발전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중국 문학이 비독립적인 상태에서 독립적인 상태로 나아가는 과정은 巫官문학 史官문학과 작가문학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실현되었다. 이는 서구 초기에 신화·전설·가요에서 서사시와 비극·희극·서정시가 파생되어 나온 상황과 다르다. 서구문학의 발전은 巫官문화의 모태에서 직접 작가문학을 잉태하였는데, 중국 문학은 대부분 史官문화의 세례를 받는 중간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중국은 고대 오랜 기간 동안 종법식 농업경제의 사회형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史官문화의 영향이 매우 컸다. 史官문화는 사회의 정치교화 윤리를 본위로 하였기 때문에 중국 문학이 정치교화적 기능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美는 善에 종속되어 있다 혹은 '美와 善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고대문학의 영구적인 본질을 이루고 있다. 史官문화는 문학·역사·철학·정치·경제·교육 등 여러 가지 학술적 요소가 한데 긴밀히 결합되어 있어서 영역을 구분하기 어렵다. 漢代 이후 형성된 독립된 문학범주도 대개는 잡문학의 체제로서, 시나 희극 및 소설을 모식으로 한 서구의 순문학과는 구별된다. 史官문화는 상고시대의 신화나 전설을 고대 역사의 한 부분으로 해석하고자 함으로써 서양과 같은 장편의 서사시를 발전시키지 못했고, 희극이나 소설은 더욱 충분한 영양분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서정시와 산문이 곧 정종의 문학양식을 이루었다. 이러한 모든 변화는 중국 문학전통의 확립에 심각한 작용을 하였고 장래 민족문학의 발전과정을 규정하게 된다. 2. 민족전통의 변화와 발전 중국 전통문학은 漢·魏 이후 변화와 발전시기를 맞이한다. 이른바 발전은 내용과 형식 두 방면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文'과 '質'의 관계는 곧 이 시기 문학사에 있어서 주요 모순을 이루고 있다. 대체로 최초 文과 質의 합일에서 중간의 文과 質의 분리, 나중의 文과 質의 兼備에 이르는 과정은 문학발전의 기본적인 윤곽을 보여준다. 그리고 漢·魏와 晉·南北朝 및 唐代의 구분은 각각의 단계를 그에 상응하는 시기로 나눈 것이다. 文과 質이 합일된 문학창작은 漢代 樂府民歌와 古詩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악부민가의 수집과 정리 및 전래는 대개 漢賦의 성행과 보조를 같이 한다. 그러나 한부가 '수식을 늘어놓는(鋪采摛文)' 것을 能事로 여긴 것과는 달리, 악부민가는 대체로 맑고 자연스러운 언어를 사용하여 직설적이고 소박하게 일반 서민의 실제생활의 느낌을 표현하였다. 이른바 '슬픔과 즐거운 감정에서 감흥이 일어나 일에 따라 표출한다'(주: 班固, {漢書·藝文志} "感于哀樂, 緣事而發.")는 것은 辭賦의 작가와는 확실히 다른 미적 취향을 보여준다. 東漢 중엽 이후 수식이 화려하고 언어가 사치스러운 大賦는 날이 갈수록 쇠퇴해져 가고 서정적인 小賦가 대신 성행하였다. 이는 辭賦의 고조기가 지나가고 서정시 시대가 장차 임박하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무명씨의 古詩가 출현한 것은 곧 시의 왕국에 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古詩는 樂府와 창작방법상 조금 차이가 있다. 꾸미지 않은 언어로 내심의 감정을 묘사함으로써 "마치 秀才가 친구에게 집안의 일을 말하듯이"(주: 謝瑧 {四冥詩話} "若秀才對朋友說家常話.") 표현한 작품은 악부민가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감동적이다. 악부나 고시는 모두 한대 辭賦로 대표되는 작가문학 이외의 또 다른 문학사조를 형성했다. 이는 당시에 주류는 못되었지만, 이후에는 오히려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魏·晉·南北朝·隋·唐이란 中古시기 문학 전체는 이들의 기초 위에서 발전되었다. 文과 質이 합일된 전통은 建安문학에 이르러 커다란 호응을 얻는다. 建安시대의 작품은 내용상 시대적 감흥(感時), 정치 풍자(刺政), 감회(述懷), 화답(酬贈), 변방(邊塞), 산수경물(山水), 역사적 내용(咏史), 신선세계의 동경(游仙), 감정의 표현(言情), 사물 묘사(賦物) 등 각종 題材를 새롭게 개척하였다. 창작방법에 있어서도 서정·경물 묘사(寫景)·서사·설리·대구·전고·기승전결의 구성(起結)·편폭의 안배(謀篇)·문구의 선택(選句)·언어의 정련(煉字) 등 각종 기교가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풍격에 있어서는 淸竣·通脫·華麗·壯大 등과 같은 풍격이 출현하였는데, 오로지 어느 하나의 풍격에만 주력하지 않고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체제면에서는 5언시가 성행하였고 7언시는 형성기를 맞이하였으며, 樂府 舊題는 더욱 새로워지고 산문과 사부(주로 서정적이고 경물묘사적인 小賦) 또한 각기 그에 상응하는 발전을 보였다. 한대 악부와 고시처럼 내용과 형식이 비교적 단순하여 자연스럽게 文과 質의 합일에 이르는 경우에 비해, 建安문학의 '質'과 '文'은 크게 복잡해지고 문학의 사유공간이 다양하게 확대되고 심미의식의 심층심리가 크게 발전된 경향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것이 결코 文과 質이 지속적으로 통일을 유지하는 데 장애가 될 수는 없다. 鍾嶸의 {詩品}에서 "氣骨이 기이하고 높고 문채가 화려하며 감정은 우아함과 원망스러움을 겸비하였으며 구성면에서 文과 質이 잘 어울어져 있다"(주: 鍾嶸, {詩品} "骨氣奇高, 詞采華茂, 情兼雅怨, 體被文質.")라는 말로써 建安의 대표작가인 曹植을 평하였으며, 또한 한 시대의 문학 풍조를 보여주었다. 正始연간에 이르러 阮籍과 稽康의 시나 산문도 여전히 文과 質이 상호 부합되는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형세의 역전으로 말미암아 [咏懷] 82수는 "비록 뜻은 풍자하는 데 두었지만 문장의 표현은 대개 감추고 꺼린 바가 많으며,"(주: {文選} 李善注 "雖志在刺譏, 而文多隱避") "감흥을 기탁하는 함에 있어서도 무슨 연유가 나타나 있지 않아"(주: 沈德潛 {古詩源}評語 "興寄無端") "궁극적인 취지(歸趣)가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주: 沈德潛 {古詩源}評語 "莫求歸趣") 이와 같은 것은 '質'이 '文'에 감추어져 있다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다음 단계에서 창작상 文과 質이 점차 분리되는 경향을 예고한다. 文과 質의 분리는 晉代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西晉시기 太康문학은 "正始연간에 그 화려한 문채를 자랑하였고 建安시기에는 애써 부드러움을 추구하여"(주: 劉勰, {文心雕龍·明詩} "采縟于正始, 力柔于建安.") '文이 質을 압도하는'의 경향을 나타냈다. 東晉시기 玄言詩賦는 "사상적인 면이 언어표현을 지나쳐 담백하기가 맛이 없는 듯하다"(주: 鍾嶸, {詩品序} "理過其辭, 淡乎寡味")는 점에서 또한 '質이 文을 압도한' 경우의 전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물론 左思·劉琨·郭璞·陶淵明 등과 같은 몇몇 시인들이 文과 質의 합일 노선을 견지하였지만, 중과부족으로 결코 시대적 풍조를 뒤바꾸지는 못했다. 南朝에까지 유행한 "文이 質보다 부염하다"는 것은 당시 주된 추세였다. 玄言·山水·宮體는 문학의 내용이 갈수록 사회·인륜·政事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對偶·典故의 사용·聲律은 언어형식미의 극단적인 발전과 추구를 보여주었다. 