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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살롱] [774] 역사의 3가지 공덕

굴어당 2011. 2. 22. 10:05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첫째로 역사는 인간사의 판례집(判例集)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재미있는 이야기이고, 셋째는 자기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도 드문 역사책이다. 500년 왕조 동안 임금과 신하가 아침부터 조정에 모여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떤 안건을 가지고 누가 어떤 내용의 발언을 했는지, 그 외에도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는 '역사의 나라'였다. 그 내용도 아마추어가 재미로 쓴 것이 아니라, 선발된 엘리트인 사관(史官)이 사명감을 가지고 기록한 것이다. 왜 이렇게 우리 조상들은 역사서 집필(?)에 정력을 쏟았단 말인가? 그만큼 후세에 내려질 판결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판결을 의식하면 함부로 행동하기 어렵다. 또한 이 기록들은 후손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판례집'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대법원 재판에서도 판례연구가 대단한 비중을 차지한다. 판례집은 시행착오를 줄여주고, 애매한 상황에서 판단의 근거를 준다.

인생이라는 것도 애매함의 연속인데, 이 속에서 참고자료는 역사라고 하는 판례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역사의 축적과 판단의 정확도는 비례한다. 고려의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를 보면 역사라고 하는 것이 '거대한 이야기보따리'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비디오아트 창시자인 백남준은 '삼국유사'를 창작의 영감을 주는 상상력의 교과서로 대했던 것 같다. 문화콘텐츠도 따지고 보면 이야기산업이고, 모든 스토리텔링의 젖줄은 결국 역사로 귀결된다. 역사는 거대한 드라마의 각본이다. 이 각본 놔두고 어디서 다른 각본을 힘들게 찾는다는 말인가.

역사의 두께와 스토리텔링 산업은 비례한다. 성경의 구약은 유대민족의 역사책이다. 구약의 앞부분은 유대인 족보이야기이다. 유대인들은 자기 역사를 종교화시켰다.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떠돌아다니다가도 결국 조상이 살던 땅을 되찾아 이스라엘을 세웠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세계의 떠돌이였던 그들이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놀라운 힘은 내가 보기에 '구약'에서 나왔다. 구약은 정체성의 원천이었다. 역사의 신성화와 정체성은 비례한다.