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수만권 쌓인 듯…채석강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구나
전북 부안 (上)
情人 기다리다 머리 희어진 매창, 노래 한자락 하려나
콧속 찌르는 까나리젓 냄새 곰소항 물들이고
전북 부안군 동도면과 하동면이 통폐합돼 생긴 부령면이 1943년에 읍으로 승격한 것이 부안읍이다. 전북 시단의 멘토인 신석정 시인(1907~1974)의 선은리 고택을 여행의 시발지로 삼는다.
고택으로 가는 길목인 동중리에는 동문안당산(중요민속자료 제19호)이 있다. 마을의 안녕을 지키려고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는 돌새(石鳥) 한 마리가 돌기둥 꼭대기에 앉아 있는 당산이다. 이곳에선 음력 대보름에 격년제로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꼬박 2년을 기다려야만 떡 한 볼테기를 얻어먹을 수 있는 배고픈 당산이다. 그마저도 옆에서 동고동락하는 벙거지 쓴 남장승 '상원주장군'과 여장승 '하원당장군'이 있으니 차마 독식하진 못할 것 같다.
신석정 고택 '청구원'은 4칸 크기의 'ㄱ'자형 초가집이다. 여덟 살무렵 동중리 생가를 떠나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시인이 26세 때 지은 집이다. 첫 시집 《촛불》과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에 실린 시편들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신석정문학관 공사가 한창인 고택 앞마당은 나무 한그루 없이 황량한 모습이다. 시 '망향의 노래' 족자가 홀로 지키는 방안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라는 시를 떠올린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光線(광선)들이 섭섭해'한다면서 어머니의 점등을 말리는 섬세한 정서를 잃어버린 채 삭막하게 살고 있다.
◆정인과 재회할 꿈만 오락가락하는 매창의 묘조선시대 기생이자 여성 시인 이매창(1573~1610)의 묘가 있는 봉덕리 매창이뜸으로 가는 길목에서 녹색 함석지붕에 세로로 길게 늘어선 창을 가진 옛 부안 금융조합(등록문화재 제177호) 건물을 만난다. 금융조합은 일제강점기 쌀과 토지 등을 수탈했던 기관이다. 골목에 깊숙이 자리한 서외리 당간지주(1671년)는 마을에 악운이 닥칠 기미가 보이면 재를 지내던 높이 7.45m의 돌기둥이다. 사찰의 장엄물인 당간지주가 민간신앙과 결합한 산물이다. 당간지주 뒤편 산자락에는 산지형 사찰처럼 만화루 명륜당 대성전이 차례대로 자리를 잡은 향교가 있다.
매창은 옛 공동묘지였던 매창공원의 여남은 개의 시비 틈에 자신이 아끼던 거문고와 함께 잠들어 있다. 그는 부안의 현리였던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나 기생이 됐다. 시와 가무에 능해 유희경 이귀 허균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사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개암사 목판본 《매창집》에 수록돼 전하는 시 58수는 하나같이 뛰어나다. 특히 유희경(1545~1636)과의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이화우(梨花雨) 흩날릴제'나 '그립고 안타깝지만 말도 못하고/ 하룻밤 시름에 귀밑머리만 희어졌어라/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거든/ 얼마나 헐거워졌는지 이 금가락지 좀 보시구려'라고 노래한 '우(又)' 같은 시는 비길 데 없는 절창이다.
매창 묘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판소리 명창 이화중선의 동생 이중선 명창이 잠들어 있다. 혹 바람 부는 날에 이곳에 오면 이중선에게 소리를 배운 매창이 자신이 지은 이별의 시에 얹어 부르는 육자배기 한자락을 얻어들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줄포항의 황혼이 빚은 곰소항국도 30호선을 따라 일제의 미곡반출과 위도의 조기 파시 덕택에 1960년대만 해도 서해안 4대 항구였던 줄포에 닿는다. 그러나 줄포는 폐항이 된 지 오래다. 마침 면 소재지에선 오일장(1일,6일)이 열리고 있다. 한때 전국의 내로라하는 장돌뱅이들이 다 모여들었다는 줄포장은 썰렁하기 그지없다. 장사가 시들해서인지 길가 테이프 장사조차도 뽕짝을 틀지 않은 채 꾸벅꾸벅 졸고 앉았다. 어쩌면 아직도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의 낡은 건물들이야말로 철 지난 유행가인지도 모른다.
1968년 곰소항이 만들어질 때 함께 들어선 곰소염전을 곁눈질하며 곰소항에 닿는다. 곰소는 줄포항이 토사 때문에 점점 수심이 낮아지자 1936년께 곰섬과 범섬,까치섬을 연결해 제방을 쌓아 만든 대체항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곰소는 물이 쓰면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섬마을이었다.
어시장 안엔 《자산어보》에 '맛은 싱겁고 곧잘 술병을 고친다(味薄劣 能治酒病)'고 했던 물메기 병어 갈치 등과 부안의 명물인 백합 바지락 참소라 둘굴 등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젓갈시장답게 젓갈가게마다 주말을 맞아 관광객들로 북새통이다.