文과 質 사이의 거리가 갈수록 멀어져가고 양자간의 대립도 갈수록 첨예화됨에 따라 일부 문인들의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혹자는 '道에 근본하고(原道)' '성인을 종주로 떠받든다(宗聖)'는 전제하에 문학발전의 전체적인 방향을 바로잡고자 했고, 혹자는 창작실천에 있어서 '風骨'과 '丹采'의 조화로운 통일을 주장하였다. 요컨데 이런 주장들은 모두 文과 質을 하나로 귀속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폭넓은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唐代 시와 산문의 복고운동을 위해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이와 동시에 北朝문학은 南朝와 다소 상이한 길을 걸었다. 북조민가는 본래 남조의 [子夜] [讀曲]과는 다른 강하고 거친 기질을 지니고 있다. 북조 문인의 창작이 남조를 본받았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실질을 중시하는 근본이 담겨 있다. 周·齊 이후 庾信·王褒와 같은 남방작가들은 북방을 떠돌며 그들 자신이 본래 지니고 있는 고도의 문화적 소양에다 국가의 커다란 변란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서 지난날의 자연경물에 매료되어 시를 읖조리던 태도에서 바꾸어 정치하고 화려한 언어표현으로 애통하고 침울한 마음을 노래하였다. 남북의 문풍이 융합된 이런 새로운 경향은 隋代에 들어서 보다 의식적으로 주장되었으며, 또한 唐代문학이 文과 質이 겸비된 국면을 형성하는 데 실천적 기초를 다져 놓았다. 六朝문학이 文과 質의 합일에서 文과 質의 분리로 변화·발전한 것은 상술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변화를 보아야 할 것인가? 과거 어떤 학자들은 '형식주의' '유미주의'라는 말로 전체 육조문학의 가치를 매도하였다. 또 오늘날에 와서 어떤 학자들은 '문학의 자각' '문학의 해방'이란 말로 이러한 주장과 전혀 상반된 주장을 한다. 그렇다면 과거 천년 세월의 공과를 누가 평가해 줄 것인가? 필자의 생각에 이 문제는 역사의 기본적 맥락 속에 놓고 볼 때만이 비로소 정확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육조문학은 漢나라라는 봉건적 통일왕조가 해체되는 형세하에서 발전된 것이다. 漢代 사람들이 유가 교리에 의해 속박을 받은 것과는 상대적으로, 육조 문학은 작가 개성의 표현과 정감의 표현을 중시하고 문학의 독립적 지위와 가치를 강조하며 '미'를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제재·意境·언어·기교·풍격 등 여러 방면에서 모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육조의 문학은 분명 '문학의 자각'과 '문학해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육조 문학과 같은 '새로운 변화'가 없었다면, 후세 唐代문학과 같은 중국문학의 전성기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齊·梁 및 陳·隋의 여러 작품들은 번잡스러웠다'(주: 韓愈 [薦士] "齊梁及陳隋, 衆作等蟬噪.")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일종의 편협한 말이다. 그러나 또한 漢나라 제국이 패망한 상태에서 세워진 육조 사회(西晉에서 시작된다)는 기본적으로 문벌사족의 부패한 통치하에 극히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사회였다. 미래에 대한 비젼도 없이 사람들의 생활과 심리활동을 제한하여 사상의 해방이 기형적으로 발전하여 매우 소극적이고 퇴폐적인 상태로 흐르게 하였다. 晉·宋 이후의 문학창작에는 사회와 인생을 도피하는 경향과 오로지 형식미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나타나서 '美'와 '善'을 극히 대립적으로 보았는데, 이는 바로 이러한 위기심리의 반영이다. '漢魏의 風骨은 晉·宋시기에는 전해지지 않았다'(주: 陳子昻 [與東方左史규修竹篇序] "漢魏風骨, 晉宋莫傳.")라고 한 것은 다소 절대화된 감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핵심을 찌르는 비평이다. 唐代 詩와 산문의 이름난 작가들은 매우 오랜 시간 동안에 '六朝의 餘習'과 싸웠는데, 이는 과녘도 없는데 활을 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육조문학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특수한 복합성이 있다. 육조문학의 文質分離 노선은 文質合一이란 원형에 대한 극복이자 '문학자각'과 '해방'의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文과 質의 분리가 가져온 편협성은 또 다음 단계 문학이 文과 質의 겸비로써 이를 극복하길 기다렸다. 이 또한 하나의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이다. 唐代에 접어들면서 文과 質 겸비의 조건이 성숙되게 된다. 唐代는 중국 봉건사회의 전성기이다. 문벌사족 통치가 무너져감에 따라 봉건시대 전반기 일련의 모순들(가령 생산영역에서 노예제가 심각할 정도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 농민과 공장의 긴밀한 결속, 문벌제도하에서 '士' '庶'의 현격한 차별화)은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봉건 후기의 여러 중요한 모순들은(예를 들어 균전제가 붕괴된 후 토지겸병이 가속화된 점, 상품경제의 발전이 사회분화를 가속화하고 전제주의 중앙집권을 강화시킨 점 및 국내 각 민족의 폭넓은 연대와 민족모순의 첨예화) 아직 충분히 전개되지 않았다. 바로 이처럼 특별히 좋은 시대조건은 당대 사회경제의 변영, 정치의 안정과 국력의 강화를 촉진시킴과 동시에 사람들의 정신상태를 더욱 분발시키고 향상시킴으로써 문학과 예술이 싹트고 성장하는 데 풍부한 토양을 제공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토대 위에서 발전되어 온 唐代문학은 과거 문인들의 창작 성과를 충분히 흡수하였다. {시경}의 사실주의 정신과 초사의 낭만적 상상력, 漢·魏의 風骨, 齊·梁의 성률, 陶淵明과 謝靈運의 전원시와 산수시, 北朝의 변새적이고 호방한 정신, {사기} {한서}의 서사방식, 제자백가의 議論 및 賦의 나열식 기술, 樂府의 白描수법, 고소설의 志怪, 參軍戱의 우스꽝스러운 연기나 농담 등은 당대 문인들의 글에 등장하지 않거나 당대 문인들의 문학정신에 용해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당대 작가는 또 각 방면의 재료를 기계적으로 융합하지 않고 여러 가지 장점들을 널리 채집하고 자꾸 새롭게 바꾸어서 文과 質이 조화롭게 통일된 일대 새로운 풍조를 열었다. 내용과 형식의 상호 통일이란 점에서 볼 때, 당대 문학은 漢·魏시기의 文과 質의 합일 전통에 대한 복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단순한 회귀가 아니다. 그것은 六朝시대 文과 質이 분리된 하나의 발전단계를 거친 뒤의 회귀요, 획기적인 개척과 획기적인 자각에 바탕을 둔 회귀이다. 이른바 "新聲의 능숙함은 물론 古調에도 밝아 文과 質을 절반씩 취하였고 시경과 {離騷}의 정신을 두루 겸비하였으며 氣骨면에서는 建安을 傳으로 삼았고 宮商면에서는 太康이 여기에 못미친다"(주: 殷璠, {河岳英靈集.集論} "旣閑新聲, 復曉古調, 文質半取, 風騷兩挾, 言氣骨則建安爲傳, 論宮商則太康不逮.")