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釋奠, 성인聖人이 되고자 다짐하는 의식
겨울 채비를 마친 성균관 뜰 안으로 발을 내딛기 전부터 엄숙한 분위기로 인해 경건함이 밀려들었다. 공자를 비롯해서 선성선현先聖先賢(중국: 4성·공문 10철·송조 6현, 우리나라:18현)을 봉안하고 있는 성균관 대성전大成殿.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祠堂))라고도 불리는 이곳에 훌륭한 스승들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으니, 제향祭享 공간 특유의 기운에 압도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석전釋奠은 선성선현先聖先賢을 추모하는 제사입니다. 옛날부터 성균관成均館과 지방의 향교鄕校에서 석전이 봉행된 것은, 누구라도 배움을 익히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유학儒學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성인聖人으로 일컬어지는 선성선현先聖先賢들은 오랫동안 바람직한 인간상의 전형으로서 추앙推仰되어 왔다. 평범한 사람도 배움을 통해 성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권오흥 보유자의 심오한 이야기에 성인의 위패를 배움의 터전인 학교에 모셔놓은 이유, 처음 성균관에 들어 온 사람은 반드시 석전을 봉행하는 것이 관례가 된 데에 대한 궁금증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문묘에 모셔진 성인을 추모하고, 스스로도 성인이 되기를 다짐하는 석전대제.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선성선현들은 신神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몇 번이고 되뇌어 본다.
마음 안팎으로 재계齋戒하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문묘는 신라에서는 국립교육기관인 국학, 고려에서는 국자감, 조선시대에는 성균관 안에 세워졌다. 특히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건국한 조선은 중앙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성균관을 두고, 지방의 고을마다 향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과 아울러 석전을 봉행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국왕도 참여하는 큰 의례여서 특별히 ‘대제大祭’라고 불리는 석전은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맞추어 봉행되어 왔다.
“제향에 앞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이를 일러 재계齋戒라 하는데, 산재散齋와 치재致齋로 다시 구분합니다. 산재는 문상弔喪도 문병問病도 하지 않습니다. 음악도 듣지 않아야 하고 금기사항을 지키면서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하지요, 치재는 마음을 오로지 제향에 관한 일에만 전념하라는 뜻입니다.”
선현을 모시는 정성이 예와 지금이 다르지 않겠지만, 오늘날 재계를 비롯한 의례전반이 어떠한 양상으로 진행되는지 보유자에게 조심스레 여쭤본다. “석전 3일 전부터 제향준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루 전에 습의習儀에 들어가요. 정성을 다해야 할 제의 당일에 조금의 실수도 없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제의 전부터 마음 안팎을 닦아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예행연습인 ‘습의’라는 절차까지 두었던 선조들의 정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중국에서도 배워가는 석전대제
정숙하고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음악과 무용이 의례에 곁들여지니, 예禮와 악樂이 조화를 이루어 석전대제를 종합예술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다. 애초에 중국의 영향을 받은 의례이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제향이 중단되어 우리의 법식을 거꾸로 배워가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악기와 제기, 음악과 무용, 복식과 의식 절차를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문헌고증과 연구를 통해 오랜 세월동안 석전대제 전반을 갈고 다듬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시 석전대제를 전승하는 길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일제에 의해 유학교육과 인재양성의 중추기관으로서 기능하던 성균관과 지역 향교의 교육이 차단되어 교육방향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으로 인하여 1930년대에는 석전대제 봉행일자가 변경되는 등 의례 부분에서도 크고 작은 진통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 전국 유림儒林의 노력을 통해 성균관과 향교는 유학의 본산으로서 현재의 체제로 정비되었고, 동양철학과 학문에 뿌리를 둔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문화양식인 석전대제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1986. 11.1)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중국과 대만, 일본에서도 우리의 석전대제를 배울 수 있게 되어, 의례를 매개로 한 국가 간의 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차세대와 배움의 본질 공유하기
권오흥 보유자는 언제부터 유학에 심취하게 된 것일까 궁금해졌다. 구한말 고종 연간 후학 교육에 평생을 다한 유학자 권태선權泰善 공이 그의 조부祖父시라 한다. 또한 고려 말 개성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양촌陽村 권근權近 선생이 현조이시니 사람의 도리에 대해서 어려서부터 귀가 닳도록 듣고 배웠을 것이다. 유학자 집안 특유의 분위기는 성년이 되어서도 그의 가치관을 흔들림 없도록 올곧게 잡아 주었으리라. 성균관 전의典衣를 거쳐 석전의례 강사를 역임하면서 유학에 대한 향수와 학문적 욕구를 채워갔다.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석전대제 보유자로 인정되기 이전부터 그는 석전대제보존회원들과 함께 석전 봉행을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체계적으로 유학공부를 다져왔다. 사람된 도리가 학문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까닭에 그를 비롯한 석전대제보존회에서는 청소년에게 예절을 중심으로 한 전통문화 보급에 각별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오늘날 학문의 목적이 본질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의식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1984년부터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충효忠孝교실을 운영해 왔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예절과 전통문화를 보급하는 것이 중심인데, 처음에는 성균관을 중심으로 교육하다가 전국향교로 확산되었습니다. 지식이 아니라 기본을 가르쳤던 옛날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듯해서 보람이 큽니다.”
그 옛날, 배움에 뜻이 있어 성균관에 입학한 학생들이, 문묘에 배향된 성인들을 본받아 수신修身과 덕행德行에 힘쓰리라 다짐하며 정성을 들였던 석전대제. 선현들에게 학문 정진은 곧 심성을 닦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이것이 곧 공자의 예를 실천하는 길이었고, 그 중심에 석전대제가 있다. 배움을 통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유학의 가르침, 차세대와 배움의 본질을 공유하는 것이 바람이라는 권오흥 보유자의 가치관이 오늘날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글·황경순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사진·김병구
'http:··blog.daum.net·k2gi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권 內助는 ‘대한민국 情治’龍의 아내가 더 무섭다 (0) | 2011.01.19 |
---|---|
'수퍼 파워' 중국의 內面을 읽는다] 공자를 앞세워, 西歐에 맞서다 (0) | 2011.01.19 |
알래스카의 雪景과 氷河 (0) | 2011.01.18 |
留別王侍御維(유별왕시어유) - 맹호연(孟浩然;689-740) (0) | 2011.01.18 |
Re:虞美人(우미인) - 꽃 (0) | 2011.0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