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암과 추사는 대조적이다. 추사는 돈 있는 교목세가(喬木世家) 출신이었지만, 창암은 지방의 한미한 집안이었다. 추사는 20대에 이미 북경에 가서 옹방강이나 관원 같은 당대의 대가들로부터 서법(書法)에 대한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귀족이었지만, 창암은 시골에서 별다른 스승 없이 독학을 했던 '잡초바둑'이었다고나 할까.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가던 길에 전주에 들러 창암을 만나 서로의 글씨를 겨뤄보았다. 추사는 16년이나 연상이었던 창암의 글씨를 보고 '조필삼십년(操筆三十年)에 부지자획(不知字劃)이라'고 혹평하였다. '30년 붓을 잡았다고 하지만 획(劃)도 하나 못 긋는구나!' 창암 제자들이 추사를 두들겨 패려고 했지만 창암이 가만히 두라고 말렸다. 추사는 털이 짧은 중국식 붓을 썼지만, 창암은 터럭이 아주 긴 붓을 사용했다. 창암은 꾀꼬리 꽁지털, 칡뿌리로 만든 갈필(葛筆), 앵무새 꽁지털과 같이 길고 아주 부드러운 재료를 사용한 붓으로 글씨를 썼다.
추사체는 획이 곧고 강직하다. 장검이나 돌비석 같은 직선의 기세가 느껴진다. 반대로 창암의 글씨는 '유수체(流水體)'라고 해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유연하고 곡선적이다. 유수체를 연구해온 김진돈(52) 선생은 창암의 집이 전주천이 감아 도는 한벽당(寒碧堂) 옆에 있었기 때문에 항상 물을 보면서 서체를 궁리했을 거라고 본다. 물은 대단히 영적(靈的)이다. 인생과 시간의 유전(流轉)을 상징한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를 끝내고 오는 길에 다시 전주에 들렀다. 이때 창암은 작고한 뒤였으므로, 추사는 그의 묘비에 '명필창암이공삼만지묘(名筆蒼巖李公三晩之墓)'라는 글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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