는 것은 바로 당대 사람들의 이러한 자각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당대 文과 質이 兼備된 문학은 또한 그 자체로 발전적인 궤적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安史의 난(A.D.755-763) 이전은 文과 質의 겸비가 형성된 단계에 속한다. 이 시기에는 齊·梁과 漢·魏 두 전통의 장기간 투쟁과 상호 융합이 문학발전의 주류를 이룬다. 시가는 唐初 宮廷(齊·梁의 메아리)에서 기원하여 '初唐四杰' 陳子昻 등의 개혁(漢·魏를 부흥시키는 것)을 거쳐 開元·天寶 연간(A.D.713-756)에 이르러 마침내 "聲律과 風骨이 비로소 갖추어 지고"(주: 殷璠, [河岳英靈集序] "聲律風骨始備.") 齊·梁과 漢·魏가 종합되는 거대한 경계에 도달하여 울긋불긋 화창한 봄날의 풍경이 나타났다. 산문혁신의 성과는 시가에 비해 현저하지 않지만, 경향이나 폭은 그와 엇비슷하다. 安史의 난이 폭발한 때로부터 元和·長慶 연간(A.D.806 -824)까지는 당대 사회가 거대한 변화를 거치는 시기이다. 사회정치의 동란·민생의 피폐·통치계급의 '自救'적 노력, 도시 상공업과 시민계층의 급성장이 한 데 어울려 한 폭의 화려한 풍속도를 이룸으로써 여러 가지 면에서 문학창작을 활성화하는 데 추동력이 되었다. 당대 전기에는 유독 시가만이 크게 성장을 보였지만, 이 단계에 와서는 각 쟝르의 문학이 전체적으로 꽃을 피웠다는 것이 그 특징이다. 시가창작이 재차 성행하고 고문운동이 고조되고 전기소설이 번영하고 變文이 유행하며 曲子詞가 민간에서 문단으로 이행하고 또 희극이 초보적으로 형성된 것은 중국 고전문학이 전체적인 면에서 성숙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전에 중국 문학의 발전은 주로 시와 산문 두 방면에 한정되었다면, 이후에는 모든 문학쟝르에 대해 사방으로 확트인 탄탄대로를 열어 놓았다. 비록 전통의 문학양식의 범위내에서이긴 하지만 中唐문인은 커다란 창조적 성과를 거두었다.(주: 필자가 말하는 '中唐'이란 安史의 난의 발발에서 元和·長慶 연간까지를 지칭하므로 전통의 '四唐'설의 시기구분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 安史의 난은 사실 唐代 역사와 문학발전 중 중요한 분수령으로 생각된다. 杜甫(그의 대표작은 대부분 安史의 난 중에 창작되었다)로부터 韓愈 白居易에 이르기까지는 일맥상통하는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시가로 말하자면, 杜甫의 '三吏와 三別'에서 元稹·白居易·張籍·王績의 新題와 古題의 樂府에 이르기까지 당시 여러 시인들은 종종 전형적인 사건과 장면을 골라 묘사함으로써 시대적 폐단의 어느 한 측면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때문에 이러한 시들을 르뽀형식의 시라고 일컫기도 한다. 白居易의 [長恨歌] [琵琶行]과 元稹 [連昌宮詞]는 완곡하면서도 생동적인 필체로 인간의 애환 및 만남과 이별과 같은 세상사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기소설식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柳宗元의 [籠鷹詞] [跂鳥詞]와 劉禹錫의 [聚蚊謠] [百舌吟]은 날짐승과 들짐승의 말을 빌어서 인간세상의 일을 되비쳐 보여줌으로써 현실세계를 비꼬고 있다는 점에서 우언·잡문식의 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韓愈의 [山石] [謁衡岳廟]와 白居易의 [游悟眞寺詩]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유람 과정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어서 遊記式의 시에 속한다. 杜甫의 [自京赴奉先縣咏懷] 및 [北征] 중의 대대적인 의론은 정치평론식의 시라 할만 하다. 또 [戱爲六絶]은 시가예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므로 문학평론식의 시에 속한다. 劉禹錫의 "가라앉은 배 옆으론 수 많은 돛배 지나고, 병든 나무 앞에선 온갖 나무들 봄맞이 하네"(주: 劉禹錫 [酬樂天揚州初逢席上見贈] "沈舟側畔千帆過, 病樹前頭滿木春.") "봄날 향그런 숲풀 새잎은 묵은 잎을 밀어내고, 흐르는 강물의 앞 물결은 뒷 물결에 자리를 양보하는구나"(주: 劉禹錫, [傷微之·敦詩·晦叔] "芳林新葉催陳葉, 流水前波讓后波")라는 서정적 표현과 경물의 묘사 속에 인생세상의 철학적 내용을 담음으로써 송대 시인들이 이치를 즐겨 말하는 풍조의 남상이 되었다. 韓愈 [南山詩] [陸渾山火] 및 韓愈·孟喬의 [城南聯句] [鬪斗聯句]는 장황하게 문자를 나열하고 기이한 문자와 심오한 내용이 많아 漢賦의 흔적이 뚜렷히 남아있다. 이들 작품은 서로 다른 방면에서 盛唐 이전의 시가창작이 감정 표현과 경물 묘사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었던 것에서 벗어나 시가의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해 광활한 천지를 열었다. 과거 사람들은 매번 시는 盛唐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성행하기' 시작하였다고 칭송하면서도, 중당에 이르러서는 중국시가 '변화를 다했다'고 종종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中唐은 사실 중국 문학사상 가장 주의할 가치가 있는 시기이다. 淸代 葉燮은 "고금 문단의 변화와 시단의 변화는 이 시기에 이르러 일대 관건이 되었다"(주: 葉燮, {原詩} "古今文運詩運至此時爲一大關鍵.")고 주장했으며, 더 나아가 이른바 中唐은 "곧 고금 百代의 '중간'이지 唐代만의 '중간'이 아니다"(주: 葉燮, [百家唐詩序] "乃古今百代之中, 而非有唐之所獨得而稱中者也")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지적은 혜안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당대문학은 盛唐과 中唐 두 번의 번영기를 거친 뒤 晩唐 五代에 이르면 쇠퇴하는 추세를 보인다. 시가창작상 지나치게 형식미를 강구하는 경향이 다시 대두하고 고문운동이 쇠퇴하고 변문이 부활하며 전기소설 가운데 현실을 벗어나는 풍조가 늘어난 것은 모두 이러한 추세의 반영이다. 이 시기 문학 중 文人詞만이 기형적으로 발전하였다. 즉 수량도 전에 없이 많아졌고 형식도 정치하였다. 그렇지만 표현된 내용은 대부분 술자리 주변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기루 주변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당시의 다른 갈래와 마찬가지로 퇴폐적 경향을 드러냈다. 이 모든 것은 文質兼備의 국면이 해체되고 문학발전의 고조된 물결이 시들어 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중국 문학의 역사발전 또한 새로운 변화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4. 전통문학의 탈바꿈 필자는 宋·元·明·淸을 전통문학이 탈바꿈하는 시기(蜕變期)라고 본다. 탈바꿈(蜕變)이란 단순한 정체나 쇠락도 아니고, 또 사상이나 예술적 가치가 보편적으로 하락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통문학의 본질적 내용에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원래의 내용이 해체되고 새로운 내용이 점차 싹터 양자가 오랫 동안 서로 적대시하고 배척하는 가운데 통일된 전체를 아직 형성하지 못했다. 탈바꿈하는 과정에도 사물은 여전히 발전한다. 다만 이전 시기의 점진적인 발전과는 달리 자신과 다른 방향 그리고 대립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혹자는 그것을 '질적 전화'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중국 사회 역사운동의 특징 때문에 이러한 전화과정은 유독 길고 진행이 완만하며 굴곡과 반복이 많다. 