포구 가엔 한가하게 세월을 낚는 망둥어 낚시꾼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강처럼 뭍으로 깊숙이 파고든 곰소만을 '곰소강'이라고 부른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걸대와 건조대엔 박대 갈치 복쟁이 망둥어 따위들이 일광욕하듯 누워있다.
거무튀튀한 갯벌에는 주름살처럼 갯골들이 깊게 패어 있다. 포구 앞엔 제 늙음을 감추려는 듯 빨갛게 화장한 등대가 표지물처럼 서 있다. 칠산바다를 관장하는 여신 개양할미는 '곰소강' 깊은 둠벙을 걸어가다 젖은 속곳을 지금은 어느 여에서 말리고 있을까.
◆성게알보다 더 붉은 채석강 노을
곰소를 떠나 격포 채석강 일원(명승 제13호)으로 간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달을 보며 놀았다는 중국의 채석강만큼 아름다운 곳이라 하여 채석강이라 했다지만 사실은 해면에 깔린 암반의 채색이 영롱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5㎞에 걸쳐 펼쳐진 해식애 해안단구 화산암류 습곡의 기기묘묘한 풍광을 바라보며 물 빠진 바닷가를 걷는다. 파도의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생긴 파식대의 암반을 밟으며 층층이 쌓인 해식애(海蝕崖)를 바라본다.
어떤 시인은 수만권의 책이 쌓인 것 같다고 했지만 시루떡 무더기를 퍼다 넣은 것 같다. 파식대의 너른 암반은 하루내내 제 몸의 채색을 영롱하게 비춰주던 햇살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면서도 제 몸에 와 넘실거리는 파도를 살갑게 맞는다. 성게알이 제아무리 붉다 해도 이 적벽강 노을만큼 붉을까. 붉은 노을빛이 암회색 암반 위에 와 부딪치면서 기묘한 슬픔의 변주곡을 연주한다. 슬픔의 변주곡을 들으며 태양과 경주했던 중국 신화 속 거인 과보처럼 마치 노을의 꽁무니를 따라잡을 것같이 뒤를 따른다.
닭이봉 아래 수성암 단층 절벽 밑의 해식동굴께에 이르자 저녁해는 마침내 수평선 아래로 자맥질하고 만다. 하릴없이 나그네는 방파제에 올라 서서 어두워져가는 격포항을 바라본다. 1986년에 1종항이 된 격포항은 전북에서는 군산항 다음 가는 항구다. 성급한 문명에 어둠이란 일종의 가려움증이다. 옆구리가 가려운지 격포항이 슬슬 점등작업을 시작한다. 나그네란 온 세상이 불을 켤 때 홀로 불을 켜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소외가 지겨워질 무렵 나그네는 슬쩍 항구의 불빛 속으로 스며든다.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
여기가 율도국?…참게장 정식에 밥 한그릇 뚝딱
◆여행 팁변산반도 서쪽 약 15㎞ 해상의 위도는 고운 모래와 울창한 숲,기암괴석과 해안 풍경 등 천혜의 경관이 살아 있는 섬이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꿈꾸었던 율도국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곳이다. 부안에서 위도나 하섬 식도 상도로 섬여행을 계속하고 싶은 분들은 격포항 여객선터미널에서 위도행 배를 타면 된다. 격포매표소(063-581-0023,063-581-1997) 기본 편도운임 성인기준 7700원.
◆맛집
문병란 시인은 '전라도 젓갈'이란 시에서 '썩고 썩어도 썩지 않는 것/ 썩고 썩어도 맛이 생기는 것/ 그것도 전라도 젓갈의 맛이다/ 전라도 갯땅의 깊은 맛이다. // 괴고 괴어서 삭고 곰삭어서/ 맛 중의 맛이 된 맛/ 온갖 비린내 땀내 눈물내/ 갖가지 맛 소금으로 절이고 절이어/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맛/ 소금기 짭조름한 눈물의 맛(후략)'이라고 젓갈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곰소항 입구에 있는 곰소쉼터회관(063-584-8007)은 젓갈 정식으로 소문난 집이다. 오징어 토하 바지락 낙지 어리굴 갈치속 창란 황석어 청어알 이렇게 9가지 종류의 젓갈이 된장찌개와 함께 나온다.
갓 잡아 올린 어물을 곰소의 천일염에 버무려 1년 이상 숙성시킨 젓갈들은 비릿한 맛이 별로 없고 입에 착 붙는다. 참게장 정식도 권할 만하다. 젓갈 정식 7000원,참게장 정식 1만5000원.
'http:··blog.daum.net·k2gim·'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재선생시慵齋先生詩 1편.번역 : 청계 조면희淸溪 趙冕熙 (0) | 2011.01.15 |
---|---|
中 축복' 누린 세계경제 이젠 '中 리스크'에 직면… 한국, 新불황에 대비하라 (0) | 2011.01.15 |
눈꽃은 詩가 되어 쌓이고 … 내소사 꽃살문은 `봄 벗`을 기다리네 .전북 부안(下) (0) | 2011.01.15 |
(34) 인상여(藺相如), `完璧`의 고사를 남긴 명재상 (0) | 2011.01.15 |
사이버대학교] 사이버대 졸업생 이야기 (0) | 2011.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