탈바꿈의 흔적은 宋·元 이후의 문학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중국 문학은 '美와 善이 두루 겸비된' 것을 근본적인 특징으로 삼고 있다. 미는 선에 종속되어 있다. 보다 분명히 말하면, 종법사회의 정치교화 윤리에 종속되어 고대문학의 굳건한 전통을 이루고 있다. '理'와 '情' '質'과 '文' '神'과 '形' '正'과 '變' 등과 같은 여러 요소의 조화와 통일은 이러한 '善과 美의 결합'이란 본질의 구체적 표현이다. 그런데 宋·元 이후에는 정황이 차츰 변하였다. 宋詩와 宋詞의 분류는 문학창작상 '主理'와 '主情'이란 자못 상이한 경향을 나타냈는데, 이는 明·淸 문예사조 중 '理'와 '情' '天理'와 '人慾'의 첨예한 갈등으로 발전한다. 宋·明 이학가와 고문가의 문학 가치관념에 대한 차이는 전통 시문 가운데 文과 質의 합일 관계가 파열되었음을 의미하며, 바로 여기에서 道統과 文統 간의 장기간의 대립이 생겨났다. 蘇軾 및 그 문화생들의 '神似'와 '形似' 문제에 관한 토론은 '神을 중시하거나' '形을 중시하는' 서로 다른 풍조를 열어 놓아 王若虛·李贄·王士禛·趙執信 등의 거듭된 논의를 거쳐 더욱 분명해지게 되었다. 嚴羽가 江西詩派에 대한 비난에서 '詩體正變'의 논지를 제시한 것은 명대 前後七子와 公安·竟陵派 사이의 擬古와 反擬古의 투쟁을 위해 복선을 깐 것이다. 이밖에 다같이 '文과 道' 관계를 논한다 할지라도, '格調' '性靈' '神韻' '肌理'의 구분이 있으며, 심지어 다같이 고인을 본받더라도 宗唐·宗宋·宗盛唐·宗晩唐·宗李杜·宗王孟 등 각기 다른 문파와 家法이 존재한다. 宋·元 이후의 문단에 각종 사조와 유파가 전에 없이 화려하고 다양하게 출현하여 소생했다 소멸하며 모순과 충돌을 일으켰는데, 이러한 복잡한 현상의 이면에는 공교롭게도 전통 문학의 고유한 바탕이 분리되고 해체되는 면이 숨어 있다. 그렇지만 탈바꿈과 해체의 가장 뚜렷한 징표는 雅문학(사대부 정통문학)과 俗문학(사대부에 의해 정통으로 간주되지 못한 문학) 사이의 대립이다. 알다시피 문학창작에 있어서 雅와 俗의 구분은 옛부터 존재하였다. 이는 창작자의 신분 차이와 상관이 있으며, 더우기 감상대상의 층위 구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사회가 문화적 소양이 현저히 다른 사람들로 구분해야만 雅·俗의 구분 역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唐 이전의 정황으로 말하자면, 雅문학과 俗문학의 대립은 결코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았으며, 한계 또한 그만큼 엄격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정황으로 볼 때, 민간에서는 일종의 속문학 형식을 창조했고, 그것이 활발한 생명력을 얻으면 오래지 않아 문인 학사들의 주목을 받아 모방되고 다듬어지고 개조됨으로써 마침내 雅문학의 대열에 들어갔던 것이다. {詩經}의 15國'風'이 그러했고, 훗날의 楚歌와 樂府民歌 및 5.7언시 그리고 曲子詞가 모두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宋·元 이후의 정황은 다르다. 백화소설이 발흥하고 南戱·雜劇·傳奇가 번영하고 鼓子詞·諸宮調·寶卷·彈詞 등 각종 講唱문학이 성행하는 등 속문학 계열이 흥성한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시종 雅문학의 대열에 들어가지 못했다. 문인학사들 가운데는 간혹 이들 신선한 형식에 손을 대는 사람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은 여전히 저속한 학문 혹은 보잘 것 없는 道로 간주되어 결코 大雅之堂에 오로지 못했으며, 詩·詞·文·賦 등과 같은 정통문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문학전통은 이후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고유의 고전적이고 우아한(古雅) 문학이다. 이러한 고전적이고 우아한 문학은 발전과정에서 날로 쇠퇴하고 고착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단에서 여전히 지배적 지위를 점유하고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신흥의 통속문학이다. 통속문학은 활발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발전하면서도 질시와 억압으로 인해 그 떳떳한 위상을 확립하지 못했다. 雅문학이 속문학을 흡수하여 소화시킬 힘이 없다는 것은 새롭게 일어난 속문학이 전통 雅문학과 다소 다른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전통문학 속에서 이질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말해준다. 통속문학의 발전은 마침내 전통문학의 해체를 촉진하였다. 雅와 俗의 대립이란 실마리에 근거하여 宋·元 이후의 문학의 진화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진화의 첫단계는 雅문학과 俗문학이 평행하게 발전하는 단계이다. 이는 대체로 宋·元시기에 상당한다. 이 단계에서는 雅문학도 여전히 발전할 여지가 있었고(宋詩·宋詞·北宋 고문운동·元 散曲) 속문학도 마침 활발하게 성행함으로써(宋·元 話本과 講史, 宋·金 雜劇과 南戱, 金 諸宮調, 元 雜劇), 雅문학과 속문학이 모두 나란히 발전하여 서로 충돌함이 없이 '평화롭게 경쟁하는' 국면을 형성하였다. 경쟁의 결과, 雅문학은 그 위세가 점차 위축되어 갔고 속문학은 시작 단계에서 성숙의 단계로 발전하여 雅문학과 속문학이 거의 대등한 관계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北宋시기는 시·사·산문이 거의 천하를 통일한 시기였고 話本과 講史는 겨우 맹아상태였는데, 南宋 및 金代에 이르러서는 雜劇·南戱·話本·諸宮調가 크게 성행하여 순식간에 雅문학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으며 元代 잡극 역시 한 시대를 독점함으로써 확실히 시·산문·사 및 산곡의 성취를 능가하였다. 이 시기의 雅문학은 비록 발전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발전과정에서 이미 쇠약의 기미가 보였다. 宋詩(歐陽修·梅堯臣·蘇軾·黃庭堅을 대표로 한다)는 고전시가 唐詩를 계승한 이래 가장 창조성이 뛰어난 시가라고 할 수 있다. 송시에는 당시와는 다른 새로운 면모를 갖추고자 함으로써 '묵은 것을 피하고 새로운 것을 쫒고' 큰 길이 아닌 구불구불한 샛길로 걸어간 점이 없지 않다.(주: 南宋 前期의 애국적인 시가풍조는 예외이지만, 그것은 특수한 역사조건 속에서 생겨난 산물이다.) 송대 시인은 中唐詩의 기이함을 좋아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경향을 계승발전시켰지, 中唐詩의 거대하고 심후한 기상과 담백하고 평이한 작풍만은 도리어 계승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송대 말엽까지는 [自京赴奉先縣咏懷] [北征] [新樂府] [秦中吟] 및 [長恨歌] [琵琶行]과 같이 역사성도 풍부하고 세상사에 있어서 감동적이고 실제 인간의 삶에 부합하는 일들을 서술한 거대한 작품은 출현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송시는 '세세한 것'에 대한 묘사는 뛰어나지만 '중대한 판단' 같은 것은 부족하다라는 비판이 있는데,(주: 錢鍾書, {宋詩選注}(北京, 人民文學出版社, 1958년판) 序言 참조.) 이는 올바른 지적이다. 宋詞(婉約派를 정종으로 삼는다)의 경우에는 또 송시와 다른 새로운 면모를 갖추고자 한 점이 있는 듯하다. 송시의 '以文爲主'는 玉石이 섞여 있지만, 거기에 반영된 내용은 비교적 넓고 풍격도 다양한 편이다. 詞는 '또 다른 하나의 쟝르로서' 감수성이 섬세하고 표현이 정치하다는 점에 있어서 그에 비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지만, 표현세계가 너무 협소하고 표현형식도 너무 섬세하다. 몇몇 호걸지사들이 이 한계를 타파하고자 했으나, 이는 도리어 '詩로써 詞를 짓는' 격이어서 '본질적인 것이 못된다'라고 여겨졌다.(주: {後山詩話}에서 蘇軾의 詞를 평하면서 "以詩爲詞"요 "要非本色"라고 했다.) 송대 전통문학 가운데 당대 문학과 견줄 만한 것으로는 산문 밖에 없다. 게다가 발전의 보편성과 풍격의 성숙 정도에서 보자면, 송대 산문은 당대의 성과를 훨씬 뛰어넘었다. 그러나 당대 산문은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고 송대 산문은 의미가 겉으로 드러난다. 당대 산문은 장대하고 송대 산문은 정교하다. 당대 산문에는 '의미있는 언어'의 구사가 많고 송대 산문에는 '논리적인 언어'의 표현이 많다. 당대 산문은 실제성(實)을 중시하여 장편의 議論(가령 [原道] [封建論])과 완정한 서사(가령 [段太尉逸事狀] [張中丞傳后序])에 뛰어나며, 송대 산문은 추상성(虛)을 중시하여 감정 표현과 경물 묘사 및 수필 잡기에 능하다(가령 [醉翁亭記] [石鐘山記]). 당대 산문과 송대 산문은 크게 다르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그 우열을 나누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볼 때, 송대 정통문학의 발전은 어떤 면에서 새로운 경계를 개척하고 새로운 기교를 제공하여 시·사·산문 각 쟝르가 다같이 성행하는 형세를 조성했지만, '美와 善의 결합' '文과 質의 합일'이란 총체적 시각에서 볼 때 당대 문학보다 한층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말한 바 발전과정 중의 퇴보적 형세이다. 물론 이것은 결코 송대 문인의 자질이 부족한 데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美와 善 결합'이란 전통문학의 본질은 당대 서정시에 이르러 이미 '善과 美가 극도로 발휘된'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런 방향으로 계속 발전할 수는 없었다. 중당 문학은 서사·설리·희극 등의 방면으로 전화되기 시작했는데(시가 자체적으로도 전화하고 있음을 포함한다), 이는 사회역사가 봉건 후기로 넘어가면서 각종 모순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하는 형세와 잘 부합된다. 그러나 송대 이후 雅문학과 俗문학의 분리로 말미암아 새로운 형태의 문학은 단지 속문학 테두리 안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다. 雅문학은 여전히 서정과 서경의 좁은 울타리에 갇혀(가령 宋詞) 있거나 전통의 서정적 체제 내에 어떤 非서정적 요소들을 가미했지만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함으로써(가령 송시), 요컨데 새로운 변화를 원만하게 실현하지 못했다. 이는 문인의 불행이자 시대의 불행이었다. 원대에 이르러서는 시와 산문은 더욱 쇠퇴하였다. '일대의 새로운 양식'으로 불리우는 산곡은 사실 雅와 俗이 반반씩 섞인 문체이다. 속문학의 영향(예를 들어 시민생활을 반영하고 白描의 수법을 많이 사용하고 속어를 사용하는 것 등)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확실히 생활의 정취가 풍부하다. 그렇지만 雅문학의 전통(예를 들어 사대부의 사상의식을 표현하고 서정과 서경에 중점을 두며 우아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 등)에 얽매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문체와 격조가 급박하고 情境이 번잡스러워서 동시대 잡극의 성취에 크게 못미친다. 이와 동시에 이 단계의 속문학은 급속한 성장 속에서도 새로운 요소를 형성하였다. 그것은 곧 시민생활과 정취의 반영이다. 송대 話本 가운데 [碾玉觀音] [錯斬崔寧] [快嘴李翠蓮] 등이 그 실마리를 열어 元 雜劇에 이르러 보다 발전하였다. 잡극의 작자는 話本소설과는 달리 늘 전문적인 문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원대 사회에서 지위가 낮아 성년이 되어서도 시장바닥이나 길거리를 떠돌았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시민들의 생활과 사상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關漢卿의 명작 [竇兒怨] [救風塵]은 모두 시민계층 가운데 가장 억압받는 부녀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만남과 불행, 고통과 반항, 성격과 바램을 흥미진진하게 표현함으로써 실로 사람을 감동시키고 있다. 화본과 잡극에 등장하는 이들 주인공은 [石壕吏] 중의 노파, [無家別]의 늙은 병사, 終南山 기슭의 숯파는 노인, 新豊市의 팔뚝잘린 사람과는 다르다. 그들은 마음대로 좌지우지되는 가련한 벌레나 남에게 동정이나 받는 '보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니고, 자신의 풍격과 사상을 지니고 생존과 행복을 위해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는 시민의 자아형상의 창조로서, 자연과 인간을 가련히 여기는 사대부 문인들의 마음속에 비친 노동자의 창백한 모습이 아니다. 시민의 형상을 진실하게 표현하고 시민과 봉건세력의 갈등 및 그들의 반봉건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곧 宋·元 소설과 희곡이 제공한 일종의 새로운 요소들이며, 종법사회의 정치교화와 윤리도덕이 인정하기 어려운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새로운 요소들은 非시민적 제재의 작품 속에도 완곡하게 반영되어 있다. [西廂記] 중의 張生과 鶯鶯은 결코 시민이 아니지만, 그들의 자유연애나 결혼은 도리어 개성해방을 쟁취하고자 하는 시민적 색채를 띠고 있다. 과거 卓文君이 몰래 司馬相如에게 달려가 정을 통한 것은 하나의 일화로 널리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은 문인의 풍류적 화제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정식적인 것으로 받들어지지는 않았다. [西廂記]의 작자는 張生과 鶯鶯 두 사람이 예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만나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情理에 지극히 부합된다고 보고 진지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는 '情感에서 발현하여 결국 禮義로 돌아간다'라는 교훈에 대한 대담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宋·元 이후의 속문학이 雅문학에 의해 흡수되어 융화될 수 없었던 까닭은 아마 여기에 있었던 듯하다. 물론 속문학 형태의 작품이 모두 시민의 사상과 의식의 반영인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사대부 문인들의 자아묘사(馬致遠의 잡극이 이러한 경향을 드러냈다)가 적지 않게 나타나며, 시민의 생활과 정취를 표현한 내용 중에도 많은 봉건적인 요소들이 섞여 있다. 이런 사실은 모두들 알고 있는 바이기 때문에 부언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명대 초기에서 청대 중엽(아편전쟁(1840) 이전)에 이르기까지는 제2단계의 탈바꿈 시기에 해당하는데, 이는 아문학과 속문학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단계이다. 바로 이전 시기의 '평화롭게 경쟁하던' 국면은 끝나고, 속문학이 급부상하면서 아문학의 존립을 위태롭게 함으로써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과 갈등 역시 한 단계 한 단계의 발전이자 심화이다. 명대 전기(嘉靖(1522-1566) 이전)의 시와 산문의 창작에 있어서 옛 작품을 모방하는 擬古풍조의 성행은 사대부 정통문학이 속문학의 영향을 수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가운데 날로 고착화되어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와 동시에 희곡이나 소설에 대한 봉건통치자의 정치적인 억압은 갈수록 심해져서 여러 차례에 걸쳐 금지령을 내려 이러한 새로운 문학 형태를 억압하고자 했다. 억압되지 않으면 방법을 바꾸어서 봉건 정통사상을 속문학의 체제 속에 침투시키고자 했다. 희곡의 경우에는 [琵琶記]가 그 성공적인 예에 속한다. [伍倫全備]는 보잘 것 없는 극 작품이지만 하나같이 봉건사상이 스며들어 있다. 소설의 경우, [水滸傳] 속의 무마와 복종의 노선이나 [三國演義] 속의 정통사관에도 봉건적인 조박한 흔적이 드러나 있다. 두 가지 문화세력 간의 대립구도가 갖추어지면서 대립적인 형세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명대 후기(萬曆(1573-1620) 이후)에 들어서는 대립이 보다 빈번해지고 속문학의 일대 반격이 시작되었다. 명 중엽 이후 자본주의 맹아의 출현과 시민의 반봉건적 정치투쟁이 전개됨에 따라 소설과 희곡 속에 시민의 영향과 비판정신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三言과 二拍' [金甁梅] [牧丹亭]과 같은 작품의 출현은 시민생활의 토양과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성과이다. 또한 [西游記] [鳴鳳記] [淸忠譜]와 같은 작품들은 비록 직접적으로 시민의식을 반영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봉건적 정치나 사상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조롱함으로써 사실상 봉건사회가 저물고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하는 시대적 상황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속문학의 세찬 물결은 雅문학의 영역에도 흘러 들어갔다. 시문 창작상에 나타나는 반복고 사조, 작가의 개성과 재능에 대한 강조 및 '감성적 욕망(人情)'으로써 '도덕적 이성(天理)'에 맞설 것을 호소한 것 등은 다소나마 시민사상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李贄는 이러한 영향 속에서 전통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온 전형적 인물이다. 公安派의 三袁(袁宏道, 袁宗道, 袁中道)도 정도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영향을 받았다. 비록 그들의 외침소리에는 무척 겁먹은 모습이 엿보인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淸代에 접어들면서 사회와 문학의 발전에도 굴곡과 반복이 나타난다. 명청 교체기의 사회적 혼란은 새로이 발흥하는 자본주의의 맹아를 크게 저해하였다. 만주족인 淸이 중원을 지배하게 되자, 낙후된 종속관계와 심각한 민족억압이 나타났다. 청대 전기에는 봉건통치가 강화되어 이념상의 통제 역시 매우 심하였다. 이는 문학영역에 반영되어 시와 산문의 창작에 있어서 또 다시 擬古의 풍조를 낳았고, 희곡과 소설의 경우는 시민의 생활과 정치를 묘사함에 있어서 이전 단계에 비해 묘사가 직접적이지도 분명하지도 못함으로써 시민문학은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상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의 싹은 봉건제도의 억압 속에서도 여전히 자라났고, 봉건제도의 부패성은 갈수록 더욱 더 심각해져서 이는 문학에 모두 반영되었다. 이 시기 문학의 중요한 특징은 봉건예교와 정치 및 문화사상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과 반역자 형상의 심화인데, 이는 구체적으로 {聊齋志異} {儒林外事} {紅樓夢} 등 세 개의 위대한 소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聊齋志異}는 봉건사회의 과거시험과 관료정치·사법제도 등이 낳은 병폐를 광범위하게 폭로하고, 사회암흑을 강력히 비판함으로써 반영의 폭과 깊이가 과거의 소설이나 희곡 작품을 능가했다. {聊齋志異}가 대체로 과거시험 등의 폐단을 폭로하는 데 그쳤다면, {儒林外事}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과거제도 자체를 부정했고 그와 연관된 예교문화까지도 부정했다. 소설 속의 긍정적 인물인 王冕과 杜少卿 등은 벼슬길에 나아가 세상을 구하겠다는 뜻을 버린 채 세속적 예교에도 구애되지 않음으로써 당시 사회질서에 대해 뚜렷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러한 반역자의 전형은 {紅樓夢} 속의 賈寶玉이란 인물에 이르러 보다 잘 체현되었다. 賈寶玉과 같은 반역자는 더이상 전통문학 속에서 반역정신을 지녔던 阮籍이나 嵇康·陶淵明처럼 그저 특정 정권이나 특정 사회에만 반항하는 것이 아니고, 봉건제도 전체 혹은 그 관념체계와 완전히 결별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결별이 사람들에게 현실의 출로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 구시대의 종말을 보여주었다. 아뭏튼 그 역사적 의의는 결코 낮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세 권의 소설은 하나 하나가 봉건사회의 죄악과 멸망의 공증서였던 것이다. 이들 소설들이 비록 직접적으로 시민의 생활과 정취를 묘사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시대의 본질적인 갈등과 역사발전의 기본방향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이전 시기의 시민문학에 비해 매우 깊이가 있다. 게다가 그들은 두 가지 사회적 역량의 충돌을 杜少卿이나 賈寶玉과 같은 반역적 인물들에게 집중시킴으로써, 新·舊 두 문화사조와 문학전통의 대립과 침투 또한 매우 첨예한 정도로까지 발전하였다. 사물은 극에 달하면 되돌아 가기 마련이고, 모순은 절정에 도달하면 곧이어 해결되기 마련이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 봉건사회가 半봉건 半식민지 사회로 바뀌어 가고 자산계급의 개량주의 운동과 혁명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雅문학과 속문학이 상호 대치하는 국면은 점차 타파되고 두 가지의 문학적 변화가 일어나는 새로운 추세가 나타났다. 이는 전통문학에서 이탈해 가는 최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변화와 접근은 일면 전통의 시와 산문으로부터 새로운 제재·새로운 사상·새로운 의경·새로운 풍격을 만들어 냄으로써 점차 고착화되는 국면을 탈피하였다. 또 다른 방면에서 여러 속문학 양식들은 문인작가에 의해 매우 중시되어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국민의 심리·도덕·학술·정치를 쇄신하는 데 결정적 작용을 할 정도로까지 과장되었다.(주: 梁啓超의 [論小說與群治之關係]와 陶曾佑의 [論小說之勢力及其影響] 등 참조) 이에 문학창작 중 '정통'과 '비정통'의 한계는 점점 모호해져서 아문학과 속문학 모두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아울러 변화를 통해서 서로 접근하고 융합해 갔다. 여기에도 물론 하나의 발전과정이 있다. 대체로 보아 1840년대 전후에서 1880년대까지는 점진적인 변화의 단계이다. 龔自珍과 魏源은 시와 산문이 변화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기풍을 열었고, 張際亮·姚燮·貝靑喬·林昌彛·馮桂芬·王韜 등과 같은 일련의 작가들은 각기 서로 다른 관점에서 커다란 시대적 변화를 반영함으로써 초보적이나마 문학풍격의 새로운 변화를 체현하였다. 동시에 소설과 희곡 등 속문학 양식은 점차 사람들에게 중시되었고 심지어 兪鉞과 같은 뛰어난 경학가조차도 이러한 속문학을 긍정하였다.(주: 兪鉞이 편찬한 [七俠五義序]와 [余蓮村勸善雜劇序] 등의 글에 보인다.) 1890년대에서 20세기 초까지는 戊戌變法운동과 辛亥革命을 둘러싸고 문학혁신이 고조기에 접어들었다. '시계혁명' '문계혁명' '소설계혁명' 및 백화문의 제창, 黃遵憲과 梁啓超를 대표로 한 新體詩文의 창작, 南社 혁명시가활동의 전개, 견책소설과 혁명소설의 성행, 희곡개량과 話劇의 맹아, 번역문학의 유행 및 서구 문학이론의 수입과 수용은 눈부시게 찬란한 문학발전의 화면을 구성했다. 아무리 역사조건의 제한 때문에 새로운 경향이 아직 충분히 성숙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중국 문학은 총체적인 변화에 직면하여 안정된 국면을 형성하였다. 물론 옛 문학사조도 자발적으로 생활의 영역에서 물러날 리가 없다. 앞서 말한 새로운 조류와 나란히 '同光體'의 시·'常州派'의 詞·'桐城派'의 고문과 六朝의 변문은 여전히 문단에 유행하여 새로운 문학조류와 경쟁하였다. 특히 중국 자산계급의 연약함으로 인해, 신해혁명의 실패 이후에는 정치와 문학의 형세가 결국 역전되었다. 南社의 해체와 '同光體'의 부활, 黑幕소설, '駌鴦蝴蝶派' 소설, 탐정소설, 무협소설의 범람, 경극의 改良化 및 '文明戱'의 유행은 모두 문학의 새로운 변화 조류의 상대적 정체와 부분적 도태를 반영하고 있다. 전통문학에서의 이탈은 '5·4' 이전까지는 줄곧 완성되지 못했다. '5·4' 정치운동과 신문화 운동 에 와서야 신민주주의 혁명의 시작과 함께 문학의 새로운 변화에 강력한 추동력을 불어넣어 정식으로 전통문학의 결속과 중국 신문학의 탄생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문학사의 범위에 속한다. 5. 몇 가지 느낌 문학사의 전과정을 빠른 속도로 살펴 보았는데, 여기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문학사에 있어서 세 개의 커다란 주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上古 및 西周의 巫官文學(비문학적 형태 속에 문학적 영혼이 숨어 있다)으로부터 周·秦 간의 史官文學(문학적 형식 속에 비문학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을 거쳐, 다시 楚·漢 간의 作家文學(내용과 형식 모두 독립되었다)에 이르기까지가 발전의 첫번째 주기를 구성한다. 漢魏의 文質合一로부터 魏晉南北朝의 文質分離을 거쳐 唐代의 文質兼備에 이르기까지는 발전의 두번째 단계이다. 그러한 연후에 宋·元시기 아문학과 속문학의 평행적인 발전으로부터 명·청(아편전쟁 이전)시기 아문학과 속문학의 첨예한 대립을 거쳐 근대에 와서 양자의 변화가 상호 접근하기까지가 또 하나의 발전적 주기이다. 세 개의 커다란 주기는 또 다시 몇몇 작은 주기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세 가지를 종합해서 하나의 보다 큰 주기를 구성했는데, 그것이 전체 중국 전통문학의 형성과 발전 및 해체의 주기이다. 매 주기는 모두 '정·반·합'이란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전통문학은 이러한 한 주기 한 주기의 변증법적 운동과정 속에서 스스로 전개되었다. 물론 발전하고 변화하는 것은 몇몇 구체적인 문학현상 뿐만 아니라 전통문학의 기본요소와 체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美와 善의 겸비'는 전통문학의 본질적 특징이다. 이러한 기본요소는 중국 문학이 巫官문학에서 史官문학을 거쳐 작가문학에 이르는 독특한 역사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文과 質의 合一과 分離 및 兼備의 변화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고도로 발전되었고 또한 모든 문학전통이 탈바꿈함에 따라 점차 바뀌게 되었다. 최후의 이러한 역사단계에서는 한편으로 사대부 정통문학 중의 情과 理·文과 質·形과 神·正과 變 등 여러 요소는 통일에서 분열로 나아갔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요소가 속문학에서 싹이 텄지만(주: 새로운 요소에는 사람들의 문학관념도 포함된다. 가령 소설이나 희곡은 장기간 오락적 수단으로 여겨졌는데, 이는 전통의 '美와 善의 겸비'라는 가치관과 모순을 이루고 있다.) 봉건 정통세력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는 '美와 善의 겸비'라는 전통문학의 본질이 해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학체제의 변화 역시 이와 같다. 先秦 兩漢시기는 초보적으로 雜文學의 체제를 이루었다. 魏晉南北朝를 거쳐 隋唐五代에 이르기까지 詩·詞·散文·賦 및 변문체와 산문체 그리고 古體와 今體라는 각 문체가 갖추어져 잡문학의 형식은 극도로 발전하였다. 宋·元 이후 한편으로 雅문학은 여전히 잡문학의 체제를 견지한 나머지 새롭게 변화하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속문학이 점차 소설·희곡·가요·故事·강창문학을 대표로 한 순문학 체제를 형성시킴으로써 양자가 서로 배척하면서 장기간 공존하며 느리고도 험난한 전통문학의 해체과정을 이루었다. 요컨데, 세 개의 주기로 중국 문학사('5.4' 이전)의 기본적인 발전과정을 개괄할 수 있다는 것이 첫번째 결론이다. 다음으로는, 앞에서 말한 바 세 개의 주기와 상응하여 우리는 세 가지 사회역량이 문학사에서 번갈아가며 일어났음을 보았는데, 그것이 곧 귀족과 寒士(즉 가난한 선비) 및 시민이다. 고대 중국은 귀족통치하의 종법사회로서 '官府에서 학문을 가르치는(學在官府)' 제도를 실행함으로써 귀족들만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계층은 초기의 문학창작에서 비교적 중요한 역할을 했다(다만 원시 신화나 가요는 예외적이다). {시경}은 대부분 귀족의 노래(시대정치를 비평한 시가들을 포함한다해도, 그것들은 하층 귀족에게서 나온 것이다)였고, {尙書}는 官方의 공문서였다. 공자와 맹자는 구귀족 가운데 생각이 확 트인 인물이며 노자와 장자는 몰락계층의 대표였다. 또한 순자와 한비자는 신흥 귀족집단의 바램을 반영하고 있고, 굴원은 귀족 혁신세력의 이상을 체현하고 있다. 이후 한대 辭賦에 이르러서는 비록 작자의 신분이 반드시 귀족관료는 아니라 할지라도, 부귀를 과장하거나 국위를 선양한 것은 일대 궁정문학의 모범으로 삼을 만 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先秦 兩漢의 문단에 있어서 귀족은 지배적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주: 이는 단지 주요 문학요소의 계급적 속성을 가지고 말한 것일 뿐, 그 안에 민주적 본질이 담겨 있다는 것을 무시한 것도 결코 아니고 귀족 이외의 문학존재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寒士가 문학상에 표현된 것은 아마도 宋玉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하나의 조류를 형성한 것은 늦어도 東漢 중엽 이후의 무명씨의 古詩에서였다. 建安시기에는 시문이 크게 성행하여 '강개하게 氣를 운용한(慷慨以任氣)'(주: 劉勰, {文心雕龍·明詩}) 것이 시대정신으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漢 왕조가 와해된 뒤 권문세가들이 타격을 받은 것이나 寒門庶族의 사상해방과 무관하지 않다. 西晉 이후 문벌제도가 정형화되면서, 寒士 계층은 다시 억압을 받게 되고 그 문학전통은 여전히 左思·郭璞·陶淵明·鮑照 등과 같은 작가에 의해 적극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唐代에 이르러 庶族지주의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그들의 문학창작 또한 번영 국면을 맞게 되었는데, 李白·杜甫·韓愈·柳宗元이 가장 전형적인 경우이다. 그렇기 때문에 寒士 계층은 漢魏에서 唐代에 이르는 문학발전 중에 중요한 추동작용을 일으킨다. 寒士 문학은 굴곡을 가지면서 발전하여 바야흐로 이 시기 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송·원 이후 사대부 정통문학은 점차 쇠퇴하였고, 문학에 있어서 시민의 영향은 날로 증가되었다. 시민의 영향은 직접적으로 시민의 생활을 제재로 한 작품(가령 [三言二拍])에 반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 문인의 생활을 묘사하고 시민의 감정을 표현한 작품(가령 [西廂記]와 [牧丹亭]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심지어 시민의 생활과 정취를 표현하지 않고 단지 봉건제도와 그 사상문화적 전통을 부정한 작품(가령 [聊齋志異]와 [儒林外事] 등)에도 나타나 있다.(주: 이상의 구분 또한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가령 {紅樓夢}의 경우는 뒤의 두 가지 정황을 두루 겸비하고 있다.) 이러한 부정은 봉건사회의 부패와 몰락을 드러내 보여주며, 어떤 면에서는 자본주의의 맹아가 전통제도나 문화를 무너뜨리는 작용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시민의 영향을 단순히 시민문학의 창작으로 귀결지어서는 안된다. 중국 봉건사회에서 시민계층은 경제적 정치적 역량이 아직 유럽 중세 말기의 시민에 비할 만큼 발전하지는 못했으며, 중국의 시민문학도 복카치오나 라벨레(Fran ois Rabelais, 1494-1553, 프랑스 작가. 역자주) 및 세익스피어의 수준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봉건 후기 문학의 귀중한 자료로서, 주로 사대부 문인들의 사고방식을 반영한 몇몇 작품들 - 가령 [牧丹亭] [紅樓夢] 등 - 은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시민문학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들은 시민의 영향과 따로 떼어놓고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시민문학이 형성될 수 있었던 사회적 기초는 시민경제나 정치 및 문화심리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이것으로 볼 때, 귀족과 寒士 그리고 시민은 중국 전통문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삼대 역량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이 번갈아 출현한 것은 각 시기 문학조류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것이 두번째 결론이다. 물론 이 세 가지 역량 이외에 노예나 농민과 같은 기타 사회계층 역시 중국 문학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들은 사회의 정신적 문명을 창조하는 데 물질생산이란 토대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창작을 통해 역대 작가문학을 양성했다. 이들 작품들은 대량 소멸되어 발전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고 시기구분의 표준으로 삼기도 어렵다. 마지막으로, 세 개의 주기와 세 가지 힘을 축으로 삼아, 문학사에 있어서 전후에 나타난 세 차례의 고조기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역사의 전환점에서 생겨났다. 첫번째 고조기는 周·秦 교체기(春秋 말기에서 戰國시기에 이르기까지는 戰國 중기가 그 정점이다)에 형성되었는데, 이는 고대사회가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이행해 가는 轉變시기이다.(주: 이 책에서는 중국 노예제와 봉건제에 관한 사회적 시기구분은 편의상 사학계에서 비교적 유행하는 郭末若의 견해에 근거하며, 더 이상의 논의는 하지 않는다.) 史官문학이 전성기에 도달하면서 작가문학이 정식으로 생겨나서 전체 고전문학이 발전과정에서 확실한 기초가 되었다. 두번째 고조기는 唐·宋 교체기(당 중엽에서 북송 중기에 이르기까지, 특히 開元·元和·元祐의 이른바 '三元'이 그 표지가 되고 있다)에 나타나는데, 이는 봉건사회의 전기에서 후기로 가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사대부 정통문학(시·사·산문)이 최고봉에 도달했으며, 기타 각종 문학양식도 이에 상응할 만큼 전개됨으로써 고전문학은 전체적인 면에서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세번째 고조기는 明·淸 교체기(晩明에서 淸 전기까지로서 萬曆과 乾隆을 정점으로 말안장과 같은 모양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로서, 이 시기는 봉건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 맹아를 배태한 시기로서, 雅문학과 俗문학의 대립과 융합이 대단히 심한 가운데 소설과 희곡이 극도로 번영했으며 고전문학이 전체적으로 종합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세 차례의 고조기는 각각 특색을 지녔지만 사회역사의 대변혁을 벗어나지 못했다. 바로 대변혁의 시대가 문학창작의 중대한 변화와 발전을 촉진했으며, 이러한 변화와 발전이 없이는 문학이 고도로 번영할 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것 또한 우리가 얻은 한 가지 인식이다. 세 차례의 커다란 고조기 외에도 몇몇 작은 고조기들이 있었다. 가령 漢·魏 교체기와 淸末民初 등의 시기는 대체로 사회의 변혁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변혁기간이 비교적 짧아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거나 혹은 지지부진한 채 도태되어 버리는 등의 원인으로 인해 문학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 또한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위에서 말한 바를 종합해 보면, 세 개의 주기와 세 가지 역량 그리고 세 차례의 고조기는 모두 우리가 거시적인 시각에서 중국 문학사를 고찰함으로써 얻은 인식이다. 이상의 논의가 꼭 타당하지도 못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제기한 까닭은 문학발전의 역사적 맥락을 연구하고 파악하는 데 대한 여러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민족문학의 특징과 그와 상관된 각종 법칙성의 문제를 사고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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